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겉옷이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겉옷이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14–23

“겉옷이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세미나리를 가르침, 114–23

겉옷이 지성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교리와 성약 및 교회사 심포지움에서 종교 교육자에게 전한 연설, 브리검 영 대학교, 1981년 8월 22일

제가 대단히 중요한 주제에 대해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려 한다는 사실을 충실하고 헌신적이며 영감에 찬 동료인 여러분에게 드리는 찬사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많은 시간을 들여 학문적인 연구에 몰두하는 많은 교회 회원이 자기 전문 분야의 원리를 잣대로 교회와 교리, 조직, 지도자, 과거와 미래를 판단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종종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광범위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전문 훈련에서 배운 원리들을 자기 기준으로 삼아 교회를 평가하는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저는 그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회원이라면 언제나, 특히 광범위한 학문적 연구를 추구하고 있다면, 인간의 전문 분야를 주님의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학문 분야에 이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많은 교회 회원들이 학문적 성취의 대가로 간증을 잃고 신앙을 저버리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혹독한 시험을 겪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한 지역의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감독관 중 한 사람으로 일하던 마지막 해에 한 세미나리 교사가 상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려고 동부에 있는 큰 대학교에 갔습니다.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권위자가 그 대학에 있었는데, 그는 곧 이 매력적이고, 단정하며, 매우 총명한 후기 성도 젊은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교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과정을 이수해 주목을 끌었고 그의 장래는 참으로 밝아 보였습니다. 적어도 박사 논문 심사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감독단 보좌인 그는 와드 감독을 연구 주제로 삼았습니다.

당시 저는 총관리 역원으로 부름을 받았던 터라, 그가 일부 감독들과 인터뷰를 하고 설문 조사를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감독의 부름과 성임에 대해 기술하고, 감독에게 부여된 분별력, 계시와 영적인 인도를 받을 권리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박사 학위 심사 위원회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내용이 학술 논문에는 전혀 맞지 않으므로 그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의 논문을 읽어본 후 그에게 “후기 성도들은 감독이 영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또는 “그들은 감독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부름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영적인 문제에 관한 논제를 소개하도록 제언했습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는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서는 이런 내용을 학술 논문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꽤 난처해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그는 자신의 매우 큰 잠재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약간만 순응한다면, 특히 영적인 부분에 관한 모든 참고 문헌을 삭제하면 학위 논문이 출판되고 명성도 얻게 되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위원회는 그가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는 흔들렸습니다. 일단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나면, 아마도 자신의 논문에 영적인 요소를 다시 집어넣을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인정받는 권위자로서 교회에 진정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로 그의 신앙과 고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만족하기에 충분할 만큼 영에 관한 내용을 학위 논문에 담지를 못했는데, 그래도 세상적인 지도 교수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그는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논문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진정 그것이 될 수 있었던 그러한 학술적 문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계시는 감독이 상담하며 겪는 경험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기에 그 점을 무시하는 어떤 연구도 학술 저서라고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입이 크지 않고 상대적으로 세상에서 덜 인정해 주는 교회 교육 기구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어저께 그 교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논문과 그것이 출판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교회 젊은이들 사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 왔습니다. 그는 올바른 일을 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경험을 요약했습니다. “겉옷이 지성보다 훨씬, 훨씬 더 위대합니다. 신권은 인도하는 권능입니다.” 그가 한 이 말이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의 제목이며, 또한 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교수님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들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라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회원에 대해, 특히 신권을 지니고 성전에서 성약을 맺은 회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제 동료가 했던 것처럼 하지 않고 오히려 굴복하고, 선을 넘어가며, 영적인 것들을 저버립니다. 그런 이후에 그들은 학문적 전문 분야의 기준으로 교회, 교리, 지도력을 판단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 관해 가르치고 저술해 온 몇몇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교수들은 자신들에 대해 말하기를 종교적인 신앙이 몰몬학자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후기 성도가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세속적 교육 기관에서 훈련된 지성인이기 때문이란 것이 명백합니다. 몇몇 후기 성도 사학자들은 몰몬의 입장이 아닌 대학원에서 교육받은 학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우리가 하는 학문적인 연구에서 영적인 것들을 빼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단계에서는 우리 삶에서 영적인 것들을 떼내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님께서 하신 매우 중요한 말씀을 읽어 드리고 싶은데 여러분이 가르칠 때나 연구할 때 마음에 새겨 둔다면 유익할 말씀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의 기초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 백성의 진로를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해 온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이는 바로 인간보다 위에 계시고, 인간의 지식보다 더 큰 지식이 있으시며, 인간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의 지혜로 인도되었던 것입니다. …… 주님의 손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위대한 후기의 사업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존재하는 매 시간 매 순간에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을 보았던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04, p. 2; 강조체 추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심을 끊임 없이 마음에 새겨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 세미나리 교사들과 일부 종교 교육원 교수 및 브리검 영 대학교 교사들이 교회사를 가르칠 것입니다. 이 기회는 학생들의 삶에서 이 사업의 신성함에 대한 신앙과 간증을 키울, 비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손길이 매시간 매 순간 교회를 인도하심을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그 여정을 겪어온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시작하기에 앞서 네 가지 주의 사항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주의 사항

이 사업에 임하는 영적인 권능을 고려하지 않고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교회 역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인도, 분별, 계시를 고려하지 않고서 감독 직분에 대한 학술적이며 객관적인 연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재차 말씀드리자면, 영을 무시하고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교회 역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멘델스존의 전기를 저술하려 한다면 당연히 그의 음악을 들어보거나 언급해야 할 것이며, 렘브란트의 삶을 기술하려 한다면 당연히 빛이나 유화나 색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음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누군가가 멘델스존의 전기를 썼다면, 음악을 느끼도록 교육을 받아 소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이를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몇 쪽만 읽더라도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빠져 있음을 알 것입니다.

틀림없이 멘델스존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아마도 전혀 인상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그려졌을 것입니다. 그를 기억하게 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기껏해야 별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분명, 전기에 관한 논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전기작가가 그 프로젝트를 위해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했더라도, 그리고 다른 모든 상세한 내용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독자는 다들 멘델스존이 어떤 음악가인지 진정으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렘브란트를 단지 흑백으로 본다면, 그의 영감 대부분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저술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포함하여, 인간의 지혜를 광범위하게 연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학문 연구의 길을 걸었던 터라 그러한 위험에 대해 조금 압니다. 우리는 오히려 다른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더 취약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매우 흥미롭고 영감에 찬 것이어서 신앙을 쌓는 데 참으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거나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신앙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브리검 영 회장님은 칼지 메이저에게 주님의 영이 임재하지 않는다면 시대 개관조차도 가르치지 말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럴진대 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며, 가르치는 일에서 영은 얼마나 필수적이겠습니까.

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고, 가르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구실삼아 영적인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교회 역사를 상당히 세속적으로 다룬다면, 우리는 정확하지도 않고 학술적이지도 않은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그 역사의 부분으로 포함된 개별 서술이나 사건에 대한 조사의 정도나 본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록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의 교육적이고 학문적인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 배제된 역사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영을 지닌 독자라면 기록된 교회 역사에서 뭔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입니다. 저자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역사가이고 독자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일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하나님께서 내게 일지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라고 영감을 주셨음 알리며,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내가 기록한 이 교회와 왕국에 관한 역사를 신뢰해 줄 것을 당부한다. 이는 내 간증이 참되며, 그 기록의 참됨은 다가올 세상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Journal of Wilford Woodruff, 6July 1877, Historical Department,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강조체 추가. 철자와 구두점은 현대 맞춤법에 따름)

두 번째 주의 사항

교회 역사를 저술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합당한지 또는 신앙을 증진시키는지에 관계 없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진실되지만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출판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듯합니다. 특히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약점, 또는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어떤 까닭인지 역사가나 소설가들은 그런 것에 구미가 당기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것이 생존한 사람에 관계된 것이라면, 가십거리의 머릿기사가 될 것입니다. 역사는 가십으로 호도될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종종 검증이 아주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이론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작가 혹은 교사는 자신만의 판단을 위한 기초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자신이 주었던 것을 자기 자신이 받게 될 때 불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죄악이 널리 알려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역사가는 대학생 청중에게 돌아가신 한 교회 회장에 관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 회장님이 기벽에 사로 잡힌 사람임을 보여 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특히 그 회장님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이란 관점에서 이야기했을 때 그 회장님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이른바 사실이라고 하는 많은 것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역사적인 인물과 친분이 없는 사람(특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신앙이 약화되고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아벨에스 리치 원장님 밑에서 세미나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고용한 두 번째 세미나리 교사였으며, 원숙하고 지혜로우며 경험 많은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배운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것인데,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적이 아닌 친구에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며, 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사인 우리는 선행 조건의 원리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화학 과목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책임감 있는 화학자라면, 명망 높은 학교라면 화학의 기본 원리도 잘 모르는 초보 학생에게 고급 화학 수업에 등록하도록 권유하거나 등록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급 과정은 심지어 아주 총명한 초보 학생에게도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총명한 학생조차도 원소, 원자, 분자, 전자, 원자가, 화합물의 성질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에게 기본 지식을 갖추게 하지 못한 채 진도를 나가게 되면, 틀림없이 그는 흥미를 잃고 화학 분야에서 이룰 수 있는 미래를 잃게 될 것입니다.

소위 성교육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사실적이고, 심지어 고상하기까지 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변태적이며 추해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은 것들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또는 나이, 성숙도, 공인된 법령 때문에 그런 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참된 어떤 것들은 너무 이르거나 부적절한 때에 가르치게 되면 배움에 수반되는 기쁨 대신 슬픔과 비통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두 주제와 관련하여 참된 것은 종교 분야에서는 두 배나 더 참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고기를 먹이기 전에 먼저 우유를 먹여야 한다고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들은 선별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어떤 것들은 오직 합당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점을 아주 명확히 하셨습니다.

무엇을 듣느냐 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언제 듣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을 파괴하기 보다는 신앙을 쌓을 수 있도록 주의하십시오.

윌리엄 이 베렛 회장님은 역사가들이 저술에서 언급한 세칭 사실이라 하는 것들에 노출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 속에 교회의 과거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었다는 간증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점을 참으로 감사히 여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전제 조건의 원리가 모든 교육에 아주 근본적인 것임에도 역사가들이 왜 그토록 대놓고 무시하는 것인지 저는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직업적 신조 외에는 그들을 이끌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보다는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읽거나 들을 사람들이 오직 경험 많고 원숙한 역사가들인 마냥 글을 쓰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주 제한된 청중을 위해 글을 쓰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많은 것들이 청중을 고양해 주지 않으며, 그들이 의도했던 청중의 범위를 훨씬 넘어가며 신앙을 파괴합니다.

그 역사가가 교회 회장님의 평판을 두고 행했던 것은 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두에게 그 선지자가 한낱 인간이었다는 점을 확신시키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선지자와 모든 사도는 인간입니다. 그가 그 회장님이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사실, 즉 그 사람선지자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려 했다면 그것은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에 관한 기억에서 중요한 부분을 앗아갔습니다. 그는 신앙을 파괴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가르친 진리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아고는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지갑이야 훔쳐간들 별겁니까. 큰돈도 그렇죠. 내 것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간 것뿐이지요. 원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명예를 도둑 맞으면 훔친 사람에겐 별볼일 없지만 빼앗긴 쪽은 큰 일이 나는 겁니다.”( Othello, act 3, sc. 3, lines 157–61)

슬픈 사실은 지난 세월 동안 그는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소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영적인 발전에 이르는 길고, 가파르며, 낙담스럽고 때로는 위험한 길을 따르거나, 그들이 도달한 곳에 이르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것과 비교하려고 실수와 약점, 한계를 모으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 역사적인 인물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시도해 왔으며 그런 식으로 그에게 가깝다고 느끼며 자신의 연약함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스테판 엘 리차즈 회장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동의합니다.

“역사적인 인물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 나라 사람들과 동포들에게 높게 평가되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면, 연구자들과 학자들이 그런 인물의 과거를 캐내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는 약점을 들춰 내어 묻혀 있던 사실이라며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내 오랫동안 역사적인 인물로서 누려왔던 이상적인 평가와 존경을 앗아버리는 것을 즐거운 오락거리로 삼는 듯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폭로’가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는 입장의 사실주의에 깃든 관심사라고 듣고 있습니다. 한 역사적인 인물이 국가와 사회에 크나큰 이바지를 했고, 그의 명성과 행위가 여러 세대를 두고 후대가 바람직한 성품을 키우고 봉사하도록 하는데 사용되어 왔다면, 동시대인들이 관대하게 용서하고 참아준 과거를 캐내고 약점을 들추어 내는 일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Where Is Wisdom? [Salt Lake City: Deseret Book Co., 1955], p. 155)

현재와 과거 지도자들의 나약함과 약점을 끄집어 내는 일을 즐기는 역사가와 학자는 신앙을 파괴합니다. 신앙의 파괴자, 특히 교회 내부에 있는, 좀 더 특정하자면 신앙을 쌓는 일을 하도록 고용된 사람이면서도 신앙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커다란 영적 위험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그는 잘못된 주인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영원의 세계에서 충실한 자들 사이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 해를 끼치거나 “고등 역사”를 들을 준비가 안 된 사람의 신앙을 파괴시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전문 분야의 신조를 따르기로 하는 사람은 영적인 위험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가 교회 회원이라면, 성약을 깨뜨린 것이며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필멸의 모든 날들을 마친 후에, 그는 자신이 설 수도 있었을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헨리디 모일 회장님과 나눴던 대화가 기억납니다. 애리조나에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우리는 교사 지위를 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신앙을 파괴했던 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 모일 회장님께 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여전히 교회 회원인지 물었습니다. 모일 회장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교회 회원이 아닙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그가 아직 파문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모일 회장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파문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영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가 재판을 고려하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영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 번째 주의 사항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학술적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작가나 교사는 자신도 모르게 대적에게도 동등한 시간을 부여합니다.

누군가가 책 제목을 남부의 관점에서 본 편견 없는 남북전쟁의 역사라고 지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웃고 있지만,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교회 역사를 전하는 것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지지하는 주장을 내세우는 만큼 대적을 위해서도 똑같이 그래야 하며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쪽 편을 듭니다. 지금 전쟁이 진행 중이며 우리는 그 전쟁에 참여해 싸우는 중입니다. 이 전쟁은 선과 악의 전쟁으로 우리는 선을 방어하는 전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표하는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는 성약을 맺었습니다.

우리 학자 중 일부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동조적인 객관성”이라 부릅니다. 특히 역사가들이 그렇게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교회를 칭찬하는 말을 하면, 반드시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 좋지 않은 뭔가를 언급해야 하는 듯합니다.

그 중 일부는 자신이 교회 회원이기 때문에 편파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당혹해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매우 염려하여, 자신의 저술에 과거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반드시 포함시키려고 합니다.

특히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 인정받는 역사가가 되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니파이의 쇠막대 시현에 관한 구절인 24절에서 28절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되었나니 나는 다른 이들이 앞으로 밀고 나아옴을 보았나니, 그들이 나아와서 쇠막대의 끝을 붙잡더라. 또 그들은 쇠막대를 꼭 붙든 채 밀고 나아가 어둠의 안개를 지나가더니 마침내 나아와 나무의 열매를 먹더라.

또 그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은 , 마치 부끄러운 듯 주위에 그들의 눈길을 던지더라. [‘후’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피십시오. 니파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들, 즉 교회 회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 또한 내 눈길을 던져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이 흐르는 강 저편에 크고 넓은 건물 하나를 보았나니, 그것은 땅 위 높이, 말하자면 공중에 서 있더라.

또 그 건물은 사람들, 곧 늙은이와 젊은이, 남자와 여자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저들의 옷차림은 심히 훌륭하였고, 저들은 열매에 이르러서 먹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태도였느니라.

이에 그들이 열매를 맛본 그들을 비웃는 자들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더니, 금단의 길로 떨어져 나가서는 잃어버린 바 되더라.”(니파이전서 8:24~28; 강조체 추가)

지상에 세워진 그분의 교회와 왕국을 축복하고 보호하기로 성약을 맺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를 지켜보시는 주님의 인내심에 한계가 있음을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특히 자신의 명성을 구한다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고 사람의 명예를 갈망하여 [우리가] 이 한 가지 교훈을 배우지 아니함이니-

곧 신권의 권리는 하늘의 권능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고, 하늘의 권능은 의의 원칙이 아니고서는 통제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다 함이니라.

신권의 권리가 우리에게 부여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니라.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은폐하려 하거나 우리의 교만, 우리의 헛된 야망을 만족시키려 하거나 조금이라도 불의하게 사람의 자녀들의 영혼을 통제하거나 지배하거나 강압하려 하면, 보라, 여러 하늘은 스스로 물러가며, 주의 영은 심히 슬퍼하나니, 주의 영이 물러가면, 그 사람의 신권 곧 권세는 아멘이니라.

보라, 그는 미처 깨닫기 전에 홀로 있게 되어 가시채를 뒷발질하며, 성도를 박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도다.”(교리와 성약 121:35~38)

경전과 교회 문헌에는 우리가 대적과 전쟁 중이라는 확신을 주는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나 교회 회원으로서 이 전투에서 적에게 순응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습니다.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님은 장군이 적에게 자신의 모든 기밀을 내준다면 어리석은 장군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료에 접근하여 참고 자료를 빼내어 그것을 왜곡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대적에게 우리가 맞추어서도 안되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경영이 잘 되는 회사가 다른 회사로부터 기업 인수 위협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기업 인수를 작정하고 덤비는 회사가 모든 자산을 빼내어 이 회사를 고사시킬 작정이라고 합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위협을 받는 회사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회사를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회사를 보호하기로 계약을 맺은 그 변호사가 실제로 어느 편을 들지 말아야겠다고, 공정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회사를 보호하도록 고용된 변호사가 변론 취지서를 준비하기 위해 회사 문서 열람이 허락되었을 때 증거를 수집하여 일부를 적대 회사 변호사들에게 넘긴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이런 배신 행위는 고객 회사를 큰 위험에 빠뜨릴 것입니다.

윤리나 고결성, 또는 도덕성 위반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 말의 요지를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에 고용된 여러분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키워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신앙의 파괴자인 적의 편이 되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보호하겠다고 성약을 맺은 그 대의에 대한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학문의 자유 또는 소위 정직을 구실삼아 자신의 연구 저술에서 어떠한 종교적 신앙도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지워버리는 사람들은 교회가 그들의 연구를 수용하거나 그 일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확신하건대, 여러분은 문서를 훔친 사람들이나 훔친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 진실을 거의 얻지 못하거나 이득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어떤 내용을 찾아내어 돈을 받고 팔거나 출판하여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거나 가장 먼저 출판했다는 삐뚤어진 자부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람으로 출입이 제한된 도서관과 문서에 접근하여 자료를 몰래 복사하고 빼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어왔으며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만 있다면 신앙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계속 전진해 나갈 것이며 그들의 노력은 잠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하고, 개종하며, 그분의 편을 드는 일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님은 양쪽 모두와 손을 잡으려 하는 모호한 태도의 오류를 이같은 말씀으로 지적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레이맨인들이 니파이인에 관해 하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몰몬경이 참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Utah Genealogical and Historical Magazine, Apr. 1925, p. 55)

수년 전에 저는 교회 회원인 하버드 대학교 교수들에게 초대를 받아 하버드 경영 대학원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새로운 책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기고문을 써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박사 학위가 있기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제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총관리 역원(당시 십이사도 보조였음)인만큼 아주 유용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하며 후한 찬사를 늘어 놓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말을 아주 주의 깊게 경청했으나 대화 말미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요청에 응하지 못하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사유를 물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은 그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그것이 교회에 어떻게 유용할지 설명했습니다.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런 후에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었죠. “우리는 모두 활동적이며 충실한 교회 회원입니다. 하지만 ……’”

저는 그 두 교수에게 만일 발표문이 “우리는 활동적이며 충실한 교회 회원들입니다. 그러므로 ……”였다면 그들의 조직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하지만”으로 특징지어진 조직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조직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이라는 단어는 곧 그들이 교회 회원인 것과 신앙에 조건을 건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이 다른 무엇인가를 최우선시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교회와 복음과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배경과 받은 훈련에 따라 판단하려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부분적이며, 그런 부분적인 헌신으로는 충만한 영적인 빛을 발할 자격을 얻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으로나 의도로 신앙을 무너뜨리는 출판물에 기고하거나 그런 조직에도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모든 세속적인 진리를 찾으려는 많은 학자가 있습니다. 교회를 보호하며 영적인 진리를 전하고자 힘을 들이는 우리는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속합니다. 우리는 중립을 지키면서 안전하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윗소 장로님은 교회 젊은 회원들의 토론 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로 상호 향상 모임에서 토론회를 연 어리석은 교사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제로 “해결됨: 조셉 스미스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를 제시했는데, 불행히도 반대편이 승리했습니다.

논제에 찬성하는 젊은이들은 반대편 젊은이들만큼 영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반대편만큼 주의 깊게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논쟁이 끝난 후에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나 일부 참여자들은 신앙이 파괴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후 그들은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가 아닌 듯이, 그리고 그가 설립한 교회와 그가 회복한 복음이 참되지 않은 듯이 생활해 나갔습니다.

네 번째 주의 사항

마지막으로 드릴 주의 사항은 이미 출판된 내용이라는 이유로, 어떤 출처든 간에 이용할 수 있는 자료라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없이 그것을 저술과 말씀, 가르치는 데 사용해도 괜찮다는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그 생각에 담긴 오류를 분명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교회의 합당한 회원으로 여겨지는 분들의 저술에서 교회나 교회의 예전 지도자들을 비하하고 품위를 손상시키는 글들을 읽으며 실망하곤 합니다. 출간된 내용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전에도 출판된 내용이고 지금도 이용할 수 있는 자료라서 그 내용을 다시 책에 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을 유포하는 일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고급 역사”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사람들이 읽게 되면 묘목 단계에 있는 간증이 으스러질 수도 있습니다.

수년 전에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사 가운데 일부가, 특히 대학교에서 재직하시는 분들이 배교자로 알려진 사람들의 저술을 구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특정 견해에 관한 정보를 얻거나 그들의 연구 결과를 모으려는 노력의 하나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저술을 구입하고 그들이 펴내는 정기 간행물을 구독하는 행위는 그들의 조직을 돕는 행위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저술이 세미나리나 종교 교육원 또는 개인 서가에 꽂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교회를 폄하하는 자들의 관점이 아닌 주님과 제일회장단을 대표하여 학생들 앞에 서야 할 책임을 맡긴 것입니다.”(The Gospel Teacher and His Message [address delivered to Church Educational System personnel, 17 Sept. 1976], p. 12)

저는 벤슨 회장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조언을 지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신랄한 배도자를 볼 때, 빛의 부재뿐만 아니라 어둠의 존재 또한 보게 됩니다.

병균을 퍼뜨리지 마십시오!

수년 전에 한 젊은이를 선교 본부에서 접견하면서 저는 큰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봉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생각지도 못하리라 생각되는 그러한 범법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행위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까?”

그가 “감독님에게서요.”라고 말했을 때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감독님이 접견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런 것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와 다른 어떤 것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다음 그 감독은 그 젊은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상세하게 묘사해 주었습니다. 감독이 한 그 말들이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으며, 비뚤어진 영감 하에 기회가 찾아오자 그는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합당하지 않고, 불미스러우며, 선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간직하지 마십시오.

일부 출판물들은 절판됩니다. “하찮은 잡동사니는 시원하게 없애라”는 옛말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칠십인 제일정원회의 지호머 더햄 장로님은 저명한 역사가였던 교수님에게서 받은 조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쓰레기통을 뒤적여 나온 역사를 쓰지 마십시오. [여기에 이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가르치지도 마십시오.]”

모로나이는 역사가들이 따라야 할 훌륭한 원칙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는 보라, 그리스도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선악을 분별하게 하였은즉,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판단하는 길을 보여 주노니, 무릇 선을 행하도록 권유하며, 권하여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사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을 완전한 지식으로 알지니라.

그러나 무엇이라도 사람들을 설득하여 악을 행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하고, 그를 부인하게 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하는 것이면, 너희는 그것이 악마에게 속한 것인 줄을 완전한 지식으로 알지니라. 이는 실로 이러한 방식으로 악마가 일함이니, 이는 그가 아무도, 실로 단 한 사람도 설득하여 선을 행하게 아니하며, 그의 사자들도 그러하며, 그에게 복종하는 자들도 그러함이라.”(모로나이서 7:16~17)

필멸의 삶을 우리 존재의 결말과 실현으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그에 더해 영생을 준비하는 시기로 여길 것인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제가 교회 역사를 가르치고 기술하는 여러분에게 드리는 주의 사항들입니다.

이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할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이런 자격 요건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교회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실을 말해 주고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교회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자격 요건을 평가할 수 있게 이런 자격 요건들을 질문 형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1820년에 몸소 소년 선지자 조셉 스미스 이세에게 나타나셨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조셉 스미스가 출판된 역사 자료를 통해 세상에 전한 간증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 소년의 머리 위 공중에 서서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이 있습니까?

그 참됨에 관한 영적인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간증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온 지면 위에서 유일한 참되고 살아 있는 교회를 …… 나 주는 …… 매우 기쁘게 여기노라”(교리와 성약 1:3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를 통해 교회가 회복되었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이 현대 경륜의 시대에 하늘의 천사들을 통해 회복되었으며 인간의 힘으로 만든 교회가 아니라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을 성신을 통해 아십니까?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계승자들이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였고 현재도 그러함을 믿으며, 하늘에서 주어진 계시가 교회 본부에서 나오는 결정과 정책 그리고 선언을 이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영을 통해서 이 선지자들이 진실로 주님을 대표하고 있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얻으셨습니까?

자, 여러분은 분명 제가 학문적인 자격 요건에 관해 말씀드린 것이 아님을 아셨을 것입니다. 사실과 이해력, 학문 등은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필수 과정을 이수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나열한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영을 통해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적인 훈련이나 연구, 학문적인 탐구 또는 과학적인 조사로는 그것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이러한 것 중 어느 것이라도 없다면 다른 어떤 훈련을 받았을지라도, 그는 이 교회의 진실된 역사를 이해하거나 기술하거나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지닌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 초창기의 선지자를 헐뜯고 그 과정에서 신앙을 약하게 만들거나 파괴했을 것이 분명한 그 역사가는 어떻습니까? 글이나 가르침에서 이와 유사한 잘못을 저지른 다른 교회 회원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놀랄 수도 있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파괴적인 행동을 했었지만 나중에 교회의 선지자가 된 사람을 압니다. 그는 앨마 이세였습니다. 저는 몰몬경을 읽으면서 그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몰몬경은 사실상 고대 시대에 있었던 교회에 관한 아주 신뢰할 만한 역사서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앨마 이세가 청년이었을 때의 기록이 친숙할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인 부친을 따라 다니며 부친이 복음 전파하는 것을 우롱했습니다. 그 시절의 그는 신앙의 파괴자였습니다. 그 후에 전환점이 찾아 왔습니다. 부친이 이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었고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종교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역사가에게, 그리고 겉옷보다는 지성에 더 높은 우선 순위를 두었을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총관리 역원들은 사람, 그것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며, 대개 시작이 아주 미천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를 조사하고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이 받은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신을 알며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부분인지도 압니다. 우리의 의무는 여러분이 잘 알지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위해 교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세우며 권세의 열쇠를 부여하며 의식을 행하고 왕국의 경계를 살피며 짐, 그것도 아주 힘겨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부름에 비해 우리가 진정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 책임의 무게가 우리를 압도할 만큼 무겁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찾고 있다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에게 오는 부름과 관련하여 우리가 느끼는 거대한 책임감의 무게를 아마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학자들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며 이 교회는 그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 교회를 감리하십니다.

계속되는 교회 역사에서 여러분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셨던 킴볼 회장님을 모시고, 범법으로 파문당한 한 스테이크 지도자를 교체하려 먼 스테이크를 방문한 슬픈 특권을 이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합당치 못한 일을 저지른 이 선한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의 슬픔과 번민과 고통을 보며 “쓰디쓴 담즙”이라는 구절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후 저는 킴볼 회장님으로부터 간간히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형제에게서 연락이 있었습니까?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와 연락하고 계십니까?” 킴볼 형제님께서 교회 회장이 되신 후에도 그 전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더 자주 전화하셨습니다.

어느 날 회장님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형제에 대해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그를 다시 침례받게 하기엔 너무 이른 걸까요?”(항상 질문이었고 절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느낌을 말씀드렸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장로님을 만나러 올 수 있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접견 후 느낌이 좋다면 침례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후에 저는 아주 이른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는데, 킴볼 회장님이 차를 타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유럽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분은 창문을 내려 제게 인사하셨고 저는 그분께 그 형제에 관하여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형제가 어젯밤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제를 차에 타게 하셨고 옆에 앉자 자초지종을 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접견에 관해 말씀드렸고, 그에게 접견을 마치면서는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신권 축복이 가까운 장래에 다시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숨김 없이 말했으며,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도 말했다고 전해드렸습니다.

킴볼 회장님은 제 무릎을 부드럽게 두드리시면서 제 말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음, 아마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 그후 회장님은 다시 간간히 전화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받은 또 다른 교훈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새로운 총관리 역원으로 경험이 많지 않았을 때, 제일회장단 제1보좌의 사무실로 호출을 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대회 참석 차 서부 해안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하루 정도 일찍 떠나셔서 다른 도시에 있는 선교부에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선교사가 범법을 고백했고, 선교부 회장은 주저하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도 평의회가 필요한지와 그 선교사를 파문해야 하는지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가서 그 장로와 오랜 시간을 접견했습니다. 그런 후에 공원에 가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이례적인 사례였는데, 대단히 이례적이었습니다. 두 시간 후에 저는 제일회장단 보좌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드렸고 그 문제에 관해 알게 되고 느낀 점을 약간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제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으셨습니다. 주저하면서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미루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하지만 회장님께서 조치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그분의 목소리는 제게 천둥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영의 속삭임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저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조치를 취했을 때 그 영감이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쳤습니다.

고급 학위나 세상의 인정과 칭송을 얻는 대가로 신앙을 양보하지 마십시오. 주님과 그분의 교회와 그분의 종들에게서 돌아서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아,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봉사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으로 학문적 명성과 세상 동료들의 칭송을 내려 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권위자나 또는 학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시험이 닥쳐왔을 때 그는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바칠 필요가 없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단지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제 과거 교회 역사에서 얻은 신앙을 키우고 간증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마지막 교훈 한 가지를 전하겠습니다.

윌리엄더블유 펠프스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신뢰하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던 위기의 순간에 그는 등을 돌려 선지자의 목숨을 앗으려 하던 압제자와 배도자의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나중에 펠프스 형제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회개하면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에게 선지자 조셉이 펠프스 형제에게 보낸 답장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연구자들이 우리 역사 기록을 자세히 조사하며 찾아내고도 교회 역사에 관한 학문적인 논평에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저술에는 실지 않은 이와 같은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비탄에 잠겨 탄식했던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친애하는 펠프스 형제님께, ……

리그돈 장로와 하이럼 형제, 그리고 제가 형제님의 편지를 읽었을 때 우리의 감정이 어땠을지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형제님의 결심을 확인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아끼는 마음과 연민으로 녹아 내리는 듯했습니다. 저는 여호와께서(저는 그분의 종입니다.) 승인하실, 계시된 진리와 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형제님의 일을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겸손하며 통회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오래 참으심과 인내와 자비로 역사하시므로, 저도 그 모범을 따르고 그 원리를 소중히 간직하여 제 동료를 구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형제님의 행동으로 우리가 큰 고통을 겪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마시기 힘들 정도로 이미 차 있던 쓴 잔이 형제님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을 때, 참으로 넘쳐 흐르고 말았습니다. 형제님은 우리와 함께 종종 감미로운 권고를 듣고, 주님께서 주시는 큰 축복을 많이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형제님이 원수였더라면 견디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

그러나 고통의 쓴 잔은 비워졌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악한 자들의 손에서 구출되었으니, 형제님이 원수의 힘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의 자유의 품으로 인도되어 가장 높으신 이의 성도로 다시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형제님의 특권입니다. 근면과 겸손, 거짓 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하나님, 형제님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형제님 자신을 맡기십시오.

형제님의 고백이 참되고 형제님의 회개가 진실하다는 것을 믿으며, 저는 다시 한 번 형제님에게 우정의 오른손을 내밀게 되어 행복할 것이며, 돌아온 탕자를 맞아 기뻐할 것입니다. ……

“‘오소서, 사랑하는 형제여, 전쟁은 끝났으며,

처음에 친구였듯이 결국 다시 친구입니다.’

당신의 변함 없는,

조셉 스미스 이세.”

(History of the Church, 4:162–64.)

펠프스 형제는 진심으로 돌아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찬송가 작사가였습니다. 이 모임을 개회하면서 부른 찬송가 “찬양해 여호와와 대화한 사람”은 펠프스 형제님이 작사한 것이며, 또한 몇 곡을 더 말씀드리자면 “하늘 중에 사시는 하나님”, “우리 구원의 날을 함께 다 즐기세”, “불러라 고요히 성가”,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 등이 있습니다.

아, 펠프스 형제님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교회에 얼마나 큰 손실이었겠습니까. 그리고 그에게는 얼마나 큰 비극이었겠습니까.

과거의 선지자들에 관해 읽을 때면 저는 겸손함으로 압도됩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정규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손수 쓴 편지를 읽어보면 철자도 정확히 쓰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 곁에 서기를 둘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생각할 때 눈물이 납니다. 그들이 곁에서 함께 해 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사해 했을지가 느껴집니다.

길을 잃었을 수도 있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돌아오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압니다. 우리는 조사와 연구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여러분의 학문과 훈련, 명석함과 지성, 경험과 학위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오늘날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특별한 훈련을 받은 많은 회원들이 헌신하며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를 성장시키고 보호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주 충실하게 교회 역사를 편찬하고 가르치며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을 키우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이 복음이 참됨을 증거합니다. 이 교회는 그분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기술하고 가르칠 때 영감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의 영이 풍성하게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이 학생들을 이끌고 이 경륜의 시대에 이뤄진 교회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들이 회복의 기적과 그분의 종들에게 입혀진 겉옷과 “교회가 존재하는 매 시간 매 순간에 ……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을 볼 수 있[도록]”(Joseph F. Smith, Conference Report, Apr. 1904, p. 2) 돕는 것이 여러분의 특권입니다.

주님의 영의 영향력 아래 교회 역사를 기술하고 가르친다면, 언제가 여러분은 자신이 관찰자였을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을 맡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그분의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간증과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