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6장: 하늘에도 기록되어


“하늘에도 기록되어”,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16장

제16장: “하늘에도 기록되어”

제 16 장

하늘에도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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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의 도토리와 잎사귀

남동생 에른스트 비베르스도르프가 후기 성도인 직장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나 쿨릭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의 믿음은 아나와 에른스트가 1920년대 초에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하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독일에서 꾸었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신앙심이 깊은 여성인 루이스 비베르스도르프는 꿈에서 아름다운 한 장소를 보았다. 그녀는 비록 그곳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두 자녀를 통해 언젠가는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꿈에서 그녀는 참된 교회가 미국에서부터 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

아나와 에른스트는 곧 빌헬름 프리드리히와 에밀 호페라는 이름을 가진 에른스트의 친구들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후기 성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21851년에 팔리 프랫이 칠레에서 짧게 선교 사업을 한 이후로, 교회는 남미에 선교사들을 거의 보내지 않았으며, 그 대륙에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존재했던 적도 없었다. 빌헬름과 에밀의 가족은 사실 독일에서 교회에 가입했었다. 그들과 아나와 에른스트의 가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독일인들은 최근의 세계 대전으로 야기된 불경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을 때 교회의 가르침도 그들을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들어오게 되었다.3

성도들은 일요일마다 빌헬름이 사는 집의 작은 방에서 모임을 했다. 빌헬름과 에밀 둘 다 성찬을 축복할 신권 권세가 없었기 때문에 그 모임은 주로 경전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르간이 없는 그들은 빌헬름의 아들이 연주하는 만돌린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불렀다. 성도들은 또한 목요일 저녁 7시에는 에밀의 집에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그들은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주일학교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에는 제임스 이 탈매지의 독일어판 『신앙개조』를 공부했다. 곧 아나는 십일조를 냈고, 빌헬름은 그것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 본부로 보냈다.

빌헬름은 회복된 복음을 나누고 싶은 열망에 전도용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현지에서 발행되는 독일어 신문에 교회 모임에 대한 광고도 냈다. 그는 또한 다양한 복음 주제에 관해 기사를 쓰고 강연을 했다. 빌헬름은 아르헨티나의 주요 언어인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기에 그의 노력에는 한계가 따랐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성도들에 대해 무언가를 읽고 호기심을 느낀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의 집 문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4

1925년 봄에 아나는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내가 교회 모임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남편 야콥도 곧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십 대인 그들의 세 자녀도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나의 동생 에른스트와 그의 아내 마리도 교회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는 그 의식을 집행할 권세가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교회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복음을 믿는 이들은 도시 내의 세 장소에서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앙은 빌헬름에게 영감을 주었다. 빌헬름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그들은 이 일이 참되다는 간증이 있으며, 기회가 되는 대로 빨리 침례를 받고 싶어 합니다.”5

곧 교회의 감리 감독인 실베스터 큐 캐넌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저희는 아르헨티나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제일회장단과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우리는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적합한 남성들을 찾고 있습니다.”6

아나와 에른스트의 가족은 이 소식에서 희망을 얻었다. 곧 모든 사람은 언제 자신들의 나라에 선교사가 올 수 있을지 알고 싶어했다.7


이 무렵, 많은 백인 미국인들은 자국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점점 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은 차별을 피하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미국 북부 도시로 이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많은 노동자 계층의 백인들을 불안하게 했다. 분노가 커지자, 비밀주의와 폭력을 사용하여 흑인과 소수 민족에게 잔혹 행위를 하던 큐 클럭스 클랜[KKK단]과 같은 증오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단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8

히버 제이 그랜트는 증오 집단들이 확산되는 것을 대경실색하며 지켜보았다. 수십 년 전에 선교사들은 미국 남부에서 종종 KKK 단원들에게 폭행을 당했었다. 이제 성도들은 그런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KKK단의 행보에 대한 최근의 보도는 그에 못지않게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1924년에 남부 주 선교부 회장은 그랜트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 조직이 저지른 채찍질, 살인, 집단 폭행의 수가 남부 역사에 슬픈 한 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은 없었습니다. 남부를 휩쓴 무법과 폭력의 기운은 개다이앤톤 도적들을 고무시킨 것과 똑같습니다.”9

1920년대에 걸쳐 증오 단체들은 널리 퍼진 인종 차별주의를 동력 삼아 세력을 확장했다. 인종 차별주의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896년에 미국 대법원은 학교, 교회, 화장실, 철도 차량, 기타 공공 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을 허용하는 주 정부의 법이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게다가, 인기 소설과 영화는 흑인과 다른 인종, 민족, 종교 집단을 해로운 이미지로 정형화하며 그들을 비하했다. 미국이나 그 외 국가들에서 흑인과 백인이 사회적으로 어울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0

교회의 와드와 지부는 공식적으로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 그러나 모든 회중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에 흑인 후기 성도인 마리와 윌리엄 그레이브스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들의 지부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회원들에 완전히 융화되었다. 그러나 미국 남부에 있는 한 지부를 방문했을 때, 마리는 피부색을 이유로 그곳을 떠나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리는 그랜트 회장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평생 그렇게 상처를 받은 적은 없었어요.”11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위해 지상을 준비하려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회복된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수십 년 동안 성도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태평양 제도 주민,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을 포함한 유색인종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전파해 왔다. 그러나 인종 차별을 포함한 수백 년 된 장애물들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리 그레이브스의 경우, 제일회장단은 남부에 있는 것과 같은 인종간의 관례에 도전했다가는 흑인 성도와 백인 성도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고 우려하여 회중에게 서로 어울려 지내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교회는 아프리카 혈통의 사람들에게 신권 성임과 성전 축복을 제한했으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흑인 지역 사회에서 활발하게 전도하는 것도 장려하지 않았다.12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이 관행에 대한 예외 사항을 모색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장로는 태평양 제도를 방문하던 당시 그랜트 회장에게 폴리네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교회 안에서 대가족을 함께 이룬 흑인 후기 성도에게 예외 사항을 적용할 수 있을지 문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대한 그랜트 회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데이비드 형제님, 저도 형제님만큼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문제에 관해 계시를 주실 때까지 우리는 교회의 정책을 유지해야 합니다.”13

1900년대 초반부터 교회 지도자들은 아무리 적은 수라도 아프리카 흑인 조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성도는 제한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종 정체성이 불확실한 면이 있는 일부 성도들에게는 이 제한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못하는 사례도 생겨 났다.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아들인 넬슨 리치는 아내인 백인 여성 애니와 함께 유타에서 교회에 가입했을 당시 부모의 내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는 피부색이 밝았으며 그의 자녀 중 다수는 백인으로 여겨졌다 딸 중 두 명이 결혼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엔다우먼트와 인봉 의식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넬슨과 애니가 성전에서 인봉되고 싶어 했을 때, 그들의 감독은 넬슨에게 조상에 대해 질문했다. 넬슨은 부모에 대해 아는 것을 이야기했다. 감독은 이 사례를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에 문의했고, 그들은 감독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그 사안을 돌려보냈다. 결국 감독은 넬슨과 애니가 훌륭한 후기 성도임을 단언하면서도 넬슨의 조상을 이유로 성전 추천서 발급을 거부했다.14

비록 많은 성도들은 그 시대의 인종적 편견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타인을 억압하기 위해 비밀주의와 무법, 폭력을 사용하는 단체들에 반대했다. 1920년대 초에 KKK단이 유타로 확산되자 그랜트 회장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연차 대회에서 그 단체를 규탄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세력을 저지했다. 그 단체에 가입한 교회 회원은 거의 없었다. KKK단의 지도자가 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요청했을 때에도 그랜트 회장은 거절했다.15

1925년 4월에 선지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신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KKK단과 한패가 되고 싶어 하겠는가?”16


1925년 중반, 미국 남부에서 법정에 선 고등학교 과학 교사 존 스코프스의 사건이 히버 제이 그랜트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고 가르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17

스코프스의 재판은 기독교 교회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일부 “현대주의자”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과학적 질문의 근거가 되는 출처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과학이 자연계를 이해하는 데 좀 더 신뢰할 만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스코프스와 같은 교사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로 여겼다.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인 인류가 덜 정교한 생명체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에겐 신성 모독이었다.18

히버는 현대 과학을 대단히 중시했고, 사도 제임스 이 탈매지와 존 윗소 같은 과학자들을 매우 존경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뛰어난 과학자이면서도 회복된 복음에 대한 신앙을 유지했다. 히버 역시 그들처럼 경전 밖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개방적이었으며, 과학과 종교가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19

하지만 히버는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다 신앙을 저버린 젊은 후기 성도들이 걱정되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몰몬경을 믿는다는 이유로 한 과학자에게 조롱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 과학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멸망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널리 들렸다는 제3니파이의 구절을 지적했다. 그는 음성이 그렇게 멀리까지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모두 바보라고 말했다. 몇 년 후, 라디오의 발명으로 음성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히버는 진실이 입증되었음을 깨달았다.20

스코프스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히버와 그의 보좌들은 1909년에 제일회장단이 출판한 에세이 “인간의 기원[The Origin of Man]”의 축약본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21 이 에세이는 근본주의자들처럼 진화론의 가르침을 비난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언했다. 이 에세이는 또한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의 자녀로 살았으며, 이 영의 아들딸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했다는 독특한 회복의 교리를 공표했다.

제일회장단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인간은 하늘 부모에게서 잉태되어 영으로 태어났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집에서 양육을 받아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그 성명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어나는 또 다른 종류의 변화, 즉 멀리 미래를 내다보는 변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지상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어린아이가 때가 되면 성인이 되는 것처럼, 하늘 부모의 미성숙한 자녀들도 영겁의 세월에 걸쳐 경험을 통해 하나님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22

제일회장단이 이 성명서를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스코프스 재판 배심원단은 평결을 내렸다. 존 스코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100달러의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23 판결 후에 히버는 진화에 대한 교회의 견해를 밝혀 달라는 서면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들에게 제일회장단의 성명서 사본을 보냈다. 히버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예수께서 산상수훈으로 가르치셨듯이 진리는 그 열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24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에 사는 렌 호프는 열일곱 살 때 집 근처에서 열린 침례교 부흥회에 2주에 걸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이 흑인 소년은 밤마다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목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렌은 종교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간청했지만, 아침이 되면 오직 이슬에 젖은 옷만이 자신의 수고를 증명해 줄 뿐이었다.

1년 후, 렌은 그 지역의 한 교회에서 침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꿈을 꾸었다. 렌은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이 읽어서 친구들은 그를 걱정했다. “그렇게 많이 읽는 걸 중단하지 않으면 넌 미쳐 버릴 거야.” 친구들의 말이었다. “정신 병원은 이미 설교자들로 가득 차 있다구.”

그럼에도 렌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렌은 성신이 자신을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설교자의 조언에 따라 그는 숲으로 들어갔고, 뒤엉킨 덤불 속에 숨겨져 있던 오래된 빈집에서 기도를 드렸다. 거기서 렌은 몇 시간 동안 울면서 하나님께 성신을 간구했다. 아침에 그는 그 은사를 받을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영은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세를 지닌 사람만이 그에게 성신을 부여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렌이 자신이 수없이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렌의 누이는 한 후기 성도 선교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소책자를 받게 되었다. 렌은 그 책을 읽었고, 그 내용을 믿었다. 렌은 또한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신의 은사를 부여할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장로들을 찾아내어 자신에게 침례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네, 기꺼이요.” 선교사 중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저라면 더 많은 자료를 읽어 보겠습니다.”25

렌은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 및 기타 교회 서적들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하지만 미처 침례를 받기도 전에 렌은 군에 징집되어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렌은 국외로 파병되어 전선에서 용감하게 복무했다. 그리고 앨라배마로 돌아온 뒤, 1919년 6월 22일에 현지 교회 회원에게서 침례를 받고 마침내 성신의 은사를 받았다.26

렌이 침례를 받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백인 폭도들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와서 그를 불러냈다. “우린 단지 너와 얘기를 좀 하고 싶을 뿐이야.” 그들의 손에는 소총과 엽총이 들려 있었다.

렌은 밖으로 나갔다. 렌은 미국 남부에 사는 흑인 남성이었다. 미국 남부에서는 무장 폭력단이 폭력으로 인종 분리를 강요하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렌을 해하거나 죽일 수 있었고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결코 책임을 지지 않을 자들이었다.27

무리 중 하나가 렌에게 후기 성도 교회에 가입한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했다. 앨라배마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합법이었지만, 공공 장소에서 인종을 분리하는 엄격한 인종 분리법과 불문율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앨라배마의 거의 모든 후기 성도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이 폭도들은 렌의 침례를 그 지역에 확립된 흑인 차별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28

“그러니까, 너도 바다 건너로 가서 뭔가 보고 배워 온 게 있나 본데.” 그는 렌의 군 복무를 들먹이며 말했다. “이제 너도 백인 사회에 들어오고 싶다는 거군.”

“저는 전쟁에 나가기 훨씬 전부터 우리 교회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교회가 지상에서 유일하게 참된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교회에 가입한 겁니다.”

“우린 네가 가서 기록에서 네 이름을 삭제하길 바란다.” 그들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널 나뭇가지에 매달고 총을 쏘아 벌집으로 만들어 놓겠어.”29

이튿날 아침, 렌은 그 지역에서 열린 동료 성도들의 대회에 참석해서 폭도들의 위협에 대해 말했다. 그는 모임에 참석함으로 인해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새로 알게 된 종교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렌 형제님, 우리가 형제님의 이름을 지우려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회원들은 렌을 안심시켰다. “형제님의 이름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고, 하늘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폭도들이 다시 렌을 추적한다면 그를 돕겠다고 말했다.30

하지만 폭도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렌은 1920년에 메리 푸라는 여성과 결혼한 후, 앨라배마 중심부에 있는 큰 도시인 버밍햄으로 이사했다. 침례교 목사인 메리의 삼촌은 그해가 가기 전에 메리가 후기 성도 교회에 가입하리라고 예견했다.

메리는 몰몬경을 읽고 그 책의 진리에 대한 간증을 얻었다. 예상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혼한 지 5년 후에 그녀는 교회에 들어오기로 결심했다. 1925년 9월 15일, 호프 부부는 두 명의 선교사와 함께 버밍햄 근처의 한적한 샘으로 갔다. 메리는 아무런 사고 없이 침례를 받고 마침내 남편처럼 후기 성도가 되었다.31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요.” 그녀는 삼촌에게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교회는 없어요.”32


한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아나 쿨릭과 그녀의 가족이 그 도시를 방문한 사도 멜빈 제이 밸라드와 그의 동반자들인 칠십인 정원회의 레이 엘 프랫과 룰론 에스 웰스를 기쁘게 맞이했다. 제일회장단은 선교 사업을 위해 남미를 헌납하고, 교회의 지부를 설립하며, 그 도시 주민들에게 독일어와 스페인어로 복음을 전하도록 세 명의 총관리 역원을 아르헨티나로 보냈다. 쿨릭 가족은 여러 달 동안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남미 대륙에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그들에게 침례를 줄 합당한 권세를 지닌 사람은 오직 그 선교사들뿐이었다.33

웰스 장로는 독일어를 잘했고, 프랫 장로는 스페인어가 유창했다. 하지만 밸라드 장로는 두 언어를 모두 할 줄 모르는 데다 자신이 처한 새로운 환경에 압도당한 듯 보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언어와 따뜻한 12월의 공기, 남쪽 하늘의 별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생소했다.34

이 선교사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독일 성도들을 방문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의 첫 날을 보냈다. 그들은 빌헬름 프리드리히의 집에서 모임을 하고 에밀 호페의 집에서 열린 몰몬경 수업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1925년 12월 12일, 그들은 아나, 야콥, 그리고 그 부부의 열여섯 살 난 딸 헤르타에게 침례를 주었다. 아나의 남동생 에른스트와 그의 아내 마리, 빌헬름 프리드리히의 양녀 엘리사 플라스만도 침례를 받았다. 그다음 날, 선교사들은 빌헬름과 에밀을 제사로, 야콥과 에른스트를 집사로 성임했다.35

2주 후 성탄절 아침에 그들은 넓은 초록 잔디밭과 푸른 호수, 고요한 수양버들 숲이 있는 그 도시의 유명한 공원인 팔레르모 공원으로 갔다. 그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찬송가를 부른 뒤 고개를 숙였고, 밸라드 장로가 주님의 일을 위해 그 대륙을 헌납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열쇠를 돌려 남미의 모든 국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열고 이 땅에서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게 멈출 것을 명하노라.”36

남미 선교부가 공식적으로 문을 열자, 선교사와 회원들은 이웃과 복음을 나누기 위해 함께 일했다. 스페인어를 아는 헤르타 쿨릭은 이따금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편 밸라드 장로와 프랫 장로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용 소책자를 나눠 주고 사람들을 교회 모임에 초대했다. 그건 힘이 드는 일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날씨가 어떻든 간에 광활한 들판을, 혹은 흙탕길을 가로질러 자주 먼 거리를 가야 했다.37

1926년 1월에 웰스 장로가 건강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 헤르타가 밸라드 장로와 프랫 장로가 독일 성도들과 대화하도록 도와주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밸라드 장로가 성도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영어로 준비하면, 프랫 장로는 그것을 스페인어로 번역했고, 헤르타는 스페인어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것은 복잡하고 때로는 우습기도 한 과정이었지만, 선교사들은 그녀의 도움에 고마워했다.38

선교사들은 종종 모임 중에 미국에서 가져온 영사기를 틀어 슬라이드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헤르타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을 그런 모임에 초대했다. 곧, 세를 내어 쓰던 성도들의 집회소에 대부분이 스페인어 사용자인 약 백 명의 청소년들이 나타났다. 장로들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일학교를 조직했다.39

자녀가 무얼 배우는지 궁금해하던 청소년들의 부모들도 성도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한 모임에서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복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고 프랫 장로가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르치는 것을 듣기 위해 그 집회소에 모인 적도 있었다.40

밸라드 장로, 프랫 장로, 웰스 장로가 오고 6개월이 지난 후, 전임 선교부 회장과 두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그들 대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신임 회장인 라인홀트 스투프와 그의 아내 엘라는 불과 몇 년 전에 독일에서 교회에 가입한 이들이었다. 선교사 중 한 명인 제이 버논 샤프는 스페인어를 구사했으므로, 이제 남미 사람들은 독일어를 쓰든 스페인어를 쓰든 모두 자신의 언어로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교부에서 최초로 스페인어를 쓰는 개종자가 나왔다. 그 개종자의 이름은 엘라디아 시푸엔테스였다.41

밸라드 장로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926년 7월 4일에 작은 무리의 아르헨티나 성도들에게 간증을 전했다. “도토리가 서서히 참나무로 자라듯이 이 일은 당분간 더디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빨리 자라 시들어 버리는 해바라기처럼 하루아침에 급속도로 성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천 명이 가입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이곳은 한 개 이상의 선교부로 나뉠 것이며, 교회에서 가장 강한 지역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42

  1. Kullick, “Life of Herta”; Anna Kullick, Hamburg Passenger List, Apr. 20, 1922, 499; Ernst Biebersdorf, Hamburg Passenger List, Mar. 27, 1923, 689, available at ancestry.com. 주제: Argentina[아르헨티나]

  2. Wilhelm Friedrichs to Charles W. Nibley, Dec. 15, 1924; Apr. 15,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3. Palmer and Grover, “Parley P. Pratt’s 1851 Mission to Chile,” 115; Williams and Williams, From Acorn to Oak, 13–15, 17–20; Newton, German Buenos Aires, 75–85. 주제: Chile[칠레]

  4. Wilhelm Friedrichs to Charles Nibley, Mar. 2, 1924; Mar. 5, 1924; May 2, 1924; Dec. 15, 1924; Apr. 15, 1925; Wilhelm Friedrichs to Sylvester Q. Cannon, June 29,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5. Wilhelm Friedrichs to Charles Nibley, Dec. 15, 1924; Apr. 15, 1925; Wilhelm Friedrichs to Sylvester Q. Cannon, June 29,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6. Sylvester Q. Cannon to Wilhelm Friedrichs, June 24,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7. Wilhelm Friedrichs to Sylvester Q. Cannon, June 29,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8. Schrag, Not Fit for Our Society, 70, 123, 144–45; Pegram, “Ku Klux Klan, Labor, and the White Working Class during the 1920s,” 373–96; Smith, Managing White Supremacy, 73–75; Jackson, Ku Klux Klan in the City, 5–23; Higham, Strangers in the Land, 285–99.

  9. Grant, Journal, Feb. 6, 1923; Seferovich, “History of the LDS Southern States Mission,” 122–24; Mason, Mormon Menace, 145–47, 159–60; Charles A. Callis to First Presidency, Jan. 31, 1924; First Presidency to Charles A. Callis, Feb. 5, 1924,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또한 힐라맨서 2:12~13; 6:16~32 참조.

  10. Gerlach, Blazing Crosses in Zion, 1–16; Bornstein, Colors of Zion, 34–39; Thomas, Plessy v. Ferguson, 3–4, 29–31; Jackson, “Race and History in Early American Film,” 27–51; First Presidency to Joseph W. McMurrin, Nov. 23, 1920,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주제: Racial Segregation[인종 분리]

  11. Marie Graves to Heber J. Grant, Nov. 10, 1920,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12. 교리와 성약 58:64; 마가복음 16:15; 『성도들』, 제1권, 제46장; 제2권, 제13장, 제31장, 제32장; First Presidency to Joseph W. McMurrin, Nov. 23, 1920,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13. David O. McKay to Stephen L. Richards and J. Reuben Clark Jr., Jan. 19, 1954, David O. McKay Scrapbook, CHL.

  14. Bush, “Mormonism’s Negro Doctrine,” 37–38; “Ritchie, Nelson Holder,”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Salt Lake Temple Records, Living Sealings Previously Married, Book A, 1893–1902, microfilm 186,213; Salt Lake Temple Records, Sealings for the Living, Book A, 1893–1905, microfilm 186,206, Special Collections, FHL; Nelson H. Ritchie and Annie C. Ritchie, Sugar House Ward, Granite Stake, nos. 483 and 484, in Sugar House Ward, Part 1,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Whitaker, Journal, Dec. 10, 1909. 주제: 신권 및 성전 제한

  15. Gerlach, Blazing Crosses in Zion, 23–53, 55–101, 104–5; Grant, Journal, Mar. 6, 1924.

  16. Grant, Journal, Apr. 4, 1925.

  17. Passing Events,” Improvement Era, Aug. 1925, 28:1013; “William Jennings Bryan,” Improvement Era, Sept. 1925, 28:1092–93.

  18. Larson, Summer for the Gods, 31–59, 112, 116–21, 155, 168, 263;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175–77, 184–85; Numbers, Creationists, 51–68. 주제: Organic Evolution[생물 진화]

  19. Grant, Journal, Apr. 11, 1924; Heber J. Grant to Charles W. Lovett, Aug. 25, 1919, Letterpress Copybook, volume 54, 994; Heber J. Grant to Henry W. Beyers, June 28, 1933,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Heber J. Grant to Fred W. Shibley, Jan. 21, 1930, Letterpress Copybook, volume 67, 646,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20. Grant, Journal, Apr. 11, 1924; 제3니파이 9:1; Heber J. Grant to George T. Odell, Mar. 17, 1925, Letterpress Copybook, volume 63, 8; Heber J. Grant to Eva G. Moss, Nov. 26, 1925, Letterpress Copybook, volume 63, 612, Heber J. Grant Collection, CHL; Heber J. Grant to Earl Foote, Nov. 27, 1925, First Presidency Letterpress Copybooks, volume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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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Larson, Summer for the Gods, 1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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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1–[2]; “Hope, Len,”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26.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1–[2]; “Hope, Len,”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Len Hope entry, Genealogical Record, Alabama Conference, Southern States Mission, 70, in Alabama (State), part 1, segment 1,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John Matthew Tolbert entry, Genealogical Record, Alabama Conference, Southern States Mission, 149, in Alabama (State), part 1, segment 1,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27.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2]; DuRocher, “Violent Masculinity,” 49–60.

  28.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2]; Stephenson, “Short Biography of Len, Sr. and Mary Hope,” [9]; Flynt, Alabama in the Twentieth Century, 227–28, 317–31, 446–49; Feldman, Sense of Place, 12–15, 26–28, 73–76. 주제: Racial Segregation[인종 분리]

  29.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1–[2]; “Hope, Len,”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30.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1–[2]; “Hope, Len,” Biographical Entry,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Joseph Hancock to Gloria Gunn, Dec. 31, 1949, Joseph P. Hancock Mission Letters and Autobiography, CHL.

  31. Joseph Hancock to Gloria Gunn, Dec. 31, 1949, Joseph P. Hancock Mission Letters and Autobiography, CHL;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2], [3]; “Hope, Len,” and “Hope, Mary Lee Pugh,” Biographical Entries, Century of Black Mormons website, exhibits.lib.utah.edu; Stephenson, “Short Biography of Len, Sr. and Mary Hope,” [9].

  32. Testimony of Len R. Hope and Mary Hope, [3].  

  33. Rey L. Pratt, Diary, Dec. 6, 1925;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Jan. 26,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5; Wilhelm Friedrichs to Sylvester Q. Cannon, June 29, 1925, Argentine Mission Correspondence, CHL.

  34.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Jan. 26,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5.

  35.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Dec. 15, 1925,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Rey L. Pratt, Diary, Dec. 10, 1925; South American Mission Index, in South Amer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1]–7; South Amer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Dec. 13, 1925, [17].

  36. “Dedicatorial Prayer, Dedicating the Lands of South America to the Preaching of the Gospel,”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Melvin J. Ballard, “Prayer Dedicating the Lands of South America to the Preaching of the Gospel,” Improvement Era, Apr. 1926, 29:575–77.

  37.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Dec. 15, 1925; Mar. 15,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5–36; “The Missions: The Sunday School in South America,” Instructor, Dec. 1939, 74:539; “Elder Ballard Dedicated South American Nations,” South American Mission, Manuscript History, [19].

  38.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4–36; Rey L. Pratt, Diary, Jan. 1–2, 3, and 14, 1926; Rey L. Pratt to Family, Feb. 8, 1926, Rey L. Pratt Papers, CHL.

  39. Rey L. Pratt to Family, Feb. 14, 1926, Rey L. Pratt Papers, CHL; “The Missions: The Sunday School in South America,” Instructor, Dec. 1939, 74:539;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Mar. 22,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40.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6;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Mar. 1,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41. First Presidency to Melvin J. Ballard, Mar. 23, 1926; Melvin J. Ballard to First Presidency, Mar. 22, 1926; June 16, 1926, First Presidency Mission Files, CHL; Curbelo, History of the Mormons in Argentina, 38–39; Williams and Williams, From Acorn to Oak Tree, 29; Melvin J. Ballard, in Nine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37.

  42. Sharp, Oral History Interview, 10; see also Sharp, Autobiography, 48; and Sharp, Journal, July 4, 1926, and index card inserted in journal. 주제: Argentina[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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