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7장: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


제7장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

솔트레이크 성전 모형 앞의 여성 합창단

1963년 10월 초,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전미 유색 인종 지위 향상 협회]의 솔트레이크시티 현지 지부는 연차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템플스퀘어 밖에서 평화적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곧 벌어질 그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자, 주최 측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를 수긍하고 시민의 평등권에 대해 입장을 밝혀 주기를 바랐다.

1956년에 교회 소유의 『데저렛 뉴스』에서 인종 차별 정책을 점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에 지지를 표명했지만, 유타주는 시민 평등권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있어 인근의 다른 주들에 여전히 뒤처져 있었다. NAACP는 교회의 강력한 성명이 입법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타주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보호와 기회가 보장되기를 바랐다.

이 시위는 그 시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많은 시위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해 초,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기타 유색 인종을 차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 평등권법을 제안했다. 몇 달 후 NAACP는 미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기 위해 워싱턴 디시에서 대규모 행진 준비를 돕고 있었다. 행진은 저명한 시민 평등권 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이세 박사의 고무적인 연설로 끝났고, 이는 많은 사람에게 인종적 불평등에 맞서라는 영감을 주었다.

템플스퀘어에서 시위가 계획된 사실을 안 유타 대학교의 철학 교수 스털링 맥머린은 솔트레이크시티의 NAACP 지도자들과 제일회장단의 휴 비 브라운의 만남을 주선했다.

10월 3일 저녁, 브라운 회장은 NAACP의 현지 지부장인 앨버트 프리츠와 다른 시위 주최자들을 교회 행정 건물로 맞이했다. 그날 일찍 헨리 디 모일을 대신하여 제일회장단으로 부름받은 엔 엘돈 태너도 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 대담에서 주최자들은 교회가 시민 평등권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낼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브라운 회장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 왔었다.

그러자 주최자들은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자주 목소리를 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민 평등권도 도덕적인 문제라고 설명했다.

브라운 회장은 그들의 견해에 동의했지만, 그도 태너 회장도 모두 공개적인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시민 평등권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 맥케이 회장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대담이 끝난 후, 브라운 회장과 태너 회장은 스털링 맥머린에게 맥케이 회장의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명서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앨버트 프리츠는 NAACP 회원들에게 교회가 성명을 발표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시위를 연기할 것을 강권했다. 일부 시위자들은 이미 피켓까지 만들어 둔 터였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더 기다리자는 데 동의했다.

10월 5일 토요일, 브라운 회장은 맥케이 회장이 성명서를 승인했음을 NAACP에 통보했고, 브라운 회장은 다음 날 아침 연차 대회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교회에는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피부색, 신조와 관계없이 완전한 평등권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려는 교리나 믿음, 관행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며, 어떤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 완전한 교육 기회, 시민권의 모든 특권 등에 대해 가진 권리를 개인이나 집단이 부인하는 것은 도덕적 악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팎을 막론한 만방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완전한 시민 평등을 확립하는 데 헌신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류가 서로 형제요 자매라는 우리의 높은 이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 성명은 솔트레이크시티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신문의 제1면 기사로 실렸다. 앨버트 프리츠의 요청에 따라, NAACP는 연차 대회 동안 어떠한 시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협회와 교회가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며 말했다.

“우리가 조화를 이루고 일한다면 우리의 사회적 지위는 나아질 것입니다.”


브라질의 엘리오 다 로샤 카마르고는 1963년 내내 자주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는 1959년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가 남미 순방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멜기세덱 신권을 받았다. 이제 그는 브라질 선교부 회장단에서 보좌로 봉사하고 있었다. 교회가 브라질의 여러 지역에서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그는 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 벨루오리존치, 헤시피, 그리고 브라질의 새로 건설된 수도인 브라질리아 등 멀리 떨어진 도시의 성도들을 만나야 했다.

지난 4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3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었다. 1961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교회 최초의 스페인어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그 시기에 남미에서는 선교부의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제 브라질에 2개, 아르헨티나에 2개, 우루과이에 1개, 칠레에 1개의 선교부가 있었고, 페루와 볼리비아를 아우르는 선교부도 1개 있었다.

각 선교부의 목표는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성도들이 충실하게 생활하도록 돕고, 남미에 첫 스테이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스테이크를 조직하면 회원들이 교회에서 이끌고 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커지므로, 외부에서 온 지도자들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브라질 선교부의 회장인 웨인 벡과 그의 전임자인 그랜트 뱅거터는 둘 다 스테이크의 책임을 수행하도록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고 훈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엘리오는 감리교 목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교회의 지도자 직분을 수행할 이상적인 후보였으므로, 뱅거터 회장은 곧바로 그를 책임 있는 직책에 불렀다.

그가 처음으로 받은 지도자 부름 중 하나는 다른 브라질 성도 두 명과 함께 지방부 회장단의 보좌로 봉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새로 맡은 그 임무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임무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 힘들어하다 뱅거터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형제님은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뱅거터 회장이 물었다.

엘리오가 대답했다. “지부로 돌아가서 교사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뱅거터 회장은 현지 성도들이 자국 교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지방부 회장단의 일원으로서 엘리오는 현지 교회의 지도자와 교사를 부르고 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은 주님이 남미에서 권능으로 당신의 사업을 수립하기 위해 종들을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뱅거터 회장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짐을 지도록 부름을 받게 되는데, 형제님이 바로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오는 갑자기 교회의 지도자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몇 주 뒤, 이제 그와 지방부 회장단의 다른 일원들은 효과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뒤 엘리오는 많은 현지 지도자들을 훈련했으며, 이 임무는 선교부 회장단으로 부름받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뱅거터 회장과 벡 회장의 보좌로서 그는 동료 성도들이 성찬식의 질을 향상하도록 도왔고, 교회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격려했으며, 지부들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선교부 내에서도 교회가 잘 확립된 곳에서는 지부와 지방부들이 본질적으로 와드와 스테이크의 기능을 했다. 침례나 확인이 필요한 경우, 브라질인 신권 소유자가 이를 수행했다.

엘리오의 아내 나이르는 선교부의 초등회 조직에서 보좌로 봉사하면서 성도들이 스테이크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다. 교회의 스테이크에서 하는 방식에 따라, 선교부의 초등회 회장단은 매년 초등회 지도자와 교사들을 위해 대회를 열었다. 나이르는 여성들에게 전하는 공과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초등회 참석률을 높이고 이용 가능한 교과 과정과 시각 보조 자료를 활용하는 것에 관해 제언했다.

그녀는 1963년 대회에서 초등회 봉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린이들을 위해 행한 모든 일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의 신앙과 소망을 키워 주시어 우리가 복음의 원리에 따라 생활하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열정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기를 간구합니다.”

엘리오는 선교부 회장단에서 일하면서 목사 시절의 열정으로 현재의 부름을 영화롭게 했다. 언젠가 그는 뱅거터 회장에게,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업에 온전히 전념하고 헌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감리교 신자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후기 성도들도 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3년 말 즈음, 마흔네 살의 월트 메이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식료품점 세 곳을 공동으로 소유한 그는 일요일에도 가게를 열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이 일을 쉬는 성스러운 날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최근 많은 후기 성도가 다른 사람들처럼 안식일에 장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터였다.

어디서든 일요일에 문을 여는 식당, 주유소, 상점이 보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동업을 해 온 데일 존스도 식료품점을 일요일에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는 장사가 아주 잘 되었으므로, 영업을 하면 주말에 장을 봐야 하는 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월트도 받아들였다. 차가 두 대 있는 가구는 거의 없었고, 평일에는 대체로 남편들이 차를 타고 출근을 하기 때문에 일요일은 장을 보는 중요한 날이었다.

월트는 안식일에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 온전히 편안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젊은 직원들이 종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몇 년 전 그는 데일에게 일요일에 문을 닫으면 사업상 축복을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데일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문을 닫지 않아.”라는 말로 그 문제를 종결시켰다.

그러나 최근에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인 조셉 필딩 스미스와 대화를 나눈 뒤 월트는 고민에 빠졌다. 스미스 회장과 그의 아내 제시는 솔트레이크시티 서쪽에 있는 그들 매장의 단골이었다. 어느 날, 스미스 회장은 월트가 일하는 정육 판매대로 걸어와 말했다.

“메이시 형제님, 창문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치워 주시면 좋겠습니다.” 월트는 창문에 붙은 많은 안내판 중 어떤 것을 말하는지를 물었다.

“‘일요일 정상 영업’ 안내판 말입니다.” 스미스 회장이 말했다. 그는 월트에게 일요일에 문을 닫음으로써 안식일을 준수하는 매장에서 장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매장을 나갔다. 그 후로 월트는 자신의 가게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

스미스 회장은 반세기 넘게 사도로 봉사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안식일에 대한 존중심이 줄어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야 할 합당한 이유도 있음을 인정했지만, 일요일이 단순히 하루 더 오락과 상업을 하는 날이 되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그들은 안식일에 스포츠 행사, 영화 관람, 장보기 등 다른 날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에 거듭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조셉 필딩 스미스는 당대의 다른 어떤 사도보다 강하게, 성도들에게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간청했다.

그는 1957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안식일을 범하는 일들을 멈춰야 합니다. 여러분이 안식일을 준수한다면, 안식일에 열던 가게를 닫고 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수행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면, 여러분이 번영할 것이라고 약속드립니다.”

2년 후, 제일회장단은 성도들에게 동일한 원리를 가르치면서 일요일에 물건 사는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스미스 회장과의 대화 후 월트는 변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한번 그는 데일에게 일요일에 가게를 닫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데일은 고려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월트가 말했다. “이건 나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일일세. 그러니 자네가 매장을 인수하든가 아니면 내가 인수하는 게 좋겠네.”

한 달 후 데일은 동업 관계를 끝내기로 합의했다. 데일이 가게들 중 두 개를 갖고 월트는 나머지 하나를 갖기로 했다. 월트는 메이시스[Macey’s]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가게를 다시 열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데저렛 뉴스』는 메이시스가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그날 밤 11시 15분, 월트의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스미스 자매였다. “회장님이 형제님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 후 스미스 회장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메이시 형제님, 오늘 석간신문에서 형제님이 안식일에 가게 문을 닫는다는 발표를 보았습니다. 형제님 가게에 다시 가겠습니다.”

얼마 뒤 월트는 스미스 회장이 자신의 가게에서 장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64년 초, 벨 스패포드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한 지 19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조직은 전 세계에 262,002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6천 개가 넘는 와드 및 지부 상호부조회의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 배우고 온정 어린 봉사를 하고 있었다. 상호부조회는 곧 발행 50주년을 맞이하는 『상호부조회 잡지』를 포함하여 많은 프로그램, 활동, 계획을 운영하기 위해 자체 기금을 모으고 관리했다.

스패포드 회장은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최근 상호부조회의 연례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이 많은 활동에 참여하고 많은 여성이 직장 생활을 하는 시대에 상호부조회 정규 모임의 평균 참석률이 증가한 것은 고무적입니다. 상호부조회에 헌신해 주시고 의롭게 생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스패포드 회장과 보좌인 메리앤 샤프와 루이즈 매드슨은 몇 달간의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운 협의 프로그램에 따라,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과 임원회는 그 해 상반기에 여러 스테이크 대회를 방문하여 현지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을 훈련하고 스테이크 회장단, 고등평의회, 감독단, 기타 스테이크 및 와드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들은 이런 대회에 참석함으로써 상호부조회의 일에 관해 신권 지도자들을 교육할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교회가 미국 밖에서 점점 더 많은 스테이크를 조직함에 따라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도 더 자주 해외를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최근 호주, 뉴질랜드, 사모아에서 스테이크를 훈련했으며 봄에는 유럽의 성도들을 방문했다.

전 세계의 스테이크 대회를 방문하는 동안 스패포드 회장과 상호부조회 임원들은 상호부조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사 슬라이드인 깨어남[The Awakening]을 상영했다. 영사 슬라이드는 저렴하고 사용이 간편했기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인기 있는 교육 도구로 쓰이고 있었다. 스크린에 일련의 영상을 투사하여 상영되는 깨어남에는 메리 스미스라는 인물에 관한 허구의 이야기가 등장했다. 교회 회원인 메리가 신앙이 약해졌다가 상호부조회와 와드 회원들에게서 개인적인 방문을 받고 다시 신앙에 불을 붙이게 되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슬라이드에서는 메리와 그녀의 가족이 교회로 돌아와 성전에서 인봉될 준비를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수년 동안 스패포드 회장과 보좌들은 으레 상호부조회 교육 자료를 승인해 왔었다. 예를 들어, 깨어남은 솔트레이크 버틀러 스테이크의 상호부조회 회원들이 대본을 작성하고 제작한 자료로, 이후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이 여러 스테이크에 발표할 자료 중 하나로 그것을 채택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해롤드 비리 장로와 새로 설립된 교회 전체 협의 평의회가 교회 조직을 위한 교과 과정을 개발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상호부조회는 아직 서로 연계된 공과 계획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위원회는 모든 교회 조직에 공과 및 기타 자료의 개요를 제출하여 승인을 받도록 요청하기 시작했다. 스패포드 회장은 이러한 변화를 지지했으며, 협의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교회 공과를 서로 연계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1964년 6월 24일, 스패포드 회장은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열리는 “상호부조회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동부로 갔다. 1893년 만국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 박람회를 세계 무대에서 교회의 메시지를 전할 기회로 여겼다. 박람회에서는 솔트레이크 성전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대규모 전시관을 건립하여 구주와 그분의 복음에 관한 다양한 영상물을 상영했다. 그중에는 방문객들에게 구원의 계획을 가르치는 15분짜리 인기 영화 인간의 행복 추구[Man’s Search for Happiness]도 있었다.

상호부조회의 날은 후기 성도 여성들이 성취한 일들을 보여 주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뉴욕과 다른 여러 도시의 스테이크 상호부조회 회원들로 구성된 “노래하는 어머니들” 합창단이었다. 그들의 공연은 상당한 규모의 군중을 끌어모았으며, 스패포드 회장은 회를 거듭할수록 공연의 질이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박람회장은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여성 합창단이 찬송가를 비롯한 성스러운 곡들을 부르자 모든 소란이 사라지는 듯했다. 스패포드 회장에게 이는 마치 천사들의 합창과 같았다.

나중에 한 기자가 그녀에게 왜 “노래하는 아버지” 합창단은 없는지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는 여성 조직이거든요.”


이 무렵 아르헨티나 킬메스에서는 주세파 올리바가 부분 완공된 집회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교회 건축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이 지은 아르헨티나 최초의 예배당이었으며, 그날 아침 지방부 대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건물의 완공을 고대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집회소와 마찬가지로, 이 건물도 그곳에 모인 성도들의 수년에 걸친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을 상징했다.

주세파와 그녀의 남편 레나토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출신이었다. 많은 이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새로운 나라와 문화, 언어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들은 다섯 자녀를 위해 남미에 가정을 꾸렸다. 시칠리아를 떠난 지 7년 후, 주세파는 몇몇 후기 성도 선교사들을 만났고, 그녀와 두 딸은 곧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이후에 두 딸은 모두 교회의 청년들과 결혼했다.

그런데 주세파는 지방부 대회에 참석해 있는 동안 근심이 가득했다. 당시 그곳은 경제 위기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매년 20퍼센트씩 생활비가 오르고 있었고, 사업체들이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자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속출했다. 경제적으로 너무나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하자, 바구니 제작업을 하던 레나토는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가족들도 돌아와서 자신과 함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주세파는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가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지 5년 만에 그 나라의 교회 회원은 8천 명을 넘어섰다. 지부들은 탄탄했고, 충실한 성도들의 십일조 덕분에 아르헨티나 선교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재정적 자립을 이루었다. 개종자 침례 수가 증가하여 주세파가 참석하는 지부의 회원들처럼 수많은 지부의 회원들이 강화되었다.

반면, 이탈리아에는 교회의 지부가 하나도 없었다. 레나토와 함께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면,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축복을 포기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레나토는 교회 회원이 아니어서 그녀를 위해 성찬이나 다른 신권 의식을 집행해 줄 수 없었다.

지방부 대회의 오전 모임이 끝나자, 주세파는 아르헨티나 선교부 회장인 아서 스트롱에게 다가가 자신의 곤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딸들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남고 싶지만 유럽에 있는 남편과 함께해야 한다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스트롱 회장은 그 말을 듣고 그녀에게 이탈리아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그곳이 바로 자매님이 속할 곳입니다.”

“교회는 어떡하고요?” 주세파가 물었다.

그가 약속했다. “자매님의 도시에서 교회가 성장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세파는 회의적이었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신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그녀의 신앙은 그녀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4년 6월, 열여덟 살의 데리어스 그레이는 자신의 동네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그 집을 지나가면서 보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필릭스 가족이야. 우린 몰몬이야!”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데리어스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주로 흑인 교회를 포함한 다양한 교회에 다녔다. 그는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결국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바하이교를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유타주와 접해 있는 콜로라도주에 살면서도 후기 성도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기 성도를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그는 그 새로운 가족을 차츰차츰 알아갔다.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인 존 필릭스는 데리어스에게 모스 부호를 가르쳐 주었다. 존의 아내 바버라는 자신의 종교를 전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그에게 몰몬경을 한 권 주었다. 그는 그 책을 받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책을 좋아했기에 결국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몰몬경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울림을 주었고, 그는 선교사들에게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에는 그와 어머니 엘시만 있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항상 열린 마음으로 타 종교인들과 대화했다. 데리어스는 선교사들이 오더라도 어머니가 개의치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침실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선교사 청년들이 떠나자 어머니는 데리어스를 불러 말했다.

“그 두 청년이 다시는 여기 안 왔으면 좋겠어.” 어머니가 말했다.

“왜요?” 데리어스가 물었다.

“여긴 내 집이고, 난 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게 싫어.” 어머니가 말했다.

데리어스는 캐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그가 선교사들을 반대하는 이유를 다시 물었을 때, 어머니는 두 명의 후기 성도 선교사가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집 안으로 들어왔던 잠깐의 순간에 선교사 중 한 명이 그녀에게 흑인인지를 물었다.

“네, 물론이죠.”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러자 두 선교사는 아무 설명도 없이 떠나 버렸고, 그 후로 그녀는 교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데리어스는 그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어머니를 믿었지만, 그 부정적인 경험이 특수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했다.

데리어스는 계속해서 선교사들과 공부했고, 얼마 후 교회의 회원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침례받기 전날, 그는 선교사들에게 인종과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다. 그는 그 가르침이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했다.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선교사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리어스를 등지고 천천히 방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다른 선교사가 말했다. “그레이 형제님, 가장 중요한 건 형제님이 신권을 소유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데리어스는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엄마 말이 맞았어.’ 그는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다르게 취급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밤, 데리어스는 침대로 가서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교회의 신권 제한에 대해 알게 된 내용을 어떻게 자신의 신앙과 융화시킬 수 있을까?

데리어스는 가까운 창문을 열고 창문턱에 머리를 기댔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그는 기도했다. 그런 뒤 창문을 닫고 잠을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인 끝에 그는 마침내 한 번 더 기도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금 그는 창문을 열고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번에는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이것은 회복된 복음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가입해야 하느니라.”

갑자기 데리어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다음 날, 그는 침례의 물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1. “Negroes May Picket Mormon Conference,” Newport (RI) Daily News, Oct. 4, 1963, 4; “Negro Threat to Picket Mormon Session in Utah,” Kansas City (MO) Times, Oct. 5, 1963, 19; “Mormon Temple May Be Picketed in NAACP Move,” Arizona Daily Star (Tucson), Oct. 5, 1963, B1.

  2. “Extremism Is Never the Answer,” Deseret News, Apr. 3, 1956, A22; McKay, Diary, Apr. 2, 1956.

  3. McMurrin, “Note on the 1963 Civil Rights Statement,” 60; Fritz, Oral History Interview [1984], 26–30; “NAACP Calls S.L. Protest over Rights,” Salt Lake Tribune, Oct. 5, 1963, 32; “Negro Group Lauds LDS Rights View,” Salt Lake Tribune, Oct. 7, 1963, 6; Mason, “Prohibition of Interracial Marriage in Utah,” 129–30; Harris and Harris, “Last State to Honor MLK,” 6.

  4. McMurrin, “Note on the 1963 Civil Rights Statement,” 60; Meier and Rudwick, CORE, 239, 250; Reed, Chicago NAACP, 198–99; Honey, To the Promised Land, 75–80; Jackson, From Civil Rights to Human Rights, 155–56, 166–69, 171–84; Branch, Parting the Waters, 846–50, 872–87; Arsenault, Freedom Riders, 8–10. 주제: Civil Rights Movement[시민 평등권 운동]

  5. See, for example, Hugh B. Brown to Kelorah Franklin, Sept. 1, 1961; Hugh B. Brown to William Wangeman, Nov. 6, 1961; Hugh B. Brown to Deana Astle, Nov. 26, 1963, David O. McKay Papers, CHL.

  6. Mueller, “Pageantry of Protest,” 133; Tanner, Journal, Oct. 3, 1963; McKay, Diary, Oct. 4, 1963; Holbrook, Oral History Interview, 7; McMurrin, “Note on the 1963 Civil Rights Statement,” 61. 주제: 정치적 중립

  7. McMurrin and Newell, Matters of Conscience, 201; “NAACP Calls S.L. Protest over Rights,” Salt Lake Tribune, Oct. 5, 1963, 32; Fritz, Oral History Interview [1984], 28–29.

  8. Holbrook, Oral History Interview, 7.

  9. Hugh B. Brown, in One Hundred Thirty-Third Semi-annual Conference, 91.

  10. “Give Full Civil Equality to All, LDS Counselor Brown Asks,” Salt Lake Tribune, Oct. 7, 1963, 1; “Negro Group Lauds LDS Rights View,” Salt Lake Tribune, Oct. 7, 1963, 6; “Mormon Church Calls for Full Civil Equality for All,” Herald Bulletin (Burley, ID), Oct. 7, 1963, 1; “Digest of the News,” Arizona Republic (Phoenix), Oct. 7, 1963, 1; “Mormon Leader Appeals for Civil Equality for All,” Fort Myers (FL) News-Press, Oct. 7, 1963, 1.

  11. Camargo, Oral History Interview, 19, 20, 22; Hélio Camargo entry, Vila Mariana Branch, São Paulo District, Brazilian Mission, Transcript of Record of Members, 1959, 316, in Brazil (Country), part 3,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William Bangerter to First Presidency, Apr. 18, 1960,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46–69, CHL; A. Theodore Tuttle to First Presidency, Sept. 2, 1963,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Reid, Brazil, 91–92.

  12. A. Theodore Tuttle to First Presidency, Sept. 2, 1963,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Missionary Department, Full-Time Mission Monthly Progress Reports, Dec. 1958; Jan. 1959; Jan. 1963; “Elder Romney Creates New Mexico City Stake,” Church News, Dec. 9, 1961, 3. 주제: Church Growth[교회의 성장]; 와드와 스테이크; Bolivia[볼리비아]; Peru[페루]

  13. Missionary Department, Full-Time Mission Monthly Progress Reports, Jan. 1963; “Brief Report to the First Presidency on the Brazilian Mission from President and Sister Wayne M. Beck,” Aug. 9, 1966, [6],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Bangerter, Oral History Interview, 86–88, 103–4; Bangerter, Reminiscence, 12.

  14. Rodriguez, From Every Nation, 135–37; Bangerter, Oral History Interview, 87–88; Bangerter, Diary, Oct. 28–29, 1959; Nov. 8, 1959; Feb. 22, 1961.

  15. Bangerter, Oral History Interview, 87–88; Bangerter, Diary, Feb. 22, 1961.

  16. Brazil São Paulo North Mission, Manuscript History, Aug. 4, 1963. 주제: Church Callings[교회 부름]

  17. Bangerter, Diary, Mar. 1 and 27, 1962; May 6, 1962; Sept. 14, 1962; Nov. 1, 1962; Brazil São Paulo North Mission, Manuscript History, June 20 and July 28, 1963; Camargo, Oral History Interview, 20, 22; Wayne Beck and Evelyn Beck, Oral History Interview, 76–78, 88–89; Spät, Oral History Interview, 9; “Programa Dinamismo,” 2.

  18. Brazilian Mission, Congresso da Associação da Primária [1962], [11]–[13], [16], [20], [32]; Guide for Primary Stake Boards, 55.

  19. Brazilian Mission, Congresso da Associação da Primária [1963], 27.

  20. Bangerter, Oral History Interview, 74.

  21. “Sava-Nickel Acquires S.L. Market,” Salt Lake Tribune, Jan. 24, 1964, D4; Macey, Biographical Sketch, [31]–[33], [35]–[36], [38], [40]; “Macey Takes Over Grocery Store,” Deseret News and Salt Lake Telegram, Mar. 23, 1964, B9.

  22. Macey, Biographical Sketch, [32]–[36].

  23. Macey, Biographical Sketch, [38]; Smith, Journal, June 17 and Aug. 19, 1963; Joseph Fielding Smith, in One Hundred Thirty-Third Annual Conference, 21.

  24. Joseph Fielding Smith to First Presidency, June 12, 1939,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Return to Religion Held Big Need,” Deseret News, Apr. 5, 1943, 6; Miller, Peculiar Life of Sundays, 168–70, 263–65; Harline, Sunday, 215–99, 351–67; Mrs. Richard Harston to Heber J. Grant, May 22, 1934; Heber J. Grant to Mrs. [Richard] Harston, May 26, 1934, First Presidency, Miscellaneous Correspondence, CHL.

  25. Joseph Fielding Smith, in Eigh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70; Joseph Fielding Smith, in One-Hundred and First Semi-annual Conference, 25–26; Joseph Fielding Smith, “A Warning Cry for Repentance,” Deseret News, May 4, 1935, Church section, 6, 8; Woodger, “Restoration of the Perpetual Covenant to Hallow the Sabbath Day,” 289–310; Thomsen, “History of the Sabbath in Mormonism,” 102–5; Merrill and Cannon, “Legal and Cultural War over Utah’s Sunday Closing Laws,” 167–76. 주제: Joseph Fielding Smith[조셉 필딩 스미스]

  26. Joseph Fielding Smith, in One Hundred Twenty-Seventh Annual Conference, 62; “The Sabbath,” Church News, July 11, 1959, 3.

  27. Macey, Biographical Sketch, [35]–[37]; “Sava-Nickel Acquires S.L. Market,” Salt Lake Tribune, Jan. 24, 1964, D4; “Macey Takes Over Grocery Store,” Deseret News and Salt Lake Telegram, Mar. 23, 1964, B9; “Grand Opening,” Deseret News and Salt Lake Telegram, May 14, 1964, E5.

  28. Macey, Biographical Sketch, [38]–[39]; “Grand Opening,” Deseret News and Salt Lake Telegram, May 14, 1964, E5; Smith, Journal, July 17, 1964.

  29. Derr, Cannon, and Beecher, Women of Covenant, 304, 324; Belle S. Spafford, “Report and Official Instructions,” Relief Society Magazine, Nov. 1964, 816, 820–22; Belle S. Spafford, “Report and Official Instructions,” Relief Society Magazine, Nov. 1963, 821–22. 『상호부조회 회보』[Relief Society Bulletin]는 1914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1915년 1월에 그 명칭이 『상호부조회 잡지』로 변경되었다. 주제: Belle S. Spafford[벨 에스 스패포드]; 상호부조회

  30. Belle S. Spafford, “Report and Official Instructions,” Relief Society Magazine, Nov. 1963, 818, 822.

  31.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volume 34, Sept. 19, 1962, 145; Oct. 17, 1962, 156; Jan. 9 and 23, 1963, 244, 254; Mar. 27, 1963, 286; May 29, 1963, 345, 351; Oct. 30, 1963, 402–3; Nov. 6, 1963, 405–6.

  32.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volume 34, Jan. 31, 1962, 23–24; Mar. 6, 1963, 275, 277; May 15, 1963, 334; volume 35, May 20 and 27, 1964, 89–90, 100; Belle S. Spafford, “Talk Given by Sister Belle S. Spafford,” Apr. 25, 1964, Relief Society, Belle S. Spafford Files, CHL. 주제: Australia[호주]; New Zealand[뉴질랜드]; Samoa[사모아]

  33.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volume 34, Oct. 23, 1963, 392, 396; volume 35, Jan. 2, 1964, 7; Jan. 22, 1964, 24; Mar. 11, 1964, 52;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The Awakening,” 1964, Relief Society, Belle S. Spafford Files, CHL. 주제: Globalization[세계화]

  34. Saettler, History of Instructional Technology, 178–87; Whitaker, Pioneering with Film, 3–4, 90; “The Awakening”: A Sound-Filmstrip Presentation of the General Board of Relief Society, Filmstrip Script, CHL.

  35. “‘Mary Smith’ Story … Told World Wide,” Church News, Aug. 15, 1964, [8]–[9].

  36.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volume 35, Feb. 19 and Mar. 11, 1964, 44, 52.

  37. Relief Society, General Board Minutes, volume 34, Sept. 19, 1962, 144–47; J. Reuben Clark to Belle S. Spafford, Sept. 14, 1961,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3, 1932, 1937–67, CHL. 주제: 협의부

  38. “Visitors Welcomed to Mormon Pavilion at N. Y. Fair,” Church News, Apr. 25, 1964, 3; Kogan, “Mormon Pavilion,” 37–38; McKay, Diary, Mar. 21, 1963; Whitaker, Looking Back, 61–62; Whitaker, Pioneering with Film, 57–62. 주제: 1893년 만국박람회

  39. “Mormon Mothers Chorus to Sing at Fair,” Church News, Feb. 29, 1964, 3; Gay Pauley, “Utah’s Singing Mothers Perform at N.Y. Fair,” Los Angeles Times, July 12, 1964, E12; Belle S. Spafford and Counselors to First Presidency, June 29, 1964,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see also Derr, Cannon, and Beecher, Women of Covenant, 273–74, 338–40.

  40. Argentina Buenos Aires North Mission, Manuscript History and Historical Reports, Feb. 23, 1964; “Construction Program,” 6; Strong, Autobiography Excerpt, 35. 주제:Argentina[아르헨티나]; Building Program[건축 프로그램]

  41. [Maria Oliva] to Omar Esper, Email, July 15, 2021, Maria Oliva Family Papers, CHL; Lewis, Argentina, 101; Jack E. Jarrard, “She Remembers Well the Day the Elders Called,” Church News, Oct. 5, 1968, 11; Giuseppa Oliva, María Oliva, and Rosa Oliva entries, Baptisms and Confirmations, 1957, Quilmes Branch, Argentine Mission, 66–67; Rosa Oliva entry, Marriages, 1958, Quilmes Branch, Argentine Mission, 72; María Oliva entry, Marriages, 1960, Cōrdoba Branch, Argentine Mission, 148, in Argentina (Country), part 4,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Strong, Autobiography Excerpt, 35.

  42. John Bausman, “World of ’64: Foreign Correspondents Survey Trouble Spots around Globe,” Gazette (Montreal), Jan. 25, 1964, 13; Edward C. Burks, “Argentina Faces Growing Deficits,” New York Times, Jan. 17, 1964, 70; Lewis, Argentina, 132–33; “Argentine Costs Up,” Miami Herald, Mar. 19, 1965, Palm Beach edition, A2; Strong, Autobiography Excerpt, 36; [Maria Oliva] to Omar Esper, Email, July 15, 2021, Maria Oliva Family Papers, CHL.

  43. 『성도들』, 제3권, 제16장; Missionary Department, Full-Time Mission Monthly Progress Reports, Nov. 1963 and Jan. 1964; “Argentine Mission Is Now Self-Supporting,” Church News, Nov. 9, 1963, 6; Toronto, Dursteler, and Homer, Mormons in the Piazza, 259–77; Jack E. Jarrard, “She Remembers Well the Day the Elders Called,” Church News, Oct. 5, 1968, 11; Strong, Autobiography Excerpt, 35.

  44. Strong, Autobiography Excerpt, 35–36; Jack E. Jarrard, “She Remembers Well the Day the Elders Called,” Church News, Oct. 5, 1968, 11.

  45.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1–23.

  46. Gray, Oral History Interview, 5, 15–19, 21, 23.

  47. Gray, Oral History Interview, 1, 4, 15–16, 18, 24–25; Darius Gray to Jed Woodworth, Email, Jan. 3, 2023, copy in editors’ possession.

  48. Gray, Oral History Interview, 8–10, 25–26, 55–56. 주제: 신권 및 성전 제한

  49.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6–27, 198–99; Darius Gray entry, Baptisms and Confirmations, Colorado Springs Second Ward, Pikes Peak Stake, 388, in Colorado Springs 2nd Ward,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