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81–85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세미나리를 가르침, 81–85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신약전서 심포지움에서 종교 교육자에게 전한 말씀, 브리검 영 대학교, 2000년 8월 8일, 3~5, 7~9쪽에서 발췌
가르침, 설교, 병 고침
교실에서 바라는 결과를 얻는 것과 관련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저는 오늘 오후에 가능한 한 많은 경전 개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저 없이, 흔쾌히 그리스도를 교사로 여깁니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분은 전무후무할 가장 위대한 교사이십니다. 신약전서에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 설교, 비유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 책 어느 곳에서나 교사로 등장하십니다. 가르침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가르침의 폭을 넓힐 무언가를 덧붙이십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적게 알려진 그분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기사에 뒤이어,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그리스도에 관해 듣습니다. 그런 후 그분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시려고” 광야로 인도되어 가셨습니다. 조셉 스미스 역 성경에 따르면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하시려고” 광야로 가셨습니다.(조셉 스미스 역 성경, 마태복음 4:1)
여기서 잠깐 멈추어, 잠시 여러분과 여러분의 학생들에게 우리의 후기 성도판 표준 경전의 훌륭한 각주와 학습 보조 자료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요청을 하고 싶습니다. 후기 성도판 경전, 현재 흠정역 신약전서는 세계 출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전 교구”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인용한 것처럼 학습 보조 자료와 각주를 잘 활용하십시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구주께서 대적이 제시한 유혹을 훌륭히 물리치시고 첫 제자들을 부르신 이후(아직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성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태복음 4:23; 강조체 추가)
그 가르침과 설교들은 우리가 알고 또 바라는 것들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많은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신 것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기적이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은 이 성역 초기의 가장 이른 시간부터 병 고침이라는 말은 마치 가르침과 설교의 동의어인 것처럼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다음 단락은 가르침보다 병 고침에 관해 더 많이 말합니다.
마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24절)
그다음에 그 훌륭한 산상수훈이 주어졌습니다. 여섯 쪽 반에 걸쳐 나오는 이 내용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아마 6년 6개월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끝난 순간 그분은 산에서 내려오셔서 다시 병을 고치셨습니다. 곧바로 그분은 나병 환자와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 이어 “귀신 들린 자들”(마태복음 8:16)이라고만 언급된 많은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경전에는 단순하게 그분이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16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에워싸는 무리 때문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신 그분은 이어서 가다라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 살고 있던 두 사람을 보시고 그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배에 오르사 “본 동네”(마태복음 9:1)로 건너가십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중풍으로 침상에 누워 지내는 한 남자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를 고치시고(제 생각에 이 일은 신약전서를 통틀어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순간인 듯합니다.) 구경꾼들을 방에서 물리신 후 관리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십니다.(저는 이 신약전서의 교훈이 제가 현재의 부름을 수행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드리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 후에는 두 맹인의 시력을 회복해 주셨으며, 이어서 말할 능력을 앗아간 악마를 한 남자에게서 쫓아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역을 설명하는 처음 다섯 장의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친숙하게 들리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35; 강조체 추가)
몇 단어만 빼놓고 우리가 앞서 4장에서 읽은 구절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6~38절)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6~8; 강조체 추가)
이 내용을 다루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했기에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구주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이 위대한 교사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그 이상이십니다. 그분께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너무 적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가르쳐야 할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과 선교사들을 즉시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부름은 특정 부류의 교사, 즉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치유하는 교사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힝클리 회장님께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 거는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렸고 여러분이 교실에서 행하는 역할과 관련된 “병 고침”은 공식적인 신권 행사나 병자를 위한 의식 집행,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교육 기구 교사와 관리자로 부름받은 여러분의 역할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실제로 몇 안 되는 경우이며 연관된 분들이 정말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저는 교회 교육 기구에서 일하는 몇몇 분들이 교사로서 여러분의 역할과 신권 지도자 직분을 지닌 신권 소유자로서 행하는 역할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여 수년 동안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이제 그 문제에 관해 혼란을 느끼지 않으신다면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르침이 영적인 종류의 병 고침을 가져올 수 있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마태가 기록한 28개 장 가운데 오늘 언급한 10개 장에 걸친 많은 내용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괴로워하고 어렵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행하신 구주의 성역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학생들의 삶에 일어나는 병 고침으로 여러분이 행한 가르침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르치실 때, 그저 수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눈이 먼 농구 스타가 정말 볼 수 있도록, 영적으로 귀먹은 동문회 여왕이 정말 들을 수 있도록, 혹은 영적으로 발을 저는 학생회 회장이 정말 걸을 수 있도록 좀 더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학생들을 매우 강력하게 강화해서 사탄이 어떤 유혹을 던져도 맞설 수 있고, 그래서 그 순간 진실로 그들이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십시오. 등하교 시간에 홀로 걷고, 점심시간에 혼자 앉으며, 데이트해 본 적이 없고, 놀림의 대상이 되며, 어두운 밤에 홀로 우는 소년 소녀들을 돕기 위해 아주 강하고 아주 영적으로 가르치고자 조금 더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경전의 힘과 복음의 힘을 끌어올려 그 나병 환자, 즉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닌 우리 오른편이나 왼편에 있는 이들 때문에 때로는 우리 때문에 나병 환자가 된 그 사람들을 “씻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아마도 십이사도 정원회에 속해 생활하면서 얻은 이 한 가지 교훈이 제가 이 점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고 또 여러분이 혼란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을 전체 맥락에서 보기 위해 넓은 시야로 “큰 그림”을 보시라는 권고를 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아니었지만 저는 방금 한 예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이를 기점으로 교사의 평가라는 결과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명교사이자 오랜 기간 교회 교육 기구 관리자셨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은 우리가 십이사도 내에서 서로 발표하거나 일종의 권고 같은 것을 나눌 때면 종종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그분은 “다 끝났습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시면서 발표자에게(그러면서 넌지시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것이 구주께서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설교와 분리할 수 없는 요소로서 날마다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제안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설교와 권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젊은이들,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생활하는 것을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압니다. 확신하건대 전부이거나 그 대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중 일부는 훌륭한 가정에서 자랐고, 신권을 소유해 왔으며,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해 온 소년 소녀인 듯 보이고, 심지어 때로는 선교 사업과 성전 결혼을 위해 성전에 가서 성스러운 성약을 맺었음에도(이 부분에서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어릴 때 가르침 받았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또는 최소한 충분할 정도로 진실한 회개와 복음 생활로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예외 사항을 말씀드리고 있음을 거듭 강조하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과 저, 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보다 더 많은 예외 사항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포도원에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이 지닌 모든 종류의 질병을 치유하는,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는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부르심을 재차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르침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기도하십시오. 이제는 잊힌 노래 가사처럼, 여러분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학생이 “행실을 고쳐 착실”(Nat King Cole, “Straighten Up and Fly Right” [1943])하게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그들이 행실을 고치기를 바라며 착실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 생애에서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
영으로 가르침
성령으로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경전에서 정의한 것처럼 “다른 어떤 방법”(교리와 성약 50:17)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20절)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영적인 경험을 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신약전서가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며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모든 경전이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성스러운 기록에서 얻는 영적인 경험들은 신약 시대와 모든 다른 경륜의 시대 회원들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교회에서 여러분의 학생들이 올바른 길에 서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영은 신앙의 기도로써 너희에게 주어지리니, 만일 너희가 영을 받지 아니하거든 가르치지 말지니라.”(교리와 성약 42:14) 이 구절은 단지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가르칠 수 없다, 또는 매우 수준이 떨어지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강한 어투입니다. 이것은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너희가 가르치지 말지니라(Ye shall not teach)”에서 Ye라는 말을 thou로 바꾸면 시내산에서 주어진 어투가 됩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학생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학생들입니다. 마치 이 교회가 베드로나 바울, 조셉, 브리검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과 교회 생활의 축복을 통해 젊은이들이 자신이 진정 어디에서 권능, 안전,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확신하도록 해 주십시오.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그리스도를 목격했던 열한 명의 사도들처럼, 베드로가 십이사도의 공석을 채우려고 나머지 사도들을 기도로 이끌었던 그 날처럼, 초기 성도들이 눈 앞에서 변형된 브리검 영을 바라보며 그러했던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아 인도를 구하게 하십시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 속죄, 부활을 수업에서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받았을 때, 그 주제에 적합한 합당성의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느껴 거의 두려움에 떨었던(너무 심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기억납니다. 저는 학생들이 가슴으로 그것이 중요함을 느끼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만약 그에 관련된 경험에서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이 아니고, 주님은 더더욱 아니며, 바로 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제가 지금은 구주를 더 사랑하며 온 세상에 그분의 이름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 받았지만, 여전히 이 주제에 관해서는 압도되고 부적절하다고 느낍니다. 여러분을 격려하고자 이 말씀을 드립니다. 교사 여러분은 언젠가 그것을 느낄 것이며 자주 여러분이 최고의 교사였으면 하고 바라는 날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영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정직하고, 할 수 있는 한 순결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생각한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 승천이란 최고의 절정에 달하는, 거의 가르치기 불가능한 대목에 다다르면 무엇보다도 제가 여러분이 학생들과 함께 적용하기를 바라는 다음 두 가지를 기억하도록 당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충실하셨다
학생들에게 상기시키십시오. 그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충실하셨다는 것을 학생들이 기억하게 하십시오.
마태는 그분이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태복음 26:37~38)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일부러 사도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시고 홀로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일은 혼자서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셨다]”(39절)고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그분이 “힘쓰고 애써” 아주 간절히 기도하셔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누가복음 22:44)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그분이 땅에 엎드리어 “아빠 아버지여”(마가복음 14:36)라고 외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아빠, Papa 또는 Daddy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아빠[Abba, Daddy, Papa] ……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어떻게 그 애원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완전한 당신 자녀의 애원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이 잔을 제게서 가져가 주세요.”
마가가 언급했던 그 기도는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서 삭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분은 “다른 길이 있다면, 차라리 그 길을 걷겠습니다. 다른 길이 있기만 하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누가복음 22:42)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 그분은 현세와 영원을 두고 그분의 삶을 가장 잘 특징짓는 바로 그 말씀과 행위를 하셨습니다. 몰몬경의 위대한 선지자 아빈아다이는 바로 그 말씀과 행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해야 할 말씀과 행위를 하셨습니다.(여기에서 아들을 의미하는 단어 Son의 알파벳 S는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의도와 목적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의 지상 성역 중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신성한 대화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그분은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해낼 것이었습니다.
구대륙에서 이뤄진 그 마지막 선언에서 우리는 신대륙에서 전해진 이 첫 번째 선언을 듣습니다. 성전에 모인 니파이인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나는 …… 예수 그리스도라. ……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저 쓴 잔을 마시고 …… 태초로부터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을 담당하였느니라.”(제3니파이 11:11) 주님이 판단하시기에 그 선언은 자신에 대한 소개, 즉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가장 잘 설명해 줄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반원들이 구주께서 그들을 위해 치르신 비할 데 없는 희생에, 그리고 그들의 죄 때문에 주님이 치르신 대가와 슬픔에 보답하고자 한 가지 결심을 하게 할 수 있다면, 순종해야 할 필요성, 즉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 어려운 결정의 시간에 “아버지의 뜻”(11절)에 복종하여 그 뜻을 담당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써 도우십시오. 여러분이나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항상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하며 추구하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덕성보다도 위대한 설교보다도 심지어 병 고침보다도 더 구주께서 자신의 성역에 관해 강조하고 싶어하셨던 것은 그분이 자기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반원들도 분명 위험한 영역에서 시험해보고, 한계를 시험하고, 신앙과 교회를 시험하며, 너무나 자주 여러분의 신앙을 시험하면서 그렇게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와 반원 모두를 위한 메시지는 우리도 주님처럼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편협한 자아를 깨뜨리고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를 슬퍼해야 합니다. 반원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따르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주님과 견주어 보는 불경을 범하지는 마십시오.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지나갈 수 없음을 상징하는 그 잔은 그분의 삶에서처럼 우리 삶에도 오게 됩니다. 훨씬 약한 방법으로 훨씬 약한 정도로 올 테지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속죄의 두 번째 교훈은 여러분의 학생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학생들이 이미 너무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고 느낀다면, 순종의 원리에서 너무 여러 번 돌아섰다고 느낀다면, 그들을 비추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빛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일하고 살며 노력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선지자 조셉이 성도들과 나누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려는 성향”이 있으시며, 그리스도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고 선함으로 가득한 분”(Lectures on Faith [1985], 42)이심을 가르치십시오. 자비는 그 자매 격인 회개와 용서라는 덕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모든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도움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온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삶의 시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을 하는 여러분의 학생을 위해 마련된 도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순종하라고 명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길을 걸으셨으며, 그들에게 그분이 하신 일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분은 그 길을 더 안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여행을 훨씬 더 쉽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날카로운 돌이나 걸림돌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아시며 어느 곳에 가시와 엉겅퀴가 가장 무성한지도 아십니다. 어느 곳에서 길이 위험해지는지 아시며, 길이 갈라지고 밤이 왔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분은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시고]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앨마서 7:11~12) 하셨습니다. 돕는다(To succor)는 말은 “달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내미신 자비로운 팔을 우리가 받아들이려고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이라는 것과 지금도 달려오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의 학생들에게 간증하십시오.
우리가 흔들리고 넘어질 때, 그분은 우리를 잡아 주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곳에 계십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구해 주시기 위해 계시며, 이 모든 것을 위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어두워 보일지라도, 세상의 구주는 훨씬 더 어두운 나날을 겪으셨습니다. 그 날들을 기억하도록,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부활된 육체에서도, 즉 완전한 육체에서도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상처들, 바로 표적들을 간직하기로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 고통스러운 일이 순결하고 온전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며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과 문제들은 지나가고 행복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표적입니다. 우리 영혼의 대장이 상처를 입으신 그리스도라는 것과 우리를 용서하면서 생긴 상처와 사랑과 겸손으로 생긴 부상, 순종과 희생으로 찢기신 살을 아직도 지니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의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십시오.
이 상처들은 그분이 오실 때 우리가 그분을 알아 볼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앞으로 나아오게 하셔서 그 자국들을 보고 만져보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전이 아니라면, 그때에는 확실히 이사야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멸시를 받아 …… 버림 받[고] ……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셨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이사야 53:3, 5)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간증합니다. 그분이 완전하시며 모든 생각, 모든 덕, 모든 행동, 모든 소망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간증합니다. 그분의 삶이 그 어느 누구의 삶보다 가장 위대했으며 구원은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간증합니다. 조셉 스미스가 성령의 도움으로 휘장을 지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음을 간증합니다. 저는 그분들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신회를 구성하시고 여전히 이 교회를 인도하고 이끌고 계시며,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말과 행위 모든 면에서 현재 이 시대의 선지자이심을 간증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이 일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학생들을 사랑하며, 올 한 해 동안 그분을 생애를 증거하는 위대한 신약전서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여러분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