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참으로 중요한 사명,”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112–14
“우리의 참으로 중요한 사명,” 세미나리를 가르침, 112–14
우리의 참으로 중요한 사명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와 함께하는 저녁 모임, 1999년 2월 5일, 1~4쪽에서 발췌
초기 시절
옛날 옛적 신혼 부부 시절에 패트와 저도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저희는 종교 교육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름과 방법으로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기회를 받게 된 것은 아주 실질적으로 패트 덕분입니다. 교회 교육 기구에 속한 삶을 살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데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컸습니다.
저는 아주 분명히 기억합니다.(아이어링 장로님이 그분의 어머니를 기억하듯 말입니다.) 1965년 봄 그날, 저희 아파트의 광경을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일에 대해 사전에 생각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계획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종교 교육이 저희를 향해 열려 있는 분야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보, 이게 의미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절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할 거란 점이에요.”아내는 전혀 주저 없는 음색으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서 이렇게 되받아쳤습니다. “돈은 충분할 거예요. 우리 인생의 질이나 의미를 돈으로 결정하는 것은 사양할래요.”
아내가 정말 훌륭해 보이는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말 그대로, 실로 아내의 그 짤막하고 거침없는 선언이 제 귓가에 맴돌지 않았더라면 첫 고용 계약서에 서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물질적인 욕구와 필요의 목록을 줄이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제약이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에게까지 미칠 것임을 예상하면서 그들도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제가 등을 꼿꼿이 펴게 해 주었고, 그 이후로도 늘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도중에 잠시 자리를 떠나 상당히 좋은 대학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는 동안 저희는 번쩍이는 BMW를 모는 우리의 아이비리그 출신 이웃들 틈에서 극빈자처럼 살았고, 손에 학위를 들고 자녀 둘을 데리고 교회 교육 기구에 돌아왔을 때 은행 잔고는 텅텅 비어 있었으며, 다음 고용 계약에 서명할 때 우리의 연봉은 총 11, 000달러였습니다. 물론 제가 예일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훨씬 더 높은 연봉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것이 제가 내릴 수 있었던 최고의 직업적 결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 기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란 명료한 응답이 주어졌을 때 제가 어디에 있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지 지금이라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일대학의 교수님들은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제대로 돌봐 주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돌본 것은 주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응답하셨고, 저희의 삶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 저희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러하듯 저희 부부의 눈에 기쁨의 원천인 저희 자녀들은 자라는 동안 교회 교육 기구라는 훌륭한 우산 아래서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좋은 친구들과 교제하고 선한 영향을 경험한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그동안 우리가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제가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아내의 말도 맞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번 돈은 충분했습니다.
제 말씀의 이 서론은 제 아내와 우리의 모든 전임 교사들의 아내들에게 바치는 헌사입니다. 이들은 남편이 하기로 선택한 일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고, 지지하고, 헌신합니다.(얼른 덧붙이자면, 우리에게는 전임 교사인 자매님들도 계셔서 그분들의 남편들에게서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일부는 배우자 없이 가르치고 있는 분도 계심을 압니다. 저는 이와 같은 정신을 공유하는 모든 분을 포함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유한 전임 교사의 대부분은 형제들이며, 그 아내들에게 우리가 여러분을 감사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종교 교육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과 헌신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드립니다.
후기 성도들의 경험에 대해 집필한 후, 왈라스 스테그너는 우리의 개척자 조상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몰몬 남자들은 강했다. 그러나 몰몬 “여자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The Gathering of Zion: The Story of the Mormon Trail [1964], 13) 제 아내에 대한 것을 포함해서 제 관점으로 보자면 그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됩니다. 자매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희생을 압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지를 느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가정에서 때로 정말 적은 예산으로 애 쓰시는 것을 압니다. 위로가 될까 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도 그런 삶에 대해 알고 있고, 그럼에도 당시나 지금이나 그것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BYU를 떠나 현장에서 새로운 교회 교육 기구 직원으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저희는 여러분이 받았던 것과 같은 교육 기구에 대한 소개를 받았습니다. 첫 해에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한 사람이 두 개의 작은 종교 교육원 프로그램을 순회하며 맡는 임무를 수행했고, 세 개의 종교 교육원을 더 열었으며 새벽반 세미나리도 도왔습니다. 돌아보면, 한 주에 해야 하는 수업 준비가 열두 개는 되었고 말 그대로 수백 마일을 운전해야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시애틀에서 더 큰 종교 교육원을 맡게 되었고, 당시로 보면 더 큰 도전에 맞닥뜨렸는데, 그 도시에 간 지 약 석 달 만에 감독 부름을 받았습니다. 집세는 더 비쌌고 생활비도 더 들었고, 아이도 하나 더 태어날 예정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부업으로 야간 경비원 직에 지원했는데, 말 그대로 유니폼 값을 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뉴 헤이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활비는 더 비싸졌고, 다시 학생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뉴 헤이븐에 간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패트는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저는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스테이크 건물은 저희 집에서 약 8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스테이크 권역이 코네티컷 주 전체와 메사추세츠 주 절반, 로드 아일랜드 주 남부, 뉴욕 주 북쪽 끝, 버몬트 주 일부까지 이어졌습니다. 거대한 지역이었습니다. 저희가 받는 스트레스는 막중했습니다. 집에 아기가 둘이 있었기에 패트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뉴잉글랜드의 우리 지역에서 제가 맡을 수 있는 모든 교회 교육 기구 일을 다 맡았고 찾을 수 있는 다른 일도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윌리엄 이 베렛 형제님이 사려깊게도 당시에 여러 임무를 주셔서 저희를 재정적으로 구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께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금요일 밤의 데이트
그러한 상황에서 저희는 이 혼란 속에 뭔가 체계를 잡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희가 한 일 중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금요일 밤에는 데이트를 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는 둘 다 누구에게서 오는 어떤 일도 계획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론 교회 교육 기구에서 하는 총관리 역원과의 저녁 모임은 예외였습니다. 저는 이 모임이 금요일 저녁 모임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데이트 장소는 여기예요, 여보.) 당시에 금요일 저녁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았고, 계획대로 100퍼센트를 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저희는 노력했습니다.
저는 공부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가르치고, 스테이크 회장단 일을 하는 것을 토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5시까지 했습니다. 패트는 상호부조회 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우리 아이들과 다른 어린이들) 세탁과 젊은 엄마들이 하는 다른 모든 일을 토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5시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몇 시간만큼은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회전목마와 같은 생활에서 잠시 내렸습니다. 깊은 숨을 한두 번 들이키고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애초에 이 모든 일을 왜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 있는 이 터널의 끝에 빛이 있으리라는 점을 상기했습니다.
그런 데이트와 관련해서 대단한 기억은 없습니다. 정말이지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허나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분명 가끔씩 피자라도 사먹었을 것입니다. 그냥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생각나는 것은 예일 뉴헤이븐 수목원에서 한 긴 산책입니다. 그 수목원은 우리의 학생 아파트 길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아내와 손을 잡고 생활이 조금 수월해졌을 때의 삶을 꿈꾸며 긴 산책을 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길 끝에는 데어리퀸 아이스크림 집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희는 아이스크림 콘을 사먹거나 가끔 기분을 더 내면 룻비어 플로트(역주: 룻비어라는 청량 음료에 아이스크림을 띄운 것)를 먹었습니다.
제가 큰 맘 먹고 하는 그런 지출만큼이나 겸손하게, 패트는 그 금요일 밤들 덕분에 당시의 여러 해를 버틸 수 있었노라고 수백 번이나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내는 “난 금요일 밤을 고대하고 거기에 의지했어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저녁을 공부와 일로 보내고 교회 일로 집을 떠나 있든, 나에겐 믿을 수 있는 금요일 밤이 있었죠. [그리고 물론 우리에겐 월요일도 있었죠.] 아뇨, 우리 데이트가 사교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어요. [과소평가입니다.] 허나 그 시간은 나의 시간이었고 매주 적어도 몇 시간만큼은 내가 내 삶도, 내 남편의 삶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것이 아주 힘겨운 시간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죠.”
어떤 무면허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사람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바로 사랑할 사람과 중요한 할 일과 뭔가 즐겁게 고대하는 일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정기적으로 고대할 수 있는 뭔가 즐겁고 정말로 신나는 일이 있도록 만드십시오.
저도 당시의 데이트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경험의 일부로 기억합니다. 사실, (이것은 세월이 흐르며 제가 발견한, 그리고 여러분도 발견한 놀라운 현상인데) 저는 그 시절에 대해 좋은 것들만 기억납니다. 스트레스와 분노와 뭔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시간과 돈이 부족했던 것, 그런 부분은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내와 함께 아름다운 대학 식물원을 산책하던 것과 특별히 맛이 좋았던 데어리퀸 아이스크림콘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지방의 가을, 그 때는 우리 스테이크 지역의 단풍 색깔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나라 초기 역사의 장면들이 살아 있는 지역에 살며, 어느 작가가 이름 붙인 것처럼 최초의 신생국 (시모어 마틴 립셋 작)을 이룩한 사람들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저희의 개인사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인간적이어야 맞는 사람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저녁 여기 모인 우리 대부분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마당에 결혼 초기의 몇 년을 되짚어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연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 말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당시에 저희에게 친절하셨고, 지금도 그러시며, 앞으로도 그러시리라는 점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영원토록 간직하도록 허락해 주실 기억에서까지 말입니다. 나중에 보면 슬픔과 고통은 어찌된 일인지 잦아들고 행복은 더 달콤하게 보입니다. 인생을 사랑하고, 인생의 모든 단계를 음미하십시오. 좋은 시절과 함께 어렵고 넉넉하지 않은 시절도 포용하시고, 여러분 자신과 서로와 결혼 관계를 위한 시간을 내십시오. 그렇게 분별 있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여러분을 영원히 축복할 것입니다.
느긋하게 옛날 이야기를 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오해를 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균형을 유지하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와 여러분의 학생들과 우리가 사랑하고 가르치는 복음을 위해 균형과 견실함을 유지하는 데 열심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로 이 땅을 휩쓰는(그리고 때로 교회 회원들 사이에까지 퍼지는) 극단주의나 소문이나 감각주의나 각종 유행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이런 맥락에서 여러분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와 함께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반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가 어려운 것을 압니다. 모든 교사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 올바른 이유를 위해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내고 복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로 그들을 매혹시키고 싶어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과 저는 그것이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주가 바뀔수록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압니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힘있게 가르치고, 열정과 공고한 준비로 가르치고, 마음을 끄는 추가 자료를 이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는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이고, 분명 제가 해 본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르치는 어떤 교리나 여러분이 주게 될 어떤 조언에서도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수준까지 이르고 싶은 유혹에 맞서십시오.
복음의 그물은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압니다. 그 중 몇몇은 교실에서 여러분 앞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종류라도 이상한 행동을 유발하는 부채질을 해 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런 일들을 충분히 겪습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여러분은 몰몬경에서 “자라나는 세대”(앨마서 5:49)라고 부르는 여러분의 학생들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안정적으로 자리잡도록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르침과 여러분이 드는 예시와 여러분의 해석과 조언에서 균형을 유지하시고, 중용을 지키시고, 합리적이 되시고, 신앙을 발전시키도록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