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메시지, 의미, 그리고 사람들 무리
2019년 11월


메시지, 의미, 그리고 사람들 무리

우리 시대의 끊임없는 소음과 소요 속에서 그리스도를 우리 삶과 신앙과 봉사의 중심에 두도록 노력합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장면은 생후 7개월 된 새미 호 칭이란 아기가 지난 4월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연차 대회를 시청하는 모습입니다.

연차 대회를 시청하는 새미 호 칭

러셀 엠 넬슨 회장님과 다른 총관리 역원들을 지지하는 시간이 되자, 양손으로 우유병을 쥐고 있어야 했던 새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습니다.

지지하는 동안의 새미 호 칭

새미는 발로도 지지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반연차 대회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일 년에 두 번 갖는 이 모임의 의미에 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신약전서의 누가복음에 나오는 다음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1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의 대담함에 놀란 군중이 그 사람을 조용히 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끈질기게 소리친 결과 그는 예수님 앞으로 불려 가게 되었고, 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신앙 가득한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2

저는 짤막하지만 생생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감명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구주의 관심을 끌고자 외치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조용히 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오히려 목소리를 더욱 높였습니다. 이 성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결연한 신앙을 보여 주는 흐뭇한 일화입니다. 하지만 모든 성구가 그렇듯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근에 불현듯 저는 주변에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린 이 맹인의 분별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화의 전체적인 중요성은 몇 안 되는 익명의 여성과 남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맹인에게서 “이 무슨 소란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들썩한 소란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소위 통찰력을 지녔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소란의 근원이었습니다. 이 짧은 대화에는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과 확신에 관한 질문은 실제로 신앙과 확신이 있는 사람들에게 던져야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만일 그런다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3

그러한 신앙과 확신의 추구가 이 대회에 참석하는 우리의 목적이며, 오늘 우리와 함께함으로써 여러분은 이것이 많은 사람의 공통적인 목적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이곳 경내에서 우리는 곳곳에서 온 여러 다양한 규모의 가족들을 봅니다. 다시 만난 옛 친구들은 기뻐하며 서로를 껴안고, 훌륭한 합창단은 노래할 준비를 하고, 시위자들은 가두 연단에서 외쳐 대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선교 사업을 했던 사람들은 옛 동반자를 찾고, 최근에 귀환한 선교사들은 완전히 새로운 동반자를 찾아다닙니다.(제 말뜻을 아시겠죠!) 사진은 또 어떻습니까? 엄청나게 찍으시죠! 각자 손에 휴대폰을 든 우리의 목적은 이제 “모든 회원은 선교사”에서 “모든 회원은 사진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유쾌한 소란 가운데서 누군가는 당연히 “이게 모두 무슨 일이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신약전서에 나오는 그 일화처럼 시력, 즉 이해력을 축복받은 사람들은 이 대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해력과 그분께서 약속하시는 치유를 얻고 이 대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의미를 깨닫기 위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란에 휘둘리지 않고 그분께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연사의 기도, 노래하는 모든 이의 소망, 참석한 모든 사람의 경건함, 이 모든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평강의 왕이신 그분의 영이 임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로 그분의 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컨퍼런스 센터에서만 그분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처음으로 몰몬경을 읽으면서 아빈아다이의 용기나 2천 명의 청년 병사들의 행군에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는 이 놀라운 기록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중심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심을 부드럽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분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거대한 조각상처럼 우뚝 서서 여기에 등장하는 신앙을 고취하는 다른 모든 인물들을 연결해 주십니다.

우리 종교에 관해 배우고 있는 친구가 우리 종교만의 독특한 요소와 생소한 어휘 때문에 다소 난감해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제약, 자립 비축물, 개척자 이동로, 디지털 가계도,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숯불에서 약간 덜 익힌 훌륭한 등심 스테이크가 제공되리라 의심 없이 기대하는 수많은 스테이크 센터가 그런 예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새로운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혼란을 넘어서서 그 모든 것의 의미와 영원한 복음의 본질적인 초점, 즉 하늘 부모님의 사랑, 신성한 아들의 속죄 은사, 위안을 주는 성신의 인도, 이 모든 진리의 회복, 그 외에 많은 것에 집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전에 처음으로 가는 사람은 그 경험이 조금은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상징과 의식 절차, 의식복과 시각 자료 상영이 구주께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예배하는 대상은 바로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성전 현관 입구에 새겨진 그 문구를 읽는 순간부터 그 건물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엄한 교리가 성전 의식 곳곳에 스며 있듯이 우리 존재에 구석구석 스며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접하는 모든 경이로운 것 가운데 무엇보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야 합니다.

최근 몇 달간 교회에서 발표한 다수의 과감한 계획과 새로운 변화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서로 성역을 베풀고, 안식일을 더욱 훌륭하게 보내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것들을 구원의 반석 위에 더 확고히 서는 데 도움이 될 상호 연관적인 노력이라기보다 서로 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요소로 여긴다면, 우리는 이런 변경 사항이 계시로 주어진 참된 이유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4 이것이 바로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이 우리에게 계시된 교회의 명칭을 사용하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5 만일 예수님, 즉 그분의 이름, 그분의 교리, 그분의 모범, 그분의 신성이 우리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앨마가 가르쳤던 훌륭한 다음 진리에 더욱 힘을 싣게 될 것입니다. “장차 임할 일이 많이 있으되, 보라, 그 모두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음이니— … 구속주가 사시며 자기 백성 가운데 오시[느]니라.”6

한 가지 정리하여 말씀드리자면, 19세기에 조셉 스미스가 살았던 국경 지역에서는 기독교인 무리들 간에 경쟁이 불붙었습니다.7 하지만 이 열광적인 종교 부흥 운동가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일으킨 소요 속에서 어린 조셉이 그토록 간절하게 찾았던 바로 그 구주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조셉은 자신이 “암흑과 혼란”이라고 칭했던 상황에 고투하던 중에8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이야기한 그 어떤 것보다도 구주께서 이 복음의 중심이심을 입증하는 더욱 영광스러운 증거를 보고 들었습니다. 조셉은 미처 예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볼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받아 우주의 위대한 하나님이신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완전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시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아침 우리가 이야기했던 내용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가리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성한 정체성, 구원의 계획에서 그분의 절대적인 중요성,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분의 지위에 대한 그 어떠한 훌륭한 표현도 그 짧은 일곱 마디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소란과 혼란이 있습니까? 군중과 논쟁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 모든 것이 숱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회의론자와 믿는 자들은 이 시현과 사실상 제가 오늘 언급한 다른 모든 것을 두고 여전히 논쟁을 벌입니다. 여러분이 수많은 견해 속에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의미를 찾고자 애쓰고 계신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로 향하라고 권고드립니다. 또한 고대의 그 맹인이 여리고 길에서 시력을 얻고 약 1800년이 지난 후에 조셉 스미스가 시현을 보았다는 사실을 사도로서 증거합니다. 저는 이 두 사람과 그 이후의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인생에서 보고 듣는 가장 감격적인 장면과 소리는 바로 우리 옆을 지나가실 뿐만 아니라10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옆에 멈추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시는11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증거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 시대의 끊임없는 소음과 소요 속에서 그리스도를 우리 삶과 신앙과 봉사의 중심에 두도록 노력합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시야가 제한되거나, 우리의 확신이 약해지거나,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고 정제된다면, 우리가 더욱 소리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12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도의 열정과 선지자의 확신으로 약속드리건대, 그분은 여러분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장차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13 연차 대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