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회개: 기쁨을 주는 선택
November 2016


회개: 기쁨을 주는 선택

우리의 구주 덕분에, 회개가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회개가 우리에게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제가 열두 살 때, 제 가족은 스웨덴 남쪽 해변가에 있는 예테보리라는 도시에 살았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예테보리는 올해 여름에 작고하신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인 페르 지 맘1 장로님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분의 고결함과 고귀한 봉사에 감사하며, 또한 그의 훌륭한 가족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그 가족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당시 저희가 다니던 교회는 큰 가정집을 리모델링한 곳이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 들어서자 지부에서 저와 함께 유일한 집사였던 스테판2이 조금 흥분된 눈빛으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스테판은 예배당 뒤쪽에 칸막이로 가려진 확장 공간으로 저를 데려가더니 주머니에서 커다란 폭죽과 성냥을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십대 특유의 허세로 저는 폭죽을 들고 긴 초록색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사실 폭죽이 터지기 전에 심지에 붙은 불을 끌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불을 끄려다 손가락을 데이는 바람에 폭죽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스테판과 저는 무섭게 타들어가는 심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죽이 터졌고, 자욱한 연기와 화약 냄새가 확장 공간과 예배당을 채웠습니다. 우리는 급히 폭죽의 잔해를 치우고 창문을 열어 냄새를 빼려고 노력했습니다. 순진하게도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고 손상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약 냄새는 회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챌 정도로 강했습니다.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 냄새로 인해 성스러워야 할 성찬식은 어수선해졌습니다. 지부에 집사라고는 두 명밖에 없었기에 저는 성찬을 전달했습니다. 제가 방금 한 짓과 지금 하려는 일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려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찬을 취하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찬기가 제 앞에 왔을 때, 저는 빵과 물을 모두 취하지 않았습니다.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한 짓이 부끄러웠고, 그 일로 하나님도 노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 모임이 끝나자 기품있는 은회색 머릿빛의 프랭크 린드버그 지부 회장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의자에 앉자, 회장님은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시며 제가 성찬을 취하지 않는 것을 보셨다고 말씀하셨고, 그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회장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가 한 짓을 아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자, 제 심정이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눈물이 흘렀고, 저는 머뭇거리며 죄송하다고, 제가 하나님을 실망시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린드버그 회장님은 닳아빠진 오래된 교리와 성약 책을 펼치시더니 밑줄이 쳐 있는 부분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보라 자기 죄를 회개한 자, 그는 용서받으며, 나 주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지는 이로써 너희가 알 수 있나니—보라, 그는 자기 죄를 고백하며, 그것들을 버리리라.”3

제가 그 구절을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보았던 린드버그 회장님의 따뜻했던 미소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조금은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제가 다시 성찬을 취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부 회장실을 나오면서, 제 마음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기쁨은 회개에 내재된 고유의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회개라는 단어에는 “마음의 변화를 인식하다” 라는 의미가 들어있으며 “변화”를 내포합니다.4 그 단어를 스웨덴어로는 omvänd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돌아서다”를 의미합니다.5 기독교 작가 시에스 루이스는 그 변화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 저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란] 옳은 길로 다시 돌아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총액이 잘못되면 다시 맞추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앞으로 잘 하겠다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돌아가 실수한 곳을 찾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만 한다.”6 우리의 행위를 변화시키고 “옳은 길”로 돌아가는 것은 회개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과 죄를 거부하는 일 또한 포함됩니다.7 에스겔에 설명되어 있듯이, 회개란 “돌이켜 …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8

그러나 이것마저도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회개를 가능하게 해 주는 권능인 우리 구주의 속죄 희생을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결부되어야 하며,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앙,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신앙, 그리고 우리가 더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라 믿는 신앙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있을 때 그분의 속죄는 우리 삶에 효력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구주께서 주시는 도움으로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돌아설” 때,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담긴 소망을 얻고 용서가 주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속주가 없다면, 회개에 내재된 소망과 기쁨은 사라져 버리며, 회개는 보잘것없는 행동의 수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는 신앙을 행사할 때 우리는 죄를 용서하실 권능을 지니시고 또 기꺼이 용서하려 하시는 그분께로 개심하게 됩니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은 지난 2015년 4월 그분이 마지막으로 참여하신 연차 대회에서 회개라는 희망찬 약속을 확언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주의 속죄에 깃든 치유의 권능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마치 그분이 반세기 동안 사도직을 수행하시면서 얻은 지혜의 집약과도 같았습니다. 패커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속죄는 아무런 자국도,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속죄는 치유할 뿐이며, 치유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9

그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갔다.

“속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개선할 수 있으며, 흉터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을 했든, 어디에 있었든, 무슨 일이 일어났든 간에,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구주]께서 속죄하시리라 약속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는 구주께서 속죄를 하셨을 때 해결되었습니다.

… 속죄는 얼마나 어렵든, 오래 되었든, 또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습니다.”10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구주의 속죄의 영향력은 그 폭과 깊이 모두 무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속죄를 강요받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 리하이가 설명했듯이, 우리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기에11 “자유로이 만인의 크신 중보자를 통하여 자유와 영생을 택하거나, … 사로잡힘과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12 다시 말해서, 회개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때때로 정말 그렇기도 합니다. 그런 선택들은 본질적으로 나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기에 진정한 회개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테보리에 살던 열두 살짜리 소년의 입장에서 저는 스테판을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큰 폭죽과 성냥을 교회에 가져온 것은 스테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만듭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이 전가될 때, 우리 스스로 행할 필요성과 행할 능력은 모두 약화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행동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불운한 피해자로 만들게 됩니다.13

회개에서 멀어지게 하는 또다른 선택은 우리의 잘못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예테보리의 폭죽 사건에서, 다친 사람은 없었고,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성찬식도 그대로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만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잘못을 축소시키는 행위는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겠다는 동기를 앗아갑니다. 이런 사고는 우리의 잘못과 죄에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다른 방식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만적인 니허가 제이라헤믈라 백성들에게 가르친 다음 내용은 믿고 싶어질 만큼 유혹적입니다. “모든 인류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을 것이[므로] … 두려워 하거나 떨 필요가 없으며, …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을 것임이라.”14 그러나 이 유혹적인 개념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도 그분께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계명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승인과 우리의 영생은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정한 회개를 구하느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15

게다가,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려 할 때 우리는 참된 회개에서 멀어집니다. 결국, 만약 성찬이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폭죽 냄새가 그 예테보리의 성찬식에 지장을 주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묵살함으로써 죄를 가벼이 여기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구주의 신성과 그분이 이 후기에 이끄시는 사업의 참됨에 대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변명을 하는 대신, 회개하기를 선택합시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 자신을 되찾을 수 있으며,16 우리의 행동이 갖는 영원한 중요성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영원한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진정 참회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유혹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좀 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다음 이야기로 자문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유혹받고 있는 이 일에서 나는 무엇을 얻는가?

허황된 꿈, 한 번의 날숨, 스쳐지나가는 쾌락뿐이지.

한 순간의 기쁨을 얻고 일주일 동안 고통 속에 살려는가.

잠시 동안의 기쁨을 주는 장난감을 얻기 위해 영원한 운명을 포기하려는가?17

만일 우리가 잠시 동안의 즐거움을 주는 장난감 때문에 영원에 대한 시각을 잃었다면, 회개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덕분에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우리가 어리석은 마음으로 사 버린 장난감은 환불이 가능하며, 우리는 다시 영원에 대한 소망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보라, 주 너희 구속주가 육체로 죽음을 겪었음이라. 그런즉 그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려고 모든 사람의 고통을 겪었느니라.”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기에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19

우리의 구속주께서는 비길 데 없는 연민과 사랑을 지니셨기에 용서하기를 선택하십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용서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신성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가 그러하듯이,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기로 선택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일로 인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속에 있다 해도,21 회개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즉시 구주를 우리 삶에 초대하게 됩니다. 앰율레크가 가르쳤듯이, “참으로 너희가 나아와 더 이상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기를 바라노니, 이는 보라 지금이 너희의 구원의 때와 날임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아니하면, 즉시로 위대한 구속의 계획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22 우리가 저지른 일로 인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그와 동시에 구주께서 내미시는 도움의 손길에서 얻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복음이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23 죄책감은 “씻기워”질 수 있습니다.24 기쁨으로 가득 차고, 죄사함을 받으며,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25 절망감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채워지며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26 우리의 구주 덕분에, 회개가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회개가 우리에게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폭죽 사건 이후 지부 회장실에서 저를 감쌌던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는 제가 용서받았음을 알았습니다. 제 죄책감은 사라졌고, 우울함은 날아가 버렸으며, 제 마음이 빛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대회를 마치면서 여러분이 삶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시기를 권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실재한다는 지식에서 오는 기쁨, 구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으며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회개하기로 선택할 때 오는 기쁨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구주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읍시다.]”27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버리며, 우리의 마음과 뜻을 돌이켜 구주를 따르기로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살아계신 존재이심을 간증합니다. 저는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증인이자 이를 수없이 반복해서 받은 수혜자입니다. 그분의 속죄에서 오는 구속의 축복이 저에게 임한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지금, 그리고 평생에 걸쳐 몇 번이고 거듭하여 임하기를28 간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1. 페르 지 맘(1948~2016) 장로는 2010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칠십인 총관리 역원으로 봉사했다. 맘 장로와 그의 아내 아그네타는 스웨덴 옌셰핑에서 태어났지만 스웨덴 예테보리를 보금자리로 삼았다. 맘 장로도 2010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전한 훌륭한 말씀에서 예테보리를 회상하며 이야기했다.(“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01~102쪽 참조)

  2. 스테판이란 이름이 제 친구의 실명은 아니지만, 그의 동의를 얻어 이 일화를 소개한다.

  3. 교리와 성약 58:42~43.

  4. 그리스어 metanoeo 는 문자 그대로 “‘변화를 인식하다’를 의미한다.(meta,는 ‘변화’를 의미하며, noeo,는 ‘인식하다’를; nous, 는 ‘마음, 즉 도덕적 반성’을 의미한다’)” (James Strong, The New Strong’s Expanded Exhaustive Concordance of the Bible [2010], Greek dictionary section, 162 참조)

  5. omvänd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다. Om은 영어로 “around”라는 단어로, Vänd는 “turn”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6. C.S. Lewis, The Great Divorce (1946), 6. 책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어떤 이들은 천국과 지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그 둘을 “통합하려” 한다고 기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 일부는] 발전이나 수정 또는 개선이 어떻게든 악을 선으로 바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나는 이런 믿음이 끔찍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길이 원의 반지름처럼 원의 중심을 향해 있어 계속 걷기만 하면 조금씩 중심에 가까워지다가 결국 중심에 다다르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 잘못된 길을 선택한 모든 이들이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의 구원은 그들이 다시 옳은 길로 돌아가는 데 있다. … 악을 고치고 되돌릴 수는 있지만, 단순히 악이 점차 선으로 “변할” 수는 없다. 시간이 간다고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이라도 악을 고치고 되돌려야 한다. … 다른 방법은 없다.”(5~6)

  7. 경전 안내서, “회개” 참조.

  8. 에스겔 33:14~15.

  9.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이 2015년 4월 연차 대회의 일부로 열린 지도자 훈련 모임에서 전한 간증으로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말씀은 그 모임에서 기록한 내 개인 노트에서 인용되었다.

  10. 보이드 케이 패커, “행복의 계획”, 리아호나, 2015년 5월호.

  11. 니파이후서 2:5

  12. 니파이후서 2:27.

  13. 니파이후서 2:26 참조.

  14. 앨마서 1:4. 니허와 그의 추종자들은 회개를 믿지 않았다.(앨마서 15:15 참조)

  15. 러셀 엠 넬슨, “하나님의 사랑”, 리아호나, 2003년 2월호, 12~17쪽.

  16. 누가복음 15:17 참조. 또한 11~24절 참조.

  17. William Shakespeare, The Rape of Lucrece, lines 211–14.

  18. 교리와 성약 18:11.

  19. 이사야 53:5 참조.

  20. 누가복음 15:4~7; 교리와 성약 18:10~13 참조.

  21. 회개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포함된다.(고린도후서 7:10) 엠 러셀 밸라드 장로님은 이렇게 가르쳤다. “구주께서는 길을 잃은 자들을 위해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회개는 쉽지 않습니다. 회개에는 시간, 즉 고통스러운 시간이 수반됩니다!”(“Keeping Covenants,” Ensign, May 1993, 7)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또한 이렇게 가르쳤다. “때로 회개의 단계들은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Finding Forgiveness,” Ensign, May 1995, 77) 비록 회개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고통이 수반되지만, 죄가 용서되었음을 느끼게 될 때 그 결과물은 기쁠 것이다.

  22. 앨마서 34:31; 강조체 추가.

  23. 경전 안내서, “복음” 참조.

  24. 이노스서 1:6

  25. 모사이야서 4:3.

  26. 모사이야서 27:29.

  27. 이사야 12:3.

  28. 모사이야서 26:29~9 참조.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고의로 죄를 짓고 손쉽게 회개하기 위해 구주의 자비에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이다.(히브리서 6:4~6; 10:26~27 참조)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이렇게 말씀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점과 죄를 다르게 보십니다. 이것은 과거의 그릇된 선택이 낳은 결과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고 반항할 때에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면서도, 약점은 언제나 자비의 대상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개인적으로 얻는 힘”, 리아호나, 2013년 11월호,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