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교회 역사 주제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조셉 스미스의 부모와 형제들이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방식은 조셉이 선지자로서 초기에 했던 일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기도와 성경 탐구에 몰두했던 것은 부모의 종교적 헌신에서 상당 부분 기인한 면이 있다. 조셉이 천사의 시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이미 심오한 영적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던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1 후에 조셉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의 이름과 행적이 언제나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절절하게 기록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훌륭한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어떤 말로도 감사를 다 표할 길이 없다.”2

조셉 일세와 루시는 신혼 시절부터 흉작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버몬트와 뉴햄프셔에서 여러 번 거처를 옮긴 끝에 뉴욕주에 있는 핑거 레이크스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형편이 다소 나아졌다. 1816년, 스미스 가족은 뉴욕주 팔마이라로 이주했고, 곧 그 근처 맨체스터에 있는 농장에 정착했다. 그 이후 조셉은 15년 동안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초기의 여러 시현을 경험하고, 몰몬경을 번역하여 출판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했다.3

스미스 가족은 교회를 따라 1831년에는 오하이오주 커틀랜드로, 1838년에는 미주리로, 1840년대 초반에는 일리노이주 나부로 이주했다. 조셉 일세와 루시는 남은 생애 동안 성인이 된 자녀들과 함께 생활했다. 비극적이게도, 1841년부터 1844년까지 불과 4년 사이에 조셉 일세와 그의 네 아들(돈 칼로스, 하이럼, 조셉, 새뮤얼)은 질병에 걸리거나 살해되어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 대부분은 조셉 스미스의 사망 후 그레이트베이슨으로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셉 스미스 일세(1771~1840)

(교회 역사 주제 “조셉 스미스 일세” 참조)

루시 맥 스미스(1775~1856)

(교회 역사 주제 “루시 맥 스미스” 참조)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아들(1797년경)

조셉 일세와 루시는 결혼한 지 약 1년 만에 첫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신생아 때 사망했다. 스미스 가족은 이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았다.4

앨빈 스미스(1798~1823)

스미스 가족 자녀 중 유아기를 무사히 지난 첫 번째 자녀인 앨빈은 1798년 2월 11일에 버몬트 턴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앨빈의 어머니는 그를 “친절하고 다정”하며 “선한 성품을 지닌 훌륭한 청년“이라고 묘사했다.5 스미스 가족이 팔마이라로 이주한 후, 앨빈은 가족의 생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솔선하여 스미스 농장에 목조 가옥을 지었다.

앨빈은 모로나이 천사가 나타났다는 조셉의 이야기를 믿었으며, 그 천사의 지시를 따르도록 동생을 격려했다. 스미스 가족의 한 친구에 따르면, 모로나이가 조셉에게 몰몬경 판을 취할 때 앨빈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6 하지만 앨빈은 26세 생일을 불과 몇 달 앞두고서 병으로 사망했다. 루시 스미스는 앨빈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이 “담석산통”이었다고 밝혔다.7 앨빈을 치료했던 의사는 수은과 염소 화합물인 “감홍”(염화제일수은의 약품명)이라는 약을 투여했는데, 이는 당시 많은 내과 의사들이 독성이 있다고 여겼으나 프리랜서 의사들은 흔히 사용하는 치료약이었다.8 결국 이 치료 때문에 앨빈의 상태는 악화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망했다. 역사가들은 그가 사망한 주요 원인이 맹장염이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9

루시는 자신의 짤막한 전기에서 앨빈의 약혼녀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언급했으나, 앨빈의 약혼과 관련하여 그 외에 더 알려진 바는 없다.10

앨빈의 죽음으로 스미스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한 지역 목사는 앨빈이 침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뜻을 내비쳐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11 1836년에 해의 왕국에 관한 시현을 받은 조셉은 앨빈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앨빈처럼 “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계시를 주셨다.12 조셉이 1840년에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침례의 교리를 발표했을 때, 그의 형 하이럼은 미시시피강에서 앨빈을 위해 침례받았다.

하이럼 스미스(1800~1844)

(교회 역사 주제 “하이럼 스미스” 참조)

소프로니아 스미스 스토더드 매클리어리(1803~1876)

스미스 가족의 맏딸인 소프로니아는 1803년 5월 16일에 버몬트 턴브리지에서 태어났다. 몇 년 뒤, 이 지역에 장티푸스가 창궐했을 때 소프로니아와 동생 조셉은 가족 중 가장 위중한 병세를 보였다. 당시 3개월째 장티푸스로 투병 중이었던 아홉 살 소녀 소프로니아는 어느 날 갑자기 호흡이 멎었다. 온 몸에는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소프로니아의 어머니인 루시는 그런 딸을 담요로 감싸 안고 마루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이웃들은 소프로니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며 루시를 설득했다. 하지만 소프로니아는 결국 한참 뒤에 깨어나 가쁜 숨을 내쉬며 흐느껴 울었다. 병에서 회복된 소프로니아는 73세까지 살았다.13

소프로니아는 동생 조셉의 시현을 믿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가혹하게 대할 때면 그녀는 고통스러워했다. 조셉이 모로나이 천사에게서 판을 받고 두어 달 뒤, 소프로니아는 캘빈 스토더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나중에 교회로 개종했다. 소프로니아와 캘빈은 14개월 된 딸 유니스를 데리고 루시의 일행을 따라 오하이오주 커틀랜드로 떠났다. 하지만 커틀랜드에 도착한 지 두 달 뒤, 어린 유니스는 원인 모를 죽음을 맞았다. 소프로니아는 1년 뒤 두 번째 자녀 마리아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 캘빈은 성도들이 오하이오를 떠나기 전 무렵에 뉴욕에서 사망했고, 소프로니아는 34세에 홀로되었다.14

소프로니아는 1838년에 윌리엄 매클리어리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미주리로, 그다음에는 일리노이로 계속해서 이주했다.15 소프로니아와 윌리엄은 윈터쿼터스로 떠날 계획이었던 같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기 전에 윌리엄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소프로니아는 자신의 친정 가족과 함께 일리노이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 30년 동안 그녀는 여동생인 캐더린과 루시의 이웃에 살다 1876년에 세상을 떠났다.16

조셉 스미스 이세(1805~1844)

(교회 역사 주제 “조셉과 에머 헤일 스미스 가족” 참조)

새뮤얼 해리슨 스미스(1808~1844)

몰몬경이 기존 교회들 개혁의 시발점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던 새뮤얼 스미스는 자신의 형 조셉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는 걱정스러워했다. 그는 근처 숲에 가서 주님께서 조셉을 인도하시는 것이 맞는지 알기 위해 기도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례를 받겠다고 말했고, 그로써 새뮤얼은 조셉과 올리버 다음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새뮤얼은 복음 안에서 충실하게 여생을 보냈다.17

새뮤얼은 몰몬경의 여덟 증인 중 한 명이며, 교회 역사상 복음 전파에 나선 첫 번째 선교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18 1830년, 짧은 선교 사업 기간 동안 그는 영 가족에게 몰몬경을 전했다. 새뮤얼이 전한 이 몰몬경을 통해 장차 교회의 회장이 될 브리검 영과 사도가 될 히버 시 킴볼에게 회복된 복음이 소개되었다.19

새뮤얼은 2년 뒤에 다시 선교 사업을 떠나 미국 북동부에서 여러 지부의 조직을 도왔다.20 그는 이때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메리 베일리를 만났다. 새뮤얼과 메리는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21 새뮤얼은 커틀랜드에서 선지자 학교에 참석했으며, 고등평의회 일원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나부에서는 빈슨 나이트 감독의 보좌로 봉사했으며, 시의원, 나부 군단의 일원, 나부 대학교 이사, 나부시 의회 의원 등으로도 활동했다.22

1841년에 메리가 출산 도중 사망하자 새뮤얼은 이후에 레비라 클라크와 결혼했다.23 그들이 일리노이 플리머스로 이주해 그곳에 살던 중 새뮤얼은 형들인 조셉과 하이럼이 카테지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작성된 기록에 따르면, 새뮤얼은 형들을 돕기 위해 말을 타고 가다가 덤불 속에 숨어 있던 두 명의 남자와 맞닥뜨렸는데, 새뮤얼은 그 즉시 그들에게 추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가까스로 그들을 따돌리고 카테지로 갔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들이 숨진 뒤였다. 충격과 비탄에 빠진 새뮤얼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인근 호텔에 안치했다가 이후에 나부로 운반했다.2 비극적이게도, 그로부터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새뮤얼도 숨을 거두었다. 한 지역 신문은 사망 원인으로 “구토를 동반한 고열”을 지목했지만,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가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치명적인 공격을 당해 중병을 얻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25

이프리엄 스미스(1810)

조셉 일세와 루시의 일곱 번째 자녀이자 여섯 번째 아들이었던 이프리엄 스미스는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10년 3월 13일에 태어나 3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이프리엄은 스미스 가족이 버몬트 로열턴에서 살던 시절에 태어났다.26

윌리엄 비 스미스(1811~1893)

윌리엄 스미스는 형 조셉이 선지자로서 했던 주장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 그는 일생 동안 교회의 여러 부름을 맡아 수행했고, 초대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도 봉사했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선교 사업을 나갔으며, 이스라엘 진영과 함께 미주리로 행군했고, 교회 축복사로 성임되었다.27

윌리엄 스미스 사진

윌리엄 스미스 사진

1833년에 윌리엄은 선교 사업 중에 만났던 가족의 일원인 캐럴라인 어맨다 그랜트와 결혼했다. 1845년 캐럴라인이 사망하기 전에 윌리엄은 복수 결혼을 시행했으며, 자신의 형들인 조셉과 하이럼이 순교를 당하기 몇 달 전에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다.28 1844년부터 1889년 사이에 윌리엄은 네 차례 더 결혼했다. 그중 두 차례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이 났다. 윌리엄은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다.29

윌리엄은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는 나부에서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짧은 기간 동안 Nauvoo Wasp(나부 와스프) 편집자로 재직했으나, 또 다른 지역 신문 편집자인 토머스 시 샤프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후 그 직에서 물러났다. 윌리엄은 일리노이 주의회에서 핸콕 카운티를 대표해 나부 시 헌장을 옹호하며 나부 시 헌장을 폐지하라는 요청에 맞섰다.30

조셉 일세와 루시의 아들 중 1844년 여름을 넘기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윌리엄은 조셉의 뒤를 이을 선지자로 처음에는 브리검 영을 지지했다. 하지만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들과 불화를 겪은 뒤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교회 통솔권을 차지하려는 한 차례의 짧은 시도가 불발에 그친 뒤 1845년에 교회에서 파문되었다. 이후 여러 교회를 전전하던 그는 자신의 조카 조셉 스미스 삼세가 이끄는 복원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Reorganized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 Day Saints)에 안착하게 되었다.31

1861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윌리엄은 입대가 가능한 나이라고 속여서 북부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동안 윌리엄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많은 군인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 중간에 철자 “B”를 넣었다. 그는 82세가 되던 해인 1893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32

캐더린 스미스 솔즈베리 이세(1813~1900)

스미스 가족의 둘째 딸이었던 캐더린은 십 대에 교회에 개종했다. 조셉이 캐더린과 소프로니아에게 폭도들의 눈을 피해 금판을 숨겨 달라고 부탁하자 두 사람은 침대 시트로 금판을 덮고 그 위에 누워 자는 척했다는 일화가 가족들 사이에 전해졌다.33 캐더린은 어머니 루시와 함께 오하이오 커틀랜드로 이주하여, 교회에 갓 개종한 윌킨스 젠킨스 솔즈베리와 그해에 결혼했다.34

캐더린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윌킨스는 직장을 찾느라 애를 먹었고, 알코올 중독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적어도 10년 동안은 교회 회원으로 생활하지 않았으며, 유타에서 지도자들과 불화로 겪던 중 사망했다. 캐더린은 때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녀들을 키웠다. 1843년에 어떤 사람이 솔즈베리 가정을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혹독한 겨울 날씨에 신발도 없이 지내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했던 일도 있었다. 스미스 가족은 캐더린이 이러한 시련을 헤쳐 나가도록 도왔고, 교회 지도자들 역시 그녀에게 일리노이에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돈을 보내는 등 도움을 주었다.35

캐더린은 조셉과 하이럼의 사망 이후에 어머니와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일리노이에 남았다. 1853년에 윌킨스가 세상을 떠나자, 캐더린은 어머니와 자매들 가까이에 정착해서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들인 돈 칼로스가 열네 살이 되자 그녀는 언니인 소프로니에게 그를 보냈는데, 아마도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던 듯하다. 캐더린은 서부로 떠나지는 않았지만, 유타에 있던 친척들과 우호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친척들은 선교 사업을 나갈 때면 캐더린을 자주 방문했다. 그녀는 1900년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돈 칼로스 스미스(1816~1841)

그의 가족들은 돈 칼로스 스미스가 온화하고, 친절하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조셉이 몰몬경을 출판했을 때 돈 칼로스는 14세에 불과했지만 일찍부터 자신의 형을 지지했다. 조셉은 그가 “내 간증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기록했다.37 복음을 받아들인 그해 후반에 돈 칼로스는 아버지를 따라 뉴욕 스톡홀름으로 가서 친척들에게 교회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얼마 뒤, 돈 칼로스는 어머니와 누나들과 함께 오하이오 커틀랜드로 이주했다.38

돈 칼로스는 커틀랜드에서 거주하는 동안 올리버 카우드리 밑에서 인쇄업을 배웠다. 돈 칼로스는 교리와 성약 초판을 포함하여 교회의 초기 문헌 출판의 많은 부분을 도왔다. 돈 칼로스는 부모의 집에 하숙하던 보스턴 출신의 개종자 애그니스 몰턴 쿨브리스와 1835년 7월 30일에 결혼했다.39 돈 칼로스와 애그니스는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나부로 이주한 뒤에도 돈 칼로스는 계속해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그는 Times and Seasons(타임스 앤드 시즌스)를 편집 및 출판했으며, 몰몬경 제3판 인쇄를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40 돈 칼로스는 펜실베이니아, 뉴욕, 버지니아,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 등지에서 짧게 선교 사업을 했으며, 대제사 정원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41 그는 1841년 8월 26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또한,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인 조셉과 에머의 젖먹이 아들 역시 불과 8일 만에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42

루시 스미스 밀리킨(1821~1882)

1821년 7월 8일에 루시 스미스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오빠 조셉은 이미 첫번째 시현을 경험한 뒤였다. 루시는 조셉의 종교적 성역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생활하며 커틀랜드와 미주리에서 초기 교회 시절을 경험했다. 일리노이 커머스에(이후에 지명이 나부로 변경됨) 도착한 직후, 루시는 메인주에서 온 개종자 아서 밀리킨과 결혼했다. 그녀는 나부 상호부조회의 일원이었으며, 1843년에 남편과 함께 메인주로 선교 사업을 떠났다. 루시는 오빠들인 조셉과 하이럼이 세상을 떠난 뒤 일리노이에 남았다. 그녀는 1846년부터 1852년까지 연로한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서 모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4년 뒤, 루시는 일리노이 콜체스터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그녀와 남편은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1880년 무렵, 호흡기 질환에 걸린 며느리를 돌보던 루시는 자신 역시 그 병에 감염되어 1882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43

루시 스미스 밀리킨 사진

루시 스미스 밀리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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