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지 렌런드 장로: 충실한 종
데일과 루스 렌런드는 더없이 숨 가쁜 삶을 살았다. 부부는 20대 후반에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살고 있었다. 데일이 유타 대학교에서 의과 대학을 마치자 그들은 서부에서 동부로 이주했고, 데일은 그곳에 있는 Johns Hopkins School of Medicine[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교]에서 힘들지만 명망 있는 전공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여쁜 어린 딸 애슐리도 함께였다. 데일은 사랑하는 아내 루스가 암 치료를 받는 중이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독으로 봉사할 부름을 받아들였다.
데일은 와드 회원을 방문할 때면 애슐리를 데려가곤 했다. 한번은 부녀가 한 저활동 회원을 방문하던 날이었다. 렌런드 장로는 이렇게 기억한다. “저는 누구도 제 옆에 있는 사랑스러운 꼬마 소녀를 문전박대하거나 돌려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에 화를 내며 자신의 보좌를 쫓아버렸던 남자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꽉 차도록 체구가 큰 남자가 문을 열고 나타나서는 렌런드 감독을 노려보았다. 그때 느닷없이 네 살 난 애슐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안에 좀 들어가도 될까요?”
놀랍게도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렴. 들어오너라.”
셋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렌런드 감독에게 자신은 교회가 참되다고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애슐리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남자는 계속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마침내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작게 오므린 손을 아빠 귀에 갖다 대며 큰 소리로 속삭였다. “아빠, 아저씨에게 진리를 전하세요.”
렌런드 감독은 진리를 말하고 간증을 전했다. 그는 그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분의 태도가 누그러졌고 영이 집안에 임했습니다.”
렌런드 장로는 이제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서 온 세상에 진리를 전할 기회를 얻었다.(교리와 성약 107:23 참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져다주고자 도울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저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이 부름을 통해 더 큰 관점으로 더 많은 곳에서 그 일을 할 기회를 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북유럽 전통 속에 성장하다
데일 거너 렌런드는 1952년 11월 13일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스웨덴어를 쓰며 자랐다. 어머니 마리아나 안데숀은 스웨덴 출신이며, 아버지 마츠 오케 렌런드는 핀란드 서부에 있는 스웨덴어 사용 지역 출신이었다. 그들은 1950년 스웨덴에서 유타로 이민을 왔다.
데일의 부모는 스톡홀름에 있는 교회에서 만났고 결혼을 결정한 후 반드시 성전에서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 유럽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스위스 베른 성전은 1955년에 헌납되었음) 그들은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인봉받기 위해 유타 주로 갔다.
렌런드 장로의 일곱 살 손아래 누이인 린다 시 모어 자매는 장성한 사 남매가 부모에 대해 깨달았던 바를 이렇게 말한다. “영어도 못 하시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하셨지만, 복음과 성전 결혼의 축복을 받기 위해 삶의 터전을 떠났던 부모님이 얼마나 훌륭하고 신앙심 깊은 분들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데일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솜씨 좋은 목수이자 건축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에서 3년간 건축 선교사로 봉사하는 부름을 받았다. 가족은 핀란드 헬싱키와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지냈다. 그들은 교회의 작은 지부에 나갔고 자녀들은 스웨덴 공립 학교에 다녔다. 데일의 한 살 손아래 누이인 아니타 엠 렌런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겪은 어려움 중 하나를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어요. 저희 형제들은 집에서 스웨덴어를 쓰기는 했지만 문법이나 맞춤법 등은 몰랐거든요.”
데일은 소년 시절 몰몬경을 읽고 간증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스웨덴의 선교부 회장은 아론 신권 청남들에게 몰몬경을 읽도록 권유했고, 당시 열두 살이던 데일의 형 게리는 그 과제를 실천했다. 열한 살이던 데일도 몰몬경 읽기에 도전했고 몰몬경을 다 읽은 후 그 책이 참된지 기도로 여쭈어 보았다. 렌런드 장로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런 분명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네가 그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그것이 참됨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데일과 형제들인 게리, 아니타, 린다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스웨덴어로 말하고 기도했던 것을 기억한다. 또한, 그들은 부모님이 경전 지식을 대단히 강조했다고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을 밝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전을 사용하는 것이었어요.” 아니타는 농담조로 이렇게 덧붙인다. “저희 집에서 경전 지식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사항이었죠.”
놀랍게도, 게리와 데일은 동시에 스웨덴 선교부에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았다. 두 사람은 동반자가 된 적은 없었지만 스웨덴어 실력을 발휘하여 2년 이상 선교사로서 주님께 봉사할 수 있었다. 렌런드 장로는 선교 사업은 힘들지만 훌륭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약속을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선교 사업은 삶이 바뀌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축복
1974년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온 데일은 유타 대학교에 다녔다. 우수한 학생이던 그는 화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형제나 가까운 친구라면 그가 어떤 일을 하건 끊임없이 보여 주었던 능력, 집중력, 근면, 그리고 헌신 등의 면모를 기억한다. 게리는 이렇게 감탄할 정도이다. “동생은 제가 이제껏 본 사람들 중 제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데일은 다니던 와드에서 루스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루스는 당시 그 스테이크 회장단의 일원이었던 멀린 알 리버트의 딸이었는데, 리버트 형제는 후에 칠십인 정원회에서 봉사했다. 데일의 기억으로, 자신은 용기를 내어 루스에게 데이트를 신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며, 몇 달 후 다시 데이트를 신청해서야 승낙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스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루스는 데일이 성찬식에서 선교 사업 경험에 관해 전한 말씀을 듣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루스는 데일과 더 알아가던 차에 데이트 신청을 받자 가슴이 설렜지만 어떤 파티를 준비하고 주최해야 했던 상황이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시 데이트 신청을 받자 루스는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데일과 루스는 1977년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당시 그는 유타 대학교에서 의과 대학에 다녔고, 그녀 역시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사우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렌런드 장로는, “교회에서 활동 회원이 되겠다고 결정한 것을 빼면 아내와 결혼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라고 단언한다. 1980년 렌런드 장로가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일주일 뒤 딸 애슐리가 태어났다.
그 뒤, 렌런드 장로는 의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일 순위로 선택했던 Johns Hopkins Hospital[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일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가족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는 병원의 의료진으로 일했다.
시련을 통한 성장
1981년, 렌런드 자매는 난소암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두 차례 수술을 받았고 9개월 동안 항암치료도 받았다. 아내와 딸을 돌보느라 어려움을 겪던 일을 떠올리며 렌런드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퇴원하여 집으로 온 루스는 병약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다. 렌런드 장로는 아내에게 기도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내의 첫 마디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저희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신 신권 권능에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아내와 하나님께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렌런드 장로는 말한다. “전에는 영원한 가족이 무엇인지를 머리로 이해했지만 이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병으로 저희 가족의 인생 항로는 달라졌습니다.”
렌런드 자매는 병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법학 대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그저 ‘뭔가 좋은 일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면 이 일은 그저 나쁜 경험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렌런드 자매의 말이다. “젊어서 암에 걸리고 아이를 하나밖에 갖지 못할 것으로 계획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법학 대학원에 가는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느꼈습니다.”
렌런드 자매는 계속하여 치료와 학업을 병행했고 렌런드 장로도 전공의 과정을 이어갔다.
볼티모어 도심의 감독
렌런드 장로는 3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심장학 전문의의 길에 들어설 무렵 볼티모어 와드의 감독 부름에 관한 접견을 하게 되었다. 당시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스테이크의 제1보좌였던 브렌트 페티는 그 접견을 기억한다. 그와 스티븐 피 시플리 스테이크 회장은 모두 렌런드 장로와 접견하는 동안 “성령의 강한 영향력”을 느꼈다.
페티 형제는 그가 직장과 가족 등 당면한 문제 속에서도 “대단히 훌륭한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라고 회상한다. 페티 형제는, 작년에 렌런드 장로가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을 받자 볼티모어 와드의 회원들뿐 아니라 대부분은 후기 성도가 아닌 렌런드 장로의 의대 동료들도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렌런드 장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며 그의 봉사와 탁월한 도덕성에 경의를 표했다.
눈부신 업적
1986년 렌런드 자매가 메릴랜드 대학교 법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렌런드 장로가 3년간의 내과 전공의 과정과 3년간의 심장병 전문의 과정을 마치자 그들은 유타 주로 돌아갔다. 렌런드 자매는 유타 주 법무부 장관 사무실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고 렌런드 장로는 유타 대학교에서 의과 대학 교수가 되었다. 렌런드 장로는 18년 동안 유타 대학교 부속 병원 심장 이식 프로그램의 의료 책임자를 역임했다.
그는 2000년에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인터마운틴 헬스 센터의 심장 마비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 책임자를 지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식 가능한 심장 펌프와 완전 인공 심장을 다루는 일이었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심장 전문의인 도널드 비 도티 박사는 LDS 병원 재임 시절 렌런드 박사의 동료이자 벗이었다. 도티 박사는 말한다. “그는 뛰어나게 훈련했고 심도 있는 집중력을 발휘했으며 유능한 행정력을 갖추었고 동정심도 있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렌런드 박사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에이 지 키포리 박사는 렌런드 박사를 가리켜, 그가 심장 전문의로서 그 분야의 선두 주자였으며 “성품, 성실, 겸손, 동정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그는] 사람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해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그들을 배려했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성공에 대단한 관심을 두었습니다.” 렌런드 박사는 조용한 모범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동료들의 가족에게도 항상 관심을 기울였다.
키포리 박사는 특히 렌런드 박사가 동정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가령, 렌런드 박사는 교통수단이 없는 환자가 있으면 그 환자의 집까지 상당한 거리를 운전해 가서 환자를 차에 태워 다시 병원까지 데려오곤 했다. 키포리 박사는 이런 일이 놀라울 뿐이라고 했다.
칠십인으로서의 봉사
렌런드 장로는 솔트레이크 대학교 제1스테이크에서 5년 간 스테이크 회장으로 봉사한 뒤, 2000년에 유타 지역에서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2009년 4월에는 칠십인 총관리 역원으로 부름받았다. 그가 처음 받은 임무는 아프리카 남동 지역 회장단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는데, 이곳은 25개국에 걸쳐 교회 단위조직이 있는 지역이다.
렌런드 자매는 부부가 이 부름을 받고 어떠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연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최정상에 올랐는데 직장을 그만두시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사실이겠지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저희가 최정상에 올랐을 때를 필요로 하신다면, 그때가 저희가 봉사할 시간이라면, 당연히 당장 그렇게 해야지요.”
렌런드 장로는 자신의 영웅인 아내를 가리켜, “아내가 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라고 말한다. 렌런드 자매는 남편과 봉사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법률 회사의 회장직과 몇몇 이름난 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렌런드 장로는 말한다. “저희는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의 성도들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어느 일요일, 렌런드 장로는 콩고 중부의 회원들에게 무엇이 당장 어려운지를 물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선뜻 어려움을 떠올리지 못했다. 렌런드 장로는 재차 물었다. 마침내, 뒷자리에 있던 노신사가 일어나서 말했다. “렌런드 장로님, 어떻게 저희에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데 말입니다.” 렌런드 장로는 그 경험을 돌이켜 보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이 콩고의 성도들처럼 되고 싶습니다. 음식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주신 음식에 매일 감사하고, 가족이 있어 감사해하는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 가지고 있습니다.”
렌런드 장로는 지역 회장단에서 봉사한 5년 동안 광대한 아프리카의 남동 지역을 수천 킬로미터 여행하며 회원과 선교사들을 방문했다. 그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썼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아프리카 남동 지역 회장단과 함께 일했던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렌런드 장로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렌런드 장로만큼 그 지역과 그곳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 사항에 자신을 쏟아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을 알고 그들의 문화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성도들이 구속의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특별한 증인으로 부름받다
2015년 9월 29일, 렌런드 장로는 예상치 못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제일회장단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저는 [교회 행정 건물에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과 두 분의 보좌들께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자리에 앉자 몬슨 회장님께서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렌런드 형제님, 저희는 형제님이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드립니다.”
렌런드 장로는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겸손하게 부름을 받아들였으며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몬슨 회장님께서는 제가 넋이 나간 것을 느끼셨는지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실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렌런드 장로는 문을 닫고 무릎을 꿇은 뒤 기도드렸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놀라워하면서도 주님과 그분의 교회와 저에게 절대적인 헌신을 보였습니다.”
딸 애슐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탁월함은 하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 부름을 위해 평생토록 봉사하시며 준비되어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넓은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십니다.”
렌런드 장로의 형인 게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동생은] 자신에게 온 부름을 위해 시험을 겪고 봉사하면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준비된 더 큰 계획의 일부이고, 저는 기꺼이 동생을 지지합니다.”
렌런드 장로는 부름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압니다. 저는 그분이 살아 계시며 그분은 저의 구주이자 여러분의 구주이심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됨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