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8장: 지상 어디라도


“지상 어디라도”,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18장

제18장: “지상 어디라도”

제 18 장

지상 어디라도

1920년대 도시의 길가에 있는 교회 건물

1927년 12월, 남미 선교부 회장인 라인홀트 스투프는 짧게나마 아르헨티나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8개월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일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도시의 독일인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고 찾기가 어려워 그들 사이에서 선교 사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멜빈 제이 밸라드 장로의 예언대로 교회가 남미에서 참나무처럼 성장하려면, 라인홀트와 그의 몇 안 되는 선교사들은 스페인어를 쓰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했다.1

독일 태생의 성도인 라인홀트는 스페인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즉시 언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라인홀트는 여전히 남미 대륙에 있는 독일인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이웃 나라 브라질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큰 규모의 이민자 지역 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밸라드 장로는 그 지역 사회에 선교사들을 보내어 복음에 대한 그들의 관심도를 알아보라고 권했었다.

라인홀트는 이미 브라질에 거주 중인 몇몇 독일인 성도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자신들의 마을과 도시에 교회의 지부가 설립되도록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독일 이민자들 사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둔화되고 있었기에 지금이 브라질을 방문할 적기인 듯했다.2

12월 14일, 라인홀트는 한 선교사에게 아르헨티나의 일을 맡기고 월도 스토더드라는 장로와 함께 브라질로 갔다. 그들은 먼저 브라질의 최대 도시 중 하나인 상파울루로 갔다. 그들은 스위스-독일 선교부에서 봉사한 후 그곳으로 이주한 한 교회 회원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회원을 찾지 못했고, 게다가 그 도시는 선교 사업이 너무도 힘든 곳임을 알게 되었다. 상파울루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많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처럼 그들도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3

일주일 후, 라인홀트와 월도는 브라질 남부의 조인빌리라는 작은 도시로 갔다. 그곳은 1850년대에 북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로, 많은 주민들이 여전히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친절하고, 복음에도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라인홀트와 월도는 그곳에서 전도용 소책자를 배포하고 두 차례 모임을 했다. 두 모임 모두 100명 이상이 참석했다. 그 지역의 다른 마을에서도 장로들의 설교가 비슷한 수준의 관심을 받았다. 조인빌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그들은 몸이 아픈 두 여성에게 축복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조인빌리와 그 주변 지역에서 3주를 보낸 라인홀트는 브라질에서 알게 된 것들에 감격해하며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그는 제일회장단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것에는 전혀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는 즉시 조인빌리로 선교사들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는 “저는 평생 낙천주의자로 살아왔지만, 그늘과 장애물이 눈에 안 보일 만큼 열광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라고 인정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브라질 남부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4


라인홀트 스투프가 브라질에서 돌아올 즈음, 존과 리아 윗소는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다. 그들은 즉시 유도라를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새로운 삶을 터잡아 갔다. 리아는 변화를 받아들였다. 선교사로 봉사한 적도 없고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일해 본 적도 없었던 그녀가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리아는 자연스럽게 선교 사업을 하게 되었고, 직장 생활과 교회 임무로 종종 떨어져 지내야 했던 존과 함께 봉사하는 기쁨을 누렸다.5

존의 교육을 위해 두 사람이 유럽에 왔던 것은 거의 3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 교회는 유럽 대륙 전역에서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유타로 대규모 이민을 떠나던 관행이 종료되면서 현재는 유럽에만 약 2만 8천 명의 성도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절반은 독일어를 사용했다. 윌리엄 자먼과 같은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이제 자취를 감췄고, 많은 신문은 이제 교회 대회에 관해 공정한 보도를 게재하거나 성도들의 선행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언급했다.6

그러나 리아와 존은 이 대륙 전역에 있는 지부들을 방문하면서 성도들이 다소 무관심하고 좌절감을 보이는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축복사의 축복과 성전 예배와 같은 교회의 몇몇 의식을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교회가 이민 장려를 중단하여, 유럽 성도 중에서 극소수만이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바랄 수 있을 뿐이었다.7

교회의 진척을 방해하는 요인은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미국에서 오는 선교사들은 전임자들보다 더 젊고 경험도 없었다. 그들 다수가 선교부의 언어를 거의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선교사들이 회원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 일은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닌 강하고 유능한 회원들이 있는 곳에서도 일어났다. 지부들은 회원들이 낸 얼마 안 되는 십일조 수입에 의존해서 마을의 황폐한 지역에 있는 회관을 빌려 운영되었으므로, 새로운 회원을 끌어들이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상호부조회, 초등회, 상호향상회, 주일학교도 없었기에, 유럽의 지부들은 후기 성도들과 교회 회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다지 관심을 끄는 교회가 되지 못했다.8

리아도 존 못지않게 유럽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리아의 주된 책임은 유럽에서 상호부조회의 일을 감독하는 것이었으며, 영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그녀는 다가올 해에 사용할 상호부조회 몰몬경 공과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밀레니얼 스타』[Millennial Star]에 게재된 영국 제도의 상호부조회에 보낸 첫 메시지에서, 리아는 그들이 교회 본부와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시온은 단 하나의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결국 시온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는 물었다. “시온이란 ‘마음이 청결한 자’를 말하며, 인간이 온전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곳이면 지상 어디라도 시온이 될 수 있습니다.”9

선교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유럽 사람들을 도울 더 많은 방법을 알아 보는 동안에도 리아와 존은 아들 마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충실히 봉사했던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존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셀이 세상을 떠난 직후 경험했던 일, 즉 마셀의 영이 자신을 찾아와 본인은 행복하고 휘장 저편에서 선교 사업을 하느라 바쁘다고 말해 주었던 일을 기억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때 마셀의 영이 해 준 말은 존에게 아들이 없는 삶을 마주할 용기를 심어 주었다.10

리아도 그 확실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전에는 마셀이 영의 세계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우울증에서 헤어날 수 없었지만, 선교 사업은 그녀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리아는 유타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여기서 위대한 대업을 하는 동안 우리 아들도 그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바쁘다는 사실을 아니까 더 큰 열정으로 더 많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마셀의 죽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으나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과 치유를 얻었다.

리아는 이렇게 간증했다. “그런 일을 견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복음뿐이야.” 이제 주님의 치유력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시험을 견뎌 냈고, 주님의 치유의 힘은 효과가 있어.”11


1929년 3월 말, 브라질 조인빌리에 있는 베르타와 페르디난트 셀의 집으로 비바람이 거세게 들이쳤다. 베르타로서는 최악의 시기에 찾아온 폭풍이었다. 독일인 이민자 2세였던 그녀와 페르디난트는 도시 주변에서 우유를 팔며 일곱 자녀를 부양했다. 페르디난트가 사고를 당해 고객들에게 우유를 배달할 수 없게 되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배달 일은 베르타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천식을 앓고 있었지만그렇다고 배달을 안 할 수는 없었다.12

이날 베르타는 악천후 속에서 몇 시간을 걸으며 계속 배달을 다녔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시야에 탁자 위에 놓인 신문 조각이 들어왔다. 베르타가 신문을 집어들고 물었다. “이 신문은 어디서 난 거예요?” 가족들 모두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신문 조각에는 그날 밤 조인빌리에서 열릴 후기 성도 모임에 관한 광고가 실려 있었다. “정말 특이하네! 이런 교회는 생전 처음 들어 봐요.”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그곳에 초대받은 거예요.”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관심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 뭘 하자구요?”

남편의 반문에도 베르타는 같이 가자며 고집했다.

“당신 피곤하잖아요.” 남편이 대답했다. “당신은 오늘 이미 너무 많이 걸었으니까 거긴 안 가는 게 좋겠어요.” 그들은 베르타의 건강 상태도 생각해야만 했다. 베르타가 모임에 가려고 무리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난 가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무언가가 내가 가야 한다고 속삭여요.”13

결국 페르디난트는 아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와 베르타는 자녀 몇 명과 함께 시내로 걸어갔다. 그날 내린 비로 거리는 진창이 되었지만, 이 가족은 제시간에 모임에 도착해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선교사 에밀 쉰들러와 윌리엄 하인츠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장로들은 반 년 전에 라인홀트 스투프 회장과 함께 조인빌리로 왔었으며, 스투프 회장은 이 도시에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브라질로 다시 왔었다.

마을의 일부 목사들은 사람들을 선교사들에게서 돌아서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선교사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전도용 소책자를 배포하고 교회에 대해 보여 주는 인기 좋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 주었다. 선교사들은 이제 40명 가량의 학생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저녁 모임과 주일학교를 열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인빌리에서 교회에 가입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14

모임이 끝나자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말한 뒤, 모두들 회관을 나갔다. 그때, 밖으로 나오던 베르타가 갑자기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페르디난트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가서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에밀과 윌리엄은 즉시 달려와 베르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베르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신권 축복을 주었다. 베르타는 곧 회복되어 웃는 얼굴로 밖으로 걸어서 나갔다.

베르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어. 이제 난 괜찮아.”15

선교사들은 베르타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베르타는 곧바로 이웃들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다. “이것만은 확실해.” 그녀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곳이 참된 교회야.” 베르타는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베르타는 선교사들을 찾아내어 지금 자신과 아이들에게 침례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로들은 그 후로 2주 동안 그 가족을 방문하며 회복된 복음을 계속해서 가르쳤다. 페르디난트와 장녀 아니타는 당시 교회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4월 14일에 베르타와 네 명의 아이들인 테어도어, 앨리스, 시그프리드, 아델은 근처 카쇼에이라강에서 에밀과 윌리엄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브라질에서 침례를 받은 최초의 후기 성도들이었다.

곧 베르타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베르타와 함께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지부가 조인빌리에 설립되었다.16


브라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는 작은 벽돌 예배당이 매물로 나왔는데, 그곳은 장로교회가 1929년 초에 내놓은 곳이었다. 약 70년이 된 이 건물은 시내 북쪽 끝 샛길에 있었다. 비록 도시의 다른 교회나 회당처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아치형 입구, 화려한 탑, 그리고 거리를 향하고 있는 몇 개의 커다란 창문이 있는 건물이었다.17

이 예배당은 신시내티 지부 회장인 찰스 앤더슨과 그의 보좌들인 크리스티안 방, 앨빈 길리엄의 눈길을 끌었다. 교회의 많은 지부 회장들처럼, 찰스는 오랫동안 회원들을 위한 상설 집회소를 찾고 싶어 했다. 당시 교회 전체에 걸쳐 와드 및 지부 지도자들은 현대식 난방, 실내 배관, 전등을 갖춘 집회소를 짓거나 구입하기를 열망했다. 찰스는 신시내티 지부가 수년간 모임을 했던 모든 오래된 상점과 다른 임차 회관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성도들을 위한 임시 건물에 불과했다. 조만간 지부 규모가 너무 커지거나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면 성도들은 다른 모임 장소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18

그렇게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는 일이었다. 찰스는 항상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좋고 가장 훌륭한 회관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수년 동안 교회는 그 도시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일부 사람들은 후기 성도들에게 임대를 주는 것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찰스와 지부 회원들은 거리 집회를 열고, 무료 연주회와 연극을 개최하고, 사람들을 일요일 예배 모임에 초대하는 등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덕에 새로운 회관을 찾는 일은 조금 더 수월해졌다. 그러나 이곳저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은 성도들이 그 도시에서 개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방해가 되었다.

이 문제를 알게 된 현지 선교부 회장은 찰스에게 신시내티 성도들을 위한 상설 예배당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지부 회원 수는 현재 70명 안팎으로,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자란 젊은 노동자 계층의 여성과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다수가 가족 중 유일한 회원이었다. 지부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신권 정원회, 상호부조회, 주일학교, 초등회, 상호향상회 등을 운영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용 건물이었다.19

찰스와 보좌들이 장로교 예배당에 대한 매입 제의를 하자, 선교부 회장이 신시내티에 와서 그 건물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는 매입을 승인했고, 찰스와 협력하며 건물 취득과 보수에 필요한 자금을 교회 본부로부터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20

한편 일부 장로교 목사들은 후기 성도들이 그 예배당을 매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과거 신시내티의 장로교 교인들은 교회를 비판하고 평판을 떨어뜨리는 활동에 가담했었다. 그런데 그 신도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예배당을 성도들에게 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신시내티에서 영향력 있는 몇몇 장로교 신자들은 예배당이 예배 장소로 계속 사용된다는 데에 만족하며 매매를 지지했다. 하지만 목사들은 성도들이 예배당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한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찰스에게 장로교회가 자신들의 예배당을 후기 성도들에게 팔았다는 내용이 공공 기록에 드러나지 않도록 중개인을 통해 거래를 완료하라고 요청했다. 찰스는 그러한 요구에 감정이 상했지만, 결국 건물을 한 변호사에게 먼저 이전시킨 다음 교회로 이전하도록 조처했다.21

봄은 곧 여름으로 바뀌었고, 지부 회원들은 건물 보수가 끝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예배당 헌납식은 성대한 행사가 될 것 같았다. 몇 달 후면, 신시내티 성도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소유라 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길 것이었다.22


한편, 독일 북동부 틸지트에 사는 45세의 오토 슐츠케는 유럽 대륙에서 부름받은 몇 안 되는 현지 지부 회장 중 한 명이었다.

오토는 키가 작고, 감옥에서 근무했으며, 근엄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23 지부 회장 부름을 받기 약 한 달 전인 그해 초, 그는 상호향상회 공과 중 너무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지부 회원 절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몇몇 사람은 울면서 모임을 떠났고, 몇몇은 그에게 빈정거리는 태도로 응수했다. 당시 지부를 이끌던 선교사들은 그에게 짜증이 난 눈치였다.

사실, 선교사들은 다른 도시로 이동 가기 전에 오토가 지부 회장이 되는 것에 대해 걱정했었다.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서로 그렇게 입을 모았다.24

하지만 장로들은 나이가 많고 경험도 풍부한 그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의 가족은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로 지역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수년 전,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츠케는 “몰몬” 선교사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이 언제나 자신의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몰몬” 선교사들이 자신의 집 문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빗자루를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프리드리히는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선교사라 소개하는 두 명의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를 모임에 초대했는데, 그는 자신이 들은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아 장로들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가르침을 전해 달라며 청했다. 선교사들이 도착했을 때, 프리드리히는 한 선교사의 손에 몰몬경이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는 이 선교사들이 자신이 피하고 싶어 한 바로 그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선교사들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두었으며, 곧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 년 후,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내 아나는 교회에 가입했다. 오토와 그의 형제자매 중 몇 명도 곧 부모의 모범을 따랐다.25

1914년에 전쟁이 시작되고 선교사들이 그 지역을 떠난 후, 프리드리히가 새로운 지부 회장이 되었다. 그는 비록 멜기세덱 신권은 없었지만 부름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냈다. 지부 회원들은 그의 집에 모여 함께 복음을 공부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것들에 대해 배웠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책임이 힘겹게 여겨질 때마다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다.26

오토 또한 전쟁 직후에 한 차례 지부 회장으로 봉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틸지트 지부는 여전히 전쟁의 참화에서 회복되는 중이었으며, 많은 사람이 교회와 떨어져 표류하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성격의 오토는 분명 지부를 되살릴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난국을 잘 대처해 나갔다. 그가 지부 회장으로 봉사한 첫 해 동안만 23명이 틸지트에서 교회에 들어왔다.27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선교사들이 돌아와 대부분의 지부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오토가 처음으로 맡아서 했던 지부 회장 경험도 끝이 나고 말았다. 이제, 윗소 장로는 유럽에 있는 지부들이 더욱 자립하고 지부 운영을 스스로 해 나가기를 바랐고, 이에 따라 지도자 부름은 오토와 현지의 다른 성도들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28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틸지트의 성도들이 과거처럼 오토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선교사들이 예상한 대로 그를 지지하지 않을까?

지부에는 많은 충실한 성도들이 있었고, 매주 60명 안팎의 회원들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그들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열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젊은 선교사들이 지부를 이끌었기 때문에 그들은 엄격하고 나이가 많으며 그냥 하는 말도 쉬 넘어가는 법이 없는 오토를 잘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오토는 지부 회장으로서 성도들이 복음대로 생활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29

  1. Reinhold Stoof to First Presidency, Nov. 2, 1927; Dec. 13, 1927,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Grover, “Sprechen Sie Portugiesisch?,” 116–17; Sharp, Oral History Interview, 7–8, 10.

  2.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June 16, 1926; Reinhold Stoof to First Presidency, Nov. 2, 1927; Nov. 16, 1927,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Grover, “Sprechen Sie Portugiesisch?,” 118–19, 125–27.

  3. Reinhold Stoof to First Presidency, Nov. 2, 1927; Jan. 24, 1928,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Grover, “Sprechen Sie Portugiesisch?,” 120.

  4. South Amer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volume 1, Feb. 29, 1928; Reinhold Stoof to First Presidency, Jan. 24, 1928,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Stoddard, Oral History Interview, 19–20; Grover, “Sprechen Sie Portugiesisch?,” 120. 주제: Argentina[아르헨티나]; Brazil[브라질]

  5. Widtsoe, Diary, Dec. 23, 1927–Jan. 14, 1928; John A. Widtsoe to Heber J. Grant, Jan. 18, 1928,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Leah Dunford Widtsoe to [Louisa] Hill, May 11, 1928; Leah Dunford Widtsoe to Mary Booth Talmage, Oct. 30, 1929; Leah Dunford Widtsoe to Libby Ivins, Nov. 1, 1929, Widtsoe Family Papers, CHL.

  6. Presiding Bishopric, Financial, Statistical, and Historical Reports for Stakes and Missions, volume 10, 1927; John A. Widtsoe to First Presidency, May 1, 1928,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Alexander, Mormonism in Transition, 243.

  7. John A. Widtsoe to First Presidency, Feb. 28, 1928; July 2, 1928,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주제: 이주

  8. Missionary Department, Missionary Registers, 1860–1925; John A. Widtsoe to First Presidency, Feb. 28, 1928; Oct. 16, 1928; Oct. 16, 1929; Aug. 24, 1932,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9. Leah Dunford Widtsoe, “Greeting to the Sisters,” Latter-day Saints’ Millennial Star, Jan. 5, 1928, 90:10–11; “Book of Mormon Studies,” Latter-day Saints’ Millennial Star, Jan. 12, 1928, 90:22–23; Leah Dunford Widtsoe to Brother Morton, June 26, 1928, Widtsoe Family Papers, CHL; 교리와 성약 97:21. 주제: 시온/새 예루살렘

  10. Widtsoe, Diary, Jan. 28–29, 1928; John A. Widtsoe to Heber J. Grant, Oct. 17, 1927,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CHL; Leah Dunford Widtsoe to [Louisa] Hill, May 11, 1928, Widtsoe Family Papers, CHL.

  11. John A. Widtsoe to Heber J. Grant, Oct. 17, 1927,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CHL; Leah Dunford Widtsoe to [Louisa] Hill, May 11, 1928, Widtsoe Family Papers, CHL. 주제: John and Leah Widtsoe[존과 리아 윗소]

  12. Sell, Transcrito, 1; Brazilian Mission, History of Mission Work, [9b]; Sell, Oral History Interview, 1.

  13. Sell, Transcrito, 1; Sell, Oral History Interview, 1.

  14. Sell, Transcrito, 1; Brazilian Mission, History of Mission Work, 2–[9b]; Sell, Oral History Interview, 1–2.

  15. Sell, Oral History Interview, 2; Brazilian Mission, History of Mission Work, [9b].

  16. Sell, Oral History Interview, 2–4; Sell, Transcrito, 1; Brazilian Mission, History of Mission Work, [9b], 21. 주제: Brazil[브라질]

  17. Cincinnati Branch, Minutes, Mar. 29, 1929, 2; Fish, Kramer, and Wallis, History of the Mormon Church in Cincinnati, 55; One Hundred Years of Presbyterianism, 182; “Joseph Smith’s Prophecy of Mormon Church in Cincinnati,” Commercial Tribune (Cincinnati), Sept. 16, 1929, [1].

  18. Cincinnati Branch, Minutes, Mar. 29, 1929, 1–2; Anderson, “My Journey through Life,” volume 4, 118, 124; Jackson, Places of Worship, 175, 189, 205; see also Fish, “My Life Story,” [2].

  19. Anderson, “My Journey through Life,” volume 4, 122–23, 126–30, 133; Cincinnati Branch member entries, South Ohio District, Northern States Mission, in Ohio (State), part 2,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Williams’ Cincinnati Directory [1927–28]; Fish, “My Life Story,” [6]; Paul Bang, “My Life Story,” 7, 10.

  20. Cincinnati Branch, Minutes, Apr. 1929, 3; Noah S. Pond to Heber J. Grant, Apr. 16, 1929; Heber J. Grant to Noah S. Pond, Apr. 16, 1929; Charles V. Anderson to Heber J. Grant, Apr. 16, 1929; Heber J. Grant to Charles V. Anderson, Apr. 17, 1929,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21. Cincinnati Branch, Minutes, Apr.–June 1929, 3; Anderson, “My Journey through Life,” volume 4, 134; see also, for example, “Changes in Law of the Land,” Cincinnati Enquirer, Feb. 3, 1915, 10; “To Talk on Mormonism,” Commercial Tribune (Cincinnati), Mar. 10, 1916, 10; and “Antimormon Meeting,” Commercial Tribune, May 4, 1916, 10.

  22. “News from the Missions,” Liahona, the Elders’ Journal, May 14, 1929, 26:574.

  23. German-Austri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May 31, 1929;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58;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35; Clayson, Oral History Interview, 4. 독일 틸지트라는 마을은 현 러시아의 소베츠크이다. 주제: Russia[러시아]

  24. German-Austri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May 31, 1929; Melvin O. Allen, Journal, Mar. 10 and Apr. 17, 1929; Worlton, Journal, Apr. 17, 1929.

  25. Obituary for Friedrich W. Schulzke, Der Stern, Feb. 15, 1937, 69:60–61; Schulzke, “Story of Friedrich Schulzke,” 13–14; Schulzke family entries, Tilsit Branch, Königsberg Conference, Swiss-German Mission, in Germany (Country), part 30,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26. Obituary for Friedrich W. Schulzke, Der Stern, Feb. 15, 1937, 69:60–61; Schulzke, “Story of Friedrich Schulzke,” 15–16; see also Parshall, “Friedrich Schulzke,” [2].

  27. German-Austrian Mission, Branch Histories, 137–38; Tilsit Branch,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1914–20.

  28. Tilsit Branch,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1921–23; see also, for example, German-Austri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volume 1, May 31, 1929; July 31, 1929; Dec. 31, 1929.

  29. Naujoks and Eldredge, Shades of Gray, 29, 35; German-Austrian Mission, Branch Histories, 138; Meyer and Galli, Under a Leafless Tree, 58; George H. Neuenschwander to Genevieve Bramwell, Sept. 16, 1931, George H. Neuenschwander Correspondence, CHL; Clayson, Oral History Interview, 4. 주제: Germany[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