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22장: 좀 더 주님과 같이


제22장

좀 더 주님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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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베르크 성전 밖, 빗속에서 기다리는 군중

1984년 4월 7일 아침, 아데스 캡은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약 3년 전 또 한 명의 제일회장단 보좌로 부름받았던 고든 비 힝클리가 연단에 서서 총관리 역원과 교회 본부 역원들의 지지를 묻고 있었다. 그는 러셀 엠 넬슨과 댈린 에이치 옥스가 새로운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본부 청녀 회장으로 아데스를 호명했다.

태버내클에 있는 성도들은 만장일치로 그들을 지지했다. 이후 아데스는 자신의 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직책이 부여되고 부름이 주어지면, 회원들은 사랑으로 응답한다.”

4개월 후, 아데스는 보좌인 패트리샤 홀런드와 모린 털리, 그리고 행정 보조인 캐럴린 래스머스와 함께 유타주 프로보 근처의 산속 오두막에 모였다. 그날은 그달의 첫 번째 일요일이어서 그들은 금식을 하고 온 터였다.

그들은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교회 청녀들의 달성 프로그램인 ‘개인 발전 프로그램’에 관해 금식하고 있었다. 본부 청녀 회장단이 개인 발전 프로그램을 도입할 당시 아데스도 그 회장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청녀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와 보좌들은 각 청녀가 신성한 목적과 정체성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청녀들이 주님과 성약을 맺고 지키려 노력할 때 주목받고 인정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돕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두막에 모인 아데스와 패트리샤, 모린, 캐럴린은 청녀의 삶과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원리들을 목록으로 적었다. 그런 다음 각자 숲속의 한 지점으로 들어가 목록을 숙고하면서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간추렸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그들은 각자 고른 목록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고, 자매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느꼈다.

지금 형태의 개인 발전 프로그램은 모든 기독교 종파가 공유하는 가치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데스와 보좌들은 이 프로그램에 후기 성도의 독특한 믿음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엇을 강조해야 할지를 논의하면서 청녀들이 어디에 살든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섯 가지 가치관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신앙, 신성한 성품, 순종, 지식, 그리고 선택과 책임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아데스와 보좌들은 본부 청녀 임원회를 조직했고, 순종 대신 개인적인 가치, 선행, 고결성을 넣어 일곱 가지 가치관을 정했다. 아데스는 청녀 임원회실 벽에 테이프로 기다란 종이들을 붙였다. 그런 다음, 임원회 임원들과 함께 거기에 교회 청녀들에 대한 연구와 그들과의 토론에서 얻은 통찰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임원회는 각 청녀가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청녀는 영적인 경험을 하고, 주님과 성약을 맺고 지키며, 그리스도와 같은 행위에 대해 인정을 받고, 신권 지도자들에게 지지받아야 했다.

1985년 초, 아데스와 청녀 임원회는 승인을 위해 이 아이디어를 교회의 신권 집행 평의회에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킴볼 회장의 인도에 따라 교회에서는 평의회를 통해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일이 더 많아졌다. 신권 집행 평의회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 정책을 추천하는 세 개의 주요 집행 평의회 중 하나였다. 이 평의회에는 사도와 총관리 역원 몇 명이 포함되었다. 아데스는 청녀 회장단과 신권 집행 평의회와의 모임에서 청녀에 대한 임원회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1월의 어느 날 아침, 일찌감치 잠이 깬 아데스는 침대 옆에 두었던 노란색 메모장을 집어 들었다. 그녀와 임원회가 부름받은 이후로 논의해 온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모자이크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막힘없이 단어와 영감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마지막 단어를 적은 그녀는 감정적으로는 지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고양되어 있었다. 그녀는 평의회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6주 후, 아데스와 보좌들은 교회 행정 건물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몇 분 뒤 그들은 신권 집행 평의회에서 청녀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그 계획이 옳다면 형제들의 귀를 열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옳지 않다면 평의회 구성원들의 귀를 닫아 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했다.

잠시 후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한 임원회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인 에즈라 태프트 벤슨이 평의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데스는 임원회실 앞쪽에 서서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의 초점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청녀들이 복음을 알고 그에 따라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본 원리들에 집중했습니다.”

그녀는 유해한 매체와 광고, 범죄, 성적 부도덕, 섭식 장애, 약물 및 알코올 남용, 자살 등 청녀들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교회의 청녀들이 청남들에 비해 자원과 인정 기회, 성인 지도자를 많이 누리지 못하고 있음이 나타난 데이터를 제시했다. 아데스는 청녀 프로그램과 청남 프로그램을 비교하면서 두 프로그램이 동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 그들은 청소년들의 성공을 돕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지원을 모두 얻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데스와 보좌들은 일곱 가지 가치관을 중심으로 청녀들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아데스는 말했다. “이 구성은 청녀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것이며, 이로써 청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청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벤슨 회장은 이 발표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평의회 구성원들에게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요청하며 말했다. “우리는 귀가 열렸을 뿐 아니라 눈물관도 열렸습니다.”

몇 시간 뒤 평의회 구성원인 딘 엘 라슨 장로가 아데스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청녀들을 위한 위성 방송이 언제쯤 준비될 수 있나요?” 그가 물었다.

“11월쯤요.” 아데스가 말했다.

라슨 장로는 놀랐다. “그렇게 늦게요?”

아데스가 대답했다. “철저하게 준비해야죠.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1984년 12월 14일,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과테말라 과테말라시티에서 주님의 집을 헌납했다. 새로운 성전의 메이트론인 카르멘 오도날은 헌납식을 지켜보며 중남미 전역에서 교회가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것에 경탄했다.

1948년 과테말라시티 남쪽의 작은 수영장에서 침례를 받았던 그녀는 과테말라에서 가장 먼저 교회에 들어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제 이 나라에는 3만 명이 넘는 후기 성도가 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최근 4년 동안 침례를 받았다. 지역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성약을 맺고 있었으며, 성전 건축은 이 일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는 헌납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제가 살아서 두 눈으로 이 기적을 보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성전 메이트론으로 부름받기 전, 카르멘은 1983년 12월에 헌납된 멕시코시티 성전에서 남편 존과 함께 봉사했었다. 이 성전은 멕시코에 최초로 건립된 주님의 집이었다. 멕시코의 회원은 36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전 세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수였다. 이 헌납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센트로 에스콜라르 베네메리토 데 라스 아메리카스의 전직 교사였던 이사벨 산타나와 후안 마추카도 있었다. 그들은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부부였다. 이제 그들은 멕시코 티후아나에 살고 있었으며, 후안은 교회 교육 기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더 남쪽에 있는 브라질에서도 교회는 번창해 나갔다. 1978년에 상파울루 성전이 헌납되었을 당시, 브라질에는 12개 스테이크에 5만 6천 명의 성도가 있었다. 1985년 초 무렵 스테이크는 47개, 회원 수는 약 20만 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엘리오 다 로샤 카마르고의 책임도 커졌다. 그는 상파울루2 와드의 감독으로 봉사한 후 상파울루 스테이크 회장, 리우데자네이루 선교부 회장, 십이사도의 지역 대표로 봉사했다. 그 후 그는 1985년 4월 6일에 칠십인 제일 정원회의 회원으로 지지받아 브라질 최초의 총관리 역원이 되었다.

그는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에서 성도들에게 “저는 정말 이 부름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복된 복음에 대한 그의 신앙은 전 세계의 다른 많은 지도자들처럼 확고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이 복음이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행복을 위해 마련된 계획이라는 것을 압니다.”

한편 칠레에는 이제 40개 스테이크에 13만여 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멕시코시티 성전이 헌납되기 직전, 칠레 성도들은 스페인어권 국가에 세워진 첫 번째 주님의 집인 칠레 산티아고 성전의 헌납을 기뻐했다. 수천 명의 성도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들 중에는 버스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온 이들도 있었다.

카를로스와 엘사 시푸엔테스도 성전에서 헌납식을 기다리는 무리에 섞여 있었다. 카를로스는 칠레 최초의 회원 중 한 명이었다. 1958년, 그가 뒤뜰 차고에 있을 때 선교사 두 명이 다가와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자라고 소개하며 교회에 대해 알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침례를 받았다. 1972년에 칠레에 첫 스테이크가 조직되었을 때 카를로스는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칠레 산티아고 성전이 헌납될 무렵, 카를로스는 암에 걸려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힘을 내 일어서서 열렬한 간증을 전했다. “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이 주님의 사업임을 압니다.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압니다.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카를로스는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주님의 집이 건축되고 있었다. 쉰네 살의 베티 캠피는 메르세데스라는 작은 시골 도시에서 스테이크 초등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멜빈 제이 밸라드 사도가 예언했던 대로 아르헨티나의 교회가 작은 도토리에서 거대한 참나무로 성장하는 모습을 평생 지켜보았다. 그녀가 침례를 받았던 1942년에 아르헨티나에는 약 7백 명의 교회 회원이 있었다. 이제 그 수는 거의 8만 명에 이르렀다. 유효한 성전 추천서를 충실히 소지하고 있던 그녀는 자국에서 그것을 사용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만이 아니었다. 남미의 다른 지역인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에서도 성전 건축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브리검 영과 조셉 에프 스미스는 성전이 전 세계에 세워지리라고 예언했었다. 지금 그 일이 실현되고 있었다.


침례를 받은 올가 코바르소바는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가족과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복음을 나눌 기회가 제한적일 것임을 알았다. 또한, 올가의 세대는 무신론 사회에서 성장한 탓에 종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말하려고 해도 그들은 그녀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믿음을 나눌지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오타카르 보이쿠브카에게 자신의 딜레마를 이야기했다. “요가 선생이 되면 돼요.” 그가 말했다. 정부는 요가 지도를 금지하지는 않았으므로 오타카르는 이 일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좋은 방법으로 여겼다.

처음에 올가는 그 제안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다음 날 올가는 요가 강사 양성 과정에 등록했다. 그리고 과정을 마친 얼마 뒤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중부에 있는 자신의 고향 우헤르스케흐라디슈테의 한 체육관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올가는 자신의 강좌가 인기가 높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요가 반에는 60명에서 120명까지 수강생이 들어올 수 있었다.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그녀의 수업에 등록해 몸과 마음의 건강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 했다.

올가는 수업 때마다 요가를 먼저 가르친 뒤 참된 원리들에 기초한 간단한 공과를 했다. 그녀는 종교적이지 않은 말을 사용했고,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유럽 시인과 철학자들이 했던 정신을 고양하는 말을 인용했다.

올가는 그런 가르침을 통해 수강생들이 삶에서 얼마나 긍정적인 메시지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공과를 듣기 위해 그녀의 수업에 참석하는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그녀와 오타카르는 수강생 일부를 교회에 소개했고, 그들 중 몇 사람이 침례를 받기로 했다.

수업이 호평을 받았기에 올가와 오타카르는 관심 있는 수강생을 대상으로 요가 캠프를 개설했다. 수강생들은 50명씩 조를 이루어 여름 중 일주일간 올가와 오타카르의 가르침을 받으며 유익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올가는 수강생들이 캠프를 통해 발견한 행복을 자신의 부모인 즈데녜크와 다누슈카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랐고 그들을 위해 자주 기도했다. 하지만 부모의 일상에서 종교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고, 그들이 사는 곳에는 지부도 없었다. 올가는 대화를 할 때 신중해야 했다.

어머니가 두통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던 올가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엄마, 목 근육을 풀고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엄마는 항상 널 믿는다는 걸 알지?”

올가는 몇 가지 간단한 운동을 해 보이고 어머니에게 혼자서도 계속 그 운동을 하도록 권했다. 몇 달 사이 어머니의 두통은 사라졌다. 올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요가에 관심이 생겨 요가 캠프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캠프에 푹 빠졌다. 올가는 아버지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캠프의 일과와 수업에서 다루는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이내 올가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믿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올가의 부모는 곧바로 몰몬경과 그 가르침을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간증을 얻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교회의 회원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올가가 침례를 받았던 바로 그 저수지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올가와 부모는 주방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건 축하할 일이야.” 어머니가 말했다.

그들은 올가가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고 서로 간증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작은 곳에서 위대한 일이 시작된단다!”


“제가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헨리 부르크하트가 말했다. “또한 지금 이 순간 제가 얼마나 깊이 감사하는지 말씀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1985년 6월 29일, 헨리는 새로 완공된 독일 민주 공화국 프라이베르크 성전의 연단에 서서 성전 헌납식을 위해 그곳을 가득 메운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이 그날 아침 헌납식에서 제일 먼저 말씀을 했고,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도 말씀했다.

이제 헨리는 드레스덴 선교부의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 부름받은 프라이베르크 성전의 회장으로서 성도들에게 말씀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주님의 집에 갈 수 있도록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30년이 넘게 소망했습니다.” 그는 동독과 서독의 국경이 폐쇄되기 전인 1955년에 자신과 아내 잉아가 스위스 성전에서 인봉되었을 때를 이야기했다. 지금 그는 동독처럼 정치적으로 소련의 영향 아래 놓인 여러 나라의 성도들이 프라이베르크에 성전을 갖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집을 지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집이 아닌 곳에서는 받을 수 없는 축복을 이 집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반대에 대응해 온 헨리는 성전이 별 어려움 없이 건축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랍기만 했다. 헨리가 성전 건축 부지를 확보한 후, 교회의 건축가 에밀 페처는 동독의 관리, 건축가,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성전 설계를 마무리했다. 그들은 전통 독일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입구에 아치형 탑이 하나 있는 단순하고 현대적인 건물을 짓기로 했다.

얼마 후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헨리는 기공식에 참석한 대부분의 정부 관리들이 기도할 때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건설 업체가 국영 기업이어서 인력을 확보하거나 허가를 얻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부는 성전에 석탄 난방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교회에 근처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사용을 허용했다. 헨리와 에밀은 해의 왕국실과 인봉실에 설치할 크리스털 샹들리에 세 개를 구했는데, 동독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건물의 신성함을 존중하려는 정부의 의지였을 것이다. 동독에서는 법에 따라 관리들이 언제든지 종교 모임을 감시할 수 있었으나, 정부는 성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는 데 동의했다. 실제로 관리들은 건축 과정 내내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 관행을 존중해 주었다. 일반 공개 때는 9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건물을 둘러보기 위해 성전을 찾았다.

헨리는 헌납식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아내와 저는 여기 이 집에서 여러분께 봉사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기쁩니다.”

헨리의 말씀에 이어 성전 메이트론인 잉아가 일어서서 간증했다. “저는 주님의 집에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젊은 형제 자매들이 가까운 미래에 여기 이 성전에서 인봉되어 부부로서 함께하는 삶을 시작할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도 그런 영을 지니고 태어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다시금 제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찹니다.”

이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좀 더 주님과 같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여기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올 때, 그리고 봉사할 준비가 될 때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간증드립니다.”


1985년 7월 18일,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는 전통적인 검정 외투 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쓴 수천 명의 정통파 유대교도들이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도시의 최고위 랍비들의 격려를 받으며 절을 하고, 애도의 날에나 쓰는 기도문을 낭송했다. 그들 위에는 “몰몬들은 이제 선교 활동을 중단하라”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적힌 거대한 빨간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교회는 1년 전 BYU 근동 연구 예루살렘 센터를 착공한 이후 꾸준히 건축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그 당시 예루살렘의 정통파 주민들은 센터를 유대교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교회가 선교 사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음에 불안해했다. 나치 정권이 계획적으로 수백만 유대인을 전멸시켰던 홀로코스트 이후, 많은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자국민 사이에서 개종자를 찾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특히 민감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센터가 이스라엘에서 후기 성도 선교 활동의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

정통파 유대교도들이 센터 건축을 반대한다는 보고를 받은 제일회장단은 고심 끝에 하워드 더블유 헌터 사도와 제임스 이 파우스트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교회는 예루살렘 센터 부지를 정당하게 임차했으며, 공사 초기 단계에는 공개적인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센터는 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과 도시의 다른 유대인 지도자들에게서 계속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사실, 센터는 이미 4분의 1 정도 건축이 완료된 상태였다.

통곡의 벽에서 시위가 있은 다음 날, 헌터 장로와 파우스트 장로는 정통파 유대교도이자 이스라엘 의회의 의원인 랍비 메나켐 포루시를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정통파 유대교의 다른 지도자 여럿도 집무실로 모여들었다.

랍비 포루시가 사도들에게 말했다. “친구로서 우리는 여러분께 이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물러나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 풍채가 당당한 사람이었지만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곡의 벽에서 일어난 일의 중요성을 여러분이 충분히 인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의 랍비들이 모여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파우스트 장로가 그에게 말했다. “이곳에 센터를 설립하는 데 있어 저희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BYU 학생들은 15년이 넘도록 꾸준히 예루살렘에 들어왔지만 어떠한 소란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선교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콜렉 시장처럼 교회 지도자들도 성지에 다양한 신앙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무실에 있던 또 다른 랍비가 말했다. “여러분이 운영하는 강력한 청년 선교사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런 프로그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포루시 랍비가 제안했다. “2주 동안 공사를 중단한다는 데 합의하시지요. 제가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담당 지도자들께 공사 중단의 필요성을 설명하겠습니다.”

헌터 장로가 말했다. “공사는 중단할 수 없습니다. 이미 계약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포르쉬 랍비가 말했다. “제가 건물을 많이 지어 봐서 압니다만, 공사 중단 합의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공사는 중단할 수 없습니다.” 헌터 장로는 거듭 말했다. “하지만 의견차를 해소하기 위해 논의를 지속할 수는 있습니다.”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루시 랍비가 힘주어 말했다.

이튿날 저녁, 사도들은 랍비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렸다. 공사는 계속될 것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온 헌터 장로와 파우스트 장로는 센터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와 의견을 나눴다.

교회가 예루살렘 센터를 통해서는 선교 사업을 하지 않기로 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헌터 장로와 파우스트 장로, BYU 총장 제프리 알 홀런드에게 이스라엘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도록 전도를 하지 않겠다는 공식 합의서를 작성할 것을 요청했다.

위원회는 8월 1일에 합의서 작성을 완료했다. 다음 날, 홀런드 총장은 합의서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소웨토의 상호부조회 회장인 줄리아 마빔벨라는 자신의 지부에 속한 모든 여성이 존중받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기를 바랐다. 그녀는 여성들이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대받는 모습을 평생 보아 왔다. 그녀는 자신이 보살피는 모든 사람이 품위 있는 대우를 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당시 교회 여성들은 매달 “가사” 공과를 통해 자립, 금전 관리, 응급처치, 영양, 질병 예방 등의 원리를 공부했다. 소웨토의 많은 사람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았던 줄리아는 상호부조회 여성들에게 식량을 비축하고 물을 절약하는 방법, 돈을 저축하는 방법, 적은 자원으로 생활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줄리아는 그들에게 새 옷을 사기보다는 헌 옷을 고쳐 입으라고 권했다.

한번은 누군가 옷 등의 물품을 지부에 기부한 일이 있었다. 상호부조회의 거의 모든 회원이 궁핍한 생활을 했으므로, 줄리아는 기부 물품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법에 대해 기도했다. 그리고 각 상호부조회 회원에게 번호를 매긴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라는 영감을 받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무작위로 번호를 뽑았다. 모든 여성이 기부 물품을 고르는 것에 대해 공정한 기회를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호부조회 공과는 대부분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줄리아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여성들을 위해 소토어와 줄루어로 공과를 준비했다.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서로 돌보도록 방문 교사를 지명할 때는 인도를 구하며 영감에 의지했다. 그녀는 새로 부름받은 자매들에게 말하곤 했다. “주님께서는 자매님이 이 사람을 방문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가정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세요. 그런 다음 우리가 한 가족으로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의논합시다.”

줄리아는 소웨토에서 상호부조회를 이끌면서 요하네스버그의 성전 건축 진행 상황을 꾸준히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모로나이 천사상을 성전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 세우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이 되자 소웨토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들이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구역 내 일과 쇼핑을 차단할 목적으로 지역 사회 차원의 “접근 금지” 파업을 벌였다.

줄리아는 운동가들의 대의를 지지했지만, 성전 건축 과정 중 너무도 중요한 이 행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기로 마음먹었다. 줄리아는 손자와 함께 요하네스버그로 갔다. 도중에 그들을 멈춰 세우거나 심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전 부지에서, 그들은 천사상 올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85년 9월 14일, 줄리아는 주님의 집에서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완전한 소속감을 느꼈다. 인종과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음 안에서 성약을 통해 형제 자매들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죽은 남편 존과 부모에게 인봉되었다.

“정말 멋진 날이었다!” 줄리아는 기뻤다. “나는 정말로 많은 축복을 받았다.”

“오늘 나는, 주님의 집에 가서 내 구주이자 구속주이신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항상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기꺼이 맹세할 것이다.” “아, 내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생은 참으로 달콤하고 내 잔은 넘치나이다.”

  1. Kapp, Journal, Apr. 9, 1984; Gordon B. Hinckley, “The Sustaining of Church Officers,” Ensign, May 1984, 5;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33. 주제: Gordon B. Hinckley[고든 비 힝클리]; Russell M. Nelson[러셀 엠 넬슨]; Ardeth G. Kapp[아데스 지 캡]; 만장일치

  2. Kapp, Journal, Aug. 7, 1984;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ii, 32, 57; “First Presidency Calls Young Women Counselors,” Church News, May 20, 1984, 7. 주제: 금식

  3. Kapp, Journal, Aug. 7, 1984, and Jan. 8, 1985;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42, 44–45, 52–58, 65, 227–28; Kapp, “Young Women Presentation to PEC,” 1–6.

  4. Kapp, Journal, Aug. 7, 1984;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52–54, 56–60; Carolyn Rasmus, “Events of Significance—1984,” [1], Young Women, Carolyn J. Rasmus Office Papers, CHL.

  5. Carolyn Rasmus to Jed Woodworth, Email, May 31, 2023, copy in editors’ possession;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45, 48–50, 52–54, 59–65; Thompson, Stand as a Witness, 267–73; Kapp, “Young Women Presentation to PEC,” 2.

  6. Priesthood Executive Council, Minutes and Records, Oct. 9, 1985; Kapp, Journal, Apr. 5, 1979; Oct. 9, 1984; Nov. 12, 1984; Jan. 8, 1985; Spencer W. Kimball, Address, Seminar for Regional Representatives, Oct. 5, 1979,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Regional Representatives Seminar Addresses, CHL; Monson, Journal, Mar. 5, 1982;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65–68. 다른 집행 평의회는 선교사 집행 평의회와 성전 및 계보 집행 평의회였다. 주제: 협의부

  7. Kapp, Journal, Jan. 6, 1985.

  8.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65; Priesthood Executive Council, Minutes and Records, Feb. 20, 1985; Rasmus, Journal, Feb. 20, 1985; Kapp, “Young Women Presentation to PEC,” 1–13.

  9. Priesthood Executive Council, Minutes and Records, Feb. 20, 1985; Kapp, “Young Women Presentation to PEC,” 1–9.

  10. Kapp, “Young Women Presentation to PEC,” 9–11; Rasmus, Journal, Feb. 20, 1985; Kapp, Journal, Apr. 9, 1984; Kapp and Rasmus, Oral History Interview, 67; Priesthood Executive Council, Minutes and Records, Feb. 20, 1985. 주제: 청녀 조직

  11. Gordon B. Hinckley, Carmen G. O’Donnal, in Guatemala City Temple, Dedication Services, 6, 115–16; 『성도들』, 제3권, 제33장; Deseret News 1985 Church Almanac, 254; Missionary Department, Annual Reports, 1979, 12. 주제: Guatemala[과테말라]

  12. First Presidency to John O’Donnal, Aug. 2, 1984, First Presidency, Temple Correspondence, CHL; Deseret News 1985 Church Almanac, 12, 254–55;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24, 27–28, 34–35;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Apr. 19, 2022], 20; John L. Hart, “‘We Are Here to Stay,’ Say Mexican Members,” Church News, May 5, 1985, 5. 주제: 멕시코

  13. Dell Van Orden, “Sao Paulo Temple Dedicated,” Church News, Nov. 4, 1978, 3; Jerry Cahill, “Orientation Center Is in Sao Paulo,” Church News, Oct. 21, 1978, 8; Deseret News 1987 Church Almanac, 172–99, 201–2, 256; John L. Hart, “Skills Gained in Military, Business and Ministry Prepared Him for New Calling,” Church News, June 16, 1985, 4; Jason Swensen, “Church in Brazil Realizing Its Prophesied Potential,” Church News, Feb. 11, 2012, 3; Gordon B. Hinckley, “The Sustaining of Church Officers,” and Helio da Rocha Camargo, “He Is in Charge,” Ensign, May 1985, 5, 85. 주제: Brazil[브라질]

  14. Allred, Oral History Interview [Sept. 2022], 8; Allred, Oral History Interview [2014], 33–34; Harold B. Lee to First Presidency and Quorum of the Twelve, Nov. 7, 1959,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Deseret News 1985 Church Almanac, 255; Deseret News 1991–1992 Church Almanac, 200–218; John L. Hart, “Temple Dedicated in an Oasis of Calm,” Church News, Sept. 25, 1983, 3. 주제: Chile[칠레]

  15. Martin P. Houseman, “Chile: ‘The Field Is White,’” Church News, May 8, 1965, 8–9; Craig Hill, “Chile’s 50th Stake—a Milestone Capping 32 Years of Growth,” Church News, Nov. 12, 1988, 11; John L. Hart, “Temple Dedicated in an Oasis of Calm,” Church News, Sept. 25, 1983, 3; Carlos Cifuentes, in Santiago Chile Temple, Dedication Services, 39–40; Carlos Cifuentes and Elsa Cifuentes, Sept. 1983, Photograph, Dedicacion Templo de Santiago, CHL.

  16. “Groundbreaking for 4th Temple in South America,” Church News, May 1, 1983, 4; Beatriz Felisa Campi entry, Argentine Mission, Baptisms and Confirmations, 1942, 6, in Argentina (Country), part 3,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Campi, Diary, Sept. 23 and 30, 1984; Oct. 7 and 14, 1984; Annual Report of the Argentine Mission, 1942, Presiding Bishopric, Financial, Statistical, and Historical Reports of Wards, Stakes, and Missions, CHL; Deseret News 1985 Church Almanac, 255; 『성도들』, 제3권, 제16장; Curbelo, History of the Mormons in Argentina, 38, 182–83. 주제: Argentina[아르헨티나]; Church Growth[교회의 성장]

  17. Gordon B. Hinckley to W. Grant Bangerter, Oct. 12, 1984, First Presidency, Temple Correspondence, CHL; “Midpoint in Groundbreakings,” Church News, Sept. 18, 1982, 5; “New Temples Planned in 3 Countries,” Church News, Apr. 3, 1982, 4; 『성도들』, 제2권, 제44장; 제3권, 제8장. 주제: Colombia[콜롬비아]; Peru[페루]; Ecuador[에콰도르]; 성전 건축

  18.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88–90; Kovářová, Oral History Interview, [12]–[13]; Vojkůvka, Statement, Oct. 3, 1990.

  19.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90–95; Kovářová, Oral History Interview, [13]–[14]; Campora, Oral History Interview [2020], 28.

  20. Campora, Saint behind Enemy Lines, 8–9, 96–114, 129–34.

  21. Gordon B. Hinckley, Thomas S. Monson, Henry Burkhardt, in Freiberg Germany Temple, Dedication Services, 15, 17–19, 35; Gordon B. Hinckley, Memorandum, July 5, 1984, Gordon B. Hinckley, Temple Files, CHL; Burkhardt, Journal, July 24, 1984, and Feb. 18, 1985; 『성도들』, 제3권, 제39장; “Temple to Be Built in German Democratic Republic,” Church News, Oct. 9, 1982, 2; “Freiberg Germany Temple District,” 1–2, Temple Department, Temple District Maps, CHL. 주제: Germany[독일]; Cold War[냉전]

  22. Kuehne, “Freiberg Temple,” 95–97, 129; Boone and Cowan, “Freiberg Germany Temple,” 156–60; “Europe’s 2nd Temple Begun in Freiberg,” Church News, May 15, 1983, 5.

  23. Kuehne, Henry Burkhardt, 97–98; Boone and Cowan, “Freiberg Germany Temple,” 159–62; Henry Burkhardt, in Freiberg Germany Temple, Dedication Services, 35; Hinckley, Journal, June 28, 1985.

  24. Henry Burkhardt, Inge Burkhardt, in Freiberg Germany Temple, Dedication Services, 36–38. 주제: 성전 헌납과 헌납 기도

  25. Haim Shapiro, “Prayers Said against Mormon Study Centre,” Jerusalem Post, July 19, 1985, 2; “Ultra-Orthodox Jews Hold Pray-In to Protest Mormon Center in Israel,” Los Angeles Times, July 19, 1985, 5; Arthur Max, “Rabbis Want Construction of Mormon Center Halted,” Salt Lake Tribune, July 18, 1985, A6;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122–23; Ogden, Journal, July 19, 1985; Galbraith, Oral History Interview, 167.

  26. Peterson, Abraham Divided, 345; Faust, Journal, Aug. 14, 1984; Oct. 1 and 10, 1984; Jan. 3 and 31, 1985.

  27.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70–71, 125–85; Moshe Porush to Teddy Kollek, May 30, 1984; Jeffrey R. Holland to Gordon B. Hinckley, Howard W. Hunter, and James E. Faust, Mar. 22, 1985; Meir Kahane to Spencer W. Kimball, July 15, 1985,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Yosef Goell, “When the Saints Come Marching In,” Jerusalem Post Magazine, June 7, 1985, 6–7; Hunter, Journal, July 30, 1985; see also Scott, “Reflections on Howard W. Hunter in Jerusalem,” 14.

  28. Hinckley, Journal, May 21 and July 18, 1985; Hunter, Journal, Mar. 9, 13, 23, and 27, 1984; Apr. 2, 1984; May 9, 1984; Feb. 8, 1985; Mar. 27, 1985; July 17 and 19, 1985; Faust, Journal, Mar. 28, 1985; June 7 and 12, 1985; July 19, 1985; Haim Shapiro, “Prayers Said against Mormon Study Centre,” Jerusalem Post, July 19, 1985, 2;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130–31; Benson, Journal, Apr. 26, 1983.

  29. “Minutes of a Meeting with Rabbi Menachem Porush (MK) and Party—19 July 1985,” 1–2,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Hunter, Journal, July 19, 1985; Faust, Journal, July 19, 1985;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132.

  30. “Minutes of a Meeting with Rabbi Menachem Porush (MK) and Party—19 July 1985,” 3,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Teddy Kollek to David Galbraith, Mar. 23, 1977,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Fear of Bogeys,” Jerusalem Post, July 21, 1985, 8; Haim Shapiro, “Mormon: Proselytizers Will Go Home,” Jerusalem Post, Aug. 7, 1985, 3; Galbraith, Ogden, and Skinner, Jerusalem, 457.

  31. “Minutes of a Meeting with Rabbi Menachem Porush (MK) and Party—19 July 1985,” 4–5,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see also Hunter, Journal, July 19, 1985; Faust, Journal, July 19, 1985; and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132–37.

  32. Hunter, Journal, July 20 and 29–31, 1985; Aug. 1, 1985; Ogden, Journal, July 20, 1985; Hinckley, Journal, July 29 and 31, 1985; Faust, Journal, July 29–31, 1985; Taylor, “Contest and Controversy,” 127–29, 137–38; Jeffrey R. Holland, Letter of Undertaking, Aug. 1, 1985, Gordon B. Hinckley, Church Educational System Files, CHL.

  33.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2–93.

  34. Relief Society Handbook, 4; Latter-day Saint Woman, Part A, chapters 21–26; Latter-day Saint Woman, Part B, chapters 21–25;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95], 24;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53–54.

  35.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3;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95], 24–25. 주제: 상호부조회

  36.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95–96; Maurice Bateman, Letter, Oct. 7, 1984, Maurice and Arlene Bateman Letters, CHL; Patrick Laurence, “SA Miners Waver on Strike after New Offer,” Guardian (UK edition), Sept. 18, 1984, 7; Patrick Laurence, “‘Six Killed’ after Police Are Called to SA Mine,” Guardian (UK edition), Sept. 19, 1984, 6. 주제: 모로나이 천사

  37.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48, 57–59, 96;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94; Bateman and Bateman, “To Julia Mavimbela,” [1].

  38. Mavimbela and Harper, “Mother of Soweto,” 86, 95–96;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95], 13–14, 20; Mavimbela, Oral History Interview [1988], 63–64; Julia Mavimbela, “My Own Endowment,” Sept. 14, 1985, Julia N. Mavimbela Papers, CHL; Julia Nompi Ngubeni Mavimbela, Report of Living Endowment, Sept. 14, 1985, Temple Records for the Living, 1955–91, microfilm 1,262,454, FSL. 주제: 성전 엔다우먼트; 인봉

  39. Julia Mavimbela, “My Own Endowment,” Sept. 14, 1985, Julia N. Mavimbela Papers, C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