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더 깊이 이해하며
1931년 봄, 존과 리아 윗소는 몇 달 동안 가족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연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 땅을 떠났다. 그들의 딸 앤은 유타에 있는 기차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앤은 윗소 부부가 유럽에 있는 동안 남편과 일시적으로 화해하여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리아의 어머니인 수사 게이츠도 3년 전 리아가 떠날 때 약속한 것처럼 그들을 집으로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이틀 후는 수사의 일흔다섯 번째 생일이었고, 존과 리아는 리아의 여동생 에머 루시와 그녀의 남편 앨버트 보웬의 집에서 열릴 축하 잔치에 때맞춰 도착한 것이었다.1
안타깝게도 존의 이모 페트로라인은 지병으로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페트로라인의 임종은 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존의 동생 오스보네의부인 로즈가 지켰다.2
유타에 있는 동안 존의 일정은 교회 지도자들과의 모임으로 빽빽했다.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는 사도 조셉 필딩 스미스와 칠십인 제일 평의회의 선임 회원인 비 에이치 로버츠 간의 견해 충돌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로버츠 장로는 구원의 계획을 상세히 기술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라[The Truth, The Way, The Life]”라는 제목의 800쪽짜리 원고를 집필했다. 그는 교회가 그 원고를 멜기세덱 신권 정원회의 학습 과정으로 채택해 주기를 바랐다.3 하지만 스미스 장로는 그 원고에 나오는 특정 개념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가 가장 염려한 것은 로버츠 장로가 창조에 대한 경전의 기사를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일치시키려 했다는 점이었다.4 로버츠 장로는 화석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 두시기 이전 수백만 년 동안 인간과 유사한 종들이 지구에 살다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믿었다.5 반면, 스미스 장로는 그러한 믿음은 경전 및 교회 교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에 사망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와 같은 종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스미스 장로는 유타 계보 협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로버츠 장로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발상에 대해서는 맹비난을 했다. 이에 로버츠 장로는 스미스 장로의 연설이 교회의 공식 입장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 사도의 의견인지 알기 위해 제일회장단에 서신을 보냈다.6
십이사도 정원회는 두 사람에게 평의회에서 각자의 견해를 밝히도록 요청한 뒤 제일회장단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제일회장단은 분쟁의 양측 주장을 신중히 검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기도를 드렸다.7
이것은 얼마 전에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는 것에 관한 책을 냈던 존 역시도 심사숙고해 온 문제였다. 그는 젊은 성도들이 새롭고 현대적인 사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키울 수 있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종교인이 사실과 해석을 혼동하기 때문에 과학을 경계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과학적 이해는 바뀌기 마련이고, 기도 및 계시와 같은 종교적 개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는 과학에만 의존해서 논란을 해결하는 방식을 꺼렸다. 또한, 그와 동시에 계시 및 성스러운 기록의 배경과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경전 해석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존은 사도 멜빈 제이 밸라드에게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가장 현명한 방안은 지난 수년간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립되고 확증된 모든 사실은 받아들이고 우리 신앙의 근거를 이론에 두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그 이론이 과학적인 것이든 신학적인 것이든 말입니다.”8
연차 대회 다음 날인 4월 7일, 제일회장단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십이사도 정원회와 그 밖의 총관리 역원들을 소집했다. 제일회장단은 스미스 장로와 로버츠 장로 둘 다 그 문제에 대한 논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으며, 존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양측 모두 경전, 그리고 교회의 일에 관한 저명한 인물들의 진술을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9
제일회장단은 조셉 스미스의 다음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첫째 원리를 선포하십시오. 신비한 이야기들은 가만히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10 또한 그들은 개인 의견을 마치 교회 교리인 양 설교하는 것은 성도들 사이에 오해와 혼란,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교회의 총관리 역원 중 한 명이 어떤 교리에 대해 확언을 하면, 그것이 사견이든 아니든 교회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의 말이 교회의 승인된 교리로 받아들여집니다.”11
제일회장단은 두 사람에게 회복된 복음의 핵심 교리를 전하라고 촉구했다. “우리는 교회의 영역 내에서 우리의 부름을 영화롭게 합시다.” 제일회장단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지질학, 생물학, 고고학, 인류학은 과학 연구에 맡깁시다.” 제일회장단은 1909년에 당시 제일회장단이 발표한 성명서 “인간의 기원”에서 표명한 것 외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12
존 역시 제일회장단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 이 문제를 말끔히 정리할 수 있었다. 존과 로버츠 장로, 스미스 장로를 포함한 그 밖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 결정을 지지했고, 아담이 있기 전에 인간과 유사한 생명체가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기로 하는 데 동의했다.13 하지만 로버츠 장로에게는 여전히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라” 원고에서 그 주제를 빼 버리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원고를 출판하지 않고 한쪽에 치워 놓았다.14
그해 말,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윌리엄과 클라라 대니얼스가 다른 십여 명의 후기 성도들과 함께 부르는 찬송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월요일마다 대니얼스 가족의 집에 모여 그렇게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날 그들이 그곳에 모인 이유는 사뭇 달랐다. 돈 돌턴 선교부 회장은 이들을 소집하여 특별 대회를 열었다.
클라라가 개회 기도를 드린 후, 윌리엄이 자신의 개종 이야기와 소모임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에 우리는 『몰몬경 준비 참고서』[Book of Mormon Ready References]를 공부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15
클라라도 간증을 전하며 자신이 교회의 회원인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우리가 굳건히 남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움을 주시기를 희망합니다.”16
다른 몇 사람들의 간증이 전해진 후, 돌턴 회장이 말씀을 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사업의 선두에 계심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명대로 생활한다면 주님은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는 몰몬경에 나오는 야렛의 형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야렛의 형제는 주님께 매우 가까이 다가간 삶을 살았기에 그분은 그에게 아무것도 숨기실 수 없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돌턴 회장은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제가 충실하다면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17
돌턴 회장은 모브레이 지부의 일부 회원들이 대니얼스 가족과 같은 혼혈 회원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제일회장단은 그에게 이러한 사안을 다룰 때는 모든 성도의 감정을 배려해야 한다는 조언을 전했다. 그들은 서신을 통해 교회의 흑인 회원과 백인 회원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인종 갈등 문제를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18
윌리엄의 충실함을 알고 존경하는 돌턴 회장은 그의 노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돌턴 회장은 이 특별 소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저는 이곳에 지부가 조직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대니얼스 형제님은 특정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야 합니다. 그의 근면함이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고,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돌턴 회장은 윌리엄을 지부 회장으로, 클라라를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그들의 딸 앨리스를 상호부조회 서기 겸 지부 서기로, 그들의 친구 에머 비어를 클라라의 보좌로 부름을 주었다. 돌턴 회장은 윌리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새로운 부름을 위해 그를 성별했다. 하지만 신권 성임은 없었고, 따라서 윌리엄은 성찬을 집행하거나 지부 회원들을 부름에 성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책무는 그에게 교회에서 봉사하고 성장할 더 큰 기회가 될 것이었다.
“저는 이 지부의 명칭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돌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지부’가 이 지부의 명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9
그다음 월요일 모임에서 윌리엄은 클라라와 지부의 새로 부름받은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책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클라라가 말했다. “좀 어렵긴 하지만, 주님께서 상호부조회를 처음으로 시작한 자매님을 도와주셨듯이 제가 하는 일도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0
윌리엄과 클라라는 지부의 지도자로서 모브레이 지부의 백인 방문객들과 함께 지부 모임에 참석하는 선교사들을 지속적으로 보살폈다. 윌리엄은 또한 앨리스에게 모임 기록을 세심하게 작성하여 그 사본을 솔트레이크시티로 보내게 했다. 그는 사랑의 지부가 기억되기를 바랐다.21
미국에 사는 열세 살 소년 폴 방은 1932년 2월 14일에 신시내티 지부의 새로운 집사가 되었다. 그 나이의 소년들은 1800년대 후반부터 아론 신권을 받았는데, 당시 집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땔나무를 패고, 집회소 난방을 위해 불을 지피고, 와드와 지부에서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했다. 청남들을 신권 직분에 성임하는 일이 일반화된 것은 20세기 초반에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이 아론 신권의 개혁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로는 어린 집사들도 지부와 지부 모임에서 더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22
이제 폴은 예배당과 경내를 관리하는 것 외에도 성찬을 전달하고, 금식 헌금을 모으고, 지부 회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과부와 궁핍한 성도들을 도울 수 있었다.23 교회의 다른 집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신앙개조의 각 조항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지혜의 말씀에 순종하고, 개회 및 폐회 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내고, 아론 신권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야 했다.24
하지만 이 새로운 책무들 중에는 폴에게 당장 시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성찬은 성인 남성들이 전달했었다, 그래서 교회 전역의 많은 사람은 그 역할을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을 불안해했다. 신시내티에서는 항상 두 명의 성인 남성이 성찬을 축복하고 전달했는데, 때로는 폴의 형인 크리스와 헨리가 그 책무를 수행했다.25
사실, 새로운 신권 책무로 바쁘게 지내지 않는다 해도 폴은 잡화와 식료품을 판매하는 부모님의 상점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게는 매일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폴은 계산대 일을 보고, 선반을 채우고, 정돈하고, 나무 바닥을 쓸고 기름칠을 했다. 형 크리스가 고기를 자를 때는 폴이 바닥에 떨어진 지저분한 것들을 빨아들여 줄 톱밥을 뿌렸다. 크리스가 고기 자르는 일을 다 마치면 철제 솔로 도마를 문질러 닦는 것도 폴의 몫이었고, 방과 후에는 주문받은 물품을 상자와 바구니에 싣고 동네를 다니며 배달도 했다.26
경제 불황이 닥쳤을 당시 신시내티에서는 건설 붐이 한창이었고, 약 180미터 높이의 고층 건물과 거대한 기차 종착역 공사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이런 대규모 공사와 다양한 지역 경제 덕분에 신시내티는 최악의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하락하고, 실업률은 높이 치솟았다.27
방 가족은 그들과 같은 백인 이민자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대인, 그 외 여러 민족과 함께 살고, 일하고, 놀고, 공부하는 가난한 동네에 살았다. 도시가 불경기로 들어서자, 방 가족의 상점을 찾던 고객들 다수는 이제 식료품과 잡화를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폴의 아버지는 그런 고객들을 외면하지 않고 종종 상점 물품을 나누어 주거나 외상으로 주었다. 하지만 그런 친절과 관대함이 무색하게, 대공황으로부터 가업을 안전하게 지켜 낼 수 없었던 그는 1932년 4월에 파산 신청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게를 폐업하지 않았으며, 이웃들에게 계속해서 도움을 주었다.28
신시내티 성도들은 경기 침체를 잘 헤쳐 나갔다. 바로 얼마 전에 감리 감독단은 교회 전역의 지부와 와드에 아론 신권 소유자들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마다 아론 신권의 회복을 기념할 것을 요청했었다. 1932년 5월 15일에 신시내티 지부에서도 최근에 성임된 4명의 제사(모두 19세 이상)가 성찬식에서 아론 신권의 역사와 성장에 관한 말씀을 전했다. 지부 회장인 찰스 앤더슨은 평상시와 같이 성찬식 마지막에 말씀을 전했다.29
폴은 그 프로그램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봉사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었다. 지부 참석자가 50명을 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어떤 모임에서든 폴의 부모님이나 형 또는 누나 중 한 명이 말씀을 하거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그 밖의 일을 할 가능성이 많았다.30 사실 폴의 형 헨리는 지난 4주 동안 세 번의 성찬식에서 폐회 기도를 했으며, 폐회 기도를 하지 않은 날에는 말씀 순서를 맡아 했다.31
폴도 방 가족의 일원이었으므로, 그도 언젠가 지부 모임에서 임무를 맡게 될 것이었다.
한편, 세계가 대공황의 수렁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자 유타의 상호부조회 사회 복지사 에블린 호지스는 걱정거리가 많아졌다. 한때 일할 필요 없이 집에 함께 있자고 간청했던 그녀의 아버지도 로건의 농장에서 경작한 농산물이 팔리지 않아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교회 및 주정부 보조금 신청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었지만, 그는 보조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대공황이 시작될 때, 그는 에블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분명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에블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매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상대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로스엔젤레스로 갈 수만 있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유타의 노동자들은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고용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블린은 캘리포니아나 미국의 다른 어느 곳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에블린은 어느 곳이나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녀가 담당하는 몇몇 가족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32
1932년 여름, 에블린에게 변화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주와 기업에 재정적 원조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에 유타의 공무원들은 곧바로 주정부의 연방 대출을 신청하기 위해 상호부조회 사회 봉사부로 도움을 요청했다. 에블린과 에이미 브라운 라이먼은 유타주에 만연한 빈곤 상황을 문서화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통계 자료와 개별 사례 기록을 수집했다. 그들은 조사 결과를 주 의회 의사당에 전달했고, 주 의원들은 그 자료를 이용해 유타를 위한 연방 정부의 원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33
힘든 일을 함께 해내면서, 에블린은 에이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에이미는 사회 복지사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이따금 퉁명스럽기도 했다. 에블린은 에이미의 직설적인 면을 좋아했지만, 그것이 거슬린 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에블린이 실수를 하면 에이미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에블린은 에이미가 자신을 벌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에이미의 입장에서는 그저 세심하게, 또는 조심성 있게 말할 겨를이 없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사회봉사부의 모두가 이 일에 온 힘을 다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에블린은 에이미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34
1932년 8월, 연방 구제 기금이 유타에 도착하자 절망에 빠져 있던 많은 성도들은 희망을 얻었다. 주정부는 다시금 상호부조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에이미와 사회 복지사들은 곧 지원금을 배분하는 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지역 교회와 지방 정부 구제 기금은 바닥난 상태였다. 따라서 에블린이 함께 일했던 감독들 다수는 자기 와드의 궁핍한 회원들이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회원들 중에는 성도들이 정부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부 회원들은 이웃이자 친구이기도 한 감독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교회 보조금을 요청하지 않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에 갔을 때 보조금을 받는 사람이라고 눈총을 받게 되는 것이 싫어서 보조금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조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계속 증가해 나갔다. 미국의 정부 지도자들은 경제 붕괴를 과소평가했고, 그들이 제공한 자금은 미국인들을 영구적으로 구제할 수준이 못 되었다. 경제는 계속해서 급락하며 희망을 앗아갔다. 직장과 집을 잃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에블린은 작은 집에서 두세 가족이 함께 사는 사례를 자주 보았다.
그녀의 가족에게 닥친 어려움도 여전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에블린의 아버지는 부동산 일부를 매물로 내놓기까지 했으나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매달 에블린의 수입에서 30달러씩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딸의 도움에 안도했다.35
에블린은 악화되는 대공황 속에서 솔트레이크시티의 궁핍함이 더욱더 심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이 지역 사회 내에서 더 큰 동정심과 성장의 기회를 보았다. 에블린은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더 깊게 이해하며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면, 이번 고통을 발판 삼아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36
솔트레이크시티 도심을 가로지르면 나오는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의 회장인 해롤드 비 리는 사람들이 대공황을 헤쳐 나가도록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그는 교회에서 가장 젊은 스테이크 회장 축에 속했고, 따라서 그 직책에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 인생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테이크에 있는 7,300명의 성도 중 약 3분의 2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재정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현세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영적으로 먹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37
해롤드는 보좌들과 함께 스테이크 내의 성도들을 도울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은 교리와 성약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초기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창고를 세우라고 명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38 수십 년 동안 교회 곳곳의 와드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기타 헌물을 모으고 재분배하기 위한 소규모 “감독의 창고”를 운영해 왔었다. 비록 현금으로만 십일조를 내도록 1910년대에 정책이 바뀌긴 했지만, 일부 와드와 스테이크에서는 여전히 그와 같은 창고가 남아 있었다.39 어려운 시기에 성도들을 돕기 위해 상점과 곡물 저장고를 운영했던 상호부조회 회장단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옷과 기타 생활용품을 제공하기 위한 창고를 운영하고 있었다.40 파이어니어 스테이크가 비슷한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곧 이 구제 프로그램은 구체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성도들이 좀 더 자립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해롤드의 스테이크는 감독들의 도움을 받아 십일조와 헌금으로 지원되는 창고를 설립하기로 했다. 프로그램은 물품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테이크 내의 실직한 성도들에게 창고나 다른 구제 사업에서 일을 하게 하고, 그 대가로 식량, 의복, 연료, 또는 기타 필수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었다.41
해롤드는 보좌들과 상의 후 이 계획을 제일회장단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는 특별 모임에서 스테이크 내의 감독들에게 계획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곧바로 한 감독이 교회의 많은 회원이 필시 마음에 담고 있었을 질문을 던졌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양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십일조를 바치는 이 많은 충실한 성도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궁핍을 겪는 것인가?
해롤드는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 감독들에게 의지하고 계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최선을 다해 답했다. “주님의 약속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으며, 이를 이행하는 방법과 수단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은 실현될 것이라고 간증했다. 그리고 감독들에게 창고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달라고 촉구했다.42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해롤드와 그의 보좌들은 감독 중 한 명인 제시 드루리를 창고 관리자로 채용했다. 제시가 감독으로 있는 와드의 성도들 다수는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제시도 직장을 잃었고, 그의 가족은 정부 지원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43
그럼에도 그해 초, 제시와 그의 보좌들은 와드 회원들에게 추가로 음식과 일을 제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와드 경계의 바로 남쪽에는 그냥 묵혀 두고 있는 비옥한 땅이 있었다. 감독단은 땅 소유주들을 찾아갔고, 농지세를 대신 낸다는 조건으로 와드가 그 땅을 경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에 속한 두 이웃 와드가 곧 이 일에 동참했다. 그들은 함께 씨앗을 흔쾌히 기증하고 관개수를 공급해 줄 농부들과 군 지도자들을 찾아냈다. 또한 여러 채소 모종을 할인된 가격에 구입하고, 이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농기구와 말도 얻어 왔다.44
해롤드의 지시에 따라, 제시는 실직한 교회 회원들을 데리고 가서 낡은 창고를 스테이크 창고로 개조했다. 그들은 창고 안에 통조림 공장을 설치하고 잡화점을 열었다. 기증받은 의류를 취급할 여러 칸짜리 수납공간도 만들어졌다.45
1932년 여름, 드디어 창고가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 해롤드와 제시,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의 성도들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하루 동안 특별 금식을 하고 건물 개관식에 자신들의 금식 헌물을 가져왔다. 스테이크의 일부 여성과 남성이 창고에서 일하도록 배치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농장과 과수원에서 일하기 위해 솔트레이크밸리를 가로질러 이동했다.46
곧 그들은 많은 양의 수확물을 얻었다. 복숭아 수백 통, 감자와 양파 수천 자루, 체리 수천 톤 등 많은 양의 작물이 수확되었다. 스테이크 회원들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수확물에서 각자의 몫을 받았다. 수확물은 그러고도 풍족하게 남아서, 상호부조회는 잉여 농산물 일부를 다가올 겨울철에 대비하여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은 헌 옷을 수선하고 헌 신발을 모으는 등의 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존이 가능한 필수품들을 받았다.47
그 해가 끝나갈 무렵, 해롤드는 주님께서 파이어니어 스테이크의 성도들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지난 1년간 역경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겪는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변함없이 굳건하게 지냈다. 그에 더하여, 그들은 대공황이 초래한 참상에도 불구하고 궁핍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