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복음”,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19장
제19장: “주님의 복음”
제 19 장
주님의 복음
1929년 9월 9일 월요일, 맹렬한 폭풍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를 강타했을 때 전봇대 하나가 벼락을 맞고 산산이 부서졌다. 그 타격으로 순식간에 급증한 전류는 전선을 타고 마을 북쪽 끝에 있는 새로 보수된 후기 성도 예배당으로 흘러 들어갔다. 일부 배선의 단열재에 불이 붙으면서 건물 안은 연기가 가득했다. 곧 소방관들이 도착했지만, 건물은 이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처음에 신시내티 지부 회원들은 화재로 건물의 배선이 파괴되었다며 걱정했다. 예배당 헌납식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성도들은 이런 막대한 피해를 복구할 시간도, 자금도 없었다. 그러나 점검을 한 결과, 그들은 배선은 제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은 즉시 전선을 수리하고 교체하는 작업을 했으며, 곧 건물은 정상으로 돌아왔다.1
헌납일이 다가오자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9월 12일, 지부 회장단 제1보좌인 크리스티안 방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시간을 쪼개어 현지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기자는 성도들이 한때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크리스티안은 교회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해명할 용의가 있었다.2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지난 10년간 많은 편견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케케묵은 관념을 접어두고 우리가 옹호하는 이상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일부다처제에 대한 당신들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종결된 문제입니다.” 기자의 질문에 크리스티안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의 믿음은 매우 정통적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믿고 그 율법을 실천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장로들과 보좌들은 자신의 봉사에 대해 전혀 봉급을 받지 않습니다.”3
사흘 뒤, 기자들은 예배당 헌납식에 다시 나타났다. 성도들은 기쁨이 역력했다. 주변 지역의 선교사들을 포함해서 4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사도 올슨 에프 휘트니는 헌납 기도를 드리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조부모 뉴얼과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는 거의 한 세기 전 오하이오에서 교회에 들어왔었다.4
그날 오후, 지부 회장인 찰스 앤더슨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방 가족 및 다른 초기 지부 회원들과 함께 신시내티의 지부를 성장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 왔다. 회중에 말씀을 전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집회소를 구입하고 보수하면서 겪은 많은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건물을 헌납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고 오늘 우리보다 더 뿌듯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5
휘트니 장로는 말씀을 전하며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가 1836년에 커틀랜드 성전에서 구주를 보았던 시현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오하이오주의 성스러운 역사를 강렬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말씀을 전하는 이 사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고, 휘트니 장로는 시현에 대해 이야기한 후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여, 이 건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옵고, 이 건물이 완성되도록 가진 것을 기부한 이들에게 상을 내려 주시옵소서. 또한 이 예배당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그는 신시내티 지부 회원들, 그들에게 봉사한 선교사 및 선교부 지도자들, 그리고 인근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축복을 간구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당신의 영을 쏟아 주시고, 저희가 바치는 헌물인 이 건물을 받아 주시옵소서.”
평온과 고요함이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을 감싸안았다. 휘트니 장로는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오하이오 주민들이 몰몬이즘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친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6
1929년 11월 1일, 히버 제이 그랜트는 자신이 사도 프랜시스 라이먼의 후임으로 유타 투엘러 스테이크의 회장이 된 날을 회상하며 그 경험을 일지에 기록했다. 히버가 스물네 번째 생일을 불과 몇 주 앞둔 1880년의 일이었다. 존 테일러 회장과 그의 보좌들인 조지 큐 캐넌과 조셉 에프 스미스가 스테이크 대회를 위해 그 마을에 와 있었다. 라이먼 장로는 그들을 접대했고 히버도 그 집에 초대되었다.
방문 중에 히버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기도를 하면서 “연로한 당신의 종 테일러 회장님”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곧 일흔둘이 되는 선지자는 그 “연로한”이라는 표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기도가 끝나자, 그는 “왜 우리 젊은 보좌들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히버는 선지자의 목소리에서 묻어난 불쾌감을 여전히 기억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히버도 이제 곧 일흔셋이 될 것이었다. 그는 일지에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의 연로한 종 그랜트 회장님’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충격을 받을 것 같다.”라고 썼다. 히버는 자신이 마흔 살 때처럼 젊고 심지어 훨씬 더 건강하다고 느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영은 늙지 않는 것 같은데, 그 사실은 내게 영혼의 불멸성을 보여 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7
평소 같으면 히버는 자신의 생일을 위해 자녀들과 그 가족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딸 에밀리가 몇 달 전 출산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아직 가족 파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유타 바로 남쪽에 있는 애리조나의 스테이크들을 방문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8 브리검 영은 사망 직전에 애리조나에 정착할 200명의 지원자를 요청했었다. 그 이후 성도들은 애리조나주 전역에 수십 개의 정착지를 세웠고, 이제는 공직의 높은 지위에 오른교회 회원들도 있다. 1927년에 히버는 애리조나 성도들뿐만 아니라 멕시코 북부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성도들을 위해 그곳 성전을 헌납했다.9
히버는 또한 훨씬 더 큰 축하 행사를 고대하고 있었다. 성도들이 곧 기념하게 될 행사는 바로 교회 조직 100주년이었다. 이 기념 행사는 전 세계 거의 1800개의 와드 및 지부의 70만에 가까운 교회 회원들이 함께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될 것이었다. 사도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위원장을 맡은 한 작은 위원회는 1930년 4월 연차 대회에 맞춰 개최할 성대한 행사를 1년 이상 계획해 왔다. 히버는 그들의 진행 상황을 자주 보고받고 가끔 피드백을 주었다.10
그는 11월 15일에 애리조나로 떠났다. 선지자는 그 후로 열흘 동안 성도들을 방문하며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지난 11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교회를 실망시키지도 않았고, 역대 교회 회장들보다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두 번째 세기로 접어들면서 성장하고 번영하고 있었다.11
교회 회장으로서 히버는 방송 전파를 통해 연차 대회와 그 밖의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술 혁명을 목격했다. 이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요일 저녁마다 교회 라디오 방송국인 KSL에 채널을 맞추고 지도자와 교사들이 복음 주제에 대해 전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12 1929년 7월에는 태버내클 합창단이 뉴욕시 방송망을 통해 주간 라디오 방송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적으로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고, 수백만 명의 청취자들이 합창단을 통해 교회를 더 잘 알게 되었다.13
히버는 또한 교회 회장으로서의 영향력을 통해 성도들이 그들의 와드와 지부에서 서로 가르치고 봉사하도록 격려했다. 그가 어렸을 때, 일요일 모임은 성도들이 저명한 사람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듣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 아래 각 와드와 지부는 교회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봉사를 해야 했다. 남성과 여성, 청소년들은 공과를 가르치고, 정원회 및 반 회장단에 참여하며, 성찬식에서 말씀을 했다.14 또한 많은 성도들이 교회 참석을 중단한 회원들을 찾도록 스테이크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15 그리고 처음으로 와드와 스테이크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행하도록 청소년들을 단체로 성전에 보냈다.16
교회가 그 열매로 알려질 것이라고 믿었던 히버는 성도들이 깨끗한 생활을 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알코올, 커피, 차, 담배, 그리고 이전 세대의 성도들이 이따금 취했던 다른 해로운 물질들을 삼가며 지혜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킬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그는 성전에 참석하고 선교 사업을 나가기 위해 지혜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성도들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고 헌금을 내라고 간청했다.17
일흔세 번째 생일날 아침, 히버는 애리조나의 스노우플레이크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이 구슬치기, 야구, 글씨쓰기, 노래 부르기의 달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일화들을 들려주며 그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끈기와 탁월함에 대한 동기 부여를 해 주려는 목적으로 수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전했고, 사람들은 언제나 흥미진진해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18
날이 갈수록 히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우렁찬 목소리, 힘찬 발걸음은 그의 건강과 체력이 매우 좋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다. 히버를 본 사람들은 그가 전날 애리조나주에서 상당히 많은 지역을 다니고 여덟 곳을 들르며 회중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19
그해 가을, 독일 북동부에서는 틸지트 지부 성도들이 매주 안식일 오전에 모여 주일학교를 했다. 오토 슐츠케 지부 회장은 모임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일학교 관리자를 도왔다. 모임의 사회를 보는 것부터 음악을 지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토가 도맡았다. 이제는 일요일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공과에 나오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교회 회원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주일학교를 다니는 많은 어린이 중 한 명인 아홉 살의 헬가 마이주스는 오토의 엄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했다. 헬가가 기억하기에 오토와 오토의 가족은 언제나 그녀의 삶에 함께해 왔다. 헬가가 태어났을 때 교회에서 그녀를 축복해 준 사람도 오토였다.20
헬가의 가족은 틸지트 지부에서 대들보와도 같았다. 헬가의 외할머니 요하네 워치스머스는 수년 전에 선교사들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 가족이 상호향상회와 교회의 다른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틸지트로 이사하고 그 지역에서 우연히 몇몇 성도들을 만난 후였다. 헬가의 외할아버지는 처음에 성도들을 의심했지만, 결국 그는 헬가의 어머니, 외할머니, 이모들, 외삼촌과 함께 교회에 가입했다. 헬가의 아버지도 헬가가 태어나기 직전에 침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와 헬가의 외할아버지는 교회에 자주 참석하지는 않았다.
헬가는 주일학교에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모임 5분 전에는 항상 누군가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전에 오르간을 연주하던 사람은 헬가의 이모 그레텔이었는데, 그레텔은 언젠가 유타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1928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21 이제 전주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지부의 또 다른 자매인 조닝케이트였다.22
틸지트 주일학교의 모임 순서는 교회의 다른 모든 주일학교의 모임 순서와 똑같았다. 모임은 찬송가, 개회 기도, 그리고 또 다른 찬송가로 시작되었다. 그런 후 신권 소유자들은 뒤에 있을 저녁 성찬식에 참석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성찬을 집행했다. 그런 다음, 이들은 함께 성구를 하나 암송하고 노래 연습을 했다.23
헬가의 외삼촌 하인리히가 한때 노래 순서를 이끌었지만 그도 그레텔이 떠난 지 몇 달 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제는 종종 오토가 그 순서를 이끌었다. 헬가가 잘 아는 노래 중 하나는 “낮도 다간 이 저녁에”였는데, 헬가는 아버지가 일하는 인근 제지 공장에서 사이렌이 울릴 때면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녀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장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서, 아버지를 걱정했다.24
노래 연습이 끝나면, 주일학교에서는 커튼을 걸어 어른과 청소년, 어린이 반으로 공간을 나누었다. 와드의 경우, 어린이 주일학교는 어린아이들 반과 큰 아이들 반, 이렇게 두 반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틸지트 지부처럼 작은 지부에서는 모든 어린이가 하나의 반으로 모였다.25
약 15명의 아이들이 헬가와 함께 공과에 참석했다. 매주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재림, 조셉 스미스의 사명, 그리고 기타 복음 주제에 대해 배웠다. 종종 교회 회원이 아닌 아이들도 공과에 참석했다. 교회의 오전 모임과 저녁 모임 사이에 헬가는 이따금 학교 친구들과 함께 루터교 모임에 참석하여 옛 루터교 찬송가를 불렀다. 하지만 헬가의 마음은 항상 후기 성도들에게 있었다.26
주일학교 공과가 끝나면, 헬가와 다른 아이들은 폐회 말씀을 듣기 위해 나이가 많은 성도들과 함께 다시 모이곤 했다.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한 뒤, 그날 저녁 성찬식이 있을 때까지 휴회했다. 주일학교 서기인 에리카 슈테파니는 각 모임을 기록부에 기록했다.27
1929년 12월, 리아 윗소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는 뜻밖의 일들이 많았어. 남편과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우리 회원들을 방문하고 가르쳤지. 또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750명의 청년 선교사들의 안녕을 살피느라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어.”28
그녀는 불평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리아는 그 일을 좋아했다.29 지금까지 리아와 존은 유럽의 교회에서 일어난 많은 중요한 변화를 목격해 왔다. 점점 더 많은 현지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들이 지부 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선교사들은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 지부들은 또한 더 좋은 모임 장소를 찾고 있었다. 1929년 7월, 독일 동부에 있는 셀봉겐의 교회 회원들은 독일 최초의 후기 성도 집회소를 완공했다. 벨기에 리에주와 세랭의 성도들, 덴마크 코펜하겐의 성도들은 예배당을 짓고 있었다. 그해 여름, 존은 소수의 성도들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가서 선교 사업을 위해 그 나라를 헌납했다.30
선교부를 관리하는 것은 보람 있지만 고된 일이었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기에 리아와 존은 둘 다 체중이 줄고 있었다. 건강이 염려된 리아는 자신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는지 점검하기 위해 대학교에서 받은 영양 교육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식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럽 성도들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선교부 임무 첫 해 동안, 리아는 많은 사람이 영양분이 거의 없는 값싼 수입 식품을 먹어서 심각한 건강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9년 1월, 리아는 지혜의 말씀에 대한 일련의 상호부조회 공과를 『밀레니얼 스타』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지혜의 말씀에 대한 토론을 할 때면 피해야 할 물질에 주로 강조점을 두던 시기에, 리아의 공과는 경전과 영양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통곡물, 과일, 채소 등 지혜의 말씀에서 권하는 건강한 식품을 먹으면 어떻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더 강건해지는지를 설명했다.
지혜의 말씀에 대한 첫 번째 공과에서, 리아는 영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교리와 성약 88편 15절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어 표현했다. “영과 몸은 사람의 영혼을 구성한다.” “실제로 참된 복음에는 신체의 건강과 활력이 포함되어야 한다. 몸은 영이 거하는 장막이며, 하늘 부모의 직계 소생이기 때문이다.”31
그녀와 존은 또한 유럽 성도들에게 계보 사업을 하도록 격려했다. 존은 1929년 9월 19일 자 『밀레니얼 스타』 기사에서 “현재 유럽에는 성도들이 복음의 의식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성전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의 주요 활동은 계보를 수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리아는 유럽 성도들을 위해 계보 공과 집필을 시작했으며, 존은 그들이 성전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환 프로그램을 창안했다. 그는 성도들이 가족 역사를 탐구하고, 가계도를 작성하며, 대리 의식 사업을 위한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지부에 계보 공과를 시작할 것을 요청했다. 그런 후 이 이름들을 미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면, 미국의 성도들이 그들을 위한 성전 사업을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성도들은 그러한 봉사에 화답하여, 대서양을 건널 형편이 안 되는 미국 성도들을 위해 계보 조사를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32
이 시기에 리아와 존은 그녀의 어머니가 쓴 브리검 영의 전기를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 위해 영국 신문 기자인 해럴드 셉스턴과 협력했다. 수사는 원고 출판을 위해 어떤 내용이든 필요한 부분을 잘라 내는 것에 대해서는 리아와 존을 신뢰했다. 그녀는 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거야.”
수사는 또한 자신과 리아를 공동 저자로 올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아버지의 역사서에 내 이름만 나오는 걸 원하지 않아.” 그녀는 리아에게 이렇게 썼다. “그 글과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쓴 모든 글에서 네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넌 짐작도 못할 거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니까.”
12월에 해럴드는 영국의 대형 서적 회사가 전기를 출판하기로 했다고 존과 리아에게 알려 왔다.33 바쁘고도 보람찬 한 해가 끝날 무렵에 도착한 이 소식은 가족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리아는 존과 함께 선교사로 일하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우린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을 보게 되리란 것을 빼고는 귀환할 날을 고대하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이 무렵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주님의 복음이라는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이 선교 사업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34
1930년 4월 6일 일요일, 아침 5시에 잠이 깬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은 역사적인 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깥 솔트레이크시티 템플스퀘어의 주변 거리는 교회 조직 100주년을 기념하는 형형색색의 장식용 깃발과 현수막으로 빛나고 있었다.35
지난 한 주 동안 수만 명의 성도들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호텔들은 만원이었고, 많은 솔트레이크시티 주민들은 방문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을 개방했다. 솔트레이크 성전 헌납식을 제외하고 이 도시에서 이처럼 큰 행사는없었다.36
세계 주요 신문과 잡지들은 이미 100주년 보도에 나서고 있었다. 더구나 사우스템플 스트리트를 거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 서점인 데저렛북[Deseret Book] 창가에 진열된 비 에이치 로버츠의 신간을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교회의 첫 100년을 다룬 여섯 권으로 된 역사서였다. 뉴욕주 북부에서 처음 조직되었을 때, 이 교회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데저렛 뉴스』는 미국에서만 약 7천 5백만 명의 사람들이 100주년 행사를 알고 있다고 추산했다. 그주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사 잡지 중 하나인 타임지의 표지에 그랜트 회장의 얼굴 사진이 실렸다. 그 잡지의 기사에는 교회의 업적에 대해 존경심을 보이고 심지어 칭찬하는 내용마저 들어 있었다.37
100주년 기념행사의 최고 행사인 연차 대회의 개회 모임이 10시에 시작되었다. 태버내클의 좌석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더 많은 사람이 대회에 직접 참석할 수 있도록 특별 입장권을 발행하고 대회를 하루 더 연장했다. 그들은 초과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인근 어셈블리홀과 도시 전역의 다른 몇몇 건물에서 모임을 준비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KSL 라디오는 유타와 그 주변에 있는 여러 주 전역에 대회를 방송하여,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성도들도 대회를 들을 수 있게 했다. 방송을 수신할 수 없는 세계 각지의 성도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맞춰 소규모로 100주년 기념행사를 할 수 있도록 같은 시각에 모이라는 지침을 받았다.38
그랜트 회장은 제일회장단이 준비한 연설문을 낭독하며 대회를 시작하는 동안 감사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몇 주 전, 히버와 그의 보좌들은 이 연설문을 교회의 스테이크와 선교부들에 보내고 필요하다면 번역도 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렇게 공표했다. “지금 이 시간에 전 세계에서 우리 회원들이 이 메시지를 읽을 것입니다.”
이 연설문에서 그랜트 회장과 그의 보좌들은 복음의 회복과 구주의 지상 성역, 그리고 그분의 속죄 희생에 대해 강력한 간증을 전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박해와 그들의 시련에 뒤이은 수세기 동안의 종교적 혼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이어서 몰몬경, 신권 및 교회 조직의 회복, 이스라엘의 집합,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성전 사업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대해 간증했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에게 다가올 일에 준비될 수 있도록 집에 질서를 세울 것을 촉구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병자를 방문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벗은 자를 입히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남편을 잃은 이들과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십시오.”39
성도들이 교회의 총관리 역원들을 지지한 후, 그랜트 회장은 손수건을 공중에 흔들며 회중이 호산나를 외치도록 이끌었다. 전 세계의 수십만 성도들도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자신들의 모국어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을 외치며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했다.40
그날 저녁, 사람들은 세계의 성스러운 역사를 풍성하게 다룬 야외극인 시대의 메시지[The Message of the Ages] 초연을 보기 위해 다시 태버내클로 모여들었다. 이 공연에 참여한 천 명의 배우들은 경전과 교회 역사의 사건들을 재현했다. 또한 가수와 음악가들은 찬송가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곡 중 선곡한 노래들을 부르고 연주했다. 형형색색의 의상은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공들여 제작되었다. 조셉 스미스 역을 맡은 배우는 한때 선지자 조셉이 소유했던 옷깃을 둘렀다.41
기념행사 동안 날이 저물면, 교회는 새로 설치한 강력한 투광 조명등으로 7개의 성전을 각각 비추었다. 건물들의 웅장함이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사방으로 수킬로미터까지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드러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모로나이 천사 상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는 마치 군중 위로 황금 나팔을 높이 치켜든 채 멀리 있는 성도들을 부르며 성대한 100주년을 기뻐하라고 외치는 듯했다.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