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스도: 어둠에 비치는 빛
2019년 5월


11:29

그리스도: 어둠에 비치는 빛

만일 여러분 간증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으며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십시오.

상호부조회 건물에 있는 저의 사무실에서는 솔트레이크 성전이 아주 잘 보입니다. 매일 밤 해 질 무렵이면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성전 외부등이 켜집니다. 성전은 창문 바로 바깥에서 저에게 변함없이 위안을 주는, 인도하는 빛과도 같습니다.

해질 무렵의 솔트레이크 성전

지난 2월의 어느 날 밤, 일몰 후에 저의 사무실은 특별히 더 어두웠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성전이 보였습니다. 외부등이 아직 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제가 수년간 매일 저녁 바라보던 성전 첨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첨탑의 불이 켜지지 않은 솔트레이크 성전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드리운 어둠을 보며 저는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빛의 근원, 즉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힘의 근원이시고 세상의 빛과 생명이십니다. 그분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탄은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세상의 압력을 그의 일에 이용하려 시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빛을 흐리게 하고, 연결을 끊고, 전원을 차단하여, 우리를 어둠 속에 혼자 남기려고 합니다. 이러한 압력은 이생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사탄은 우리를 고립시켜 오직 우리만이 그러한 것을 겪는 자라 속삭이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비탄으로 무력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행이 닥칠 때, 삶이 너무 힘들어서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여리고로 가던 사람처럼 맞고 죽은 것처럼 버려졌을 때,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시며,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십니다.1 우리 중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 너희 어깨에 놓인 짐을 가볍게 하리니 … 너희 등에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 나 주 하나님은 진실로 내 백성을 그들의 고난 중에 돌아보는 줄을 너희로 분명히 알게 하려 함이니라.”2 그리스도는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그저 너무 지쳐 있습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보다 더 빨리 달음질함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 그런데도 저는 많은 사람이 너무도 빨리 달리고, 때로는 에너지와 감정이 거의 바닥나기까지 한다는 것을 압니다.”3 기대치가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무엇을 내려놓으면 좋을지 하나님 아버지께 여쭤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할 경험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삶에 너무 지칠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고 끌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안식이 되십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스스로가 전형적인 틀에 맞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느낍니다. 신약전서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 세리, 어린이, 갈릴리 사람, 창녀, 여인, 바리새인, 죄인, 사마리아인, 과부, 로마 군병, 간음한 자, 의례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자 등 말입니다. 거의 모든 기록에서 주님께서는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라는 세리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으며, 부패한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께서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보시고 불러 이르시기를,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의 선한 바와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한 일을 보셨을 때, 예수께서는 그의 헌물을 받아들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6

그리스도께서는 니파이인들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명하여 너희 중 아무도 가버리지 않게 하[느니라.]”7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강력한 통찰력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8 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서로에게 참된 사랑을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후기 성도들에게 변함없이 요구되는 일입니다.9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초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네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네]게로 들어가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10 그리스도는 나무 위에 있는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저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로 낙심하고 짜증이 나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이른 아침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한 정자를 보았고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다섯 개의 아치로 둘린 그 정자의 창문은 돌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밀실 공포를 일으킬 만한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꿈속에서 불평을 했습니다. 그때, 야렛의 형제가 인내심을 가지고 돌을 녹여서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던 일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유리는 상태가 변화된 암석입니다. 주님께서 야렛의 형제의 돌을 만지셨을 때 그것들은 어두운 배 안에서 빛을 발했습니다.11 갑자기 저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그 정자 안에 있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곳은 제가 진실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저를 괴롭히던 의문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더 분명히 떠올랐습니다. “너는 야렛의 형제처럼 너의 돌들이 빛으로 바뀔 수 있도록 어떻게 신앙을 키워 나가겠느냐?”12

필멸의 상태인 우리의 뇌는 조금씩 차차 이해하고 뜻을 찾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필멸의 삶을 덮고 있는 휘장이 왜 그처럼 두터운지 저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발전 과정에서 이생은 모든 대답이 주어지는 단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생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소망을 발전시키는 단계입니다. 확신이 늘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오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눈에 처음에는 그것이 돌로 된 창문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밀실 공포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인내를 가지고 믿음에 바탕을 둔 질문을 한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의 돌로 된 창을 유리와 빛의 창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시야를 밝히는 빛이십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결코 충분히 선해질 수 없다고 느낍니다

구약전서에 나오는 주홍색 염료는 색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착색 견뢰도가 높았습니다. 즉 그 선명한 빛깔은 양털에 달라붙어 아무리 여러 번 세탁해도 물이 빠지지 않았습니다.14 사탄은 다음의 논리를 곤봉처럼 휘두릅니다. 주홍으로 물든 양털은 결코 다시 하얘질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길은 너희 길보다 … 높음이니라.”15 그리고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그분의 주홍색 피가 우리를 순결한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은 그분의 은혜로 인한 기적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됩니다.

주홍으로 물든 양모

사진: iStock.com/iinwibisono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6 주께서는 단호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 죄를 회개한 자, 그는 용서받으며, 나 주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17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8 너희는 실수를 저질렀고 모두 불완전하도다.19 내게로 와서 회개하면,20 내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21 너희는 다시 온전하게 될 수 있도다.22 네가 해야 할 일이 나에게 있느니라.23 그리스도는 양털을 희게 만드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떤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할까요? 우리의 빛이 깜박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다시 연결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러셀 엠 넬슨 회장님은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성약을 맺고 지키는 것입니다. … 그 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24 그리스도를 여러분 삶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25

만일 여러분 간증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으며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질문을 여쭤보십시오. 인내를 가지고 돌을 유리로 녹여 내십시오.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십시오.

예수께서는 “나는 어둠에 비치는 빛이되,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느니라”2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둠이 빛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빛이 항상 여러분을 비출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불이 켜진 솔트레이크 성전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솔트레이크 성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들은 즉시 문제를 알아차렸고, 시설 관리자 발 화이트 형제님에게 연락했습니다. 성전 외등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먼저, 성전 직원들은 직접 성전에 있는 모든 전기 배전반으로 가서 수동으로 불을 다시 켰습니다. 그런 뒤 자동 전원 공급 장치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점검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불빛을 다시 켜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친구들이 필요하고 서로가 필요합니다. 성전 시설 직원들처럼 우리는 직접 가서 우리의 영적 배터리를 재충전해 주고 고장 난 곳을 수리함으로써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성탄 절기의 솔트레이크 성전

어쩌면 우리 개개인이 발하는 빛은 나무에 걸린 전구 한 개의 불빛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작은 빛을 밝힌다면 마치 성탄 절기의 템플스퀘어처럼 그 빛을 모두 모아 수백만의 사람들을 주님의 집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넬슨 회장님께서 격려하신 것 같이, 우리는 우리의 성약을 지키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구주의 빛을 우리 자신과 또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러한 충실한 행동을 권능과 기쁨으로 보상하십니다.27

저는 여러분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증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진보하고 계시니 계속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숨은 희생을 모두 보고 계시며 그것을 헤아려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의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8는 뜻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설혹 너무 캄캄해 아주 멀리 볼 수 없을지라도 성약의 길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빛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빛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이 참됨을 간증드립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가까이 가리라. 나를 부지런히 찾으라. 그리하면 나를 찾으리라. 구하라 그리하면 받게 될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리라.”2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