교회 역사
제14장: 빛과 희망의 샘


“빛과 희망의 샘”,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14장

제14장: “빛과 희망의 샘”

제 14 장

빛과 희망의 샘

마차와 창고 앞에 서 있는 노부인

히버 제이 그랜트는 조셉 에프 스미스의 머리맡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히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미스 회장의 가장 최근 연차 대회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히버는 죽어 가는 선지자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년 시절에 그는 젊은 사도였던 조셉 에프 스미스가 자신의 와드에서 말씀을 할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지금도 스미스 회장의 설교를 들을 때면 히버는 경외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설교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버는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이 막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스미스 회장이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1

며칠 후, 선지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묘지에 모였다. 독감이 유타 전역에 퍼지자 유타주 보건국은 모든 대중 집회를 금지시켰고, 조문객들은 묘지에서 비공개적으로 하관식을 했다.2 히버는 짧은 헌사로 조셉을 기렸다. “저는 그분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지금껏 살았던 사람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주에 대해 그분보다 더 강한 간증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3

장례식 다음 날인 1918년 11월 23일, 사도들과 감리 축복사는 히버를 교회 회장으로, 안톤 룬드와 찰스 펜로즈를 그의 보좌로 성별했다.4 친구들은 히버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를 표했지만, 그는 자신이 스미스 회장의 뒤를 잇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히버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으나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한 경험은 없었다. 반면, 스미스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 부름받기 전에 수십 년 동안 보좌로 봉사했었다.5

또한 조셉 에프 스미스의 회장단은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임기 동안 교회 회원 수는 거의 두 배가 되어 이제는 50만 명에 육박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아론 신권 직분의 의무를 명확히 하고 교회 정원회 및 조직의 모임과 공과를 표준화하는 등 신권 정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시작했다.6 그는 또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교회의 과거 관행과 가르침에 대한 논란을 해결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좋은 시각으로 교회를 볼 수 있게 했다. 1915년에 조셉 에프 스미스는 “가정의 밤”을 시작했으며 가족들에게 매달 하루 저녁을 기도와 노래, 복음 교육 및 오락에 할애하도록 요청했다.7

이런 유산에 위축된 히버는 점점 더 불면이 심해졌다. 새로운 부름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그와 그의 보좌들은 스미스 회장이 맡았던 여러 지도자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히버는 스미스 회장이 했던 것처럼 교회의 본부 교육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지만, 주일학교 본부 교육감 부름은 사도 데이비드 오 맥케이에게 주었다. 그는 또한 사도 앤서니 이빈스를 청남 상호향상회의 지도자로 임명했다.8 다만 그는 은행과 보험업계에 종사하며 다년간 사업가로서 경력을 쌓아 온 사람이었기에 교회가 관리하는 회사들만큼은 자신이 직접 감독하기로 했다.9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해 했다. 친구들과 교회 동료 지도자들의 강권에 따라, 그는 아내 아우구스타와 함께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곳에서 히버는 스미스 회장의 서거 이후 처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몇 주 후에 아우구스타와 함께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온 그는 이미 휴식을 취했고 다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10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독감 때문에 1919년 초반 동안에는 히버가 원하는 만큼 자주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이미 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교회 회원은 천 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히버와 그의 보좌들은 공중 보건 문제를 우려하여 연차 대회를 6월 첫째 주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정규 성찬식을 재개하게 되면 스미스 회장이 성도들의 건강을 보호할 영감 어린 예배 방식을 도입해 두었다는 것을 알고 위안을 얻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역사적으로 거의 내내 성찬을 취할 때 하나의 컵을 공용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1910년대 초에 세균에 대한 정보가 더 잘 알려지게 되면서, 스미스 회장은 유리나 금속으로 된 개별 성찬 컵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히버는 전염병 퇴치 면에서 그런 혁신적인 방법이 건강에 유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11

세계적 전염병의 기세가 약해진 11월, 그는 라이에 성전을 헌납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다시 한번, 히버는 하와이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하고 그들의 관습을 이해했던 스미스 회장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12

성전은 헌납식에 참석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날의 행사는 수년간의 진지한 기도와 충실한 봉사의 정점이었다. 것이었다. 솔트레이크 성전 근처에서 살기 위해 유타 이오세파의 하와이 마을로 이주했던 성도들도 이제는 새로운 성전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자 정착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히버는 전임자들처럼 헌납 기도문을 미리 준비했다. 그는 비서에게 기도문을 받아쓰게 하면서 성령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느꼈다. 그는 아우구스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평소 하는 기도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어요. 그것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13

히버는 해의 왕국실에 서서 조셉 에프 스미스, 조지 큐 캐넌, 조너선 나펠라, 그리고 하와이에 교회를 세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는 주님께 태평양 제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이 계보를 수집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구원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청했다.14

그 후 히버는 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스미스 회장님이 우리 곁에 계실 때와 비교될 정도로 그 모임에서 영감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상당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불안해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알겠구나.”15


히버 제이 그랜트가 하와이에 있는 동안, 본부 상호부조회 서기인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은 전문 사회 복지사 회의에서 연설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최신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러 비슷한 회의에 참석했었다. 그녀는 새로운 접근법이 상호부조회의 자선 활동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최근 들어 상호부조회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적십자와 같은 외부 단체들에 점점 더 의존해 오고 있던 터였다.16

남편인 리처드 라이먼이 시카고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에이미는 사회 복지 사업에 흥미를 느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개혁적 성향의 많은 시민들이 가난과 부도덕, 정치적 부패, 그리고 기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인 해결책을 옹호했다. 에이미는 시카고에 있는 동안 몇몇 자선 단체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들로부터 유타에서도 비슷한 일을 해야겠다는 동기 부여를 받았다.17

그 후에 상호부조회 본부 임원회는 에이미를 교회에서 새로 구성한 사회 봉사부를 이끌도록 임명했다. 사회 봉사부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 대한 지원을 감독하고 상호부조회 회원들을 현대적인 구호 방법으로 훈련하며 다른 자선 단체들과 협력하는 일을 했다. 이 임명은 에이미가 교회의 사회 자문 위원회에서 하는 봉사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 위원회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과 각 교회 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교회 회원들의 도덕과 현세적 복지를 개선하고자 했다.18

사회 복지 사업에 관련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에이미는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상호부조회 본부 임원회의 모든 임원이 그렇게 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사회 복지사는 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수사 게이츠는 자원해서 해야 할 일들이 영리화가 되었다고 여겼다. 수사는 또한 사회 복지 사업이 교회의 계시받은 방식, 즉 감독이 원조 자원을 모으고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지는 가운데 자선 봉사를 수행하는 방식을 대체해 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수사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사회 복지 사업이 상호부조회가 전하는 메시지의 초석인 하나님 자녀들의 영적 성장보다는 현세적 복지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는 점이었다.19

임원회는 수사와 에이미의 의견을 고려하여 결국 타협안에 합의했다. 그들은 궁핍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은 상호부조회의 신성한 의무이지 적십자와 같은 단체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와드 상호부조회를 현대적인 사회 복지 사업 방식으로 훈련하고, 제한된 수의 유급 사회 복지사를 고용하며, 원조 자원이 적절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각 지원 요청을 검토하는 것을 승인했다. 감독은 여전히 금식 헌물의 사용처를 결정하는 일에서 최종 책임을 지지만, 상호부조회 회장 및 사회 복지사와 함께 그 일을 협의할 것이었다.20

1920년부터 상호부조회 회원들은 사회 복지 사업에 관한 월간 강좌를 공부했다. 사회 자문 위원회는 또한 새로운 사회 복지사를 양성하기 위해 브리검 영 대학교에 6주간의 하계 강습회를 개설했다. 65개의 스테이크 상호부조회에서 거의 70명의 대표자들이 강습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개인이나 가족의 필요 사항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도움을 가장 잘 줄 수 있을지 결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에이미는 건강, 가족 복지 및 관련 주제에 대한 강습회의 수업을 감독했다. 강습회는 또한 사회 복지 사업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권위자 한 명을 뉴욕시에서 뽑아 왔다.

1920년 7월에 이 과정이 끝났을 때, 이 과정을 수료한 여성들은 6시간의 대학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각자 소속된 지역의 상호부조회로 돌아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나누며 성도들 사이에서 이 조직의 일을 개선할 수 있었으므로, 에이미는 만족스러워 했다.21


하계 강습회가 끝난 지 3개월 후, 그랜트 회장은 사도 데이비드 오 맥케이가 아시아와 태평양을 다니면서 그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필요 사항에 대해 더 알아볼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랜트 회장은 『데저렛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선교부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하고, 그곳의 상황을 살피며, 그곳에 관한 자료를 수집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정보를 얻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 여정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스테이크 회장인 휴 캐넌이 맥케이 장로의 동반자로 봉사할 예정이었다.22

두 사람은 1920년 12월 4일에 솔트레이크시티를 떠나 약 130명의 성도들이 있는 일본으로 먼저 갔다. 그런 후 그들은 한반도를 둘러본 뒤 중국을 방문했다. 맥케이 장로는 미래의 선교 사업을 위해 중국 땅을 헌납했다.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하와이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러 갔다. 맥케이 장로는 여행하는 동안 교회가 소유한 수십 개의 작은 학교를 돌아보기로 계획을 했었다. 그는 그들 학교 중 하나인 라이에 미션 스쿨에서 온 하와이, 미국, 일본, 중국, 필리핀 어린이들이 펼치는 국기 게양식을 관람하게 되었다.23

게양식은 교회 학교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이 사도에게 영감을 주었다.24 그는 최근 그랜트 회장에게서 교회 교육 기구의 교육 총감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는 본부 주일학교 교육감으로서의 그의 업무를 보완하는 새로운 직책이었다. 맥케이 장로는 교육 총감으로서 교회 교육 기구를 관리했는데, 이 기구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교회는 30여 년간 태평양에서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뿐만 아니라 멕시코, 캐나다, 미국에서 스테이크가 운영하는 아카데미를 관리해 왔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유타주와 그 주변의 젊은 성도들은 무료 공립 고등학교에 대거 진학했다. 그 학교들은 종교 교육을 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스테이크들은 후기 성도 학생들에게 종교 교육을 계속 제공하기 위해 지역 고등학교 근처에 “세미나리”를 설립했다.

세미나리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맥케이 장로는 스테이크 아카데미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라이에 학교와 멕시코의 후아레스 스테이크 아카데미를 포함한 다른 국제 미션 스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은 교회의 지원을 계속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25

그들은 하와이에서 타히티로, 그다음에는 뉴질랜드의 북쪽 섬인 테 이카-아-마우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헌틀리 마을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헌틀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널따란 목초지에서는 마오리족 성도들이 연례 교회 대회 및 축제를 하고 있었다. 사도가 뉴질랜드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맥케이 장로의 말씀을 들으려는 수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들었다. 목초지에는 모든 인원을 수용할 두 개의 큰 천막과 몇 개의 작은 천막이 설치되었다.

맥케이 장로와 캐넌 회장이 대회장에 도착하자, 히리니와 메레 화앙가의 손자인 시드 크리스티가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시드는 유타에서 자랐으나 최근에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천막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천막에 이르자, 사방에서 성도들이 “Haere Mai! Haere Mai![하에레 마이]”라 하고 외치며 그들을 환영했다26

다음 날, 맥케이 장로는 큰 천막 중 한 곳에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많은 마오리족 성도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그는 회중 일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제가 저의 언어로 말씀을 전하는 동안 여러분이 해석하고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주님의 영감으로 드리는 말씀을 그분의 영이 여러분에게 증거해 줄 것입니다.”27

교회 내의 화합에 대한 말씀을 전하던 이 사도는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을 주목했다. 그는 성도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고, 그중 몇몇은 영감을 받아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이 끝나자, 통역을 맡았던 마오리족 사람 스튜어트 메하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성도들을 위해 요점을 전달해 주었다.28

며칠 후, 맥케이 장로는 대회에서 다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죽은 사람을 위한 대리 의식에 관한 설교를 했다. 하와이에 성전이 건립되어 뉴질랜드 성도들은 좀 더 수월하게 성전 의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하와이도 여전히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성전에 갈 수 있었다.

그는 “저는 여러분이 성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맥케이 장로는 성도들이 그날을 위해 준비하기를 바랐다. “여러분은 그것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29


1921년 초, 49세의 존 윗소가 유타 대학 총장으로 부임한 지 이제 5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1905년에 유타 농업 대학에서 쫓겨나고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친 후, 그는 농업 대학에 신임 총장으로 복귀했었다. 그런 뒤 1916년에 그는 유타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리아와 함께 세 자녀를 데리고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사했다.

그들이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존의 어머니 아나와 이모 페트롤리네, 남동생 오스보네는 서로 가까이 살았다.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둔 오스보네는 유타 대학의 영어과 학과장이었다.30

하지만 그들이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나는 1919년 봄에 병에 걸렸다. 여름에 건강이 악화되자, 그녀는 존과 오스보네를 함께 불렀다. “회복된 복음은 내 인생의 큰 기쁨이었단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라도 부디, 듣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그 간증을 전해 주렴.”

몇 주 후에 그녀는 여동생과 자녀들과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히버 제이 그랜트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말씀을 전했다. 히버는 아나가 노르웨이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기간에 유럽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했다. 어머니의 삶을 반추해 보던 존은 어머니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머니는 가족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희생을 했다. 진리의 대업을 위한 어머니의 헌신은 숭고했다.”31

8개월 후, 오스보네는 갑작스럽게 뇌출혈을 일으켰다. 그는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내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다.” 존은 슬퍼했다. “이제는 나 혼자 남았다.”32

오스보네의 장례를 치르고 1년 뒤인 1921년 3월 17일, 존은 사도 리처드 라이먼이 오전 내내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은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체하지 말고 바로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리처드의 목소리는 다급했다.33

존은 곧장 교회의 새 본부 건물로 가서 리처드를 만났다.34 그런 후, 그들은 길을 건너 솔트레이크 성전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가 모임을 하고 있었다. 존은 그들과 함께 앉았으나,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청남 상호향상회 본부 임원회의 임원인 그는 종종 교회의 최고 평의회 일원들을 만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가 목요일마다 하는 정기 모임이었고, 그가 이런 모임에 초대받는 경우는 없었다.

모임을 이끌던 그랜트 회장은 교회 업무 중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논의했다. 그런 후 그는 존에게 최근 안톤 룬드의 서거로 생긴 십이사도 정원회의 공석을 채우도록 부름을 주었다. “부름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랜트 회장이 물었다.

존은 순간 시간이 멎는 듯했다.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번뜩이며 머릿속을 스쳐갔다. 만일 이 부름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자신의 삶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면 학자로서 쌓아온 경력도 그가 거기에 헌신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을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데 가능하겠는가? 그 부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긴 한 걸까?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서 복음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대답했다.35

그랜트 회장은 즉시 그를 성임하며 그에게 하나님 안에서 더 많은 힘과 권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랜트 회장은 존에게 어머니의 권고에 귀 기울이고 항상 겸손하며 세상의 지혜와 복음의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축복했다. 또한 그는 존이 사도로서 할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선지자는 이렇게 약속했다. “형제님은 여러 스테이크나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닐 때 후기 성도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을 것이며 형제님이 접촉하게 되는, 우리의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36

성전을 떠나는 존은 이제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와 리아는 여전히 빚이 있었고, 큰 아이들은 선교사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대학 봉급은 총관리 역원들이 전임 봉사에 대해 받는 생활비 정도의 적은 급료로 대체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37

그것은 리아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그러고자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랜트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제 삶이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많은 날을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겠죠. 하지만 저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더 직접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기쁘게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이 위대한 봉사에 부름받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재정적으로나 공적인 일 또는 일상적인 일에 어떤 변화가 생기더라도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38


수사 게이츠는 사위가 십이사도 정원회로 부름받은 것을 알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존이 가족과 교회보다 자신의 경력을 중시할 것이라는 그녀의 초기의 두려움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수사는 리아와 자녀와 회복된 복음에 헌신하는 사위를 변함없이 깊이 사랑했다.

그녀는 존에게 조언을 가득 담은 긴 편지를 쓰며 그 새로운 성역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수사는 여전히 상호부조회와 다른 교회 조직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걱정했다. “오늘날 세상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상태야.” 그녀는 존에게 그렇게 말했다. 수사는 점점 더 많은 교회 회원이 구원을 영적인 진보보다는 지적 및 윤리적 발전의 문제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위에게 이미 내면에 “영생의 씨앗”을 심었으나 영적으로 휴면기에 있는 남성과 여성을 깨우라고 촉구했다. “그 씨앗을 키우는 것이 농학의 대가인 자네의 일이야.” 수사는 이렇게 썼다. “결국, 이 각각의 영혼 속에는 아주 작고 깊은 진리의 웅덩이와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지. 정신적 무기력의 덤불을 조금 치우기만 하면 빛과 희망의 샘으로 솟아날 걸세.”39

존의 부름은 특히나 에이미 라이먼과 다른 사람들이 상호부조회를 계속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면서 수사가 교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여기던 때에 왔다. 상호부조회 임원회의 일부 임원들은 이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바람에서 히버 제이 그랜트에게 에멀라인 웰스를 상호부조회 회장에서 해임하도록 조용히 간청하기도 했다.

이제 아흔셋이 된 에멀라인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알고 있는 생존자 중 유일한 교회 역원이었다. 몸이 허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그녀는 종종 자리에 누워 지냈으므로, 제1보좌인 클러리사 윌리엄스가 임원회 모임에서 상호부조회 업무를 수행할 때가 많았다.

히버의 보좌들과 십이사도 정원회도 마찬가지로 상호부조회에 새로운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히버는 에멀라인을 해임하는 것을 꺼려하며 인내를 부탁했다. 엘리자 알 스노우 이후로 모든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에멀라인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히버의 어머니가 솔트레이크시티 제13 와드의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30년간 봉사했을 때, 에멀라인은 그녀의 서기였다.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히버의 아내 에밀리는 웰스 가족의 일원이었으므로, 히버는 그들과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에멀라인을 해임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40

하지만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상호부조회 본부 임원회의 임원들과 더 상의를 한 후, 에멀라인을 해임하는 것이 상호부조회에 가장 유익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히버는 에멀라인의 집에서 직접 그녀를 해임했다. 에멀라인은 침착하게 받아들였지만, 이 일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41 다음 날 열린 1921년 봄 상호부조회 대회에서 본부 상호부조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클러리사 윌리엄스가 지지되었다. 본부 임원회의 임원들도 대부분이 해임되고 새로운 임원들이 부름을 받았다.42

수사는 조직 개편 이후에도 본부 임원회에 남아 있던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그랜트 회장이 에멀라인을 해임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었다. 1921년 4월 14일, 새로운 임원회의 첫 모임에서 클러리사는 조직에 대한 몇 가지 변경 사항을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에이미 라이먼이 상호부조회 활동의 관리 책임자로 임명된 것으로, 그녀는 『상호부조회 잡지』를 포함하여 부서 내의 모든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수사는 그 정기 간행물의 편집장 자리를 유지했지만, 클러리사의 지시에 따라 그 직책은 해마다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잡지와 관련된 수사의 미래를 이제 더는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러한 변화가 곤혹스러웠던 수사는 사회 복지 사업 분야에서 에이미와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 여기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웠다.43

엿새 후, 수사는 에멀라인을 방문했는데, 이제 그녀는 더 많은 시간을 침대에 누워 지냈고, 종종 자신이 해임된 일로 눈물을 흘렸다. 에멀라인의 딸인 애니와 벨은 늘 곁을 지키며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수사는 최선을 다해 이 오랜 친구를 격려했다. “에멀라인 자매님, 모두들 자매님을 사랑해요.”

수사의 말에 에멀라인은 “그랬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죠.”44

4월 25일에 에멀라인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수사는 『임프루브먼트 이라』에 그녀를 극찬하는 헌사를 기고했다. 수사는 에멀라인이 여러 해 동안 시인, 『우먼스 익스포넌트』의 편집장, 그리고 최근 미국 헌법에 법률로 제정된 여성 참정권의 확고한 옹호자로서 활동한 것을 치하했다. 그러나 수사가 에멀라인의 공적에 대해 아껴 둔 가장 큰 찬사는 1876년에 그녀가 브리검 영으로부터 처음 받은 임무였던 곡물 저장이었다. 수사는 상호부조회의 곡물이 전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왔다고 기록했다.

“웰스 부인의 삶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결연한 의지력이었다. 그녀의 포부는 원대했고 그녀의 목적은 고귀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리는 그녀의 간증으로 이어졌고 그 간증은 그녀의 버팀목이 되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그녀는 언덕 위에 세워진 등불이 되었다.”45

  1. Heber J. Grant to “Family of President Joseph F. Smith,” Nov. 20, 1918, Joseph F. and Alice K. Smith Family Correspondence, CHL; Frank W. Otterstrom, “Tributes of Honor,” Deseret Evening News, Nov. 30, 1918, section 4, vii; Heber J. Grant, Remarks at YMMIA Board Meeting, Jan. 29,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585–87,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Death Certificate for Joseph Fielding Smith, Nov. 19, 1918, Utah Department of Health, Office of Vital Records and Statistics, Utah State Archives and Records Service, Salt Lake City; see also Heber J. Grant, Remarks, Jan. 29,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586; Heber J. Grant to Homer Durham and Eudora Widtsoe Durham, Dec. 30, 1941, Letterpress Copybook, volume 80, 706; Heber J. Grant to Reed Smoot, Aug. 28, 1918,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and Heber J. Grant, in One Hundredth Annual Conference, 22.

  2. Lund, Journal, Nov. 19–22, 1918; “Prest. Joseph F. Smith Followed to Grave by Magnificent Cortege,” Deseret Evening News, Nov. 22, 1918, section 2, [1]; “State Board of Health Issues Drastic Order,” Salt Lake Telegram, Oct. 9, 1918, 1.

  3. “Prest. Joseph F. Smith Followed to Grave by Magnificent Cortege,” Deseret Evening News, Nov. 22, 1918, section 2, [1]; Frank W. Otterstrom, “Tributes of Honor,” Deseret Evening News, Nov. 30, 1918, section 4, vii; “Thousands Pay Last Honor to Church Leader,” Salt Lake Herald, Nov. 23, 1918, 3.

  4. Lund, Journal, Nov. 23, 1918; Talmage, Journal, Nov. 23, 1918. 주제: 히버 제이 그랜트

  5. Heber M. Wells to Heber J. Grant, Nov. 27, 1918; John A. Widtsoe to Heber J. Grant, Nov. 23, 1918; Heber J. Grant to Charles A. Callis, Jan. 14,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84; Heber J. Grant to Isaac A. Russell, Jan. 12, 1922,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8, 806; Heber J. Grant to Edward H. Felt, Mar. 4,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245; Heber J. Grant to Samuel Woolley, Apr. 24,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726,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6. 주제: Adjustments to Priesthood Organization

  7. Deseret News 1989–90 Church Almanac, 204; Alexander, Mormonism in Transition, 114–19; Lund, “Joseph F. Smith and the Origins of the Church Historic Sites Program,” 342–58; First Presidency, To the Presidents of Stakes, Bishops and Parents in Zion. 주제: Family Home Evening[가정의 밤]

  8. Heber J. Grant to George Romney, Nov. 24, 1918; Heber J. Grant to James Lawry, June 21, 191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Many Offices Were Held by Joseph Smith,” Salt Lake Herald, Nov. 20, 1918, 6; Church Board of Education, Minutes, Nov. 27, 1918; Lund, Journal, Nov. 27, 1918. 주제: David O. McKay[데이비드 오 맥케이]

  9. “Grant Is Bank President,” Salt Lake Tribune, Dec. 6, 1918, 16; “New Head of the Utah-Idaho Sugar,” Ogden (UT) Standard, Dec. 12, 1918, 4; Zion’s Cooperative Mercantile Institution, Minutes, Dec. 19, 1918, 236–37. 주제: Church Finances[교회 재정]

  10. Frank W. Otterstrom, “Tributes of Honor,” Deseret Evening News, Nov. 30, 1918, section 4, vii; Charles W. Penrose to Heber J. Grant, Dec. 5, 1918; Heber J. Grant to Joshua F. Grant, Dec. 14, 1918; Heber J. Grant to Junius F. Wells, Dec. 12, 1918; Heber J. Grant to S. A. Whitney, Dec. 24, 1918,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11. “Spring Session of Conference Is Called Off,” Salt Lake Herald, Mar. 21, 1919, [16]; “Conference Is to Be Held in Salt Lake,” Ogden (UT) Standard, Apr. 19, 1919, 2; Heber J. Grant to Augusta Winters Grant, Mar. 20, 191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Spirit of the Lord Attends Elders of Church,” Deseret Evening News, Mar. 15, 1919, section 4, vii; Heber J. Grant, in Eighty-Ninth Annual Conference, 74; Bray, “The Lord’s Supper during the Progressive Era,” 88–104. 주제: 성찬식

  12. Heber J. Grant to “My Dearly Beloved Daughters,” Dec. 1,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5, 25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주제: Influenza Pandemic of 1918

  13. Christensen, Stories of the Temple in La‘ie, 33; Heber J. Grant to “My Dearly Beloved Daughters,” Dec. 1,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5, 259; Heber J. Grant to Augusta Winters Grant, Nov. 29, 191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성도들』, 제1권, 제21장; 제2권, 제44장; Britsch, Moramona, 241–44.

  14. Heber J. Grant, “The Dedicatory Prayer in the Hawaii Temple,” Improvement Era, Feb. 1920, 23:281–88; Christensen, Stories of the Temple in La‘ie, 35–38.

  15. Heber J. Grant to “My Dearly Beloved Daughters,” Dec. 1,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5, 259,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주제: 하와이; 성전 헌납과 헌납 기도

  16.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Nov. 20, 1919, 292; Lyman, “Social Service Work in the Relief Society,” 3–8; Hall, Faded Legacy, 79–82; McDannell, Sister Saints, 46–47. 주제: Amy Brown Lyman[에이미 브라운 라이먼]

  17. McGerr, Fierce Discontent, xiii–xvi, 79–80, 256–59; Flanagan, America Reformed, 283–86; Lyman, In Retrospect, 30; Hall, Faded Legacy, 48–50.

  18. Lyman, “Social Service Work in the Relief Society,” 1–2, 6; Alexander, “Latter-day Saint Social Advisory Committee,” 19–39. 주제: 상호부조회; Welfare Programs[복지 프로그램]

  19.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Oct. 23, 1919, 267–71; Susa Young Gates, “Address to the Relief Society Board,” 3–7, Relief Society Files, Susa Young Gates Papers, CHL; Derr, Cannon, and Beecher, Women of Covenant, 222.

  20. Cannon and Derr, “Resolving Differences/Achieving Unity,” 130–31; Derr, Cannon, and Beecher, Women of Covenant, 241–42. 주제: Fasting[금식]; 감독

  21. Lyman, “Social Service Work in the Relief Society,” 8–11; Amy Brown Lyman, “Class in Charities and Relief Work,” Relief Society Magazine, Aug. 1920, 7:437–40; Amy Brown Lyman, “In Retrospect,” Relief Society Magazine, July 1942, 29:464; Derr, “History of Social Services,” 30–31; see also, for example, “Guide Lessons,” Relief Society Magazine, Jan. 1920, 7:59–62; Feb. 1920, 7:118–24.

  22. “Two Church Workers Will Tour Missions of Pacific Islands,” Deseret News, Oct. 15, 1920, 5; Hugh J. Cannon, Journal, Dec. 4, 1920. 주제: David O. McKay[데이비드 오 맥케이]

  23. Hugh J. Cannon, Journal, Dec. 4, 1920–Feb. 7, 1921; McKay, Journal, Jan. 9, 1921, and Feb. 7, 1921; Neilson, To the Peripheries of Mormondom, xix–xxxii; Neilson and Teuscher, Pacific Apostle, xxvi–xxx, xl, 78; Britsch, From the East, 60–61; Plewe, Mapping Mormonism, 141.

  24. McKay, Journal, Feb. 7, 1921, in Neilson and Teuscher, Pacific Apostle, 77–80.

  25. Church Board of Education, Minutes, Feb. 24, 1920; Mar. 3, 1920; Mar. 18, 1926; By Study and Also by Faith, 33, 36–38, 597–99; Taylor, “Report of Sermons of Elder David O. McKay,” 12; Hatch, Colonia Juarez, 229–38. 주제: Church Academies; Seminaries and Institutes[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26. McKay, Journal, Apr. 21–22, 1921, in Neilson and Teuscher, Pacific Apostle, 103–11, 113, 118; Newton, Tiki and Temple, 162; David O. McKay, “Hui Tau,” Improvement Era, July 1921, 24:769–77.

  27. Newton, Tiki and Temple, 164; McKay, Journal, Apr. 23, 1921, in Neilson and Teuscher, Pacific Apostle, 123.

  28. McKay, Journal, Apr. 23, 1921, in Neilson and Teuscher, Pacific Apostle, 123; Taylor, “Report of Sermons of Elder David O. McKay,” 1–3; Young, Oral History Interview, 9–10; Cowan, “An Apostle in Oceania,” 193–95. 주제: 방언의 은사

  29. Taylor, “Report of Sermons of Elder David O. McKay,” 12. 주제: New Zealand[뉴질랜드]

  30. Widtsoe, In the Gospel Net, 127; Widtsoe, In a Sunlit Land, 85–87, 97–98, 124–27, 156.

  31. Widtsoe, In the Gospel Net, 127–30; Widtsoe, Diary, May 28, 1919; June 12–July 11, 1919.

  32. Widtsoe, Diary, Mar. 13–17, 1920.

  33. Widtsoe, In a Sunlit Land, 156.  

  34. 주제: Church Headquarters[교회 본부]

  35. John A. Widtsoe to James E. Addicott, Oct. 3, 1921, John A. Widtsoe Papers, CHL; Widtsoe, In a Sunlit Land, 156–57.  

  36. Widtsoe, In a Sunlit Land, 156–57; Grant, Journal, Mar. 17, 1921.

  37. Widtsoe, In a Sunlit Land, 157, 161–62; Joseph F. Smith, in Seventy-Seventh Annual Conference, 7–8. 주제: Church Finances[교회 재정]

  38. Leah D. Widtsoe to Heber J. Grant, June 30, 1921,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주제: John and Leah Widtsoe[존과 리아 윗소]; 십이사도 정원회

  39. Grant, Journal, Mar. 17, 1921; Susa Young Gates to John A. Widtsoe, Mar. 31, 1921, Susa Young Gates Papers, CHL.

  40. Heber J. Grant to Isaac Russell, Feb. 17, 1922, Isaac Russell Papers, Special Collections, Green Library, Stanford University, Stanford, CA; Heber J. Grant to Annie Wells Cannon, Apr. 25, 1921; Heber J. Grant to Frances Grant, May 18, 1921,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Susa Young Gates to Elizabeth Claridge McCune, Feb. 10, 1921; May 6, 1921, Relief Society, Susa Young Gates Files, CHL; Madsen, Emmeline B. Wells, 480–81, 484–86, 488–90.

  41. Heber J. Grant to Isaac Russell, Feb. 17, 1922, Isaac Russell Papers, Special Collections, Cecil H. Green Library, Stanford University, Stanford, CA; Annie Wells Cannon, Journal, Apr. 2, 1921; Madsen, Emmeline B. Wells, 490–91.

  42.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Apr. 2, 1921, 42–43; “Is Chosen by Head Church Official,” Salt Lake Telegram, Apr. 2, 1921, 2. 주제: 상호부조회

  43.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Apr. 14, 1921, 51; Susa Young Gates to Elizabeth Claridge McCune, Apr. 20, 1921; May 6, 1921, Relief Society, Susa Young Gates Files, CHL; Susa Young Gates, Journal, 1921–22, undated entry after Feb. 3, 1932. 주제: Amy Brown Lyman[에이미 브라운 라이먼]

  44. Annie Wells Cannon, Journal, Apr. 2–20, 1921.

  45. Annie Wells Cannon, Journal, Apr. 24–25, 1921; Susa Young Gates, “President Emmeline B. Wells,” Improvement Era, June 1921, 24:718–21. 주제: 에멀라인 비 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