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봉인된 책,”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23–32
“성경, 봉인된 책,” 세미나리를 가르침, 123–32
성경, 봉인된 책
보충자료, 신약전서 심포지움, 1984년 (1984), 1~7쪽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제 교사라는 우리 일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왕국의 수많은 신비가 담긴 봉인된 책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러한 신비는 복음을 가르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제가 다룰 특정 주제는 봉인된 책인 성경이지만, 이 주제에 접근하고 다룰 방법은 통상적인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다뤄야 할 것들이 많은데,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화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단순 명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꽤 잘 알려진 다음 글귀가 제가 하려는 말을 어느 정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모든 이여
늦거나 빠르거나 죽음은 찾아온다.
그렇다면 선조의 유산과
신들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
두려운 위험과 맞서는 것 만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는가?
(Thomas Babington Macaulay, “Horatius,” lines 219–24, in The Lays of Ancient Rome, 1842.)
이보다는 좀 더 평이한 번역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좀 더 일상어에 가깝거나,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위서에나 등장할 법한 것입니다. 그 번역은 이렇습니다. 바보들은 천사들이 감히 걸을 엄두도 못 내는 길에 뛰어든다. 그렇더라도 할 수 없지.
이사야와 요한 모두가 봉인된 책에 관해 말합니다. 이사야는 그의 예언에서 봉한 책의 일부를, 견고한 지성의 탑이라 할 수 있는, 그 책을 가져오라고 했던 유식한 사람에게 가져간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 책의 3분의 2가 봉해졌다는 말을 듣자 세상의 언어에 능통한 그 뛰어난 지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봉해진 책은 읽을 수 없다.”(조셉 스미스—역사 1:65) 이 예언은 마틴 해리스가 몰몬경 판에서 복사한 문자들 일부를 뉴욕 시로 가져가 찰스 안톤 교수에게 보였을 때 성취되었습니다.(이사야 29장; 니파이후서27장; 조셉 스미스—역사 1:63~65 참조)
계시자 요한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 한 권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 대해 현대의 계시는 이같이 말합니다. “그 책에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여러 비밀과 일들이 실려 있으니, 이 지구가 칠천 년 지속되는 동안 곧 현세적으로 존재하는 동안 이 지구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감추어진 것들이 실려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77:6) 각각의 인은 천 년을 뜻합니다. 이 일곱 인을 뗄 권능은 요한이 보았던 것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요한계시록 5: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지식이 몰몬경의 인봉된 부분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그 두 봉인된 책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복천년 동안에 몰몬경의 인봉된 부분이 번역되었을 때, 전세의 삶, 만물의 창조, 타락과 속죄와 재림, 완전한 성전 의식, 변형된 이들의 성역과 사명, 영의 세계인 낙원과 영옥에서의 삶, 부활한 이들이 상속받게 될 영광의 왕국들, 그리고 그와 같은 많은 것들이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선 한 예를 들자면, 이렇게 추가된 교리들은 현재 학문의 전당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생물 진화론 전체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그것들은 이 지구와 모든 생명체, 그 외 행성들의 창조에 관하여 상정된 모든 인간들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개념과 기간을 말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슬프게도 그 때가 되어 선택을 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될 때 하나님 대신 다윈을 선택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와 요한이 말한 봉인된 책에 관해 언급하는 목적은 지금 우리 손에 있는 봉인된 책인 성경에 관한 고찰을 하기 위한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님만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책의 일곱 인을 떼실 권능을 가지셨듯이, 몰몬경의 인봉된 부분이 세상에 드러남은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의로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천사들과 온전히 교감하지 못하게 하는 불신이란 저주스러운 휘장을 찢어 버리고 야렛의 형제와 같은 신앙을 얻게 될 때, 우리는 그가 얻은 바와 똑같은 지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께서 오신 이후에나 일어날 것입니다.(이더서 4장 참조)
몰몬경은 하나님의 권능과 은사로 나아와 번역되었습니다. 학식 있는 자의 학문과 배움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언어학적 지식으로 훈련 받은 뛰어난 지성의 거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신의 권능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번역자는 “나는 학자가 아니라”(니파이후서 27:19)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학자는 [그 판의 기록]을 읽지 못하리니”(니파이후서 27:20)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비결이 있습니다. 몰몬경이 배우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은사와 권능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그가 번역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60일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당대의 가장 유식한 학자들과 번역자들이 고대 사본을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해서 고심하며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류와 오역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지혜나 속세에서 벗어난 수도원, 학위,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지식 등 이러한 모든 것에서 특별한 지적 통찰력을 얻을 수는 있을테지만 성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것은 오직 하나님 영의 권능으로만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2장 참조) 그래서 주님은 “내가 세상의 약한 것들 곧 무식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불러”(교리와 성약 35:13)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분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바울은 참으로 훌륭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고린도전서 1:20, 25~27)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바울과 함께 앉아야 합니다. 우리는 왕국들과 나라들과 언어들에 관한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교리와 성약 88:76~81 참조) 야곱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고에 귀 기울일진대 학식을 얻음은 좋으니라”(니파이후서 9:2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결부된 것보다 더 중요하고, 모든 연령층의 현명한 사람들 전부의 지적 능력으로 얻어진 모든 지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할 필요성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배우지 못한 이를 통해 몰몬경이 세상에 나왔다는 그 방식은 왕국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본보기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할 때 그분은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사업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확고히 믿고 있으며 신중하게 판단한 바에 따르면, 지금 우리에게 있는 성경은 봉인된 책입니다. 신앙과 의로움으로만 밝혀질 야렛인의 인봉된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은 우리 시대의 의로운 사람들과 사악한 사람들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일곱 인으로 봉해진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인이 무엇인지 밝힐 것이며 이것들을 어떻게 떼어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지상의 모든 이들이 읽고 믿고 이해하는 열린 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인지 말해야 하며 구원을 얻는 것과 성경과의 관련, 그리고 다른 영감 받은 저술들과의 관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성경이 책 중의 책임을 압니다. 성스러운 경전으로,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주님의 마음과 뜻과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여진 세상의 그 어떤 책보다도 이 세상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성경에 대해 우리만큼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으며, 그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기뻐하며, 그것이 선포하는 신성한 표준에 따라 살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주의 기독교인처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말하지 못하는 자의 혀를 갖고 계셔서 더는 말씀하시지 않고, 계시도 주지 않으시며, 그분의 뜻을 자녀들에게 밝히지 않으신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지난 수많은 세월 동안 주신 계시라는 거대한 붉은 삼나무에서 기껏해야 작은 조각, 작은 가지, 나뭇잎에 불과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현대의 성경에 보존된 계시보다 수천만 배 더 많은 계시가 지금까지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보다 영적으로 더 깨어 있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왔던 계시된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에서 물 한 양동이, 한 들통, 기껏해야 시냇물 만큼의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성경에 보존된 작은 분량의 진리조차도 원래의 명백함과 온전함을 잃어버린 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한 천사가 니파이에게 반복해서 강조하여 말하기를 성경, 즉 구약전서와 신약전서 모두 처음 기록되었을 때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담겨 있었지만 “저 크고 가증한 교회 …… 다른 모든 교회보다 가장 가증한 [교회]”(니파이전서 13:26)의 손을 거치면서 명백하고 귀한 많은 부분과 주님의 성약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없어졌고 결과적으로 심히 많은 이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 또는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니파이전서 13장 참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인도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금 그대로의 성경에는 이 반항적이고 사악하며 배도한 세상이 받을 자격이 되는 만큼에 해당하는 주님의 말씀이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현재 구성대로의 성경은 인간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몰몬경을 받아들이도록 사람을 준비시킵니다. 진실하게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몰몬경을 받아들이며, 몰몬경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깨우침을 얻은 사람들은 앞으로 세상에 드러날 인봉된 책에서 더 큰 빛과 지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한 책들은 반복하건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성신의 인도를 받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성경은 신의 섭리로 모든 사람이 아무리 영적 은사가 작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진리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며,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도들을 위해 보존된 깊고도 감추인 것들을 배울 수 있도록 쓰여졌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에 국한하여 바라볼 때, 성경은 몰몬경 및 다른 후기 계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현대의 경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믿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충만한 경륜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복음 진리와 권능이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모두 새롭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경이 없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표준 경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승인되고 영감 받은 기록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록 또한 참되며 경전과 더불어 복음을 배우고 가르칠 때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은 표준 경전에 버금가는 후기 성도 문학의 다섯 가지입니다.
1. “Wentworth Letter[웬트워스 서한].”( History of the Church, 4:535~41 참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쓴 편지로 몰몬경의 출현, 고대 미대륙 백성, 이 경륜의 시대에 조직된 교회, 초기 성도들이 겪은 박해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으며 신앙개조 13개 조가 이 편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Lectures on Faith [신앙강좌]. 이 강의들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 또는 그의 지시에 따라 준비되었으며 선지자 학교에서 그와 다른 이들이 가르친 내용입니다. 선지자는 그 강의에 “구원에 중요한 교리[들]”(Preface to D&C, 1835 ed.; reprint, Independence, Mo.: Herald House, 1971)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3. The Father and the Son: A Doctrinal Exposition by the First Presidency and the Twelve[아버지와 아들: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의 교리적 설명]. (James R. Clark, comp., Messages of the First Presidency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6 vols. [Salt Lake City: Bookcraft, 1965–75], 5:26–34 참조; 또한 5:23–25 참조) 이 해설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지위와 관계를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아버지로 지칭하는 방식을 보이고, 다양한 인용구를 통해 아담이 우리 아버지이자 하나님이라는 잘못되고 이단적인 시각을 바로잡습니다.
4. “King Follett Sermon[킹 폴렛 설교]”과 “Sermon in the Grove[숲에서의 설교].”( History of the Church, 6:302–17; 6:473–79 참조) 사상과 내용에서 동일한 이 두 설교는 여러 하나님이 계시다는 교리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교리를 내세웁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처럼 되어 해의 왕국에서 승영 상태에 이르러 영원히 통치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5. 교회 제일회장단이 쓴 “The Origin of Man[인간의 기원].”(Clark, Messages of the First Presidency, 4:200–206; 또한 4:199 참조) 이 영감받은 역작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교회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여 생물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진화론적 공상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사실보다는 뜬구름 잡는 듯한 말뿐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마련하신 더 많은 빛과 지식을 얻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현대의 봉인된 책인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세상이 보지 못하도록 그 경이로움을 감추고 있는 봉인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두 가지 봉인이 있는데 흔들리는 추의 양 극단이기도 합니다. 둘 다 사탄의 봉인이며 사악한 영리함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지보다 더 성경의 사용과 가치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봉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지의 봉인과 지성의 봉인입니다. 정말 적절한 명칭입니다.
무지의 봉인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이 봉인은 거의 1, 500년 동안 성경을 지상에 거하는 대부분의 살아 있는 영혼들의 손에 닿지 않게 했습니다. 봉인된 책이 존재했다면, 암흑시대 동안의 성경이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군림하던 교회는 성경을 사용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그 대신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삼위일체의 영인 하나님, 마리아와 성화 숭배, 성도의 중보 기도, 산 자와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한 미사, 면죄부 판매, 유아 침례, 스페인 이단 심문에서와 같이 종교 재판을 통한 이교도 박해 및 살해 정당화 등의 교리를 가르쳤으며 이 같은 교리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성경에 입각한 합당한 타당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를 뚫고 성장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크게 봤을 때 성경을 번역하고 사용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던 많은 사람이 단지 승인되지 않은 성경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화형대에 묶여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 주제를 더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훌륭한 도서관의 많은 서가에 구비된 책에서 끔찍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무지의 봉인은 다만 기독교계 전반과 세계 일반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 진정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남아 있습니다. 현대 성직자들은 사회학자이지 신학자가 아닙니다. 가톨릭 국가에서 거의 성경 말씀을 소유하거나 읽도록 권장하거나 독려하지 않습니다.
지성의 봉인을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꽤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 의심의 여지 없이 “지혜로운 자와 학식 있는 자와 …… 그들의 학식과 그들의 지혜로 …… 부풀어 오른 자들”(니파이후서 9:42)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부과됩니다. 야곱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자신들을 “경멸”하는 “자들”과 같이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봉인된 성경에서 봉인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할 이해의 열쇠들을 제시하고자 하며 영을 신뢰하고 구원의 계획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의존하려 하기보다 학식과 지적 능력에 의존하려는 것의 오류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이해의 열쇠 중 일부는 거의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며, 또 다른 일부는 아주 사소한 것이기에 무시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도 중요한 항목들을 위해 언급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실례를 무릅쓰고 각 열쇠에 1점부터 10점까지의 등급을 매길 것입니다.
그리고 팔리피 프랫이 몰몬경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개봉하여(널리 펼쳐) 빛 영광을 만방에 다 알게 하라”(“하늘에서 온 천사”, 찬송가 [1985], 28장)
첫 번째 열쇠: 성경을 읽는 것
어떤 열쇠가 이보다 더 명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 책을 읽으십시오. 읽지 않았다면 읽을 때까지 아무것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열쇠에 대해 점수표에서 10점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 연구와 이해는 기본 자료를 읽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의 문제점 중 하나는 성경에 관해 남들이 말한 내용을 읽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구약전서 이야기에 관한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성경적인 이름은 내걸었지만 계보 기록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빼내고 출판한 책들을 읽습니다.
성경 그 자체를 읽으십시오. “성경을 연구하[십시오.]”(요한복음 5:39)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쌓아 가십시오. 근원으로 가십시오. 그 말씀들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최초에 기록된 대로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그런 말씀은 성신의 영감에 따른 것입니다. 살아 가는 동안 두고 두고 읽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성경의 말씀들이 다같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은 금과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그 뒤를 잇습니다.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바울의 서신은 현명한 조언과 교리의 보고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서신뿐 아니라 요한1서는 마치 천사들이 적은 듯한 글로 매겨질 수 있습니다. 요한2서와 3서는 특별히 중요한 점이 없으며, 유다서는 최소한의 가치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마음을 넓혀 주고 영혼을 일깨워 주는 신성한 지혜의 토대입니다.
구약전서에서 창세기는 책 중의 책이며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신성한 기록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또한 놀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민수기, 여호수와,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는 모두 필수적인 역사서로써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배경이 되는 기적과 신앙의 행위로 밀접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레위기는 우리에게 적용할 만한 특별한 내용이 없으며,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습니다. 룻기와 에스더는 우리 유산의 일부로, 사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시편은 경이로운 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주에 관한 부분과 후기와 재림에 관한 말해 주는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잠언, 전도서, 예레미야애가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욥기는 그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가는 영감 받은 저술이 아니므로 별 가치가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오바댜, 요나는 관심이 덜 가는 선지자들이며 다른 모든 선지자 가운데 이사야가 으뜸이지만 각 선지자의 위치와 순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교리적이고 예언적인 말씀들은 깊이 연구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 열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아는 것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아는 것에 대해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약간의 위험은 따릅니다. 조셉 스미스와 일부 초기 형제들은 히브리어를 조금 공부했습니다. 고대 언어에 관한 지식이 특별한 구절에 관한 영감을 얻는 수단으로 제대로 사용된다면 1점, 또는 1.2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부적절하게 사용된다면 그 가치가 뚝 떨어져서 사용자의 영적인 관점과 태도에 따라 마이너스 5점 또는 마이너스 10점까지 줄 수 있습니다.
교리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원언어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은 경전 해석을 할 때 선지자들이 아닌 학자들의 의견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많이 아는 현명한 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과 하나로 여겨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성경이 처음에 기록된 언어에 관련된 실용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서 곤란해 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며 고대 언어를 후기 성도의 계시에 조화롭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열쇠: 성경 주석과 사전 사용
이 제목으로 이야기할 모든 것은 승인이라기보다는 경고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문제와 관련된 이들 영감 받지 않은 참고 자료들은 1점 또는 2점을 받을 수 있지만 교리적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교리에 따라 마이너스 10점, 마이너스 100점, 마이너스 1,000점까지 떨어집니다.
지혜 있는 사람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은 교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에 교리를 읽는 것을 거의 시간 낭비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그들의 모든 신조는 주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을 교리로 가르칩니다. 자신의 전통에 맞추려고 경전을 왜곡하고 어지럽힙니다. 그들에게 바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연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는 물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예수께서 물 위를 걷지 않으셨고, 그보다는 오히려 파도 속에서 걸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이 빵과 물고기를 불어나게 하셔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자연의 섭리에 반대되기에 불가능하며, 그보다는 회중 가운데 많은 이가 배낭에 음식을 담아왔지만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할까 두려워 꺼내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그저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라고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재림을 바랄 필요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더 이상 사람들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하므로 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속에 거할 때 재림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속성, 전세의 삶, 천국 전쟁, 영원한 구원의 계획, 인류의 타락과 그에 따른 영적인 죽음 및 육체적 죽음, 복천년에 복원될 낙원 상태의 창조, 멜기세덱 신권과 그에 속한 다양한 직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집합, 이스라엘의 온 산에 있게 될 열지파의 회복, 영옥에 거하는 영들에게 전파될 복음, 죽은 자의 구원에 관한 교리, 성전과 해의 영광의 결혼, 영원히 지속될 가족 단위, 기적의 은사와 표징, 범세계적인 배도, 영광스러운 회복의 날, 몰몬경 출현, 순종을 조건으로 가능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구원, 영광의 세 등급,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서 해의 왕국의 가장 높은 등급에서 받게 될 승영, 이 같은 거의 모든 구원의 기본 교리에 관하여 세상의 주석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동료 교사 여러분, 이 모든 것과 이보다 더 수많은 것들이 이 영광스러운 마지막 경륜의 시대에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진리들이며 세상 학자들의 저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 열쇠: 그 지역의 관습과 전통을 배우는 것
이에는 어느 정도 상당한 유익이 있습니다. 등급을 매긴다면 2~3점대가 될 것입니다. 경전 말씀은 그 말씀이 전해지는 지역의 상황에 비추어 읽을 경우 종종 새롭고 더 많은 의미를 띠기도 합니다.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지만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권고가 그 당시의 랍비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시대에는 그 비유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교회의 성직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내게로 와서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권하신 온유하신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며 행하기 부담스러운 모세 율법에서 떠나 단순한 복음 예배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임을 알게 될 때, 죄로 가득한 세상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성스러운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모든 여행자들은 동물을 묶어 놓는 마당을 방들이 둘러싸는 식으로 지어진 숙소에서 묵었다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장소와 관련하여 우리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 교사들이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만든 것을 혹독하게 꾸짖으셨고, 완전히 어리석은 안식일 제약에 대해 나무라셨으며, 그들이 씻음과 정결함을 위해 행하는 의식 행위를 규탄하신 내용을 읽을 때, 그것들이 어떤 전통, 제약, 의식 행위였는지 아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니파이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말은 예언의 영으로 충만한 자 모두에게는 명백하도다.”(니파이후서 25:4)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해하는 보충적인 방법으로 그는 사람이 “유대인의 것의 방식을 좇아 가르침”(니파이후서 25:5)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더 큰 신앙을 지니고 또 아들의 신성을 믿었던 백여 년 전에 에더스하임, 파라, 게이크와 같은 작가들이 썼던 내용은 이러한 고대 관습과 생활 방식에 관한 많은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다섯 번째 열쇠: 모든 경전을 맥락에 놓고 공부하는 것
모든 경전의 맥락이 중요하므로 점수표에서 2~3점대의 점수를 매기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 어떤 것을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거나 또는 말씀하려 하신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순되는 듯 보이는 다른 명령을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 “살인하지 말라”(출애굽기 20:13)는 말씀이 있음에도 주님께서는 왜 니파이에게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유대인 지도자 라반을 죽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경전에 살인을 범한 교회 회원은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내용이 이교도 국가 백성들에게도 적용되나요?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가르치는 성구가 필요하다면, 신정시대였던 구약시대에서 찾겠습니까 아니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도록 요구되던 신약시대에서 찾겠습니까? 레위인의 의식 집행에 관해 공부하고자 한다면, 백성들 가운데 레위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몰몬경에 의지하겠습니까?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명백한 것은 경전은 맥락에 따라 제한적으로도 또는 보편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열쇠: 문자 그대로 봐야 하는 구절과 비유적인 구절을 올바르게 구별함
이것은 상당한 경험과 분별력을 요하는 어려운 일이며, 확신컨대 3~4점대 등급을 차지할 것입니다. 비록 경전에는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 있지만, 그렇더라도 일반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문자 그대로 실제 일어난 일들로 사람이 친구와 대화하듯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함,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육신과 영으로 창조됨,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독생자로 오심, 주 예수께서 에녹의 시온성에 거하심, 복천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심, 모든 사람이 살과 뼈를 가진 육신을 입고 죽음에서 부활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비유적인 내용으로는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음, 주 여호와께서 고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심,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심, 성찬식에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열쇠: 흠정역 성경 사용
세상의 성경에 관한 한, 흠정역 성경이 다른 모든 성경에 비할 바 없이 으뜸이 됩니다. 점수표에서 5~6점대 항목이 될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은 몰몬경의 번역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교리와 성약에서 주어진 계시의 문학적인 양식과 표준을 정하기 위해 존재하게 된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교회의 공식 성경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폭넓게 알고 싶다면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회장님께서 저술한 Why the King James Version? [왜 흠정역 성경인가?] (Salt Lake City: Deseret Book Co., 1956)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덟 번째 열쇠: 세상의 다른 번역본은 어떠한가?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것들은 잊으십시오. 그 번역본들을 탐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할 만큼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너그럽게 봤을 때 점수표에서 1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구속력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그저 번역자가 종교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내용을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한 예를 들자면, 일부 성경 번역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경한 번역본이 이따금 어떤 특정한 부분에 어떤 빛을 비추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번역본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연구하고 학습할 것들이 아주 많기에 영원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영감이 결코 없는 현명하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가졌던 번역에 관한 시각을 그렇게 존중해 주어야 할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아홉 번째 열쇠: 영감받은 역본으로 불리는 조셉 스미스 역 성경을 사용하고 신뢰함
이 조언은 8~9점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조셉 스미스 역 또는 영감역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성경보다 천 배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책은 흠정역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추가된 내용도 있고 정정 및 삭제된 내용도 있습니다. 이러한 정정은 계시의 영으로 이루어졌으며 변경되고 추가된 내용은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에 계시된 말씀과 일치합니다.
역사적인 이유를 비롯한 여러 이유 때문에 지난 시절 일부 교회 회원들이 조셉 스미스 역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 약간의 편견과 오해를 가졌습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사라졌기를 바랍니다. 후기 성도판 성경에 영감역에서 이뤄진 많은 주요 변경 내용을 각주로 달아 놓았으며 각주에 포함하기에 너무 긴 내용은 발췌하여 17쪽에 걸쳐 따로 실어 놓았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부분과 각주에 언급된 내용을 보고서 조셉 스미스가 행한 이 계시적인 일에 깊은 감사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선지자로 부름받았음을 입증하는 위대한 증거 중 하나입니다.
이곳 브리검 영 대학교에 조셉 스미스 역에 관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계심을 말씀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복음 연구 중 이 분야에 끼친 그분의 업적은 이 경륜의 시대에 출판된 가장 뛰어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종교 교육과 학과장인 로버트제이 매튜스 형제님이십니다. 그분이 출판한 책 “A Plainer Translation”: Joseph Smith’s Translation of the Bible, a History and Commentary[“더 명백한 번역”: 조셉 스미스 역 성경, 역사 및 주해] (Provo: Brigham Young Univ. Press, 1975)는 주의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열 번째 열쇠: 후기 성도판 성경의 교육 보조 자료를 사용함
저는 어떤 세미나리 교사에게서 새로 출판된 경전에 각주, 전후 참조, 교육 보조 자료 등이 실린 것을 비판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이 자신의 상호 참조 자료를 만들어 가며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방해하는 목발과 같은 요소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목발이 필요한 사람이며 여러분에게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안에는 조셉 스미스 역 성경, 각 장 머리말, 주제별 색인, 성경 사전, 각주, 지명 사전 및 지도가 들어 있습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 자체로 교리를 규정하지도 않으며, 그 안에 실수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전후 참조는 관련된 같은 주제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유사한 구절이 있는지를 입증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단지 보조 자료이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중요도에서 이러한 것들은 4~5점의 등급이 될 것입니다. 꾸준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열한 번째 열쇠: 영감에 따라 해석한 경전 번역을 사용함
제가 보기에 우리 대부분은 영감에 따라 성경 구절을 해석한 번역에서 얻을 수 있는 큰 깨우침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의 점수표에서는 이런 영감 받은 해석이 8~9점을 획득할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도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의심과 질문만 더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듯이 거의 모든 신약전서의 구약전서 인용문은 우리 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 원전 내용과 다릅니다. 왜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많은 인용문이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 역에서 온 것이며 현재 구약전서가 된 히브리 원전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칠십인 역은 번역자들의 교리적인 관점이 덧칠되어 있어서 많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예수님 시대 당시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했지만 경전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한 교사가 본문을 히브리서로 읽어주면 다른 교사가 이 구절들을 그들이 사용하는 아람어로 번역 또는 의역하거나, 이런 구절들을 탈굼(아람어로 번역된 고대 유대인의 경전)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회당에서 가르쳤는데, 이분들이 탈쿰을 만들었을 때는 이들 경전 구절들이 영감에 차 있었으며 그 구절들에 큰 깨달음의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구약전서의 많은 구절이 신약전서에서 인용되는 방식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됩니다.
실제로 니파이는 종종 이사야와 지노스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와 같이 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영감에 따라 해석한 번역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말씀은 많은 경우에 원래의 예언적인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하거나 크게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로나이가 1823년에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났을 때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엘리야가 돌아오신다는 약속이 담긴 구절을 더 명백하게 했는데 그것은 마치 즐거운 황혼 빛에서 한낮에 빛나는 햇빛처럼 밝아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조셉 스미스는 더 온전한 번역에서 오는 충만한 지식으로 흠정역의 언어를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과 그의 영감역에 깃들게 했습니다.
분명 여기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경전의 같은 구절도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확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번역은 사람의 영적 성숙도에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몰몬경에 실린 산상수훈은 약간의 개선과 함께 흠정역의 언어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뤄진 조셉 스미스 역 성경은 심지어 몰몬경에 실린 이 설교보다도 더 훌륭하게 향상된 내용을 전해 줍니다.
아주 단순한 구절인 요한복음 17장 3절은 모든 사람에게 제한된 의미를 전하지만 우리에게는 밝게 빛나는 해의 왕국의 등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그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고, 그분들이 행하시는 것을 행함으로써 그분들을 닮아간다는 것임을 배우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지식은 무지한 마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계획을 배우고 마음을 성신에 맞추게 되면 그 즉시 경전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편협한 지성들처럼 제한 받지 않고, 우리 온 영혼이 지금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빛과 이해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열두 번째 열쇠: 현대의 경전이 고대 경전의 의미를 밝혀 줌
이 열쇠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점수로 치자면 10점 또는 그 이상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이 지닌 실제적이며 실질적인 뜻 그대로 우선 후기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지만, 후기의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회복된 왕국에 속해 있습니다. 교리며 율법, 의식, 권능이 모두 회복된 것들입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그것들을 새롭게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믿으며 우리가 소유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부여된 열쇠와 권능을 행사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 하늘이 열려 그것들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나 옛 시대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남에 따라 우리가 가진 것이 고대 성도들이 가졌던 것과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치하는 진리와 관례들은 복음 진리의 두 번째이자 보충하는 증거로 서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과 권능은 하늘로부터 직접 온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께서 고대 성도들에게 행하셨던 일에 대한 성경 상의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기사들은 우리가 받아온 것에 맞추어 보며 이를 기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성경이 참되기에 몰몬경이 참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것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몰몬경이 참되기 때문에 성경이 참됩니다.
영원한 복음, 영원한 신권, 구원과 승영을 위한 동일한 의식, 절대 변하지 않는 구원의 교리, 동일한 교회와 왕국, 오직 왕국의 열쇠를 통해서만 인간을 영생으로 인봉할 수 있음 등, 이 모든 것이 어느 세대에나 언제나 같았으며 이 지상뿐 아니라 영원을 두고 변함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후기의 계시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압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되면, 성경에 실린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이해하는 문을 열 수 있습니다.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하나로 합칠 때 우리는 고대 세계에 살았던 주님의 백성들 사이에 무엇이 성행했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구절을 최소한 천 개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영원한 복음의 충만함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담 시대부터 주 예수께서 바운티풀 땅에 나타나셨을 때까지 지금 우리에게 영원한 충만함을 지닌 복음이 있는 것처럼 단 10분이라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 율법의 실행이 아론 신권으로 집행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멜기세덱 신권이 존재하는 곳에 복음의 충만함이 있으며, 모든 선지자는 멜기세덱 신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도 침례가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조셉 스미스 역 성경과 몰몬경에 있습니다. 니파이인 역사에서 첫 육백 년 동안의 기록은 그야말로 참되며 평이한 기사로 모세 시대 이후로 고대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나타내 줍니다.
고대에도 교회가 존재했나요?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나요? 소위 그리스도 이전 시대를 통틀어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눈 깜빡일 동안조차도 되지 않으며 그 교회는 기본적으로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멜기세덱 신권이 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라반도 교회 회원이었으며, 리하이도 예루살렘을 떠나기 오래 전부터 교회 회원이었습니다.
사도의 권능이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멜기세덱 신권은 언제나 아론 신권이 나아갈 길을 이끌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는 그 시대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성전 결혼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아브라함 성약의 중심이자 정수입니다. 일라이어스와 엘리야가 와서 이 고대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영원한 효력이 있는 인봉 권능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오순절 이전에도 성신의 은사가 있었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 같이 그들은 그러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기적을 행했고, 하나님께서 세우고 만드시는 도시를 구했고 얻었습니다.
저는 자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몰몬의 선지자적인 손길로 편집되어 전해졌더라면 하고 바라곤 합니다. 그랬다면 성경이 몰몬경처럼 읽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처음 기록되었을 때에는 그런 방식으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열쇠: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영을 구함
이것이 전반적인 결론입니다. 이 열쇠로 봉인을 떼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순수하고 감미로우며 감추인 진리를 충만히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점수에서도 모든 다른 것에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말씀을 쌓아두어야 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며, 날마다 의로운 것을 깊이 생각하고, 니파이가 한 것처럼 밤이면 눈물로 우리 베개를 적시도록 하며, 영원한 엄숙함이 우리 영혼에 깃들도록 해야 함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간구하여 인도와 깨달음을 얻어야 함을 압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받게 될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리라”(교리와 성약 4: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그리고 영은 신앙의 기도로써 너희에게 주어지리니, 만일 너희가 영을 받지 아니하거든 가르치지 말지니라.”(교리와 성약 42:14) 그 이유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베드로후서 2:20~21)이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많은 말씀을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구도의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어둠이 현명한 사람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드리워 있다 하더라도 혼란스러워하거나 불확실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의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봉인된 책의 인들을 해제하고 각 페이지에서 밝게 비쳐 나오는 빛을 마음껏 받을 권능을 가졌습니다.
결론을 맺으면서 교리와 간증으로 여러분에게 네 가지 단순한 권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1. 근원으로 가르치십시오. 경전 자체를 사용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성경의 순수하고 신성한 말씀을 취하기보다는 성경에 관련된 책들을 연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줄기는 선지자들이 마련한 경전이란 물길을 따라 흐릅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이해하실 약간의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말떼가 날뛰는 아래쪽에서, 특히 종파주의의 말떼가 날뛰는 아래쪽에서 냇물을 마시지 마십시오.
2. 윤리보다 교리를 우선적으로 가르치십시오.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회장님께서 교회 교육의 진로(1938년 8월 8일 종교 교육자들에게 하신 말씀, 또한 Charge to Religious Educators [Salt Lake City: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1981] 참조)에서 제시하셨듯이 우리가 윤리만을 가르친다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하고 영원한 구원의 교리를 가르친다면 성공을 거둘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윤리적인 원리들은 스스로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3. 영으로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자명합니다. 태초부터 그러했으며 영원토록 그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 시대에 전해진 위대한 선언에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해야만 하는지에 관해 비전을 얻으셨습니까?
경전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독생자 곧 절정의 시기에 오리라 그가 선언하였고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예비된 그를 믿으[라]”(모세서 5:57)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위대하고 영원한 구원의 계획에 순응하십시오.
그런 후에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같이 복음은 태초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나니,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내심을 받은 거룩한 천사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신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포되었느니라.”(모세서 5:58)
복음은 오로지 성신의 은사로 가르치고, 성신의 은사로 가르쳐야 하며, 성신의 은사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 은사는 가장 높으신 이의 성도인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다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독립되어 있으며 세상이 갖지 못한 권능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영감을 받기 때문에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에 관한 우리의 관점은 그들의 것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가르치는 부름, 남녀를 불문하고 교사가 되는 부름이 교회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직책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씀은 진실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린도전서 12:28) 사도, 선지자, 교사의 순서입니다. 그 뒤에 오는 것이 산을 옮기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권능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 또한 교사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앞에 서서 주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말씀을, 성신의 권능으로 흘러 나오는 대로 말씀을 하는 임무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더 큰 위임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4. 복음 학자가 되십시오. 이토록 큰 위임을 받고서, 우리가 복음 학자가 되고 또한 그대로 생활함으로써 영이 우리가 습득한 진리의 보화에서 그 순간에 필요한 부분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모든 교사는 당연히 듣는 사람들에게 경전을 해석하는 자가 됩니다. 다른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파하며, 가르치고, 자세히 설명하며, 훈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설명은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영의 인도를 받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에베소서 4:14) 주님께서 교회에 세워두신 주요 성직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개인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교회 부름이 아니라 순종과 개인적인 의로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 하나님 곧 세상의 구주의 이름으로 말하게 하려”(교리와 성약 1:20)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감을 주는 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셉에게 어떤 일을 계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알려야 할 일을 십이사도에게도 계시하십니다. 가장 작은 성도라 할지라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모든 일을 속히 알 수 있습니다.”(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조셉 필딩 스미스 편 [솔트레이크시티: Deseret Book Co., 1938년], 149쪽)
영의 은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실제로 우리의 특권은 왕국의 모든 장로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우리가 시기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휘장이 찢어[질]” 때까지 주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춘다면 그분을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이 존재하심을 알게 될 것(교리와 성약 67:10)입니다.
이 사업은 참되며, 주님의 손길이 함께하며,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 생애 동안 평화와 기쁨을 누릴 것이며 다가올 세상에서 영생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