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기이한 방법
1999년 10월 26일, 조지스 에이 보닛은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이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회장단과 감리 감독단, 여러 총관리 역원 및 교회 관리자가 함께한 예산 배정 회의가 이제 막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행정 건물에서 끝난 참이었다. 시설부 관리 책임자를 대신하여 참석한 조지스는 보통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힝클리 회장이 일어서서 문으로 향하기 전까지는 모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날도 선지자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힝클리 회장은 방을 나가는 대신 조지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가나 성전은 어떻게 할 건가요?” 선지자의 눈은 간절히 답을 원하고 있었다.
조지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지스는 약 10년 전 아프리카에서 실무 책임자로 봉사하는 동안 교회의 활동에 대한 가나 정부의 전면 중단 명령을 철회시킨 바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아크라의 교회 회원인 아이작 애디가 소원해진 그의 이부 동생이며 가나의 대통령이었던 제리 롤링스와 화해하도록 힘을 보탰다.
조지스는 가나에서 해낸 일로 교회 지도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조지스가 교회에서 새로 맡은 일은 아프리카와는 연관이 없었으며, 그가 가나 성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힝클리 회장이 1998년 2월에 건축을 발표했다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조지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습니다.”
힝클리 회장은 여전히 답을 원하는 눈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지자는 조지스에게 가나 성전 건축이 정체에 빠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나 정부가 성전 건축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고, 교회는 아크라의 주요 도로에 부지를 매입했었다. 하지만 부지 매입 이후 1999년 4월에 막 성전 건축을 시작하려고 하자 가나 정부는 교회에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뒤, 조지스는 에이치 데이비드 버튼 감리 감독과 그의 2보좌인 키스 비 맥멀린과 함께 교회 본부 건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크라 성전 건축 허가를 위해 교회가 할 일에 대한 조지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가나에 가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조지스가 대답했다. “그럼요. 기꺼이 가겠습니다.”
몇 주 후 조지스는 가나에 도착했고 그곳 교회는 번영한 모습이었다. 교회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던 시기에 가나의 교회 회원 수는 약 9천 명이었고 스테이크는 없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가나에는 5개의 스테이크가 있었으며 회원 수는 17,000명이 넘었다. 그리고 수많은 회원들이 주님의 집 건설이 재개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1998년에 힝클리 회장이 가나를 방문해서 성전 건축을 발표하자 성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었다. 그 누구도 일이 지연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조지스는 아크라에서 성전 설계자와 교회 변호사, 정부 관료를 만났다. 또한 아프리카 서 지역 회장인 글렌 엘 페이스 장로를 만났는데, 페이스 장로는 조지스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조지스는 페이스 장로가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크게 낙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최근 아프리카 서 지역 성도들은 성전을 위해 특별 금식을 했으며, 페이스 장로는 곧 변화가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조지스는 일주일간 여러 번 회의를 한 후에 일정을 한 주 더 연장하고 자신이 파악한 점들을 정리했다. 조지스가 만난 사람들에 따르면, 교회의 대리인들이 본의 아니게 도시의 건축 승인 담당 기관인 아크라 시의회를 불쾌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아크라 시의회는 교회 대리인들이 허가 승인 절차를 진행하면서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고 오만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회 활동 일시 중단 시기에 화해하긴 했지만, 롤링스 대통령은 그 후 다시 형 아이작과 멀어져 있었고 아이작에게 다소 반감이 있는 것 같았다.
조지스는 자신이 파악한 사항을 페이스 장로에게 이야기했고, 두 사람은 감리 감독단에 보고할 내용을 함께 준비했다. 이후 조지스는 보고서를 가지고 유타에 돌아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피지의 줄리엣 토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원격 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 그녀가 듣는 강좌들은 그동안 경험했던 것과 달랐다. 학창 시절 줄리엣은 엉뚱한 말을 했다고 선생님에게 비웃음을 살까 봐 항상 질문하기를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원격 교육에서는 강좌의 진행자들이 질문을 독려했으며 그들은 절대 그녀가 스스로를 바보로 느끼게 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강좌를 듣는 동안 주님의 영이 학습을 인도하며 함께 하고 있음을 느꼈다.
줄리엣에게 첫 번째 학기는 매우 힘들었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경영학이었다. 줄리엣은 이미 기본적인 경영 원리들은 익숙했지만 강좌에서 배우는 여러 새로운 용어와 정의로 중압감을 느끼곤 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줄리엣은 시험 전에 복습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반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다.
종교 수업과 회계 수업 또한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줄리엣은 새로운 회원이었기 때문에 교리와 성약이 익숙하지 않아서 같은 반에 있던 세라 발레나가사우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는 평생 교회의 회원으로 생활했고 전임 선교사로도 봉사한 사람이었다. 회계학은 남편인 일리에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은 최근까지 은행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 과목을 잘 이해했고 줄리엣이 문제를 푸는 것을 도와줄 수 있었다. 학기 말이 되자, 줄리엣은 종교와 회계 강좌에서도 최고 점수를 받았다.
줄리엣의 집은 학교 바로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다. 반원들은 종종 식사 준비와 집 정돈을 도와주곤 했다. 줄리엣은 반원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즐거웠으며, 그들이 그녀와 가족들을 위해 베푸는 봉사를 통해 힘을 얻었다. 그들을 보면 복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두 번째 학기는 199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성적이 좋지 않아 재시험을 치르고 좋은 성적을 받기를 희망한 일부 학생들을 위해 요점 정리 과정이 개설되었는데, 줄리엣은 첫 번째 학기를 너무나 잘 해낸 나머지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진행자가 되었다.
그녀는 다음 3개월간 학업을 이어가면서 진행자와 어머니로서의 책임들도 병행했다. 줄리엣은 경영학 요점 정리 과정에 있는 5명의 청년들을 아들처럼 대했다. 줄리엣은 학기가 지날수록 이 청년들이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온 진행자보다 자신과 있을 때 더 편안해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수업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했고 그녀에게 질문하는 것을 덜 주저했다. 학기가 끝났을 때는 그들 모두가 시험에 합격했다.
하루는 프로그램 진행자가 줄리엣을 불러서 그녀가 졸업생 대표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줄리엣은 “졸업생 대표가 뭔가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당 연도의 모든 학생 중 가장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는 뜻임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자신감이 차올라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해낼 수 있어.’
얼마 후 학생들과 약 4백 명의 가족 및 친지들을 위해 이 프로그램의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들은 파란색 모자와 피지 LDS 기술 대학 가운을 입고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다. 줄리엣과 다른 몇몇 학생들은 브리검 영 대학교-하와이에서 주는 경영학 개론 수료증도 받았다. 줄리엣은 졸업생 대표 연설을 했다.
이후에 일리에사는 교회 교육 총감이었던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줄리엣과 자신이 느끼는 감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저희 부부는 저희가 교육을 더 받을 수 있을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저희가 조용히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2000년 1월 1일에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는 구주의 탄생 이천 년을 기념하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 사도들의 간증”이라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을 더해 발표했다. 제일회장단은 이렇게 권고했다. “이 서면 간증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신앙을 키우는 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선언문은 현세와 영원을 통틀어 예수께서 지니신 신성한 사명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를 모은 것이었다. 사도들은 선언했다. “그분의 비길 데 없는 삶의 실재와 그분의 위대한 속죄 희생의 무한한 가치에 관해 간증드립니다. 지금까지 지상에 살았고 또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누구도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3개월 후 2000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들이라는 한 시간짜리 영상을 공개했는데, 이 영상에서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개인적인 간증을 전했다.
영상은 힝클리 회장이 햇빛이 비치는 브리검 영 대학교 예루살렘 센터의 복도를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힝클리 회장은 발코니에 멈춰서서 이렇게 말했다. “이 위대한 고대의 도시 예루살렘, 저에게는 늘 영감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후 그는 베들레헴에서의 탄생부터 무덤에서의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한 뒤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그분의 위대한 삶과 장엄한 죽음, 그분이 인류에게 주시는 은사의 보편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백부장이 외쳤던 말을 우리도 외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힝클리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서 영상은 사도 한 명 한 명의 간증으로 이어졌다. 장면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촬영되었는데, 어떤 사도들은 성전 앞에서 간증했고, 또 어떤 사도들은 팔마이라, 커틀랜드, 나부와 같은 유적지에서 말씀했다.
닐 에이 맥스웰 장로는 천문대의 웅장한 망원경 아래 서서 온 우주에 미치는 구주의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 예수로 알려지기 오래전에 우리의 구세주는 여호와이셨습니다. 그 오래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무수한 세상을 지으신 우주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 지구는 그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 광활한 창조물 가운데서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지는 것까지 아시는 우주의 주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십니다].”
신임 십이사도 정원회에 새로 부름받은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는 솔트레이크 성전 동편 계단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헌납된 성전은 부활하신 구세주께서 오실 수도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 이 건물의 모든 부분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은 우리에 대한 구세주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은 옛 나부 성전 터를 경건하게 거닐며 구주와 그분의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형언할 수 없는 속죄의 고통을 통하여 저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부활의 기적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우리 각자를 위해 그분이 치르신 대가에 놀랍니다.”
영상은 사도들과 템플스퀘어에 있는 그리스도상 앞에 서 있는 힝클리 회장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간증으로 마무리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세워진 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 이 일을 하도록 그분으로부터 권능을 위임받은 사도로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그분은 살아 계시고, 다시 오셔서 왕국을 주장하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다스리시리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줄리엣 토로의 졸업식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난 2000년 5월 19일, 무장한 시위대가 피지 의회에 들어와 수상과 열댓 명의 정부 관료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 사태는 금세 대규모 쿠데타로 변모했다. 폭력과 무법 상태가 며칠간 나라 전역을 휩쓸었다.
줄리엣은 눈물을 흘리며 텔레비전으로 쿠데타에 대한 보도를 지켜봤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봉쇄됐다. 가게와 학교가 문을 닫았고, 교회는 모임을 중단했다. 이후에 제한 조치가 완화되자 줄리엣의 큰 아이들 두 명이 사촌들과 교회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러나 그들이 영화관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수바에서 다시 폭력 사태가 발발해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줄리엣은 그 소식을 듣자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3시간이 지났다. 자녀들이 겨우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녀들을 꼭 끌어안았다.
쿠데타는 피지 수바 성전 건축이 마무리된 뒤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성도들은 6월에 있을 성전 일반 공개와 헌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많은 교회 회원들은 성전 일반 공개와 헌납이 이 대격변의 시기가 끝날 때까지 미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5월 29일, 피지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군부가 정부를 장악했다. 이틀 뒤 힝클리 회장은 피지 수바 선교부의 로이 바우어 회장에게 전화하여 현지 상황을 물었다. 바우어 회장은 힝클리 회장에게 여전히 인질들이 잡혀 있지만 군부의 통치하에 나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상황이라고 알렸다. 수바 공항의 운영이 재개됐고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다시금 가능해진 상태였다.
힝클리 회장은 만족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 달에 만납시다.”
6월 초, 피지 성도들은 조촐한 성전 일반 공개를 열었고, 1만 6천 명이 넘는 방문자가 성전에 다녀갔다.
어느 토요일에는 세 대의 버스가 일반 공개 장소에 도착했다. 안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한 여성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정말 멋진 느낌을 받았으며 성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과거에 그녀는 교회에 적대적인 말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며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오늘 저는 이곳이 주님의 참된 교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반 공개 중 내부를 둘러보며 만난 성도 한 명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부디 저에게 선교사를 보내주세요.”
쿠데타로 인해 제일회장단은 헌납식을 네 번이 아닌 한 번만 열기로 결정했고, 참석자의 수를 제한했다. 하지만 헌납식이 열리는 6월 18일이 되자 성전 밖 큰길은 줄리엣을 비롯한 피지 성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전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힝클리 회장과 아내 마조리가 탄 차가 천천히 옆으로 지나가자 성도들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고 호산나를 외쳤다. 선지자는 미소를 지으며 성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지자를 보자 모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맑은 하늘 아래서 줄리엣은 설렘과 감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성전 헌납식 말씀에서 힝클리 회장은 새로운 설계로 수정되어 지어진 성전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이미 전 세계에 24개가 넘는 성전을 헌납했다. 힝클리 회장은 해의 왕국실 연단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곳은 주님의 집입니다. 씻음과 기름 부음을 받고 엔다우먼트를 받은 뒤 아름답게 꾸며진 이 방으로 올 수 있는데, 이곳에서 휘장을 통과하는 것은 지금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가는 우리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아름다운 제단이 있는 두 곳의 인봉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영원이 어떤 것인지를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지상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습니다.”
얼마 후 성전은 의식을 위해 문을 열었다. 토로 가족은 주님의 집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뒤 현세와 영원을 위한 인봉을 받았다.
2000년 8월 10일, 조지스 보닛은 크나큰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가나에서 돌아온 지 9개월이 지나 다시 가나로 갔는데, 이번에는 아프리카 서 지역의 교회 실무 책임자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아내 캐럴린과 3명의 자녀들이 머지않아 아크라로 오겠지만, 지금 당장 그는 혼자였다.
아크라 성전은 여전히 건축이 불투명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아프리카를 잘 알고 세심한 지도력으로 유명한 조지스가 이 일의 실행에 힘을 보태 주기를 바랐다. 이 임무의 무게를 느낀 조지스는 자신이 앞에 놓인 어려운 문제들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 희생에 관해 생각하며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속죄의 권능이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걸 굳게 믿지만, 속죄에는 분명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다른 권능과 축복도 있다.”
아크라에 도착했을 때, 조지스는 성전 건축 허가를 받는 것이 자신이 서 아프리카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많은 심각한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함을 금방 깨달았다.
처음에 그는 나이지리아 아바의 성전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 관련 프로젝트들을 다 잘해 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일했었잖아. 해낼 수 있어.’ 그리고 가족들이 도착했고, 조지스는 외로움이 한층 가신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다른 책임이 많아서 아크라 성전 건축 허가에 거의 시간을 쓰지 못했다. 가나 전역의 성도들이 주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충실히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교회 안팎의 누구도 모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가나 대통령 제리 롤링스가 허가 지연의 배후에 있다고 말이다.
조지스는 무력감을 느끼며 기도했다.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고 너무나 많은 것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당신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행하겠습니다. 당신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허나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습니다.”
얼마 후 조지스는 가나 영부인 사무실과 함께 인도주의 원조 프로젝트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조지스는 이것을 계기로 롤링스 가족이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그는 매주 일요일에 금식을 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 중순 무렵, 조지스는 낙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형인 아이작 애디가 교회 활동이 일시 중단됐을 때처럼 교착상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그는 점점 더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교회를 대표하여 대통령에게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형제는 교회 활동이 일시 중단됐을 당시에 화해하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부탁하는 것은 형인 아이작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아내 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생과 관계를 개선하도록 도와주실 것임을 믿어 보도록 남편을 격려했다. 그 덕분에 아이작은 힘들기는 하지만 성전에 대해 제리와 이야기해 보겠다며 조지스를 안심시켰다.
12월 3일에 아이작은 조지스의 집에 전화를 걸어 좋은 소식을 말해 주었다. 대통령 보좌관이 그에게 연락해서 성전에 대해 질문했고, 교회가 부지의 구획에 대해 몇 가지 사소한 사항을 변경하면 대통령이 성전 건축 프로젝트를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전한 것이다. 그날은 금식주였기 때문에 조지스와 아이작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저녁에 금식을 마치는 대신 같이 성전 부지로 가서 대통령의 요구 사항이 적절한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부지를 걸으며, 둘은 대통령의 요구 사항을 수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스는 아이작에게 말했다. “아이작, 여기가 바로 성전이 있게 될 곳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 일에 관여해 주실 것을 청합시다.”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주님께 자신들의 노력을 축복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강한 영을 느꼈고, 그 즉시 대통령 보좌관에게 전화하여 기꺼이 협상하겠다고 말했다. 조지스와 아이작은 보좌관과의 대화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틀 후에 아이작은 가나 대통령 관저인 오수 성에서 비공개로 동생을 만났다. 만남 직전, 조지스는 아이작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것을 재차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후 집으로 돌아가 기도를 마친 뒤, 초조한 마음으로 방 안을 서성이며 아이작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가 오지 않자 조지스는 성전 부지로 가서 연락을 기다렸다. 마침내 30분이 지나서 전화가 울렸다.
아이작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다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아이작과 제리는 10분 동안 성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머지 시간 동안 자신들의 가족과 추억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은 함께 미소 짓고, 웃고, 눈물을 흘렸다. 제리는 교회가 바로 성전 공사를 시작해도 좋다고 말했다.
아이작이 도시 계획 위원회와 먼저 상의해야 하지 않냐고 묻자 제리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