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지상의 어떤 세력도
1960년 내내 헨리 부르크하트는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 교회가 해체되는 것을 막고자 안간힘을 썼다. 동독은 모든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 국경 내 봉사를 금지했기에, 동독에서의 전도는 전적으로 성도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집집을 다닐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0월에 정부는 교회 회원의 숫자가 아주 많지 않은 도시에서는 전임 선교사들의 봉사를 금지했다. 또한 정부만 국민들에게 오락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거의 모든 상호부조회, 상호향상회, 초등회 활동을 중단시켰다.
한 관리는 정부가 성도들을 곱게 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필요한 걸 전부 교회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동독의 교회는 한때 존재했던 교회의 그림자 같은 처지가 되었다. 많은 동독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서독의 더 큰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찾아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성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동독을 떠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국경을 넘는 경우가 잦았다.
이 대규모 이주는 동독 정부와 소련 동맹국들에게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헨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모두 차단하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선교 본부는 서베를린에 있었으므로, 헨리는 그러한 극단적인 조치로 인해 동독 성도들이 교회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단절될까 봐 두려웠다.
12월 18일, 유럽 선교부 회장이자 십이사도 정원회 보조인 앨빈 알 다이어가 동독에 와서 헨리와 현지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돌보고 있는 성도들의 안녕에 관해 이야기했다.
동독의 교회 지도자들은 암울한 상황을 전했다. 정부는 최근에 출판된 책이나 기타 인쇄물을 수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이 규제로 인해 성도들이 서독에서 밀수입하지 않는 한 새로운 교회 잡지, 공과 교재, 찬송가 등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지부의 참석률은 감소하고 있었다. 집회소는 제 기능을 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파손된 상태였다. 청소년 모임이 중단된 지금, 정부가 여러 프로그램들을 후원하는 탓에 많은 청소년들이 종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헨리는 지부에서 이따금 비밀리에 청소년 활동을 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동독 화폐는 가치가 하락하고 있었고,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은 통탄할 정도로 부족했다. 많은 성도들은 너무 가난해서 음식과 연료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 복지 계좌의 자금을 사용하여 석탄과 감자를 구입하거나 그것들조차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임 후, 다이어 회장은 헨리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동독의 선교 사업과 관련된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단순히 동독 정부가 선교사들이 봉사할 수 있는 지역과 방법을 크게 제한했다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는 신체가 건강한 남성이라면 모두 돈벌이가 되는 업종에 종사하기를 기대했으므로, 전임 선교사 봉사는 동독 경제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현지 지부나 서독 성도들의 재정 지원에 의존한다는 사실도 문제였다. 다이어 회장에게는 그것이 보수를 받고 성역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헨리에게 동독에서 봉사하는 모든 전임 선교사를 해임하도록 요청했다.
처음에 헨리는 그 요청에 응하기를 주저했다. 선교사들은 이제 가가호호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에 정부의 시각에서 교회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한편 교회의 일부 지부에서는 여전히 선교사이 신권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해임되면 그런 지부들이 붕괴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다이어 회장을 존중했으므로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고를 따랐다.
몇 달 후, 서독과 동독의 청소년 성도들이 상호향상회 대회를 맞이해 서베를린에 모였다. 언제라도 국경이 폐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으므로 불안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간증을 나누는 가운데 한 가지 공통된 주제를 거듭 이야기했다. 즉,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설령 다시 함께 모일 기회가 없을지라도 정치적으로 분열된 양쪽 모두에서 복음은 참되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끝까지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겠다고 말이다.
중앙 유럽과 동부 유럽,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 걸쳐 독재 정권이 확산되자 맥케이 회장은 촉각이 곤두섰다.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그는 한때 교회가 번성했던 독일 동부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곳에서 정부가 권력을 잡고, 무신론을 조장하며, 종교적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을 지켜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도들의 열렬한 헌신에서 희망을 얻었다. 미국과 서유럽은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사회가 하나님보다 부와 지위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을 염려했다. 맥케이 회장은 교회 회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 세계의 성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타심에 감탄했다. 그는 1961년 1월에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교회 회원들이 지금보다 더 큰 영성, 다시 말해 더 기꺼이 베풀고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특히 십일조와 헌금을 바치는 면에서 성도들이 보여 주는 관대함에 감동을 받았다. 과거 세대에는 주님의 일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교회에 어려운 과제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부금과 더불어 자원봉사와 다양한 사업적 투자에서 얻는 수입 덕분에 교회는 교육, 복지, 선교사, 건축 프로그램을 포함한 많은 일에 계속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건축 프로그램에 특히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맥케이 회장은 그것이 성장하는 교회에 꼭 필요한 지출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건물의 목적은 벽을 세우고 지붕을 단단히 얹고 탑을 완성하고 헌납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건물들은 영혼의 교화를 위해 지어집니다.”
전 세계에 건축된 새로운 예배당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집합 장소였다. 1959년,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인 텍사스주 덴턴에서는 24명의 교회 회원들이 존과 마거릿 포터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그러다 사람이 많아져 포터의 집이 비좁아지자, 그들은 지붕이 새는 2층짜리 빈 건물에서 모임을 했다. 1961년에 이 그룹은 교회 건축 위원회에 집회소 건축 허가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만큼 활동 회원을 보유한 지부가 되었다.
그 당시 새 집회소를 건축할 때면 선교부 지역 교회 회원들은 건축 비용의 30퍼센트를, 스테이크 지역 회원들은 비용의 50퍼센트를 기부해야 했다. 스테이크 회장인 어빈 앳커슨은 덴턴 성도들이 예배당 건축 공사에 기부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부 금액이 1,000달러에 도달하면 자신도 1,00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에 존 포터는 교회의 승인을 받아 직접 3,600여 평의 땅을 구입하여 1,200여 평은 식당에 팔고 나머지 2,400여 평은 건물 공사를 위해 기부했다.
1960년대 초에 집회소를 지을 때는 그곳을 사용할 교회 회원들이 교회에서 승인한 몇 가지 건축 설계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몇몇 설계도에서는 와드나 지부의 규모와 성장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두세 단계에 걸쳐 집회소를 건축하게 되어 있었다. 건축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예배실로 사용할 수 있는 큰 다목적실 하나와 여러 개의 공과실을 지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큰 예배실과 초등회실이 추가됐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활동실, 주방 및 더 많은 방이 포함됐다. 덴턴 지부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지부의 성도들은 처음 두 단계를 결합한 설계도에 따라 집회소를 짓기로 했다. 교회에 고용된 건설 감독관이 공사를 관리하는 동안 덴턴 성도들은 대부분의 노동을 제공했다.
지부 회원인 라일리 스완슨은 고급 가구를 만드는 목수였다. 그는 예배당의 아름다운 목조 장식을 맡았다. 라일리는 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담배를 끊은 현지 개종자였다. 건축 공사가 시작되자, 그는 낮 시간 내내 자원봉사자로 예배당 짓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야간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집회소가 세워지면서, 교회는 본부 지도자와 교회 직원들에게 업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에 큰 사무실 건물을 지을 계획도 세웠다. 템플스퀘어의 새로운 방문자 센터, 솔트레이크시티 근처 산속 깊은 곳에 계보 기록 보관할 동굴 보관소,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새로운 성전 건축 계획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맥케이 회장은 교회 청소년들과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그들의 소망에서 희망을 찾았다. 1959년에 그는 모든 교회 회원에게 새로운 회원 및 잠재적인 개종자를 찾고 가르치며, 그들과 우정을 나누도록 권유했다. 그 후로 선교 사업에 속도가 붙었고, 특히 영국에서는 새로운 성전이 실제로 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불러오기도 했다. 영국 선교부에서는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개종자 침례가 극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교회는 1960년 3월에 영국 북 선교부와 맨체스터 스테이크를 설립했다. 1년 후, 맥케이 회장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 스테이크를 조직하고 런던 중심부의 하이드파크 근처에 아름다운 새 예배당을 헌납했다.
영국에 있는 동안 맥케이 회장은 모든 회원에게 선교 사업에 참여하라고 거듭 권유했다. 그는 영국 북 선교부의 선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만약 모든 회원이 그 책임을 맡는다면, 지상의 어떤 세력도 이 교회의 성장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맥케이 회장이 영국에서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난 후, 제일회장단은 러마 윌리엄스에게서 나이지리아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십 통의 편지에 관한 보고서를 받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한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면, 지금이 그 일의 착수 여부를 알아보기 적절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맥케이 회장은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회복된 복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전 해에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귀환하던 선교부 회장 글렌 피셔에게 나이지리아를 방문하도록 요청했었다. 글렌은 선교 사업을 위한 그 나라의 준비 상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했으며, 그에 따라 맥케이 회장은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 터였다. 그즈음에 러마의 보고서가 올라온 것이었다.
1961년 7월 1일, 맥케이 회장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모임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교회의 신권 제한이 나이지리아에서의 선교 사업에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할 것임을 알았기에, 그는 이 상황을 고대 사도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의문스러워하며 직면했던 딜레마와 비교해 보았다. 고대의 사도들은 베드로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맥케이 회장은 신권 제한에 관해 주님께 인도를 구했지만 명확한 답을 받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도 주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나이지리아에 선교부를 열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러마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믿었다. 교회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으므로, 그는 나이지리아인들의 신앙을 알아보기 위해 교회 대표자들을 나이지리아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이 사안을 논의한 후, 사도들은 선지자의 제안을 지지했다.
이 무렵, 열여섯 살의 수지 타우스는 매일 하는 일이 있었다. 날마다 방과 후에 신문 배달을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약 1년 전부터 교회에 관심이 있었다. 한 친구가 그녀를 영국 베벌리에 있는 현지 지부의 청소년 활동에 초대했는데, 수지는 곧 회복된 복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과 감리교 신자인 그녀의 부모는 교회에 가입하고 싶어 하는 딸의 소망은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딸이 침례받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성도가 되겠다는 수지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녀는 당시 영국 제도에서 교회에 마음이 끌린 수천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수지처럼 그들 중 다수는 새로 도입한 선교부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성도들에게 친구와 가족을 교회 모임에 초대하여 그들이 선교사들과 만나게 할 것을 장려했다. 사실 수지의 친구가 그녀를 교회에 데려왔을 당시, 영국 선교부에서 최근에 나온 침례의 85퍼센트 이상이 소개의 결실이었다.
수지는 교회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몰몬경을 받은 후 그것을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 위해 가톨릭 신부에게 가져갔었다. 신부는 평소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몰몬경을 보여 주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몰몬경이 악마의 책이라고 말하면서 수지가 자신의 집을 이단으로 더럽혔다고 비난했다. 그러더니 신부는 수지의 손에서 몰몬경을 낚아채 벽난로에 내던졌다. 몰몬경에 불이 붙지는 않아서 수지는 신부가 자신을 현관문 밖으로 쫓아내기 전에 간신히 몰몬경을 끄집어냈다.
그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는 일은 없어.”
그녀는 곧 베벌리 지부의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화려한 가톨릭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던 수지는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인 맨바닥 호텔 방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성찬식에 참석한 후 그녀는 그곳에서 들었던 말씀이 참됨을 확인해 주는 따뜻한 느낌을 느꼈다. 영은 수지에게 다시 성찬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강한 증거를 주었다.
수지는 훨씬 많은 사람이 참석한 상호향상회 모임에서도 비슷한 영을 느꼈다. 그중에는 수지처럼 친구에게서 교회를 소개받은 청소년들도 있었다. 선교사들과 야구를 하면서 교회를 알게 된 청남들도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선교사들은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교회를 소개했다. 최근 영국 선교부에서는 야구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가 선교사가 운영하는 팀에서 경기를 하려고 교회에 가입했다. 당시 선교부 지도자들은 다른 선교사들보다 더 많이 침례를 준 선교사들에게 표창 및 포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부 선교사들은 대체로 성인들보다 훨씬 더 기꺼이 침례를 받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노력을 집중했다.
이 청소년 개종자들은 대개 침례에 앞서 복음 토론을 거쳤지만 교회에 참석하는 것보다 스포츠팀에 소속되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침례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교회에 가입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베벌리 지부와 영국 제도의 다른 지부들에는 명목상으로만 교회 회원인 청소년이 수십 명은 되었다.
그렇지만 수지는 매주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부모님과 침례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수지가 신문 배달을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차 밑으로 들어가 발만 밖으로 내놓은 채 차를 수리하고 있었다. “아빠, 저 침례받아도 돼요?” 수지가 물었다.
“그러렴, 우리 딸.” 아버지는 여전히 차 밑에서 나오지 않고 말했다. “그게 네게 그렇게 의미가 큰일이라면, 그렇게 하렴.”
수지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세요, 아빠? 나중에 딴소리하시는 건 아니죠?”
그는 염려 말라고 대답했다. 수지는 원한다면 침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마워요.” 수지가 외쳤다. “정말 고마워요.” 수지는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선교사들의 숙소로 가서 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두 사람 다 아버지 마음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수지가 물었다. “왜 안 놀라세요? 저는 놀랐는데요.”
선교사들이 말했다. “우린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자매님을 위해 금식해 왔거든요.”
1961년 8월 13일 이른 아침, 독일 민주 공화국은 서베를린 외곽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탱크들은 덜거덕거리며 느릿느릿 나아가 국경 건널목에 자리 잡았고, 군인들은 인근 건물의 창들에 기관총을 설치했다. 도심에 있는 역사적 건축물인 브란덴부르크 문에는 분노와 혼란에 빠진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다음 날에는 작업자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 도로를 착암기로 부수고 콘크리트 블록과 가시철조망으로 기다란 임시 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 앞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몇 달간의 소문 끝에 동독 정부는 마침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국경을 폐쇄했다.
벽의 높이가 빠르게 올라가자 헨리 부르크하트는 불안해졌다. 그가 우려한 대로 국경이 폐쇄되면서 서독과 통신이 두절되었다. 그는 선교부 사무실에 전화를 걸 수도, 전보를 보낼 수도,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가 전날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으려고 한다면, 경비병들이 그를 가로막을 것이고 심지어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동독의 지방부와 지부들은 이미 현지 지도자들의 인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고 회원 선교사들이 대체로 전임 선교사들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헨리는 서베를린에 있는 베를린 선교 본부와의 연락에 항상 어느 정도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진짜 장벽이 세워져 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될까?
헨리는 8월 말에 그 답을 얻었다. 동독은 자국민의 국외 여행을 금지했지만, 특별 허가를 받은 서독 주민들이 동독 국경 내를 여행하는 것은 허용했다. 8월 27일, 베를린 선교부 회장인 퍼시 케이 페처와 그의 보좌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오원즈는 동베를린에서 헨리와 성도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입국 전에 차와 주머니에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검문소에서는 줄지어 선 경찰과 군인들이 수천 명 인파를 저지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군중을 갈라놓자, 페처 회장은 차를 몰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미로 같은 장애물들을 통과해 동베를린 입구에 도착했다.
헨리와 성도들은 선교부 회장을 만나 무척 기뻤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페처 회장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후 여러 달 동안 비슷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방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베를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들과 동독 성도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다행히 새로운 제한 조치가 동독 성도들의 결의를 흔들어 놓지는 못한 것 같았다. 성찬식 참석자가 늘어났고, 많은 사람이 복음이 참됨을 확고하게 간증했다.
현지 지도자들이 모인 한 대회에서, 헨리는 돌아가는 상황이 동독의 성도들에게 이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며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인간이 강제한 상황 때문에 주님의 일이 어려워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 나라에서 계속 성공을 거둘지 여부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가 부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1961년 10월 연차 대회가 열리기 몇 주 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해롤드 비 리 장로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오게 했다. 선지자는 그날 아침 6시 30분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다가오는 신권 모임에서 교회 교과 과정을 통합하기 위해 마련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해야 한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교회의 각 조직, 즉 주일학교, 초등회, 청남 및 청녀 상호향상회, 상호부조회, 신권 정원회는 서로 제각각 자체적인 주간 공과를 작성해 왔었다. 그리고 1900년대 초를 시작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조직과 정원회의 주간 공과와 활동을 서로 연계시키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 기본 교리를 강조하고 반복적이거나 중복되는 단원을 없앤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산발적이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공과와 활동을 서로 연계시키려는 초창기의 노력에 일정 부분 참여했던 맥케이 회장은 이제 그것을 다시 시도할 때가 됐다고 여겼다. 교회 회원의 3분의 1 이상이 지난 10년 동안 교회에 들어왔으므로, 현재의 교과 과정은 새로운 성도들의 필요를 다 충족하지는 못했다. 선지자는 특히 잘못된 개념을 전하거나 기본적인 복음 가르침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는 공과에 대해 염려했다. 그는 복음의 기본 원리에 기초한 통일된 교과 과정을 원했다.
“우리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은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입니다.” 그는 말했다.
리 장로는 1년 넘게 소규모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연구해 왔다. 그도 교회에서 전하는 가르침이 구원의 교리에 더 중점을 두기를 바랐다. 그리고 최근에 그는 교회에서 출판한 훈련 자료가 사도들이 보지 못한 상태로 현지 회원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처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에서는 공과와 지침서가 성도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충분한 검토를 거치게 하고 싶었다. 그는 교회 조직들 간에 원활한 협의가 이루어질 때 혼란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위원회는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구성 원리에 따라 교회 교과 과정을 작성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르면, 각각의 본부 조직이 독자적으로 공과 자료를 작성하는 대신 세 개의 위원회, 즉 어린이를 위한 위원회, 청소년을 위한 위원회, 그리고 성인을 위한 위원회가 교과 과정을 감독했다.
교회의 다양한 조직을 대표하는 여성과 남성들은 구원과 관련된 몇 가지 핵심 원리에 초점을 둔 교과 과정이 개발되도록 돕기로 했다. 십이사도 정원회가 그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네 명의 사도가 이끄는 교회 전체 협의 평의회가 세 위원회의 활동을 감독하게 될 것이었다.
연령별로 교과 과정을 구성함으로써 각 위원회는 공과에서 불필요한 중복을 피할 수 있었다. 더욱이 총관리 역원들과 함께 공과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이 전 세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방문한 경험도 교과 과정에 실을 수 있었다.
위원회가 제안서를 작성하자,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이를 검토하고 승인했다. 때마침 리 장로는 10월 연차 대회의 신권 모임에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할 수 있었다.
리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러한 프로그램을 채택함으로써 교회 교과 과정, 교회 출판물, 교회 건물, 교회 모임 및 기타 주님 사업의 중요한 측면이 통합되고 단순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리 장로는 교회 교과 과정을 서로 연계시키려는 맥케이 회장의 조치가 영감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이 교회의 회장님을 주시한다면, 그분이 가능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자녀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연차 대회가 끝난 직후, 러마 윌리엄스는 나이지리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가방에는 사진기와 녹음기를 챙겨 넣었다. 자신이 만날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나중에 제일회장단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함께할 그의 동반자는 남아프리카 선교부로 가는 마빈 존스라는 이름의 스무 살 된 선교사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나이지리아 해안의 도시인 포트하커트였다. 러마와 편지를 주고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편지를 통해 러마의 관심을 아프리카로 돌렸던 아니스티 존 이콩은 군중 속에 없었다.
러마는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이 전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는 그들이 함께 일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들 중에는 러마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쓴 매슈 우도-에테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러마와 마빈을 자신의 작은 집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 있었다. 러마는 몹시 뜨겁고 습한 공기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회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첫 번째 일요일에 러마는 매슈의 예배당에서 또 한 번 다른 많은 군중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움직인 사람들이었다. 러마는 그들에게 신회, 배도, 조셉 스미스를 통한 복음의 회복에 대해 가르쳤다. 그는 신권 제한에 대해 설명하고, 자신은 그들이 신권을 소유할 수 없더라도 여전히 교회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나이지리아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매슈가 모임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에게 나머지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중에 있던 사람들이 러마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러마는 통역을 듣기 위해 매슈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간증을 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슈가 말했다.
러마는 깜짝 놀랐다. 그는 사람들이 피곤하고 배도 고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그때부터 3시간 동안 간증을 나누어 주었다.
그중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흰 셔츠를 입고, 장밋빛 천으로 다리를 감싼 노인도 있었다. 그는 맨발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순다섯 살이고 몸도 아파요. 그런데 오늘 아침 여기에 오려고 26킬로미터를 걸어왔어요.”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나는 맥케이 회장님을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을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형제님을 보았으니까 개인적으로 형제님에게 책임을 하나 지울게요. 맥케이 회장님께 가서 우리가 진심이라고 전해 주세요.”
회중의 한 여성은 러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헛된 것이 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일주일 남짓 지날 무렵, 마침내 러마는 우요라는 마을에서 아니스티 존 이콩을 만났다. 러마는 그 친구가 자신을 마중하려고 160킬로미터도 넘는 거리를 여행하여 공항으로 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자기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스티 존은 러마에게 자신의 집 벽을 보여 주었다. 벽들은 교회 잡지에 실린 총관리 역원들의 기사와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러마는 나이지리아 사람들의 신앙에 거듭 감명받았다. 그는 거의 100개의 교구에 있는 약 5천 명의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권과 성전에 대한 제한이 있는 한 나이지리아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친구들에게 장차 그 나라에서 선교 사업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내가 제일회장단에 보고할 때 내 역할을 다하면 나이지리아에 교회가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결정을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데 있어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 사람인가를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