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다른 나라에서
1968년 10월 초, 이사벨 산타나는 베네메리토 데 라스 아메리카스의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제 이 교회 학교에는 이사벨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두 배가 넘는 1,200명의 학생이 있었다. 교정도 확장되어 새로운 강당 겸 체육관, 작은 식료품점, 두 개의 상가 건물, 다목적 공간, 그리고 35채의 기숙사가 더 들어서 있었다. 그해 초 엔 엘돈 태너 회장이 새 건물들을 헌납하기 위해 멕시코시티에 왔을 때는 태버내클 합창단도 헌납식에 와서 공연을 했다.
이사벨과 그녀의 여동생 힐다는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사벨은 본래 수줍음이 많았지만 교육에까지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친한 친구를 사귀고 자신이 직면한 문화 차이를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웠으며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한 그녀는 부지런한 학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자주 학교 선생님과 관리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런 조언자 중 한 명인 에프라인 비야로보스는 청소년 시절에 멕시코에서 교회 학교를 다닌 뒤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농경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났으며 이사벨을 비롯한 베네메리토의 학생들은 그를 친근하게 느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그들은 그를 개인 교사이자 안내자로, 그리고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의지했다.
그녀에게 영감을 준 또 다른 선생님은 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치는 레오노르 에스테르 가르멘디아였다. 이사벨이 1학년이었을 때, 레오노르는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사벨이 손을 들었다.
“왜 수학을 싫어하니?” 레오노르가 물었다.
“이해가 잘 안돼서요.” 이사벨이 말했다.
“내 수업에선 이해하게 될 거야.”
레오노르의 수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그녀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준 다음 한 명 한 명을 자신의 책상으로 불러서 수학 문제 풀이를 도와주었다. 오래지 않아 이사벨은 혼자서도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갖게 될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능력이었다.
같은 반에 있던 많은 친구들처럼 이사벨도 학업과 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교회는 낮은 수업료를 유지하기 위해 학비의 대부분을 부담하고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나머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건물을 청소하거나 학교 낙농장에서 일했다. 이사벨이 구한 일자리는 학교의 전화 교환원이었다. 그녀는 몇 시간이고 좁은 전화 교환실에 앉아 핀과 숫자가 있는 교환기를 사용하여 구내 곳곳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단순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책을 가져가서 시간을 때우는 일도 많았다.
당시 전 세계에서는 대학생들이 자국 정부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더 많은 경제적, 정치적 정의를 요구하며 데모를 했다. 그들은 미국이 멕시코 지도자들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학생들은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을 빌미로 강대국들이 상대적으로 작고 힘이 약한 이웃 국가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멕시코시티가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하계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던 터라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올림픽을 열흘 앞둔 1968년 10월 2일,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멕시코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50명 가까운 사람이 사망하면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당국은 학생 운동의 주동자들을 체포했고, 정부와 언론은 잔인한 틀라텔롤코 학살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묻어 버리려 했다.
베네메리토는 유혈 사태가 일어난 곳과 가까이 있었다. 이사벨은 학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펐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는 정치적 시위에 참여한 학생과 교사가 드물었으므로 그곳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한 남자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학교 버스를 훔치겠다고 협박했다. 이사벨은 겁이 났지만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누구신가요?”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어떻게 할지 몰라 교환기에 핀을 꽂고 학교 교장인 케니온 와그네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벨, 우리가 처리할게요.” 교장이 말했다.
그 전화는 공갈 협박으로 드러났으며 이사벨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베네메리토는 그녀에게 오아시스가 되었다. 복음을 공부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 있는 동안 보호받을 것임을 알았다.
1968년 11월 10일 아침, 헨리 부르크하트는 독일 민주 공화국 동쪽 국경에 자리한 도시인 괴를리츠에서 약 230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방부 대회를 개최했다. 그들이 모인 3층 건물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낡디낡은 외관에 창문 주변으로는 벽돌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집회소에 기쁨의 물결이 일렁였다. 사도 토마스 에스 몬슨이 대회에 나타나 성도들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올라간 이후 7년 동안 그들은 총관리 역원을 거의 만나 보지 못했다.
몬슨 장로가 최근에 독일어권 선교부를 감독하도록 지명받은 터에, 동독 교회의 지도자인 헨리는 그와 함께 일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마흔한 살의 몬슨 장로는 그보다 불과 몇 살 위였다. 하지만 그는 사도였으며, 그 점에서 헨리의 눈에는 그가 정말 특별해 보였다. ‘어떤 분일까? 나랑 잘 맞을까?’
그런 의문은 몬슨 장로가 집회소에 들어서기 무섭게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어를 못했고 헨리는 영어를 못했지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대회는 10시에 시작되었다. 회중의 성도들은 몬슨 장로가 참석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정보원임이 분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보원인 교회 회원들은 동료 성도들의 말과 행동을 정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헨리는 누가 정보원인지를 자신이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부가 교회에 호의적이지 않은 소식통보다는 교회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후기 성도 정보원으로부터 보고받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자신과 다른 동독인들에게 가해진 많은 제약에 대해서는 분개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를 이끄느라 그는 일주일에 6일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그와 잉아는 토비아스라는 이름의 둘째 아이도 있었다. 헨리는 자주 정부 관료들을 상대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이점을 그에게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국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에 관해 보고하도록 부추기는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몬슨 장로도 동독의 상황에 마음이 동요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회에서 성도들에게 말씀하기 위해 일어서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고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참되고 충실하시다면, 다른 나라에서 교회 회원들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여러분도 받게 되실 것입니다.”
방금 몬슨 장로는 헨리와 회중의 성도들을 위해 그들이 교회 회원으로서 갈망하는 모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실현되려면 동독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져야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동독에 스테이크를 창설하자고 제안했을 때, 헨리는 정부로부터 원치 않는 관심을 끌게 될 것이 두려워 제안을 거절했다. 동독이 국경 통제를 강화한 후로 동독의 성도들은 성전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성도들이 스위스 성전에 가기 위해 허락을 구할 때마다 정부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예배실에는 놀라운 영이 가득했다. 몬슨 장로는 성도들을 축복했고, 그들은 모임을 마치며 다음과 같은 열렬한 찬송가를 불렀다.
이 무렵 서아프리카 국가인 가나에서는 조셉 윌리엄 빌리 존슨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찾았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4년 전, 그의 친구인 프랭크 멘사는 그에게 몰몬경을 비롯한 후기 성도 서적과 소책자들을 주었다. 이웃 나라인 나이지리아와 마찬가지로 가나에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없었다. 프랭크는 그런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그는 빌리에게 말했다. “자네가 나와 함께 일할 적임자라고 생각하네.”
그 후로 그들은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와 그 주변 지역에 네 개의 비공식 후기 성도 교구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본부와 연락한 뒤 교회가 서아프리카에 선교사들을 보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러마 윌리엄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은 그들에게 복음을 공부하고 같은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이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브리검 영 대학교 교수인 버지니아 커틀러가 가나 대학교에서 가정학 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아크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와 함께 매주 주일학교를 열기 시작했다.
빌리는 복음을 나누는 것이 무척 좋았다. 그는 수출입 업계에서 일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 사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었다. 그는 아내와 종교가 달랐다. 아내는 말했다. “이 교회는 너무 낯설어요. 일을 그만두지 마세요.”
하지만 빌리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다. “내 안에 숨길 수 없는 무언가가 불타오르고 있어요.”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빌리에게 종교는 아주 오랫동안 중요한 문제였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그의 어머니 마틸다는 아들을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길렀다. 빌리는 학교에서도 다른 학생들이 노는 동안 자신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는 일이 많았다. 그의 선생님 한 명이 이를 알아채고 그는 언젠가 성직자가 될 사람이라고 말해 준 일도 있었다.
빌리는 나이가 들면서 놀라운 꿈과 시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인받았다. 프랭크 멘사가 그에게 회복된 복음을 소개한 직후, 빌리는 기도하던 중 하늘이 열리고 수많은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한 음성이 “존슨, 존슨, 존슨”하고 그를 불러 말했다. “네가 나의 명대로 내 일을 행하면 내가 너와 네 땅을 축복하겠노라.”
하지만 모든 사람이 빌리와 프랭크 또는 그들의 믿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거짓 교회를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빌리는 그들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로 빠진 게 아닐지 생각하며 금식을 시작했다. 사흘 후, 그는 자신의 집에서 교회 회장들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 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했다.
“저는 이 선지자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지침을 내려 주기를 바랍니다.”
그날 밤 빌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조셉 스미스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곧 선교사들이 올 것입니다. 선지자 맥케이가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더니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서 자신을 브리검 영이라고 소개하며 말했다. “존슨, 우리가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빌리는 이튿날 아침이 되기 전에 조지 앨버트 스미스에 이르는 후기의 선지자를 모두 보았다.
빌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 곧 직장을 그만두고 아크라 남서쪽 도시인 케이프코스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농사를 짓고 새로운 교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 결정을 지지하지 않았으므로 가족과 함께 이사하는 대신 빌리와 이혼한 뒤 그에게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맡겼다.
빌리는 망연자실했지만 어머니 마틸다가 그를 지지해 주었다. 그녀는 빌리가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케이프코스트로 이사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고, 이미 교회가 많은 도시에서 그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빌리는 그녀의 유일한 살아 있는 자녀였고 그녀는 아들에게 부양받는 처지였으므로 빌리와 함께 갔다.
마틸다는 이제 아들의 종교를 믿었다. 처음에 빌리가 새로 믿는다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종교로 인해 그와 그가 가르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고는 아들이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교회가 가나에 들어오면 자신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가족이 케이프코스트에 정착하자, 마틸다는 빌리가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는 동안 손주들을 돌보았다. 또한 그녀는 빌리에게 도덕적인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교구를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녀는 이렇게 단언했다. “상황이 어떻고 미래가 어떻든 나는 교회를 위해 정직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단다.”
송죽원의 소녀들은 스탠리 브론슨과 함께 음반을 발매한 후 곧 군 기지와 미국 및 한국 텔레비전 쇼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 어린 소녀 합창단을 좋아하는 듯했다.
황근옥은 스탠리와 소녀들과 함께 즐겁게 노래 작업을 했다. 그룹 공연은 소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공연에 참여하려면 제시간에 숙제를 끝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근옥은 소녀들이 노래를 통해 자존감을 얻는 것을 보고 기뻤다. 그룹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녀와 스탠리는 계속 소녀들을 격려하며 각 연습과 공연 및 녹음 과정을 상냥하게 지도했다.
그들은 지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이 보육원 소녀들을 돕고 싶었다. 스탠리는 전해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갔을 때, 소녀들 한 명 한 명에게 성탄절 선물로 새 외투나 인형을 사 주는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었다. 그런 후 한국말을 하는 친구에게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소녀들에게 선물을 전하도록 부탁했다. 이후, 그와 근옥은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달 소녀들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스탠리는 제대 후 유타에 비영리 단체를 설립했다. 또한 그는 소녀들과 그들의 재정적 필요 사항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변의 모임에서 말씀하고, 콘서트를 열고, 음반을 판매했다. 하지만 이 단체가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한국 정부는 외국 단체가 국내에서 사회사업을 하는 것을 제한해 왔다. 다행히 근옥은 그룹의 인기와 정부 내 인맥을 통해 스탠리의 단체에 대한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스탠리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하는 동안 『Tender Apples』[부드러운 사과]라는 영감 어린 책을 읽게 되었다.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을 도운 한 후기 성도 여성에 관한 책이었다. 그와 근옥은 그 제목이 마음에 들어 저자에게 연락했고, 저자는 그들의 단체를 ‘텐더 애플즈 재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했다. 근옥은 서울에 있는 자신의 2층집 방 하나를 비영리 단체의 한국 사무실로 개조했고, 스탠리는 한국에 머물 때마다 그곳에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들의 그룹도 텐더 애플즈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녀들 몇 명이 키득거리며 스탠리에게 사전을 가져왔다. 소녀들은 미군 기지의 후기 성도 모임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으므로 스탠리가 교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처럼 그들도 교회나 교회의 가르침을 아직 잘 몰랐다. 그들이 사전에서 찾은 “몰몬”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스탠리가 소녀들에게 물었다. “음, 너희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아니요!” 그들이 말했다.
“황 원장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그 말에 놀란 소녀들이 ‘헉’ 소리를 냈다. 그들 중 누구도 근옥이 “몰몬”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탠리는 근옥에게 그 일을 말했다. 그녀는 송죽원의 개신교 후원자들이 자신이 교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임을 알고 그들의 반응에 대비했다.
반응은 금세 나타났다. 후원자들은 근옥이 후기 성도이고 보육원의 몇몇 소녀들이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녀는 교회를 떠나거나 원장직을 사임할 수 있었다. 근옥에게 그것은 전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물건을 챙겨 보육원을 떠났다. 근옥을 사랑하게 된 몇몇 큰 소녀들은 곧바로 얼마 안 되는 소지품을 들고 그녀를 따라갔다. 소녀들이 집 앞에 나타나자, 근옥은 그들을 돌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타의 트루먼 매드슨은 교회의 기원을 조사하는 위원회에 전할 좋은 소식이 가득했다. 미국 동부로 조사를 떠난 역사가들은 1968년 여름 내내 그에게 새로운 정보를 보내왔다. 제일회장단의 자금 지원 덕분에 그들은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역사 문서를 찾아내 중요한 날짜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굉장한 여름이었습니다!” 트루먼은 말했다. 그는 이제 후기 성도 역사가들이 첫번째 시현에 대한 웨슬리 월터스의 주장에 더 잘 대응할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해 여름 그들이 찾아낸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1820년 조셉 스미스의 집 근처에서 종교 부흥이 일어났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브리검 영 대학교의 역사 및 종교학 교수인 밀턴 백맨은 조셉 스미스가 구체적인 위치를 밝히지 않고 일반적인 말로 종교적 동요를 묘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결과, 밀턴은 웨슬리 월터스가 너무 좁은 범위인 팔마이라에만 집중해서 조사를 진행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는 몇 주 동안 뉴욕 서부의 역사 기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실제로 1819년과 1820년에 종교적 열정이 “회오리바람”처럼 팔마이라 주변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선지자 조셉이 1838년 첫번째 시현 기록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다음 몇 달 동안 트루먼을 비롯한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알아낸 사실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작성했다. 트루먼은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인 『BYU Studies』[BYU 스터디스]에 모든 조사 내용을 모아서 게재하고 싶었다.
같은 시기에 휴 니블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파피루스 조각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교회가 그것들을 확보하자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서와 그 번역에 관해 그 유물이 무엇을 밝혀 주는지를 몹시 궁금해했다. 어찌 됐든, 아브라함서와 함께 출판된 세 가지 “사본”에 대한 조셉 스미스의 해석에 관해 일각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의문을 제기해 온 터였다. 파피루스에 나오는 삽화를 그대로 옮긴 이 사본들은 여느 이집트 장례식 두루마리 속 그림과 흡사했고, 아브라함이나 그의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조각들의 초기 분석과 번역에 따르면 그것들은 확실히 아브라함 시대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록된 장례 관련 문서였고, 교회도 휴도 그 발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휴는 더 연구하면 파피루스와 선지자의 번역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1968년과 1969년에 발표된 열두 편 이상의 소논문에서 고대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아브라함서에 대해, 그리고 아브라함서와 고대 이집트 종교 및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학설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그는 아브라함서의 진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일부로, 이 기록과 조셉 스미스가 알지 못했을 다른 고대 신전 문서 및 아브라함에 관한 수천 년 된 전통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또한 그는 신권, 성전 의식, 구원의 계획에 관한 아브라함서의 강력한 통찰을 글에서 입증했다.
1969년 봄, 트루먼의 위원회가 수행한 연구 결과가 『BYU 스터디스』에 게재되었다. 해당 호에는 첫번째 시현에 관한 가장 최신 정보가 실렸으며, 조셉 스미스의 간증에 대한 확고한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었다. 위원회의 위원인 레너드 애링턴과 제임스 앨런은 초기 교회 역사에 관해 출판된 기존의 기사와 책들을 요약했다. 밀턴 백맨은 자신이 팔마이라 근처의 종교 활동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기사로 썼다. 교회 역사가 사무실의 기록 보관자인 딘 제시는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 기록에 관한 기사를 준비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기사들도 있었다. 트루먼은 이런 글이 신앙을 옹호한다는 점만이 아니라 회복의 역사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성도들이 협력한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믿었다. 그는 많은 교회 회원들이 역사가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는 편지, 일기 및 기타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BYU 스터디스』 봄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수집, 조사, 해석이라는 중요한 작업이 필요한데 한 사람 또는 백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다. 그것들은 우리가 모두 참여해야 하는 일이다.”
한편, 독일 민주 공화국의 헨리 부르크하트는 자신이 돌보는 성도들에게 일어날 몇 가지 변화를 감독하고 있었다. 몬슨 장로가 괴를리츠를 방문한 후, 제일회장단은 동독의 주요 도시인 드레스덴에 선교부를 창설하고 헨리를 그곳의 선교부 회장으로 불렀다. 얼마 뒤 몬슨 장로는 다시 그 나라를 방문해 선교부를 조직하고 헨리를 대제사 직분에 성임한 뒤 선교부 회장 부름에 성별했다.
헨리의 아내 잉아도 그와 함께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몬슨 장로는 부르크하트 부부를 만난 뒤 두 사람이 일주일에 몇 시간밖에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지 않습니다.” 그는 헨리에게 말했다. 이제 잉아는 선교부의 동료 지도자로서 그와 함께 자주 나라 곳곳을 다녔고 때로는 선교부 사무실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헨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되면 혼자 여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정부는 여전히 성도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동독 국민인 헨리가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은 이후로 교회에 대한 의심은 잦아든 터였다. 성도들이 예정에 없던 모임을 하거나 교회 자료를 인쇄 또는 등사하거나 주의 없이 행동하지 않는 한 당국은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성찬식을 하고 가정 복음 교육을 하며 상호부조회, 주일학교, 신권회, 초등회 모임을 했다.
헨리는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동독의 성도들은 동독 밖 교회와 연락이 끊어지는 것을 걱정했으며 더 많은 교회 자료를 인쇄본으로 갖고 싶어 했다. 정부는 성도들이 찬송가 책이나 경전 같은 대량의 출판 자료를 수입하는 것을 간간이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회원들은 대개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헨리는 교회 자료를 인쇄하고 등사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따르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자원자들을 통해 타자기와 먹지로 교재를 복사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위법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교재를 만들고 배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항상 성문화되거나 전국에서 균등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비밀경찰들이 자신을 체포하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만약 엉뚱한 경찰이 헨리가 외국 교재를 가진 것을 발견하면, 그는 곧장 심각한 곤경에 처할 것이었다.
나라의 상황이 이상적이지 않았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발전했다. 1968년에는 놀랍게도 47명이 침례를 받았다. 몬슨 장로가 드레스덴 선교부를 설립할 당시, 동독에는 47개 지부와 7개 지방부에 4,641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성도들은 가능할 때마다 모임에 참석하고 가정 복음 교육을 하고 교회 활동을 했다. 심지어 그들은 “계보 주간”을 개최하여 성전 사업을 위해 14,000명의 이름을 제출하기도 했다.
헨리는 자신의 새로운 부름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그 부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헨리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잉아와 함께, 모든 직무를 숙달하고 내 약점도 극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