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의도로”, 『성도들: 후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이야기, 제3권,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1893~1955년』(2022)
제37장: “진정한 의도로”
제37장
진정한 의도로
1953년 3월, 동독 베른부르크에 사는 스물한 살의 잉아 리만은 집 문을 나섰다. 바깥 공기는 쌀쌀했다. 잉아는 부모님이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 안다면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거란 걸 알았다. 새로운 교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끔찍한 일이었는데, 잉아가 차가운 잘레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겠는가? 잉아는 결핵 후유증으로 여전히 몸이 허약해서 잉아의 부모는 딸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렇지만 잉아는 단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년 동안 베른부르크 지부의 후기 성도들을 만나왔고,이날은 드디어 잉아가 침례를 받는 날이었다.
잉아가 침례식을 준비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모였을 무렵에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잉아는 그들 중 한 명을 알아보았는데, 그는 2년 전 베른부르크 지부에서 봉사한 선교사 헨리 부르크하트였다. 헨리는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지만, 잉아는 아직 그를 잘 알지 못했다.1
선교부 회장단 부름을 받은 후로 헨리는 슈타지(동독의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교회를 인정하긴 했지만, 관리들은 헨리에게 “동독 선교부”라는 명칭을 더는 사용하지 말라면서 전도 활동도 전면 중단하라고 강요했다. 헨리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그는 교회 지도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동독과 서독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정부는 여전히 그를 예의 주시했다. 이미 슈타지는 그를 간첩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며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2
잉아의 친구 중 한 명인 이리카 요스트도 그날 밤 침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이리카는 잉아의 이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는 동안 잉아의 몇몇 이웃이 교회에 관심을 보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교회에서 제공하는 식량과 물품이 더는 긴요하지 않게 되자,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중단했다. 그러나 잉아와 이리카를 포함한 몇몇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교회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주중에 상호향상회 활동에 참석하고 일요일 저녁에는 성찬식에 참석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침례식에 온 사람들이 잘레 강둑에 도착했을 때는 희미하게 그들을 비추던 햇빛마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어두운 강물 위에는 여기저기 얼음덩어리가 떠다녔다. 독일인 선교사 볼프강 주스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례를 받을 다섯 명 중 첫 번째 사람이 그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자, 구름 뒤에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면 위의 달빛은 하나님의 승인을 나타내기라도 하듯이 일렁였다. 강둑에서는 몇몇 사람이 새로운 회원을 담요로 감싸 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3
곧이어 잉아가 강물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스 장로가 그녀를 물 밖으로 일으켰을 때,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침례가 끝난 후, 그들은 지부 집회소로 돌아갔다. 집회소는 원래 모자 가게였으나 성찬식 모임과 주일학교 공과를 할 수 있도록 개조한 건물이었다. 잉아가 교회 회원으로 확인되고 성신을 받을 차례가 되자, 헨리 부르크하트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말을 했다.
잉아가 속한 지부에서 봉사할 당시만 해도 헨리는 그녀를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례식을 마치고 며칠 후, 그는 일지에 그녀에 관한 내용을 짧게 적었다.
그는 그날 밤 다섯 명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약을 맺었다고 적었다. “나는 베른부르크에서 봉사하면서 그들 모두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잉아 리만을 신뢰한다.”4
같은 해 후반인 1953년 가을, 서른여섯 살인 낸 헌터는 날마다 같은 방식으로 평일 하루를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6시에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와드 집회소에서 약 25명의 십 대 청소년에게 세미나리를 가르쳤다. 겉으로는 낸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감도 넘쳤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몰몬경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으면서도 몰몬경이 참된지는 확신하지 못했다.5
고등학생 자녀를 둔 낸은 새벽 세미나리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몹시 기뻐했다. 미국 서부의 교회는 종전 이후 번영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가족과 신앙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으며, 유타 출신의 많은 캘리포니아 성도들은 자녀들이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유익을 얻기를 바랐다. 1950년 4월, 남부 캘리포니아의 10개 스테이크는 교회 교육 위원회에 남부 캘리포니아 고등학생을 위한 세미나리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유타주 로건의 세미나리 교사인 레이 존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세미나리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했다.
유타에 있는 레이의 학생들은 낮 시간에 학교 근처 건물에서 세미나리에 참석했다. 서로 가까이 사는 성도들이 많지 않은 캘리포니아에서는 그런 방식이 실용적이지 못했다. 레이는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등교 전 시간이 세미나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교회가 세미나리 전임 교사를 많이 고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지 성도들이 대부분의 수업을 가르쳐야 했다.
일부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교회 건물에서 종교 수업에 참석하겠다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이게 잘될 리가 없어요!”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남부 캘리포니아의 새벽 세미나리는 번창했다. 단 3년 만에 1,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57개 반에 등록했다.6
낸은 새벽 세미나리 프로그램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감독단 보좌인 데이비드 밀른이 자신에게 그 반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낸은 청녀 시절에 유타 중부에서 자랐고 세미나리 수업을 좋아했지만, 정규 교육이나 대학 교육은 받지 못했다.7
데이비드는 낸에게 레이 존스와 이야기해 보라고 했고, 레이 존스는 그녀에게 교회 교육부의 부회장인 윌리엄 베렛과 상의해 보라고 권했다. 윌리엄은 그녀가 진정으로 헌신적이며 세미나리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는 낸이야말로 몰몬경을 가르칠 적임자라고 말했다.
“그 지루한 것 말인가요?” 낸은 놀라서 말했다. “그걸 제가 가르칠 수는 없어요. 전 몰몬경을 다 읽어 보지도 못했는걸요. 매번 이사야가 나오는 부분에서 막혀요.”
윌리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헌터 자매님, 한 가지 약속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매님이 진정한 의도로 몰몬경을 읽고 읽으면서 그에 대해 기도한다면, 몰몬경에 대한 간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윌리엄은 그녀가 몰몬경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 확언했고, 결국 낸은 그 일을 해 보겠다고 승낙했다.8
낸은 피아노와 칠판을 사용할 수 있는 상호부조회실에서 수업을 했다. 곧 청소년들은 교회 회원이 아닌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낸은 학생들의 열정과 간증을 사랑했지만, 몰몬경이 경전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진리를 그녀가 어떻게 간증할 수 있겠는가?
낸은 윌리엄 베렛이 제안한 대로 매일 밤 몰몬경에 대해 기도했지만, 응답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낸은 이전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게 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낸은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앞부분을 건너뛰고 제3니파이를 읽은 뒤,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책이 정말 참된가요?” 낸이 물었다. “정말로 제가 이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원하시나요?”
하늘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느낌이 마치 누군가가 낸을 보듬듯 감싸 안았다. “그래, 그 책은 참되단다.” 작고 고요한 음성이 속삭였다.
그 후 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학년 초에 그녀는 몰몬경 시험을 보았고, 겨우 25점을 받았다. 학년 말에 또 다른 본 시험을 보았고, 이 때는 98점을 받았다. 그리고 낸의 반에 참석했던 여섯 명의 비회원 학생들은 학년말까지는 모두 교회에 가입했다.9
한편,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43세의 고든 비 힝클리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교회 라디오, 홍보 및 선교 자료 위원회의 집행 서기로 경력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교회 직원으로서 대부분의 직장 생활을 해 왔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교회 선교사 위원회의 집행 서기로 일했다. 고든은 선교사 훈련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복음 전파를 위한 교회의 노력에서 거의 모든 면에 관여하고 있었고, 일거리를 집까지 가져가는 경우도 많았다.10
아내 마조리는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고든이 귀가하면 가족을 볼 새도 없이 전화가 울려 대기 일쑤였다. 가끔 전화는 지구 반대편에서 향수병에 걸린 선교사에 관한 것일 때도 있었고, 선교사 부름과 징병에 관한 교회의 정책에 화가 난 누군가의 것일 때도 있었다.11
얼마 전 휴전 협정으로 남한과 북한은 휴전을 했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선교사 연령의 청년들을 징집했다. 교회는 전시 정책을 조정하여 일부 청년들이 징집 유예를 받고 선교사로 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기회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실망하고 마음이 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징집된 청년들에게는 그들이 주둔한 나라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한 예로, 한국 서울에서 후기 성도 군인들은 소규모 한국 성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 들 중 다수는 피난민들로 전쟁 후 미군들로부터 회복된 복음을 배운 이들이다.12
1953년 10월,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고든에게 또 다른 책임을 맡기기 위한 준비를 하여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알다시피 우리는 스위스에 성전을 지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소한의 성전 봉사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유럽 언어로 성전 의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13
유럽의 성전은 여느 성전들과는 다를 것이었다. 당시 운영 중이던 교회의 8개 성전에서는 훈련을 받은 몇몇 의식 봉사자들이 의식 참여자들을 구원의 계획의 각 단계가 벽화로 장식된 일련의 의식실을 통과하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성도들은 유럽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의식 봉사자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따라서 제일회장단은 의식 봉사자 수와 엔다우먼트에 필요한 공간을 줄이기 위해 현대 기술을 이용하고자 했다.14
맥케이 회장은 고든에게 말했다. “형제님은 그런 종류의 영상과 자료를 준비하는 면에서 방대한 경험을 쌓아 오셨습니다. 이 일을 해낼 방법을 찾는 책임을 형제님에게 맡기겠습니다.” 고든은 당장 그 일을 시작해야 했다. 스위스 성전은 2년 이내에 완공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고든은 말했다. “회장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습니다.”15
이듬해 초, 맥케이 회장은 아내 에머 레이와 함께 다시 미국을 떠나 유럽, 남아프리카, 남미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휴 캐넌과 함께 처음으로 나섰던 전 세계 선교부 순회를 통해 그는 세계 곳곳의 성도들의 필요 사항과 관심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순방에 나선 그는 특히 남아프리카 선교부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 교회가 들어선 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신권을 소유하거나 성전 의식을 받을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교회는 지도력 부족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런 제한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늘 특정한 어려움이 있어 왔다. 그곳 선교사들은 자신이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혈통이 섞여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형제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엔 그들이 신권 성임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일회장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모든 예비 신권 소유자들에게 남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최초의 조상이 아프리카 태생이 아니라 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신권을 성임받을 자격을 확인하도록 요청했다.16
이런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릴 뿐더러 좌절감을 주곤 했다. 지부 또는 지방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남성의 조상이 계보 기록이 작성되기 전부터 남아프리카에 살았던 경우도 있었고, 자신의 가계를 조사하는 데 상당한 돈을 썼음에도 도중에 막혀서 더는 조사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선교부 회장인 리로이 던컨은 합당한 남성들이 자신의 조상을 증명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선교사들에게 부름을 주어 회중을 이끌게 했다.
리로이는 제일회장단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지난 5년 동안 멜기세덱 신권에 성임된 사람은 다섯 명뿐입니다. 더 많은 훌륭하고 충실한 형제들이 신권을 소유할 수 있다면 주님의 일이 더욱 빠르게 진척될 것입니다.”17
맥케이 회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해서 그 문제를 직접 다루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심각한 인종적 불화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수의 백인이 통치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얼마 전부터 흑인과 혼혈인을 백인과 완전히 분리하여 2등 시민으로 취급하도록 하는 억압적인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라고 알려진 이 법률 체계에 의해 엄격한 인종 분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중심축이 되었다. 맥케이 회장은 그 문제에 대해 숙고했다. 그는 교회가 한 국가의 기존 법률 내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관행을 고려해야 했고, 또한 신권 및 성전 제한에 대한 영감받은 변경 사항조차도 백인 교회 회원과 비회원들의 분노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18
맥케이 부부는 1954년 1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전국의 성도들을 만났다. 맥케이 회장은 시간을 내어 최대한 많은 사람, 특히 다소 주눅 들어 보이거나 무리에서 언저리에 있는 듯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19 케이프타운을 방문한 그는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사랑 지부의 창립 회원인 클라라 대니얼스 및 그녀의 딸 앨리스와 악수를 나눴다. 클라라의 남편이자 사랑 지부 회장인 윌리엄 대니얼스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클라라와 앨리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수의 혼혈 성도로서 계속 충실히 생활해 왔다.20
그 여정 동안 맥케이 회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신권 제한과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드렸다. 그는 성도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숙고했다. 그는 교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비 신권 소유자들에게 아프리카가 아닌 다른 대륙에 기원을 둔 조상을 찾도록 계속 요구한다면 지부에서 교회 업무를 수행할 현지 지도자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1
1월 17일 일요일,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선교사 모임에서 신권 및 성전 제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 관행의 기원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셉 스미스와 브리검 영이 회장단으로 있는 동안 몇몇 흑인 남성이 신권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도 과거 1921년 세계 순회 기간 동안 그 제한 사항을 지지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하면서, 신권을 받기를 원하는 하와이의 한 흑인 성도를 위해 그랜트 회장에게 간청했던 일을 들려주었다.
맥케이 회장은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형제님과 함께 앉아 이야기하면서, 주님은 공정하시고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가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맥케이 회장은 언제 그날이 올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주님께서 달리 계시하실 때까지 제한 사항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아프리카 선교부에는 단순히 이 나라 밖에서 계보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신권을 받지 못한 합당한 남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그는 이제부터 조상이 불확실한 성도들은 신권을 받기 위해 더는 혈통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22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나기 전에 맥케이 회장은 아프리카의 흑인 후손들이 신권의 모든 축복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미 다른 여러 나라들의 흑인들이 회복된 복음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서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의 몇몇 주민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교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왔다. 다른 많은 이들 역시 그런 요청을 보낼 것이었다.23
동시에, 전 세계의 많은 흑인들은 인종 분리 정책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등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이 사회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신권 제한 사항에 대한 진심 어린 질문을 하고 있었다.24
그해 말, 독일민주공화국에서는 작은 배 엘베호가 하나뿐인 굴뚝에서 희뿌연 증기를 느릿하게 피워냈다. 배의 측면에는 아인하이트[Einheit]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단합이라는 뜻이었다.
배에 탄 헨리 부르크하트는 상호향상회 대회를 위해 동독 전역에서 모인 성도들을 맞이했다. 헨리의 나이는 그곳에 참여한 많은 젊은이들과 비슷했지만, 그는 단순히 행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동독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모임을 감독하고 있었다.25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배를 타는 것은 대회에 참여한 500명 정도의 젊은이들을 위해 계획된 많은 활동 중 하나에 불과했다. 1930년대 이후로 전 세계의 선교부들은 신앙을 강화하고 교회 내의 교제와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상호향상회 대회를 개최해 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동독 경찰은 교회 단체가 구기 운동, 또는 하이킹과 같은 오락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제한 탓에 동독에서 교회 회원으로 살아가는 일은 힘들어졌고, 이미 많은 동독 성도들은 서독이나 미국으로 도피했다. 헨리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민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그들 중 일부라도 자국에 남을 수 있게 격려를 받고 또한 동독에서 교회가 존속될 수 있기를 바랐다.26
증기선은 울창한 언덕과 높다란 회색 사암 기둥을 지나 강 상류로 계속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헨리는 작년에 베른부르크에서 자신이 확인 의식을 해 주었던 젊은 여성 잉아 리만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확인 의식 이후로 그는 잉아를 몇 번 본 적 있었고, 부활절에 있었던 상호향상회 활동에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헨리는 젊은 여성들이 주위에 있을 때면 말문이 막히고 수줍음을 탔다. 열아홉 살의 선교사였던 시절에 그는 선교 사업에만 집중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교회 책임을 맡은 지금, 선교부의 일부 성도들은 헨리가 언제, 누구와 결혼할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잉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전에 느꼈던 어색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27
다음 몇 달 동안, 헨리는 잉아를 보러 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오래된 오펠 올림피아 자동차를 몰고 선교부 지역을 돌아다녔는데, 동독에서는 자동차가 드물었으므로 후기 성도들은 헨리가 그녀의 동네를 지나갈 때마다 눈치를 챘다. 헨리는 선교부 임무로 늘 바빠서 잉아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지 않아 그들의 관계는 꽃을 피웠다.
겨울이 되자 헨리와 잉아는 결혼을 결심했다. 성탄절 동안 잉아의 부모는 약혼을 발표하기 위해 헨리와 그의 부모를 베른부르크에 있는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딸이 교회에 가입하기로 한 결정을 못마땅해 하던 리만 부부였지만, 그들의 태도는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헨리와도 좋은 관계를 쌓았다.28
헨리와 잉아는 약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교회 봉사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웠던 헨리는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헨리와 잉아 둘 다 원했던 성전 결혼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스위스 성전이 완공되기까지 1년도 남지 않았기에, 그들의 꿈이 완전히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경비 마련을 위해 그저 돈만 모으면 되는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동독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을 통제하는 정책이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었다. 헨리와 잉아는 자신들이 함께 나라를 떠나는 것을 정부가 허락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