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길을 찾아 가게
모세세와 살라비아 무티가 탄 배가 니우에에 가까워지자, 외딴 동굴과 자잘한 만이 점점이 흩어진 바위투성이 해안선이 나타났다. 모세세의 꿈대로, 섬에 있는 열세 개 마을이 물가를 따라 자리해 있었다. 니우에에서 가장 큰 마을로 서쪽 해안에 자리한 알로피는 섬 내부를 뒤덮은 열대림과 산호초를 관통하는 몇 안 되는 도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곳은 인구가 5천 명도 안 되는 외딴섬이었다.
선교사들이 니우에에 처음 온 것은 1952년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섬에는 약 3백 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지방부 회장은 척 우드워스라고 하는 스물세 살 미국인 선교사였다. 우드워스와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섬에 있는 여섯 개 지부를 돌보는 때가 아니면 알로피에서 새로운 예배당과 선교부 사무실 짓는 일을 했다. 니우에에는 건축 감독관이 없었기에 장로들은 아직 터를 파거나 벽을 쌓는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공사에 사용할 콘크리트를 만들기 위해 섬의 단단한 산호 바위를 자갈로 부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무티 가족이 도착했을 때, 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선교사였지만, 니우에 성도들이 선교사를 도와주지 않거나 자신의 생각과 달리 종교에 어긋나는 생활을 할 때면 자주 낙심하곤 했다. 살라비아와 모세세는 그보다 인내심과 이해심이 깊었다. 무티 부부는 그 섬의 회원들이 모두 아직 이 종교가 익숙하지 않고 여전히 배우며 성장하는 중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모세세는 척에게 말하곤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다 잘될 겁니다.”
모세세는 복음을 사랑하고 현지 문화에 밝아 금세 니우에 성도들의 우정과 신뢰를 얻었다. 그는 교회의 보이스카우트 프로그램을 맡았고, 복음 공과를 가르쳤으며,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산호 바위를 부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살라비아는 선교사들과 교회 회원들의 복지를 돌봤다. 그녀는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옷을 수선했으며, 누군가 할 말이 있으면 귀 기울여 듣고 조언해 주었다. 그녀는 초등회와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치고 설교도 했다.
1956년 9월에 척은 니우에에서 최초의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고 살라비아를 상호부조회 교사로 불렀다. 처음에 상호부조회의 몇몇 여성들은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고 모임에 참석하는 데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살라비아는 교회에서 여성들과 함께 일한 경험을 통해 그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함을 깨달은 바 있었다. 그녀는 니우에에 현대식 주방 기구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상호부조회 회장인 랑기 파카호아에게 스토브 없이 간단히 요리하는 법을 여성들에게 가르쳐도 될지 물었다. 그렇게 통가 푸딩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모임 전에 살라비아는 상호부조회 회원들에게 각자 자기 푸딩을 만들 수 있게 재료를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모임에 온 열다섯 명 중 재료를 가져온 여성은 세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그저 회의적인 얼굴로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살라비아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푸딩을 준비하고 그것을 불에 올려 물에 끓이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재료를 가져온 여성들은 푸딩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녀의 설명을 모두 차근차근 따라갔다. 그런 뒤 살라비아는 자신이 모임 전에 만들어 두었던 푸딩을 들고나와 모든 여성에게 각각 몇 조각씩을 나눠 주었다.
여성들은 푸딩을 맛보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했다. “와!” 아무도 그런 맛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모임이 끝난 후 재료를 가져왔던 세 명은 자신의 푸딩을 다른 여성들과 나누어 먹었고, 재료를 가져오지 않았던 여성들은 다음번 상호부조회 활동 때는 더 잘 준비해 오기로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푸딩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여성들은 살라비아를 더 존중하게 되었다. 상호부조회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여성들이 이제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몇몇 회원들은 다음 요리 활동에 친구와 친척들을 초대했고, 살라비아는 상호부조회의 밤을 포 피아피아(즐거운 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살라비아는 요리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훌륭한 선교 사업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모인 여성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여성들은 그런 모임을 하며 서로 가까워졌으며, 그러면서 우정을 쌓고 영을 강화했다.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상호부조회에서 여성들이 배우는 기술들 덕분에 가족들도 더 행복하고 돈독해지는 것 같았다.
1956년 말, 전 세계 상호부조회 회원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상호부조회 조직을 위한 새로운 건물이 헌납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제 상호부조회에는 약 11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벨 스패포드는 세계 어디에 살든 그들이 모두 끈끈한 자매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기 바랐다.
사실 벨이 항상 열렬한 상호부조회 회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교회의 여성들은 성인이 됐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호부조회에 등록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상호부조회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기 시작했었다. 감독이 그녀에게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단 보좌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을 때 그녀는 망설였다. “상호부조회는 저희 어머니를 위한 조직이지 저를 위한 조직은 아니에요.” 벨이 감독에게 했던 말이다.
30년 뒤 벨이 상호부조회 회장단에서 봉사한 지 11년째 될 무렵, 상호부조회를 위해 상설 본부를 설립하는 것은 이제 그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새 본부가 교회의 여성들이 들어와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되기를 바랐다.
상호부조회가 1842년에 처음 조직되었을 때, 상호부조회 회원들은 조셉 스미스의 나부 상점 위층에서 모임을 했다. 이후 미국 서부의 와드 상호부조회들은 상호부조회 회관들을 지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임을 하고, 행사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과 간증을 나눌 수 있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본부 상호부조회, 젊은 여성 상호향상회, 초등회의 회장단은 각자 자신들의 조직이 사용할 본부를 짓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모은 상태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제일회장단이 그 세 조직과 감리 감독단을 포함한 다른 몇몇 조직이 함께 사용할 사무실용 건물을 건축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 후 상호부조회는 이 건물 2층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그곳은 여러 사무실과 임원회 회의실, 성전복 재봉 구역이 함께 있는 비좁고 시끄러운 공간이었다. 스패포드 회장은 1945년에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은 직후 상호부조회 조직을 위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짓자고 제안했다. 제일회장단은 그 계획에 동의하고 상호부조회에 건축 비용의 절반인 50만 달러를 모금하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스패포드 회장과 그녀의 보좌인 메리앤 샤프와 벨마 사이먼센은 모금 행사를 창안해, 상호부조회의 모든 회원에게 상호부조회 본부 건물이 건축되도록 5달러 정도를 기부하도록 권유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빵 한 덩어리가 12센트였으므로 5달러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몇 달의 모금 끝에 교회 여성들이 그동안 기부한 금액이 2만 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패포드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녀는 즉시 수화기를 들고 제일회장단 제2보좌인 제이 르우벤 클라크에게 전화를 걸어 이 멋진 소식을 전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클라크 회장이 말했다. 그녀의 흥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50만 달러를 모금해야 하는데 2만 달러는 그리 많지 않은 액수란 걸 저도 압니다.”
스패포드 회장은 낙담하지 않았고 상호부조회 자매들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상호부조회는 수십 년 동안 매년 회비를 모으고 정기적으로 모금 행사를 열어 현지 상호부조회에 자금을 지원해 왔었다. 자매들은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자 음식을 가져와 만찬회를 열고, 바느질로 퀼트를 만들어 팔고, 무도회를 열었다. 일 년도 안 되어 건축 자금이 모두 마련되었다.
상호부조회는 솔트레이크 성전 건너편 땅을 구입했고, 스패포드 회장과 보좌들은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건축가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 건물에는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과 본부 임원회 외에도 직원을 위한 사무실 공간이 있었다. 직원들은 『상호부조회 잡지』, 복지 및 사회봉사, 성전복 제조 및 판매 등 상호부조회의 많은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스패포드 회장은 이 건물이 사무실 공간보다는 집처럼 느껴지기를 원했으므로, 여성들이 친구를 만나고 편지를 쓰고 건전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편안한 휴게 공간도 마련되었다. 3층에는 스테이크 상호부조회가 특별 행사가 있을 때 예약할 수 있는, 무대와 주방을 갖춘 커다란 사교실이 있었다.
호주에서 보내온 장식 램프와 사모아에서 보내온 조각 탁자 등 전 세계 상호부조회 회원들이 보낸 선물이 건물의 방과 홀을 장식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상호부조회 회장인 헤르미네 치엡과 성도들이 알록달록한 도자기 꽃병을 구입하여 솔트레이크시티로 보내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들은 그 꽃병이 교회가 조직된 해인 1830년에 만들어진 사실을 알고 주님의 인도가 함께했음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오스트리아 선교부의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런 멋진 건물을 가진 조직의 일부라니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비록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많은 여성이 그 건물로 인해 행복해질 것을 우리는 압니다.”
새로운 본부인 “상호부조회 건물”은 1956년 10월에 헌납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이 건물은 고전 건축 양식을 본뜬 현대식 건물로 설계되었으며, 제일회장단과 그 외 총관리 역원들의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1917년에 완공된 인근 “교회 행정 건물”의 스타일을 보완해서 지어졌다. 건물 외부에는 곡물을 저장해 온 상호부조회의 오랜 역사를 기리기 위해 황금빛 밀 줄기 모양이 장식됐다.
10월 3일, 스패포드 회장은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의 연단에 서서 청중을 바라보았다. 상호부조회 건물을 완공하기 위해 희생한 많은 여성을 대표하는 자매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금 조달 및 건축을 위한 노력이 상호부호회 조직 내에서 단합을 이루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상호부조회라는 공동체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상호부조회 본부에서 나가는 모든 것이 하늘 아버지의 딸들이 살아가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들을 영원한 복지로 인도하기를 기도합니다.”
『기이한 업적』을 공부하기 시작한 엘리오 다 로샤 카마르고는 근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지부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곧 그의 아내 나이르도 회복된 복음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 일요일, 그녀가 말했다. “이제 감리교 교회에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사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고 싶었다.
엘리오는 몰몬경을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사흘 만에 몰몬경을 한 쪽도 빠짐없이 다 읽어 버렸다. 그런 다음에는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 그리고 성도들에 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출판물을 읽어 나갔다. 그는 선교사들과 자주 만났고, 현지 지부에 십일조를 냈으며,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교회의 모임에 많이 참석하다 보니 성도들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교부 회장인 아새얼 소런슨은 브라질에서 교회가 확장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강력한 신권 지도자들이 그러한 성장의 핵심이 되리라고 믿었다. 브라질에는 이제 약 2천 명의 회원이 있었지만 그중 멜기세덱 신권을 소유한 회원은 70명도 되지 않았다.
엘리오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신권 책임을 맡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에 가입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소런슨 회장은 “살아 있는 선지자의 필요성”, “지혜의 말씀”, “필멸의 삶의 목적”과 같은 주제를 이어서 다루는 일곱 가지 선교사 토론을 마련했었다. 엘리오는 이 각각의 토론을 무섭게 흡수했지만 여전히 선교사들에게 질문할 것이 많았다.
그와 나이르는 특히 과거에 성도들이 시행한 복수결혼 관행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엘리오는 교회가 아프리카계 흑인 남성의 신권 소유를 제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은 오래전에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을 노예로 삼는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브라질은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법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종 분열이 적었다.
유럽인을 조상으로 둔 엘리오는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인종 제한을 접한 적이 없었기에 그 관행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가 교회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의문 탓이 아니었다. 선교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그는 신약전서에 나오는 바울처럼 기적적인 개종을 경험하고 싶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하듯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개종 말이다.
그는 더 기도하고 다시 몰몬경을 읽어 보기로 하고도 내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선교사들은 점점 더 그에게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엘리오에게 말했다. “형제님은 이 교회가 참되다는 것을 아십니다. 이제 형제님이 결정을 내릴 때입니다.”
엘리오는 선교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회복된 복음은 완벽하게 타당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1957년 초,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마흔여덟 살의 나오미 랜들과 본부 초등회 임원들이 전 세계 초등회 지도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위원회가 선정한 이 프로그램의 주제는 “어린이의 간청”이었다. 그들은 부모와 초등회에서 봉사하는 이들이 많이들 교회의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선정된 주제는 그들의 성스러운 부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본부 초등회 회장 라번 더블유 팜리는 4월에 열리는 연례 초등회 대회에서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려 했다. 그러자면, 나오미와 위원회가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몇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며, 프로그램이 제시간에 준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무렵 팜리 회장이 나오미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프로그램과 함께 발표할 새 노래가 필요해요.” 그녀가 말했다.
“새 노래를 어디서 구하죠?” 나오미가 물었다.
팜리 회장은 나오미가 이미 교회에서 잘 알려진 시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말했다.“자매님은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오미에게 본부 초등회 임원회에서 봉사했던 재능 있는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밀드레드 페티트의 전화번호를 건네며 말했다. “이분과 연락해 보세요. 두 분이 새 노래를 만들어 보세요.”
사무실을 나오는데 나오미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녀는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성인들이 그 주제를 기억하고,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돌아가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랐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어떻게 노래로 전달할 수 있을까?
집에 도착한 나오미는 밀드레드와 전화 통화를 했다.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나 문구, 메시지를 적어 보세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곡을 쓰기 전에 메시지를 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날 밤, 나오미는 하늘 아버지께 노래에 딱 맞는 가사를 쓸 수 있도록 영감을 달라고 간구했다. 그런 뒤 잠자리에 들었고, 얼마 동안 평화롭게 잠을 잤다.
새벽 두 시. 나오미는 잠에서 깨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난 하나님의 자녀, 날 세상에 보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노래의 첫 소절이었다. 그녀는 더 많은 소절을 떠올렸고, 곧 1절과 2절이 완성되었다. ‘나쁘지 않아.’ 나오미는 생각했다. ‘괜찮은 것 같아.’
이윽고 그녀는 아이가 부모나 교사에게 영적 인도를 간청하는 형식으로 세 개의 절과 후렴구를 완성했다. 보통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하며 가사를 썼던 나오미는 너무나 빠르게 가사가 떠오른 데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나 그것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하늘 아버지께 감사드렸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본부 초등회 회장단 보좌인 알타 헤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사를 좀 썼는데 괜찮은지 봐주시겠어요?”
나오미가 가사를 읽어 주자 알타가 말했다. “와, 소름이 돋았어요. 보내 주세요!”
일주일도 안 되어 나오미는 밀드레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노래에 쓸 곡과 후렴구에 들어갈 몇 가지 수정본이 동봉되어 있었다. 나오미는 밀드레드에게 가사를 보내고부터 어떤 노래가 나올지 상상해 보려고 했었다. 마침내 멜로디를 들은 그녀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맞는 곡이었다.
1957년 4월 4일, 독창자들과 초등회 어린이 합창단이 연례 초등회 대회에서 “난 하나님의 자녀”를 불렀다. 후렴구 가사에서는 밀드레드의 도움을 좀 받았지만 나머지는 나오미가 한밤중에 쓴 그대로였다. 대회에 참석한 초등회 지도자들은 각자 자신의 와드와 지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 노래를 배웠다.
얼마 후 상호부조회 건물에서 열린 총관리 역원을 위한 만찬에서 사도 해롤드 비 리의 요청으로 본부 초등회 임원회가 말씀을 전했다. 말씀 중에 전통 의상을 입은 여러 국가 및 인종의 어린이로 구성된 합창단이 등장했다. 교회의 회원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린이들이 “난 하나님의 자녀”의 후렴을 부르자, 가사에 담긴 보편적인 메시지가 청중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길을 찾아 가게
저를 도와주소서
주와 함께 살도록
가르쳐 주소서
노래가 끝나자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이 어린이들에게 다가가 약속했다. “우리는 여러분의 간청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걸으며 곁에서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총관리 역원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라는 과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리 장로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만찬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오미 자매님, 이 노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957년 5월, 엘리오 다 로샤 카마르고는 끝도 목적도 없이 교회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데 지쳐 버렸다. 그 모든 배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리에 대한 신성한 증거를 받지 못했다. 증거를 얻지 못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아새얼 소런슨 회장과 그의 아내 아이다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부는 감리교회를 떠난 엘리오와 나이르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 주었다. 소런슨 자매는 나이르에게 특히 마음을 썼다. 자매는 나이르를 자주 만나 그녀가 복음을 배우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또한 그녀는 엘리오의 고심을 알아차리고 조언해 주고 싶었다.
어느 날 오후 소런슨 자매가 말했다. “엘리오 형제님, 형제님이 간증을 얻지 못한 이유는 교리에서 모순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은 엘리오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회복된 복음에 대해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신중하게 따져 보았고 그 교리가 성경과 일관되고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수결혼과 신권 제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있었지만, 이제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로 교회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앙이 있었다.
또한 엘리오는 배운 것이 진리인지를 확인하는 데 번갯불 같은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서서히 간증을 얻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순조로워서 영원한 진리의 빛이 이미 자신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조차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진리를 밝혀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얼마 뒤 엘리오는 선교사들에게 월요일 밤 집으로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침례를 받으려면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가 물었다.
해럴드 힐럼 장로가 단계를 설명했다. “접견을 받은 다음 선교부 회장님이 서명한 침례 서류를 받아야 합니다. 침례식은 토요일에 하겠습니다.”
힐럼 장로는 즉시 엘리오를 접견했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가 계명을 지키고 있고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침례식이 있던 1957년 6월 1일, 엘리오는 상파울루에서 유일하게 침례탕이 있는 장소인 선교 본부로 갔다. 그 전에 그는 나이르와 함께 그녀도 침례를 받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엘리오는 그 소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침례탕은 선교 본부 뒤뜰에 있었다. 쌀쌀한 날이었다. 엘리오는 침례탕에 발을 내딛는 순간 물이 너무 차가워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는 위로하듯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는 온기를 느꼈다. 그는 충만한 기쁨을 느꼈고, 그 기쁨은 남은 하루 동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