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3–15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세미나리를 가르침, 13–15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Conference Report, April 1998, 30–34; 또는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25~27쪽에서 발췌.
구주의 초기 성역 시절, 니고데모가 예수께 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한복음 3:2]라고 말했는데, 우리 모두를 대신한 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선생 이상이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영원한 복음 계획에서 거룩한 분으로, 세상의 구주요 구속주이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여러분과 제가 시작하는 방법으로, 즉 어린이나 젊은 학생들, 또는 개종자가 우리 마음의 가장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정을 감화시키는 감동적인 교사를 알아보고 답할 때 시작하는 방법으로 그 말을 열었습니다.
회원들을 양육하는 영감 어린 가르침
최근 몇 달 동안에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우리 성도들, 특히 새로운 개종자들을 교회에 가까이 끌어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힝클리 회장님은 이 요청을 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신앙 속에서 굳건히 남기 위해 최소한 세 가지 것, 즉 친구, 책임,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통한 양육]”[모로나이서 6:4; 또한 고든 비 힝클리,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47쪽 참조]의 필요성을 상기시키셨습니다. ……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3~14, 17; 기울임체 추가]
더욱 우수한 교수법을 소생시킴
우리의 선지자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더욱 큰 신앙을 가지라고 요청하고 계시는 이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실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연단에서, 우리의 관리 모임에서 더욱 우수한 교수법을 소생시키고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영감을 받아 가르치는 기술이 교회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며, 그것을 추구하는 전통도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스테이크 회장님, 감독님, 그리고 지부 회장님, 교회에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특별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회원들 대다수가 교회에 와서 공과반에서나 모임에서 번번히 [영감 받지 못한 채] 그냥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삶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유혹을 받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으로 감화되고 양육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효과적인 가르침은 영으로 감화되고 양육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종종 회원들을 교회로 오게 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합니다만, 그런 후에 그들이 와서 무엇을 얻느냐를 충분히 지켜보지를 않습니다.”[ The Teachings of Spencer W. Kimball , ed. Edward L. Kimball(1982), 524; 기울임체 추가] 이 점에 관해서 힝클리 회장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효과적인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력의 본질입니다.” 제가 이를 되풀이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효과적인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력의 본질입니다.” 힝클리 회장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모든 남녀가 효과적인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단련할 때에만 올 것입니다. 이들을 강제로 의로움이나 천국으로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인도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가르침입니다.”[“How to Be a Teacher When Your Role as a Leader Requires You to Teach”, General Authority Priesthood Board Meeting, 5Feb. 1969; 기울임체 추가]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과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첫 말씀 가운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사도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먹이라 …… [너희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21:15~19]
영으로 복음을 가르친다
이 모든 것 중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영 곧 진리를 가르치도록 보냄을 받은 보혜사로 말미암아”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신 것 외에는 교회 회원들에게 더 힘주어 권고한 것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영으로” 복음을 가르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가르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만일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할진대,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니라”[교리와 성약 50:14, 17~18]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계명에서도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영을 받지 아니하거든 가르치지 말지니라.”[교리와 성약 42:14]
영원한 학습은 하늘로부터의 영의 자극을 받지 않고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교사나 지도자들이나 우리들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대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과업을 대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안 모세가 여호와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애굽기 33:15]
그것은 우리 회원들이 모임에 참석하거나 공과실에 들어올 때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복음의 몇 가지 국면을 보거나,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교회에 오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것들 모두가 중요해도 말입니다. 그들은 영적 경험을 얻으려고 옵니다. 그들은 평안을 원합니다. 그들은 굳건한 신앙과 새로운 희망을 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으로 양육되고 하늘의 권능으로 강화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말씀을 하거나 가르치거나 인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제공하도록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또 우리 자신이 지속적으로 독생자의 빛을 구한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 마음이 올바르고 될 수 있는 한 정결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까지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준비하고 근심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앨마와 모사이야의 아들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머리를 들고 기뻐하라. …… 내가 성공을 네게 주리라”[앨마서 8:15; 26:27]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으로 양육함
……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몰몬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칼이나 그들에게 일어났던 다른 어떤한 것보다, 백성들의 생각에 더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앨마서 31:5]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위기가 닥칠 때 몇 가지 경전 구절과 시로 짜 맞춘 인간의 철학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청소년과 새로운 회원들이 삶에서 압박을 받을 때 그들을 격려하는 방법으로 양육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짝 이론같이 영적인 영양가가 없는 것들을 주고 있습니까? 존 테일러 회장님은 한때 그 같은 가르침을 하루 종일 먹어도 만족감을 못 느낄 것 같은 “튀긴 거품”이라고 일컬었습니다.[John Taylor, The Gospel Kingdom , sel. G. Homer Durham(1943), 78 참조]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은 몇 년 전 혹독한 겨울 동안 상당수의 사슴들이 뱃속에 건초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도 굶어 죽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지만 관리인들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 대신에 외견상의 피상적인 것을 공급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사슴들을 먹였으나 양육하질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반세기도 더 전에 제이 르우벤 클라크 회장님이 우리 청소년에 대해 하신 말씀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회원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몹시 배우고 싶어 하며, 복음이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것이기를 원합니다. ……
…… 여러분은 [그들] 뒤로 몰래 다가가서 [그들의] 귀에 대고 종교를 속삭이지 않아도 됩니다. …… 여러분은 이 진리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됩니다.”[“교회 교육의 진로”(1938년 8월 8일 유타 주 아스펜 그로브에서 열린 브리검 영 대학교 여름 학교에서 전한 말씀), 4, 9쪽]
사탄의 가르침은 확실히 난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가정에서 자녀들을 지도할 때든지, 교회에서 청중들 앞에 서 있든지 간에 우리의 신앙을 결코 탐지하기 어렵게 만들지 맙시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온”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의심의 씨앗을 뿌리지 마십시오. 자기 잇속만 차리는 행위와 허식을 피하십시오. 공과를 잘 준비하십시오. 경전에 바탕을 둔 설교를 하십시오. 계시된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진심에서 우러난 간증을 하십시오. 기도하고 실천하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관리 모임에서도 계시의 말씀처럼 “가르치며 덕을 세[웁시다.]” 이런 모임에서도 우리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높은 곳에서”[교리와 성약 43:8, 16] 받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로마서 2:21]라고 말한 것처럼 더 잘 될 것이고, 여러분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모범
그러한 가르침의 권능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분은 대부분의 교사나 연사나 교회 역원이 부름 받을 때 느끼는 식으로 경험이 없고, 부적합하며, 두렵다고 느꼈습니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 그들에게 말하라”[예레미야 1:6, 8, 17]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님이 시키신 대로 그들에게 말했지만 처음에는 그리 큰 성공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졌고 끝내는 투옥되고 사람들 사이에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해를 입은 것에 화가 난 예레미야는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가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들이 구도자이든, 초등회 어린이든, 새 개종자이든 간에, 아니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열다섯 살짜리든 간에 말입니다. 낙담한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주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예레미야의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간증한 모든 말과 그가 읽었던 모든 경전 구절과 그가 가르쳤던 모든 진리와 더불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입을 닫고 주님의 사업에서 떠나겠다고 맹세했을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까닭은 이랬습니다. “나의 마음이 [그의 말씀으로]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7~9 참조]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온” 교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 양쪽 모두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니파이와 리하이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힐라맨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사 저들의 마음에 들어가시니, 저들이 마치 불로 채워짐같이 충만하게 되어 기이한 말을 할 수 있더라.”[힐라맨서 5:45] 확실히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동산 가까이에서 뜻밖에도 사랑하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단순히 “랍오니”, 즉 문자 그대로 “선생님”[요한복음 20:16]이라고 말할 때 그녀가 경험한 천국의 기쁨과도 같은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우리들 모두는 가르치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일을 강화시키고, 가르치고 교화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모임과 모든 메시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과 새 개종자들, 우리 이웃과 새 친구들이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는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님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시요,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