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저마다 원하는 대로’


“‘저마다 원하는 대로’”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99

“저마다 원하는 대로,” 세미나리를 가르침, 99

“저마다 원하는 대로”

성도의 벗, 1985년 4~5월호, 26~28쪽에서 발췌

오랜 세월 동안 저 자신의 생애에서 경험한 한 사건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지역 사회에서는 정규 세미나리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부근에는 지역 고등학교도 있었습니다. 한 학년 중간에 세미나리 교사 한 분이 건강상에 문제가 생겨 공석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는 그 교사를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한동안 매일 그의 수업 몇 개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그것은 즐거운 경험이었으며, 저는 그때의 일을 즐겨 회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중 한 반에 골치 아픈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재능도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세미나리 공과 교실에서 그는 일반적으로 파괴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대개는 반에서 좋지 않은 행동으로써 주의를 끌었습니다.

저는 교실에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 토론하고 배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으므로 이 청남의 장난에 늘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는 늘 다른 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했습니다. 여러 번 개인 접견을 했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접견할 때는 상당히 좋은 태도를 보이지만 그다음 공과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또 그런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길 건너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상담 선생님을 만나서 그 청남이 한부모 가정에서 생활하며, 적성 검사를 하면 능력과 재능이 평균 이상이지만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도 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 반에 질서와 방향을 잡고 유지하려면 뭔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 왔습니다. 그 청남이 늘 하듯이 분위기를 깨뜨리는 행동을 했을 때 저는 그에게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밖에서 저는 그에게 더 이상 장난으로 다른 학생들의 공부할 기회를 희생시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행동을 자제하고 세미나리 공과 교실에서 필요한 영적인 분위기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더 이상 반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 말없이 휙 돌아서서 건물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오후 그의 어머니가 제게 전화를 걸어 저의 행동에 대한 괴로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세미나리 교실에서 쫓아낸 일이 앞으로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 저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말은 옳았습니다. 저는 그 일로부터 마음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일이 주가 지난 후 직장이 바뀌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청년이 세미나리 수업에 다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20년이나 지난 일이기 때문에 그 청남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끔 오래 전에 동정심 없는 한 세미나리 교사의 행동으로 자기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비난하는 어느 대가족의 아버지가 저 바깥 어디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동안에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잘 다루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들을 조금 배웠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행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청남이 태도와 행동을 바꿀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 반에 있었던 다른 학생에 대한 염려와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축복해 주고 싶었던 강한 열망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보면 그 청남에게 세미나리 교실에서 나가라고 했던 그날에 직면한 것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청남의 영적인 기회에 대한 책임 이외에도 그 청남의 행동 때문에 영적인 기회를 빼앗길 위험에 빠져 있던 다른 반원에 대하여서는 제게 어떤 책임이 있었습니까? 또 그 청남은 어떤 책임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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