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5장: 영원한 성약을 기뻐하며


제15장

영원한 성약을 기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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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교회 업무가 지체된 탓에 해롤드 비 리 회장은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지역 연차 대회에 늦게 도착했다. 그가 탄 비행기는 1972년 8월 26일 이른 오후에 착륙했다. 저녁에 그는 상호부조회, 아론 신권 및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 청녀들을 위한 개별 대회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러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날 아침, 대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그를 교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지지했다. 멕시코의 회중은 이렇게 세계 최초로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지지의 뜻을 표시했다.

선지자는 며칠 후 유타로 돌아왔지만 배도 단체의 일원이 자신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 회장의 안전을 위해 그가 가는 곳마다 경찰이 동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찰의 보호를 고맙게 생각했지만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번잡하게 느껴졌다. 최근의 교회 회장들은 대체로 경호원을 두지 않고 생활했다. 그런데 이제 리 회장이 외부로 나갈 때마다 경찰의 호위가 적지 않은 소란을 일으키곤 했다.

곧 그와 그의 아내 조앤은 고든 비 힝클리 장로와 그의 아내 마조리와 함께 유럽과 이스라엘의 성도들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여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이 따랐다. 그들은 경호 팀 없이 세계의 긴장 지역을 여행하게 될 것이었다. 1972년에는 서독 뮌헨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단체가 이스라엘 올림픽 국가대표 열한 명을 납치해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전 세계가 동요했으며, 리 회장은 이스라엘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런데도 그와 리 자매는 계획대로 힝클리 부부와 동행했다.

일행은 9월 19일 저녁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유학하던 캐나다 출신 교회 회원인 데이비드 갤브레이스가 그들을 태우고 남동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예루살렘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어두워서 바깥을 잘 볼 수 없었지만, 성스러운 고대 도시의 도로를 달리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사흘 동안 리 부부와 힝클리 부부는 이스라엘의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여러 성스러운 장소들을 방문했다. 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은 리 회장에게 사도 올슨 하이드가 1841년에 감람산에서 기도를 드린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리 회장은 시장에게 그 기도를 기념하기 위해 언젠가 교회에서 예루살렘 시내에 기념비나 방문자 센터를 짓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콜렉 시장이 말했다. “우리는 명상을 위한 공원을 조성할 목적으로 감람산 부지를 매입하고자 힘쓰는 중입니다. 공원에 그 비문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9월 20일 저녁, 데이비드를 비롯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소수의 성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매장된 장소일 것으로 추정되는 동산 무덤에서 리 부부와 힝클리 부부를 만났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위에 거룩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생명이 떠난 구주의 몸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모습과 막달라 마리아가 사흘째 되는 날 동산에 와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모습 등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무덤에서, 리 회장은 성도들을 지부로 조직하고 데이비드를 지부 회장으로 불렀다. 이스라엘에 상주하는 교회 회원은 30명이 채 안 되었지만, 최근 BYU 학생들이 한 번에 몇 달씩 학업 차 이 ‘거룩한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모임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수는 두 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리 회장은 지부가 그 지역에서 위대한 사업의 기초를 놓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누구냐고 묻거든 몰몬교나 LDS 교회의 회원이라고 말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이라고 답하십시오.”

모임이 끝난 후 리 회장은 지친 몸으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며칠 전부터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고통스러운 기침과 호흡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제 피로가 시작되면서 그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그날 밤, 리 자매의 요청으로 힝클리 장로가 방으로 찾아와 리 회장에게 축복을 주었다. 이튿날 아침 리 회장은 약간의 피를 토했는데, 그러자 즉시 호흡 곤란 증세가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곧 그는 데이비드와 힝클리 부부와 함께 베다니, 여리고, 가버나움, 나사렛, 그 밖의 성스러운 장소를 돌아볼 만큼 몸이 가뿐해졌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그는 힝클리 장로에게 자신이 기적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죽음의 문턱에 와 있는 것만 같았었지만, 힝클리 장로의 축복을 통해 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회복해 주셨다.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기적을 목격하기 위해 기적의 땅에 와야 했습니다.”

일행은 그날 저녁에 예루살렘을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예수께서 걸으셨던 곳을 걸으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겟세마네, 나사로의 무덤, 베들레헴, 그리고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그런 다음 데이비드가 그들을 공항으로 데려다주었고, 그들은 로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들의 신앙은 성지에서 보고 경험한 모든 것들로 인해 새로워졌다.


1972년 11월 7일, 유타주 바운티풀의 아데스 캡은 자신의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제일회장단의 비서인 프랜시스 기번스였다. “내일 아침 11시 35분에 남편과 함께 해롤드 비 리 회장님을 뵈러 그분의 집무실로 오실 수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데스는 심호흡을 하고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자, 그녀는 리 회장이 자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녀와 남편 히버는 교사였다. 그들은 마흔한 살로 아직 젊은 편이었지만 수년 동안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해 왔다. 아데스는 브리검 영 대학교 교육학부 교수였으며, 교회의 청소년 협의 위원회에서 봉사했다. 히버는 감독을 거쳐 이제는 스테이크 회장단의 보좌로 봉사하고 있었다.

히버가 집에 돌아오자 아데스는 전화 통화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리 회장이 남편에게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하도록 요청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히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사를 해야 할지 몰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집을 짓고 있었으므로 선교부 부름을 받는다면 공사를 단념해야 했다. 히버는 집 짓는 일을 대부분 직접 하고 있었으며, 공사를 마무리하도록 누군가에게 돈을 지불할 여유는 없었다.

아데스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녀가 시련을 겪는 동안 늘 그녀를 도와주셨다. 캐나다 앨버타주 카드스턴 근처에 살던 소녀 시절에 그녀는 학교에서 두 학년을 낙제했다. 그녀가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녀는 최근에 교과 과정 개발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대가족을 원했다. 하지만 기적을 바라며 자주 기도했음에도 그녀와 히버는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한동안은 입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주님의 인도를 구할 때마다 “생각이 둔해”졌다. 그들은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해 자신들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웃과 친구, 가족들이 자신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영원한 관점을 통해서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평안과 자신들이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리 회장과 약속이 있던 날 아침, 교회 행정 건물에 도착한 아데스와 히버는 긴장이 됐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임무가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리 회장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집무실로 안내하고는 말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들른 것은 아닐 테지만요.”

그런 다음 그는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발맞추기 위해 교회 조직도 잦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교회의 청소년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청소년들을 강화하고 하나님의 왕국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교회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이유로 상호향상회는 본부 아론 신권 지도자와 멜기세덱 신권 지도자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도록 재편성되고 있었다.

아데스는 리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히버에게 어떤 일을 요청할지 궁금했다. ‘회장님이 남편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든 남편은 잘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기꺼이 남편을 지지할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리 회장이 봉사를 요청한 사람은 아데스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부부를 집무실로 오게 한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단 말인가?

리 회장은 최근에 루스 펑크가 본부 청녀 상호향상회의 회장으로 봉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협의 위원회에서 아데스와 함께 일했던 루스가 아데스를 제2보좌로 추천한 것이었다. 새로운 본부 청녀 상호향상회 회장단의 사무실은 최근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에 완공된 초고층 교회 사무실 건물 19층에 위치하게 될 것이었다.

아데스는 부담을 느꼈지만 그 부름에 담긴 신뢰의 의미에 감사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 교회는 청소년 프로그램의 개편을 공식 발표했다. 이전에 청녀 상호향상회는 제일회장단의 감독을 받으며 운영됐었다. 이제 교회 조직 간의 상호 협력의 일환으로 청녀 상호향상회와 청남 상호향상회는 감리 감독단과 와드 및 스테이크 신권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함께 일하게 될 것이었다. 또한 이 새로운 구성으로 인해 멜기세덱 신권 상호향상회(18세 이상의 독신 성인)와 아론 신권 상호향상회(12~18세 사이의 청남 및 청녀) 간에 구분이 이루어졌다.

아론 신권 상호향상회는 신권 지도자들의 감독을 받지만, 이 프로그램은 성별과 연령에 기반해 앞으로 소년 소녀들이 참석할 수 있는 반과 활동을 제공할 것이었다. 신권 직분인 집사, 교사, 제사와 유사하게 청녀 반은 꿀벌반(12~13세), 장미반(14~15세), 월계반(16~18세)으로 불렸는데, 이 명칭은 청녀 상호향상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것이었다. 몇 년 전 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와드에 감독의 청소년 평의회를 시작하도록 요청했고, 이를 통해 청소년들은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를 새로 얻게 되었다. 이제 제일회장단은 새로운 상호향상회 조직을 통해 청소년들이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기를 바랐다.

펑크 회장은 이 프로그램에 대한 비전을 지지했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녀는 여러 해 동안 학생들에게 지도자로 발전할 많은 기회를 주었고, 그들은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 그녀는 단언했다. “무언가를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들은 것을 행해야만 무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아데스에게도 적용됐다. 부름을 받고 얼마 뒤 그녀는 영국에서 열리는 몇몇 지역 대회에 참석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녀는 아직 부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문을 앞두고 긴장이 됐다. 그러나 곧 그녀는 몰몬경에 나오는 니파이의 말을 떠올렸다. “주께서[는] 사람의 자녀들이 그가 명하시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실 것이 아니고는 아무 명령도 주지 아니하심[이라.]”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나는 평생 이 구절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 그 말씀이 참됨을 알아야 해.”


침례를 받은 엘베시오와 후다 마르틴스는 다른 브라질 성도들이 교회의 신권 제한과 성전 제한에 대해 종종 자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엘베시오도 그들의 아들 마르쿠스도 모두 신권에 성임될 수가 없는데 그들이 어떻게 교회에 충실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마르틴스 가족의 헌신에 화가 난 몇몇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기도 했다.

한 남성은 엘베시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상황이라면 교회에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많은 동료 성도들은 마르틴스 부부의 강한 간증과 부름에 대한 헌신에 감탄했다. 그들이 교회에 들어온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십이사도 정원회의 새로운 회원인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가 브라질의 다섯 번째 스테이크를 조직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에 왔다. 당시 엘베시오는 지방부와 스테이크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테이크 주일학교 회장단의 보좌로 봉사하라는 부름에 응했다. 그리고 후다는 스테이크 초등회 회장단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스테이크는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아울렀다. 엘베시오와 후다는 새로운 부름을 통해 스테이크 내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와드와 지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엘베시오는 늦은 밤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후다를 태워 오는 때도 많았다. 새로 맡은 부름을 수행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마르틴스 부부는 기꺼이 봉사했다.

그들의 침례는 가족과의 관계도 바꿔 놓았다. 후다의 가족들은 그녀가 교회에 가입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신앙을 버리도록 후다와 엘베시오를 설득하려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비극이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 중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아들 마르쿠스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마르틴스 가족은 성도들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꼈다. 지부 회원들이 자신들을 너무도 따뜻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처음에 엘베시오는 자신이 유명한 회사의 간부여서 자신의 가족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는 지부 활동에서 허드렛일을 배정받은 후, 자신의 가족이 다르게 대우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날 교회의 한 친구가 엘베시오에게 말했다. “자네처럼 충실한 회원들은 신권을 소유할 만큼 합당하다는 것을 이미 주님께 입증한 걸세. 나는 언젠가 자네가 신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

엘베시오와 후다는 친구와 교회 동료 회원들의 지지를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 성도들이 언제, 어떻게 신권 축복을 받게 될지에 관한 문제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당신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신앙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르틴스 부부는 실망과 상심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대치를 낮게 유지했다. 그들은 신권과 성전의 충만한 축복은 복천년에나 자신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더 많은 신앙과 교회에서 봉사할 힘을 달라고 기도할 따름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 스테이크가 조직된 후 엘베시오와 후다는 축복사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스테이크 축복사인 바우미르 시우바는 엘베시오와 후다를 축복하면서 그들이 “영원한 성약을 기뻐하며 지상에서” 함께 살 것이라고 약속했다. 훌륭한 약속이었지만 가족들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다. 신권 제한으로 인해 엘베시오와 후다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들은 필멸의 삶 동안 성전 성약을 맺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축복사의 그 축복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7주 후, 열네 살의 마르쿠스가 자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축복사의 집을 방문했다. 축복사는 마르쿠스에게 축복을 주면서 그가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에 대한 간증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엘베시오와 후다는 이 약속을 마르쿠스가 선교사로 봉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신권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마르쿠스는 선교사로 봉사할 수 없었다.

마르틴스 가족은 자신들이 한결같이 살아온 평화로운 삶의 리듬이 축복사의 말로 인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생활하며 그 일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엘베시오와 후다는 자신들이 받은 약속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만일에 대비해 마르쿠스의 선교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새 저축 계좌를 개설했다.


1973년, 스펜서 더블유 킴볼은 조용한 성탄절을 보냈다. 그와 카밀라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태어날 때부터 청각 장애가 있었고 지금은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카밀라의 여동생 메리와도 선물을 주고받았다. 카밀라는 오븐에 칠면조 고기를 넣었고, 그는 저녁 식사에 오기로 한 손님들을 위해 그녀를 도와 여분의 식탁을 준비했다.

킴볼 장로는 오전에 남은 시간 내내 타자기 앞에 앉아서 수북이 쌓인 밀린 편지들에 답장을 썼다. 축음기에서 성탄절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는 이따금 손을 멈추고 레코드판을 뒤집었다.

오후가 되자 킴볼 부부의 자녀와 손주, 증손주 몇몇이 성탄절 저녁 식사를 하러 집에 도착했다. 손님 중에는 킴볼 장로가 12년 전 인도 델리에서 침례를 준 망갈 단 딥티와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킴볼 부부의 딸 올리브 베스와 함께 살았던 주니족 소녀 알린도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노래를 불렀으며, 킴볼 장로는 즐거운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을 때, 킴볼 장로는 자택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서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말했다. 킴볼 장로는 즉시 그 사람이 리 회장의 비서인 아서 헤이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 아서.” 킴볼 장로가 유쾌하게 말했다. “잘 지내는가?”

“별로 그렇지 못해요.” 아서가 말했다. “지금 리 회장님과 함께 병원에 있는데 회장님이 아주 편찮으십니다. 장로님이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킴볼 장로는 전화를 끊고 곧장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 그는 복도에서 아서를 만났다. 아서는 리 회장이 휴식과 검진을 위해 병원에 왔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침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것이었다. 아서는 도움을 청했고, 병실은 순식간에 의사, 간호사, 장비들로 가득 찼다. 그곳은 여전히 미친 듯이 움직이는 의료진으로 부산했다.

리 회장의 아내 조앤은 딸 헬렌과 사위 브렌트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아서가 리 회장의 병실에서 나가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으므로 그들은 복도에서 대기할 수 있는 빈방을 하나 찾아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며 주님께 선지자의 목숨을 지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제일회장단의 제2보좌인 매리온 지 롬니가 도착했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롬니 회장은 다시 한 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이끌어 기도를 드렸다. 그런 후 의사가 방으로 들어와 말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킴볼 장로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병으로 고생할 때 끊임없이 자신을 지지해 준 리 회장은 일흔네 살로, 자신보다 어렸다. 게다가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었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킴볼 장로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리 회장이 오랫동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리 회장이 계속 건강하기를 킴볼 부부만큼 열심히 기도한 사람은 없었다.

10분이 지났다. 킴볼 장로는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 리 회장의 병실로 향했다. 그가 병실로 다가가는데 의사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더는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리 회장이 운명한 것이었다.

  1. Lee, Diary, Aug. 26–27, 1972; First Mexico and Central America Area General Conference, 110–15; Holzapfel and Lambert, “Photographs of the First Mexico and Central America Area Conference,” 70; J M. Heslop, “Spirituality Themes Conference,” Church News, Sept. 2, 1972, 3. 주제: 만장일치; Harold B. Lee[해롤드 비 리]

  2. Lee, Diary, Aug. 29, 1972; Goates, Harold B. Lee, 475–77; Tanner, Journal, Sept. 12, 1972; “7 Sought in Slaying of Cult Leader in Mexico,” Los Angeles Times, Sept. 2, 1972, section 3, 8.

  3. Lee, Diary, Aug. 29, 1972; Sept. 5, 7, 9–10, and 13, 1972; Goates, Harold B. Lee, 476–79; Dew, Go Forward with Faith, 319; “Olympic Day of Terror Ends with 16 Dead in Gun Battles,” Salt Lake Tribune, Sept. 6, 1972, 1; Hack Miller, “Terror—And Now the World Weeps,” Deseret News, Sept. 6, 1972, A1.

  4. Gordon B. Hinckley, “Holy Land Tour Thrills Pres. Lee, Elder Hinckley,” Church News, Dec. 16, 1972, 5; Hinckley, Journal, Sept. 19–22, 1972; Lee, Diary, Sept. 20–22, 1972;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Oct. 11, 2021], 12–13; 『성도들』, 제1권, 제35장, 제36장. 주제: 성지 헌납

  5. Hinckley, Journal, Sept. 20, 1972; John A. Tvedtnes, “A Visit with President Lee,” New Era, Apr. 1973, [6]–[7]; Gordon B. Hinckley, “Holy Land Tour Thrills Pres. Lee, Elder Hinckley,” Church News, Dec. 16, 1972, 12; David Galbraith to E. Q. Cannon Jr., Jan. 15, 1972, Switzerland Zurich Mission, President’s Files, CHL;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54–56.

  6. Lee, Diary, Sept. 16–17 and 21–24, 1972; Hinckley, Journal, Sept. 20–22, 1972; Dew, Go Forward with Faith, 321; Goates, Harold B. Lee, 486–87.

  7.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1;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0; Kapp, Journal, Nov. 7, 1972. 주제: Ardeth G. Kapp[아데스 지 캡]

  8.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0;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04–11.

  9.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0–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1; Kapp, Journal, Nov. 7, 1972.

  10.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43–46, 64–67, 70–71, 127–31, 153–57, 167–71; Karen Thomas Arnesen, “Ardeth Greene Kapp: A Prairie Girl, a Young Woman Still,” Ensign, Sept. 1985, 35, 38; Kapp, My Neighbor, My Sister, My Friend, 122–23; 교리와 성약 9:9.

  11.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1; Funk, “Ruth, Come Walk with Me,” 122; “2 Priesthood-Oriented MIAs,” Church News, Nov. 11, 1972, 3, 8–9. 주제: 청남 조직; 청녀 조직

  12.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1–12.

  13.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2–13; “Moving Days Are Near,” Church News, Aug. 5, 1972, 4. 주제: Church Callings[교회 부름]; 교회 본부

  14.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1;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12; “2 Priesthood-Oriented MIAs,” Church News, Nov. 11, 1972, 3, 8–9; Romney, “History of the Correlation of L.D.S. Church Auxiliaries,” [J3]; First Presidency to Regional Representatives of the Twelve and others, Nov. 9, 1972, First Presidency, Circular Letters, CHL.

  15. “2 Priesthood-Oriented MIAs,” Church News, Nov. 11, 1972, 3; Mission MIA Manual, 69, 74, 84; Stephen W. Gibson, “New Bishop’s Youth Council,” Church News, May 3, 1969, 4; Victor L. Brown, “The Aaronic Priesthood MIA,” Ensign, July 1973, 83; Pulsipher, Ruth Hardy Funk, 137.

  16. Peterson and Gaunt, Keepers of the Flame, 112; Pulsipher, Ruth Hardy Funk, 135.

  17. Kapp, Oral History Interview, 85; Kapp, Journal, Nov. 24 and Dec. 9, 1972; 니파이전서 3:7.

  18.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56–58. 주제: 신권 및 성전 제한

  19.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53–54, 56–57; Rio de Janeiro Brazil Stake,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Dec. 31, 1972; Shields, “Rio de Janeiro’s Journey to Become a Center of Strength for the LDS Church,” 108; Deseret News 1989–90 Church Almanac, 227–33; Martins, Martins, and Martins, Oral History Interview, 11–12. 주제: 와드와 스테이크

  20.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54.

  21.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46, 51–52; Martins and Martins, Oral History Interview, 11, 18–19.

  22.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47–48.

  23.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61.

  24. Martins, Martins, and Martins, Oral History Interview, 1, 13, 15–16; Rio de Janeiro Brazil Stake,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Dec. 31, 1972, and Feb. 22, 1975; Martins, Autobiography of Elder Helvécio Martins, 63–64; Marcus Martins to Jed Woodworth, Email, June 20, 2022, copy in editors’ possession. 주제: 축복사의 축복

  25. Spencer W. Kimball, Journal, Jan. 6–7, 1961; Mar. 28, 1961; Dec. 25, 1973; 망갈 단 딥티 및 존 샌토시 뮤랄라, “인도에서 시작하여 개척자로 걸어온 나의 여정”, 『리아호나』, 2016년 7월호, 18~23쪽; Mack, Autobiography of Olive Beth Kimball Mack, 83; Kimball and Kimball, Spencer W. Kimball, 1–2.

  26. Haycock, Personal History, 67–69; Spencer W. Kimball, Journal, Dec. 26, 1973; Goates, Harold B. Lee, 581. 주제: Harold B. Lee[해롤드 비 리]; Spencer W. Kimball[스펜서 더블유 킴볼]

  27. Haycock, Personal History, 68–69; Gerry Avant, “Camilla Kimball Feels Mantle of Responsibility,” Church News, Jan. 6, 1979, 6; Spencer W. Kimball, Journal, Dec. 26, 1973; Goates, Harold B. Lee, 579.

  28. Haycock, Personal History, 69, 71; Spencer W. Kimball, Journal, Dec. 26, 1973; Romney, Journal, Dec. 26–27, 1973; Kimball, Lengthen Your Stride, 5; Goates, Harold B. Lee, 576, 580.

  29. Kimball, Lengthen Your Stride, 5; Haycock, Personal History, 69–70; Spencer W. Kimball, Journal, Dec. 26, 1973; Edward L. Kimball, Notes, Dec. 26, 1973, Edward L. Kimball Papers, C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