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21장: 사랑의 씨앗


제21장

사랑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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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으로 땅을 파는 여자

1981년 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예순세 살의 줄리아 마빔벨라가 자신의 집 근처에서 공용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요하네스버그 서쪽의 백만여 흑인 인구 거주 지역인 소웨토에 살고 있었다. 전직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줄리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식 인종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지역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몇 년 전 공용 농장을 시작했다.

흑인 여성인 그녀는 이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 법으로 인해 흑인들은 비하의 대상이 되고 열등한 시민으로 취급받았다. 수십 년 동안, 정부는 모든 남아프리카 흑인에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명시된 소책자 형태의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강제했다. 하루 중 허락되지 않은 시간에 백인 구역에서 발견되는 흑인은 구타당하거나 체포되거나 심지어 살해될 수 있었다.

줄리아는 젊은 시절 요하네스버그의 다인종 구역에서 살았지만 흑인만 거주하는 소웨토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제 그녀는 이런 부당한 취급에 몸부림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그들의 분노가 점점 커지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녀는 분노가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괴하기 전에 그들에게 분노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었다. 농장을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보렴, 이 땅은 굳고 단단하지. 하지만 삽이나 갈퀴로 파면 금이 가서 덩어리를 떠낼 수 있어. 이런 덩어리들을 부수고 씨앗을 뿌리면 씨앗이 자라는 거야.”

그녀는 청소년들이 단단한 땅이 주는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분통 가득한 땅을 파서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 보자꾸나.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을 얻지 못한단다.”

그것은 줄리아가 여전히 배우고 있는 교훈이었다. 수십 년 전, 그녀의 남편 존은 백인이 운전하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쳐 목숨을 잃었다. 줄리아는 남편의 소지품을 찾으러 경찰서에 갔지만 당시 남편이 갖고 있던 돈이 사고 이후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사고에서 존은 잘못이 없다고 믿었지만, 백인으로만 구성된 법원은 존에게 책임을 돌렸다.

존의 죽음으로 줄리아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고,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에 계심을 느끼며 위로받고 안도를 느꼈다.

존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지금, 줄리아는 자신의 고통이 치유되려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존의 명예를 훼손하고 존을 자신과 가족에게서 앗아간 사람들을 용서하기는 여전히 힘들었다.

1981년 6월 어느 날, 줄리아는 최근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일어난 폭동으로 약탈과 화재를 겪은 청소년 시설과 도서관의 청소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곳에 도착한 줄리아는 삽으로 잔해를 치우는 두 명의 청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청년들은 백인이었는데, 소웨토에서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청년들은 환하게 웃으며 줄리아에게 자신들은 도움을 주러 온 미국인 선교사들이라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조금이나마 식물을 기르는 것에 관해 알고 있었고 줄리아와 공용 농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줄리아에게 방문해도 될지를 물었다. 줄리아는 그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두 백인 남성을 집에 초대했다가 자신과 가족이 끔찍한 보복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그녀가 경찰이나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변명을 시작했지만 그러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고 그들에게 방문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선교사들에게 사흘 후에 오라고 말했다.

청년들은 흰 셔츠에 명찰을 달고 약속한 시각에 맞춰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선교사라고 소개했다. 줄리아는 정중하게 그들의 메시지를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는 어떻게 해야 정중하게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런데 선교사 한 명이 줄리아와 사망한 남편의 사진을 가리키며 “남편은 어디 계세요?”라고 물었다.

“그이는 죽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선교사들은 그녀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에 관해 말했다. 줄리아는 회의적이었다. 여러 해 동안 많은 교회에 가 봤지만 죽은 사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 선교사가 신약전서를 펴고 그녀에게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을 읽어 보라고 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

그 구절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마음을 열고 선교사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원한 가족에 대해 가르치는 동안, 그녀는 사망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성전에서 침례를 비롯한 의식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음 생에서 존을 포함한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몰몬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은 마침내 그녀가 자신과 자녀들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줄리아는 선교사들을 만난 지 6개월이 지난 뒤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스테이크 대회에서 말씀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교회는 그곳의 흑인들에게 전도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 초부터 아파르트헤이트가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그러자 같은 종교를 믿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수월해졌다. 줄리아가 침례를 받을 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올 무렵, 소웨토에는 그곳 성도들을 위한 지부가 설립되었다.

줄리아는 대다수가 백인인 스테이크의 회원들 앞에 서자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자신과 교회의 다른 회원들을 가르는 쐐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다해 기도했고, 주님은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그녀에게 속삭여 주셨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경찰의 잔인한 대우, 오랫동안 품어 온 억울한 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간증했다. “마침내 진정한 용서를 가르쳐 주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농장의 흙덩어리처럼 그녀의 쓰라린 고통도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말했다. 남은 것은 평안과 용서뿐이라고.


독일 민주 공화국의 정부 관리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성전을 건립해 볼 것을 제안했을 때, 제일회장단은 헨리 부르크하트에게 권한을 주고 집회소 건축 허가를 얻게 했다. 이 집회소에서는 특별 구역을 두고 산 자를 위한 엔다우먼트와 인봉을 집행하되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의식은 집행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드레스덴 선교부 회장단인 헨리와 그의 보좌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후 칼마르크스슈타트에 건물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그곳에는 성도들이 많았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집회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현지 관리들은 칼마르크스슈타트에는 교회가 더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허가를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 대학이 많은 인근 도시인 프라이베르크를 제안했다.

헨리는 그들에게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칼마르크스슈타트에 짓고 싶습니다.”

선교부 회장단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그런데 헨리와 그의 보좌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프라이베르크에 성전을 짓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성도들의 작은 지부가 있었고 드레스덴과 그 지역 다른 도시들에 있는 지부들과도 가까웠다.

헨리와 그의 보좌들은 사안을 숙고할수록 확신이 커졌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실 프라이베르크는 그렇게 나쁜 선택지가 아니야.’

프라이베르크시의 관리들은 교회가 그곳에 스위스 성전 같은 건물을 짓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았다. 동독 정부는 전국에서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는 신앙인들과 관계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제 동독은 일부 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훼손된 역사적인 의미를 띤 교회들을 재건하려고 했다.

프라이베르크에는 이미 성도들에게 적합한 집회소가 있었기에, 헨리는 교회가 복합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을 접고 침례탕을 포함하고 다른 대리 의식을 허용하는 표준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프라이베르크에 모든 기능을 갖춘 주님의 집을 지을 부지를 확보하는 것에 대해 승인을 얻었다.

그런 다음 헨리는 선교부 집행 서기이자 프라이베르크 토박이인 프랑크 아펠과 함께 그 계획을 들고 프라이베르크시 회의에 참석했다. 시 의회는 교회에 후보지 두 곳을 제안했다. 첫 번째 부지는 시내 한가운데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도로보다 지대가 낮아서 행인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다른 부지는 도시 북서쪽 언덕 들판에 있는 미개발지였다. 근처에 대중교통 정거장은 없었지만 주변 지역에서 볼 때 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두 번째 부지를 본 헨리와 프랑크는 성전을 짓기 적합한 장소를 찾았음을 깨달았다.

1982년 2월 27일,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는 동독을 방문하여 성도들을 살피고 헨리와 함께 새로운 성전 부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헨리와 그의 아내 잉아는 거의 14년 전 처음 만났던 몬슨 사도와 소중한 우정을 나누었다. 몬슨 장로는 아내 프랜시스가 준비한 장식용 접시와 새 치마를 잉아에게 선물했다. 또한 부르크하트 부부의 열네 살 난 아들 토비아스에게 동독에서는 보기 드문 소형 계산기를 선물해 그를 놀래키기도 했다.

이튿날 헨리는 몬슨 장로와 함께 부지로 갔다. 몬슨 장로는 교회가 칼마르크스슈타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를 이해했지만 프라이베르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그는 헨리에게 물었다. “이 선택지를 충분히 고려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이곳이 적합한 장소인가요? 적절한 대중교통도 없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헨리는 최선을 다해 몬슨 장로의 질문에 답했다. 그런 다음 자신과 보좌들은 그곳에 성전을 짓는 것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확언했다. 헨리는 자신들이 그 부지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며 주님께서 동독에 당신의 집을 짓고자 하시는 곳은 그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몬슨 장로는 완전히 수긍했다. 교회는 토지를 매입하고 수정된 건축 도면을 동독 정부에 제출했다.


1982년 3월 31일, 예루살렘의 한 사무실에서 도시의 수석 엔지니어인 암논 니브가 손으로 색칠한 커다란 감람산 지도를 살펴보는 동안, 데이비드 갤브레이스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사무실에는 도시를 설계하는 다른 여섯 명도 함께 서 있었다.

데이비드는 몇 달 전부터 암논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교회는 BYU 유학생과 현지 성도들을 위한 예루살렘 센터 건립 계획을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센터가 완성되면 성지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곳은 교회 회원들이 찾아와 예수님이 걸으신 곳을 걸어 보고, 오랜 옛날부터 뻗어 내린 이 종교의 뿌리를 더 알아가고, 중동 사람들의 문화와 믿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배움과 이해, 평화의 장소가 될 것이었다.

데이비드를 포함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1979년 킴볼 회장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감탄했던 그 장소에 센터를 짓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감람산 가장 높은 지점인 스코푸스산 인근인 데다 정부가 지정한 “녹지”가 포함돼 있어서 사실상 건축이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이 개발을 염두에 두고 지대 설정을 바꿔 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가 그곳에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암논은 녹지의 경계를 조정해야 했다.

테디 콜렉 시장은 예루살렘시에 센터를 건립하고자 하는 교회의 소망을 지지했다. 그는 교회가 이슬람교도 및 유대인들과 형성한 우호 관계가 두 집단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코푸스산을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의 설득으로 데이비드는 사용할 수 있는 다른 부지들을 살펴보고 유망한 장소를 발견할 때마다 교회 본부에 연락했다. 그러나 그중 어느 곳도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엔 엘돈 태너 회장은 그에게 스코푸스산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어느 날 콜렉 시장은 암논에게 데이비드와 회의를 잡고 그의 말을 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교회가 BYU 예루살렘 센터를 설계하도록 고용한 현지 건축가 데이비드 레즈닉도 회의에 초대되었다.

레즈닉은 자신이 학교를 염두에 두고 그린 도면 몇 개를 암논에게 보여 주며 센터 후보지가 그와 암논이 수년 전 설계에 참여했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가까이 있다고 언급했다. 암논은 몇 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 감람산 지도를 살펴보았다. 회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말이 없었다. “펠트펜 좀 갖다주세요.” 갑자기 그가 말했다. 사무실에는 펜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서둘러 펜을 찾아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팔을 뻗어 지도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녹지를 수정하여 교회가 예루살렘 센터를 짓고자 하는 바로 그 지점 둘레로 빨간 선을 그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건물은 이 안에만 지어져야 합니다.” 그는 고무로 된 관인을 집어 들어 지도에 찍고 서명했다. “다 됐습니다!” 그가 말했다.

모두들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대해 교회가 방금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빨리 교회 본부에 전화를 걸어 이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몇 달이 지난 1982년 7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올가 코바르소바는 침례를 받기 위해 소수의 성도들과 함께 차를 타고 브르노 근처 저수지로 향했다.

올가는 오타카르 보이쿠브카의 집에서 처음 성찬식에 참석한 후로 나이 지긋한 체코슬로바키아 성도들의 신앙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일학교에서 토론을 들으며 마음이 고양되었고 자신도 편안하게 생각을 나누었다.

올가는 침례받기 몇 달 전부터 브르노 지부 회장단 일원인 야로미르 홀크만과 선교사 토론을 공부했다. 처음 몇 번은 종교적인 용어들이 너무나 생소해서 어렵고 불편했으며, 구원의 계획은 마치 동화처럼 들렸다. 올가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의문들과 씨름했다.

그녀는 침례를 받고 나면 닥칠 문제들도 걱정이었다. 교회는 1975년 이후 유럽 중부와 동부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드레스덴 선교부 회장단인 헨리 부르크하트와 그의 보좌들이 이리 슈네데르플레르라는 사람을 체코슬로바키아 성도들의 감리자로 지명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동독에서는 여전히 교회에 대해 알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올가는 머리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잊어버리자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올가는 침례받던 날 종일 금식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오타카르와 가드 보이쿠브카, 야로미르와 그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차를 타고 저수지로 갔다. 그들은 물가에 모여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의식을 진행하기도 전에 몇몇 낚시꾼들이 둑을 따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올가가 침례받을 장소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오타카르가 말했다. “이 저수지는 가장자리 대부분이 상당히 가파릅니다. 물속으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올가와 친구들은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그래도 낚시꾼들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올가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했다. ‘내가 준비가 덜 되었거나 간증이 부족하거나 완전히 회개하지 않아서일지 몰라.’

그녀가 막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던 참에 야로미르가 그녀의 팔을 끌고 다른 성도들에게 데려가더니 말했다.

“오늘 올가가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다시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었고, 야로미르가 올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다. 올가는 그의 목소리에 묻어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몇 분이 지나자, 낚시꾼들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자리를 떠났다.

야로미르는 올가의 손을 잡고 잔잔하고 고요한 물속으로 그녀를 인도한 뒤 침례 기도를 했다. 올가는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인생의 한 장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회복된 복음을 따르기로 결정한 지금, 모든 것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으며, 자신의 침례가 하늘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그들은 야로미르의 차를 타고 브르노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카세트테이프로 태버내클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다. 올가는 마치 천사들의 합창을 듣는 것 같았고, 태버내클 합창단은 단원이 모두 교회 회원이라는 야로미르의 말을 듣고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살아 있는 선지자가 있는 나라에 사는 성도들의 삶이 궁금했다.

브르노에 도착한 성도들은 야로미르의 집에 모였다. 야로미르와 오타카르를 비롯한 신권 소유자들은 올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들이 올가를 교회 회원으로 확인하자, 그녀는 성신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로미르는 올가를 축복하며, 그녀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가르침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가는 놀랐다. 드러내어 복음을 나누는 것이 당분간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가는 그 말을 마음속에 간직했고, 그 말이 실현될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1982년 11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850명의 인파가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건립될 주님의 집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도시 서쪽 흑인 거주 지역인 소웨토에 사는 줄리아 마빔벨라는 열 명의 가족을 이끌고 기공식을 찾았다. 줄리아는 성전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고인이 된 남편과 부모님의 의식을 마치고 싶었다. 그녀는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중요한 행사에 꼭 참석하기로 했다.

기공식의 감리자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마빈 제이 애쉬튼 장로였다. 그는 모임을 마치며 남아프리카 성도들에게서 느낀 영적 열기에 대해 언급했다. 성도들은 한때 미국, 스위스, 영국, 브라질의 성전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지만, 이제 성전이 완공되어 가까이에 자신들의 성전을 갖게 될 날을 고대할 수 있었다.

말씀을 마친 애쉬튼 장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날을 축하하며 첫 삽을 떴다. 그러자 참여를 열망하는 다른 성도들이 앞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았던 줄리아와 소웨토의 성도들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들을 본 몇몇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삽을 하나씩 들고 땅을 파도록 권유했다. 줄리아는 영의 영향력으로 자신들이 앞으로 불려 나왔다고 확신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줄리아는 상호부조회에서 봉사하면서 기쁨을 느꼈다. 지부의 많은 회원들은 최근에 개종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스스로 지부를 이끌 준비가 될 때까지 스테이크 내 다른 와드의 경험 많은 회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백인 여성인 상호부조회 회장은 줄리아를 제1보좌로 불렀다.

이 지부는 흑인 거주 지역에 처음으로 조직된 지부 중 하나였다. 지부는 요하네스버그 한 지역의 와드 건물에서 모였다. 줄리아와 소웨토의 흑인 성도들은 예배당에 가려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간 다음 나머지 거리는 걸어가야 했다. 얼마 후 지부는 소웨토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모임을 하기 시작했고, 줄리아는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교회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새로운 모임 장소도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를 성찬식에 적합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성도들은 일요일 아침마다 일찍 도착하여 바닥을 쓸고 창문과 의자를 청소해야 했다. 건물 예약 담당자가 돈을 더 벌 셈으로 이중 예약을 받는 바람에 성도들이 모일 장소가 마련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얼마 뒤 요하네스버그 스테이크는 점점 더 많은 흑인 성도들을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지부 지도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자신의 지부에서 새로운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그녀는 즉시 자신이 부족함을 느꼈다. 지역 사회에서 그녀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을 아는 경험 많은 지도자였지만, 지부의 성도들은 교회의 백인 지도자들에 익숙해 있었다. 그녀는 지부 회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며 ‘줄리아도 우리 같은 흑인인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아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실 것을 알았다.

  1.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36–37, 61–62, 69–71;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32–33, 38–39; Mavimbela, “I Speak from My Heart,” 68–69; McCombs and McCombs, Oral History Interview, 7–9; Clark and Worger, South Africa, 49–51; Barber, South Africa in the Twentieth Century, 140–43, 172–73, 211–14; Brown, Road to Soweto, 179–87; Johnson, Soweto Speaks, 9; Landis, “Apartheid Legislation,” 46, 48. 주제: 인종 분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2.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43–44, 51–55;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95], 15–17;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27–3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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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88–89;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47–48, 61; Turley and Cannon, “Faithful Band,” 13–37; Wood, Personal History, 265–67; Walshe, “Christianity and the Anti-apartheid Struggle,” 385–92.

  5.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54–56, 89;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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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Kuehne, Henry Burkhardt, 92–93; Kuehne, “Freiberg Temple,” 125–27; Burkhardt, “Wie kam es zum Bau des Freiberger [Freiberg] Tempels?,” 9–11; Burkhardt, Oral History Interview [1991], 11. 주제: Germany[독일]

  10. Kuehne, Henry Burkhardt, 94; Burkhardt, “Wie kam es zum Bau des Freiberger [Freiberg] Tempels?,” 9–10;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281; Apel, Oral History Interview, 1; Leonhardt, “Geschichte des Freiberg-DDR-Tempels,” 43–45; Burkhardt, Oral History Interview [1991], 11; Kuehne, “Freiberg Temple,” 115–16.

  11. Monson, Journal, Feb. 27–28, 1982.

  12. Monson, Journal, Feb. 28, 1982;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281; Burkhardt, “Wie kam es zum Bau des Freiberger [Freiberg] Tempels?,” 10; Henry Burkhardt to Thomas S. Monson, Nov. 5, 1981, in Burkhardt, “Wie kam es zum Bau des Freiberger [Freiberg] Tempels?,” [20]–[21]; Burkhardt, Oral History Interview [1991], 12; Kuehne, Henry Burkhardt, 93–94.

  13. Monson, Journal, Feb. 28 and Sept. 1, 1982;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281–83; Burkhardt, “Wie kam es zum Bau des Freiberger [Freiberg] Tempels?,” 10–11; see also Leonhardt, “Geschichte des Freiberg-DDR-Tempels,” 46a. 주제: Thomas S. Monson[토마스 에스 몬슨]

  14. Robert Taylor to Howard W. Hunter, Memorandum, Apr. 1, 1982, Howard W. Hunter, Jerusalem Center Files, CHL; Galbraith, “Lead-Up to the Dedication of the Jerusalem Center,” 54; Galbraith, “Miracles Open the Door”;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87, 150–52.

  15.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166; Robert Taylor, “The Jerusalem Center: Organizational Structure,” 1987, 1–4, Budget Office, Jerusalem Center Records, CHL.

  16.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62–64; Peterson, Abraham Divided, 343–45;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147–50; Kaminker, “Building Restrictions in East Jerusalem,” 9; Robert Taylor to Howard W. Hunter, Memorandum, Apr. 1, 1982, Howard W. Hunter, Jerusalem Center Files, CHL.

  17.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56, 85, 148–50, 166–67; Teddy Kollek to Delos Ellsworth, Dec. 18, 1983, Howard W. Hunter, Jerusalem Center Files, CHL; Galbraith, “Miracles Open the Door.”

  18.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87, 150–54, 167; Galbraith, “Lead-Up to the Dedication of the Jerusalem Center,” 54; Galbraith, “Miracles Open the Door”; Robert Taylor to Howard W. Hunter, Memorandum, Apr. 1, 1982, Howard W. Hunter, Jerusalem Center Files, CHL; Berrett and Van Dyke, Holy Lands, 389.

  19. Holcman, “Olga Campora Kovářová”; Kovářová, Oral History Interview, [11].

  20.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74–75.

  21.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75–77; Holcman, Scrapbook, 17.

  22. Mehr, “Enduring Believers,” 150–52; Ed Strobel, “Statistics of the Czechoslovakian Mission,” July 22, 1989, 1, Europe Area, Files relating to Church Activities in Eastern Europe, CHL;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77–78. 주제: Czechoslovakia[체코슬로바키아]

  23.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85–87; Kovářová, Oral History Interview, [11]–[12].

  24. Alan Dawson and Marjorie E. Woods, “Spiritual Moment as S. African Temple Begins,” Church News, Dec. 11, 1982, 5;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5; Hal Knight, “Black Branches Thrive in South Africa,” Church News, Nov. 28, 1981, 6; Marvin J. Ashton to First Presidency, Dec. 2, 1982, First Presidency, Temple Correspondence, CHL.

  25. Alan Dawson and Marjorie E. Woods, “Spiritual Moment as S. African Temple Begins,” Church News, Dec. 11, 1982, 5; “Transcript and Translation,” 1, 11, 14–16;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5–96.

  26. Johannesburg 2nd Branch, Annual Historical Reports, 1982, [4];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2–94; Hal Knight, “Black Branches Thrive in South Africa,” Church News, Nov. 28, 1981, 6.

  27. Learning to Listen”; Johannesburg 2nd Branch, Annual Historical Reports, 1981, [5]; 1982, [2]; Kwa Mashu Branch, Annual Historical Reports, 1980, [1]–[2];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