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2020년 11월


16:1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때, 다른 사람의 가치에 대한 비전이 생기며, 편견을 딛고 일어설 의지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이 메시지에서 말씀드리는 몇 가지 예시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제가 가르칠 원리는 어디에나 적용됩니다.

우리는 정치적 관계와 정책에 있어 분노와 증오가 만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올여름, 일부 시민들이 평화적인 시위의 경계를 넘어 파괴적인 행위에 가담했던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느꼈으며, 현재 진행되는 몇몇 공직 선거 운동에서도 그와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와 증오 중 일부는 교회 모임에서 정치적인 발언과 불친절한 언급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주 정부하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와 정책을 두고 일어나는 의견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정치적인 선택에 대해 논쟁하거나 비판하는 여러 상황에서 분노와 증오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산상수훈

구주의 가르침 가운데 분명 잘 알려져 있지만 좀처럼 실천되지 않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업신여겨 이용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3~44) 1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원수를 미워하도록 가르침 받았고,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의 통치와 잔혹함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업신여겨 이용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미대륙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

이는 인간관계와 정치적 관계에 관한 정말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주께서는 그와 같이 명하십니다. 몰몬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분쟁의 아비인 악마에게 속한 자임이라,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서로 노여움으로 다투게 하는도다.”(제3니파이 11:29)

원수와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힝클리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 그 정도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베풀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렇게 되려면] 우리의 능력 이상의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2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마태복음 22:37, 39) 두 가지 큰 계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또한 이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마태복음 7:7) 3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법 또한 따라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신성한 계명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다행히도 구주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율법과 인간이 만든 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과연 유대인이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으로 적들이 구주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자, 그분은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을 가리키시며 선포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누가복음 20:25) 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므로 우리는 정부의 통치하에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하고(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그러면서도 영원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어떻게 하면 적과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노여움으로 다투”지 말라는 구주의 가르침은 그 훌륭한 첫걸음입니다. 악마는 분쟁의 아비이며, 노여움으로 다투도록 사람을 유혹하는 이가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는 개개인과 무리 속에서 적대감을 키우고 증오하는 관계를 부추깁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분노는 “사탄의 도구”라고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화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5 분노는 분열과 적대감으로 이어집니다. 누군가와 의견이 어긋나더라도 분노하지 않고 적의를 품지 않을 때, 우리는 적을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한다면 그것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래된 한 뮤지컬에는 타인을 사랑하는 힘을 기르는 또 다른 단순한 방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할 때에는 그들을 더 잘 알아 가려 힘써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게 될 때 낯선 이에 대한 불신이나 적대감은 사라지고 우정과 사랑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봅니다. 6

적과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더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랑의 힘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많은 선지자의 가르침 가운데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오랜 격언이 있습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합시다. 온 인류를 향해 우리의 친절을 보여 줍시다.” 7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만일 전 세계의 남녀가 친절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푼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상당히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질시와 교만이 없는 사랑이며, 어떤 보상도 구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 편협이나 증오나 폭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종교적 신념이나 인종, 국적, 재정 상태, 교육 또는 문화와 관계없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함께 살도록 권장해 줍니다.” 8

또한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전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원을 확대”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9

원수를 사랑하는 일의 기본은 우리가 속한 다양한 나라의 법을 지킴으로써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분이 혁명이나 위법을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더 나은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현대의 계시에도 동일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땅의 법을 어기지 말지어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 땅의 법을 어길 필요가 없음이니라.

그런즉 … 현존하는 권세에 복종하라.”(교리와 성약 58:21~22)

초기 성도들이 미주리주 정부 관리들의 심각한 박해로 고통을 받은 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작성했던 신앙개조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왕, 대통령, 통치자, 장관에게 복종할 것과, 법률을 순종하고 존중하며 지지할 것을 믿는다.”(신앙개조 1:12)

이것은 우리가 법의 힘으로 집행되는 모든 일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현재의 법률에 순종하며, 법을 바꾸기 위해 평화적인 수단을 사용함을 뜻합니다. 또한 선거의 결과를 평화롭게 수용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선거의 결과에 실망한 사람들이 선동하는 폭력적 행위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며 평화롭게 살아갈 기회와 의무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주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사실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원리와 더불어 율법의 몇몇 기본 원리들은 최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평화적인 시위

한쪽 극단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가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는 법의 내용상 또는 집행상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고 거기에 촉각을 집중시키기 위한 공인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당함은 실제로 존재해 왔습니다. 집단으로서의 공적인 행동과 타인을 대하는 개인의 태도 속에 인종차별과 또 그와 관련된 불만이 있어 왔습니다. 전미 유색인 권리 향상 연합(the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의 테리사 에이 디어 목사는 설득력 있는 개인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종차별은 증오, 억압, 수동적인 태도, 무관심, 침묵 속에서 번성합니다.” 11 시민으로서, 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서, 우리는 인종차별 근절에 힘을 보태고자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불법 폭동

반대편 극단에서는 시위 및 그에 따른 불법 행위에 참여하거나 지지하는 사람 중 일부가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 시위는 평화적인 시위라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위자들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파괴하고 훼손하거나, 도둑질하거나, 정부의 적법한 경찰 권력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습니다. 헌법과 법률에는 혁명이나 무정부 상태를 권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경찰, 시위대, 지지자,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닌 권리의 한계와 현존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를 의무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폭도의 법으로 바로잡아야 마땅할 부당함은 없다.”라고 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은 옳았습니다. 12 폭도의 힘으로 부당함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영향력 있는 정부와 공식적인 경찰이 부재한 무정부 상태이며, 이 상태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보호되기보다는 오히려 훼손되고 맙니다.

미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시위가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나라에서라면 몰라도 미국에서는 다른 인종 간의 적대심과 불법 행위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인종차별 근절에 관하여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최근의 시위에서 전면에 부각된 흑인 미국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남미나 아시아계, 그리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는 인종차별에 관한 슬픈 역사가 있으며, 우리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엘리스 섬
이민자들

미국은 국적과 인종이 다양한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이들을 한데 묶어 주었던 목적의식은 특정 종교를 설립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민자들 본국의 다양한 문화 중 하나 또는 어느 한 종족의 종족 중심주의를 영속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을 세웠던 세대는 새로운 헌법과 법률을 통해 하나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의 헌법이 완벽했거나, 당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국 역사의 첫 200년은 헌법과 법률의 많은 부분에 개선이 필요했음을 여실히 드러내었습니다. 예컨대 여성의 투표권이 그러했고, 특히 노예제의 폐지와 더불어 노예로 살았던 이들이 자유로운 이들이 누리는 권리를 모두 누리도록 보장하기 위한 법률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예일 대학교의 두 학자는 최근에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다양성과 분열이 존재하는 사회를 통합할 특출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

미국의 시민은 민족 주체성과 다문화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미국인은 그 둘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은 헌법에 부합하는 애국심이다. 우리는 이념적 이견과 관계없이 헌법에 의해, 그리고 헌법을 통해 통합을 유지해야 한다.” 13

오래전 영국의 외무장관은 하원에서 열린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훌륭한 권고를 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도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우리의 국익이며, 우리는 이 유익을 좇을 의무가 있습니다.” 14

이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문제에서 “영원한” 유익을 좇을 훌륭한 세속적 이유입니다. 이에 더해, 주님의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서는 우리가 좇을 또 다른 영원한 유익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헌법과 많은 나라의 기본적인 법률에 영감을 준 구주의 가르침입니다. 일시적인 “동맹” 대신 확립된 법에 충실하는 것은 다양성 안에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가운데 적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때, 다른 모든 사람의 가치에 대한 신성한 비전이 생기며, 편견과 인종차별을 딛고 일어설 의지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수년 동안 이 나라의 여러 주를 다니며 생활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제게 이 나라의 법에 순종하고 법을 개선하고자 힘쓰는 동시에 적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분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우리가 순종하고자 할 때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간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1. 또한 누가복음 6:27~28, 30 참조.

  2. 고든 비 힝클리,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능력”,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61, 64쪽; see also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 (1997), 230.

  3. 또한 교리와 성약 6:5 참조.

  4. 또한 마태복음 22:21; 마가복음 12:17 참조.

  5. 토마스 에스 몬슨, “감정을 다스리십시오, 나의 형제여”,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68쪽.

  6. See Becky and Bennett Borden, “Moving Closer: Loving as the Savior Did,” Ensign, Sept. 2020, 24.

  7. Joseph Smith, History of the Church, 5:517. 마틴 루터 킹 2세(1929~1968)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폭력을 폭력으로 돌려주면 폭력이 배가되며, 이미 별 하나 없는 밤에 더욱 짙은 어둠을 더한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빛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2010], 64-65)

  8.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하워드 더블유 헌터 (2015), 263쪽.

  9. 러셀 엠 넬슨,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41쪽; see also Teachings of Russell M. Nelson (2018), 83.

  10. See “A House Divided,” The Economist, Sept. 5, 2020, 17–20.

  11. Theresa A. Dear, “America’s Tipping Point: 7 Ways to Dismantle Racism,” Deseret News, June 7, 2020, A1.

  12. Abraham Lincoln, address at the Young Men’s Lyceum, Springfield, Illinois, Jan. 27, 1838, in John Bartlett, Bartlett’s Familiar Quotations, 18th ed. (2012), 444.

  13. Amy Chua and Jed Rubenfeld, “The Threat of Tribalism,” Atlantic, Oct. 2018, 81, theatlantic.com.

  14. Henry John Temple, Viscount Palmerston, remarks in the House of Commons, Mar. 1, 1848; in Bartlett, Bartlett’s Familiar Quotations, 392; emphasis ad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