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우리의 힘은 신앙입니다
2000년 10월 1일, 90세의 힝클리 회장은 미국 동부의 매사추세츠 보스턴 성전을 헌납했는데, 이는 연말까지 100개의 성전을 운영한다는 그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구주의 탄생과 새천년의 시작을 기념하고자 준비할 무렵, 힝클리 회장은 두 개의 성전을 추가로 헌납했다. 하나는 브라질 헤시피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 성전이었다. 그 외에도 19개의 성전이 건축 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었다. 이는 교회 역사상 어느 해보다도 많은 성전이 헌납되었던 한 해에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힝클리 회장은 그동안 교회가 대부분 유타에 거주하는 40만 명의 회원을 지닌 조직에서 148개국에 1,1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둔 조직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지자가 태어난 1910년에는 교회에 성전이 4곳뿐이었고 엔다우먼트는 오직 영어로만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교회의 성전은 전 세계에 위치해 있었고, 엔다우먼트 의식은 수십 개의 언어로 진행되었다. 영감을 받아 성전 설계를 변경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힝클리 회장이 염두에 두고 있던 건물은 성전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그는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이 직접 연차 대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크지 않은 것에 종종 우려를 표하곤 했었다. 이에 선지자는 태버내클 좌석 수의 세 배의 좌석 수를 갖춘 새로운 회당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템플스퀘어 북편 구획에 지어져 2000년 10월에 헌납된 컨퍼런스 센터는 공학 기술의 경이였으며, 선지자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힝클리 회장의 지도하에 교회는 새로운 기술 또한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교회 회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경전과 조셉 스미스의 간증, 그리고 연차 대회 말씀을 찾을 수 있는 웹사이트 개설을 승인했다. 2000년이 끝날 무렵에는 www.lds.org에 각 경전과 30년간 발행된 교회 잡지,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살아 계신 그리스도: 사도들의 간증”이 들어가 있었다.
힝클리 회장은 인터넷이 선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로서 훌륭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 만큼 그 안에 악도 존재함을 알아차렸다. 외설물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외설물을 멀리하십시오. 더러운 질병을 피하듯 하십시오. 그만큼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신체적, 성적 학대를 규탄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해자들이 정의로운 심판을 받도록 힘쓸 것을 촉구했다.
선지자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려하여 선교사들은 침례에 앞서 개심에 역점을 두고, 선교부 및 스테이크 지도자들은 새로운 협의 평의회에 함께 모여서 새로운 회원에게 성역을 행할 더 나은 방법을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힝클리 회장은 성찬식 참석자 수가 늘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전 세계 성도들이 새로운 회원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었다.
새천년을 시작하며, 그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희망을 두었다. 점점 더 많은 청년들이 선교 사업을 나가고 주님의 집에서 결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지자는 그들이 과거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회 회장으로서 그는 젊은 성도들이 필요한 교육과 직업 훈련을 받도록 도울 방법을 간절히 찾았다. 몇 달 전, 교회 교육 위원회 모임에서 선지자는 2년제 대학인 릭스 대학이 4년제 대학교인 BYU-아이다호가 되어야 한다는 영의 속삭임을 들었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젊은 후기 성도들이 교회 대학에 다닐 기회를 줄 수 있을 터였다.
다음 날, 힝클리 회장은 이러한 생각을 사도들에게 전했으며 그들은 이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그런 다음 힝클리 회장은 릭스 대학 총장인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와 의견을 나눴고 두 사람은 새로운 대학교는 등록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해 교육과 온라인 강좌 활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지자는 지체 없이 이러한 변화를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BYU-아이다호는 훌륭한 교육 기관이 될 것입니다.”
최근에 선지자는 개발도상국에 있는 젊은이들, 특히 귀환 선교사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들은 빈곤하고 교육의 기회가 부족하며 취업 전망이 밝지 않은 현실을 겪으며 용기를 잃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감리 감독단은 힝클리 회장의 독려로 전 세계 성도들에게 직업 학교나 대학교 등록금 용도의 소액 대출을 제공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힝클리 회장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영구 교육 기금’으로 짓기로 했다. 1800년대에 수천 명의 유럽 성도들이 유타로 모이는 데 힘이 되었던 ‘영구 이주 기금’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는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영감받은 것이며 수많은 청년들의 삶을 축복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시야가 넓어지고 포부가 커질 것이다.”
11월에 힝클리 회장은 교회의 청년들을 위해 방송되는 특별 영적 모임을 열며, 그들이 더 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여섯 가지 덕목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권유했다. 그 덕목들은 다음과 같았다.
한 달여 후에 연말이 되자, 선지자는 자신의 삶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회고했다. 몸은 쇠약했지만, 그의 영은 평화와 만족감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2000년 12월 31일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깊은 감사이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고대하고 있다.”
두 달이 지난 2001년 2월 26일, 데리어스 그레이와 마리 테일러는 인파로 가득 찬 솔트레이크시티 가족 역사 도서관의 강당에 앉아 있었다. 강당 앞쪽에서는 헨리 비 아이어링 사도가 100명이 넘는 기자와 특별 방문객에게 프리드먼 은행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11년간의 노력 끝에, 데리어스와 마리, 그리고 550명이 넘는 유타주 교도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은 프리드먼 은행 기록에 적혀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총 484,083명의 정보를 초출하는 일을 완료했다. 최근에 교회는 이 프로젝트에 기술 및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초출된 정보는 CD-ROM과 교회의 모든 가족 역사 센터에서 검색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어링 장로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프리드먼 은행 기록은 계보 관련 문서로서 현존하는 가장 큰 저장소와 같습니다. 교회는 또한 빠른 시일 내에 교회의 계보 웹사이트인 FamilySearch.org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무료로 제공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발표가 있기 며칠 전에 데리어스는 데이터베이스 공개를 계획하기 위해 가족 역사부 지도자와 모임을 가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일을 하게 되는구나. 이제 정말 이루어질 거야.’
이 프로젝트의 운명은 항상 불확실했었다. 초반에는 성전 사업을 위해 이름을 초출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에 동기를 부여했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자 교회는 친척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성전에 제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고인의 가족들을 존중하기 위한 중요하고 필요한 조치였지만, 그러자 프로젝트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데리어스와 마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그들의 조상을 찾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검색 도구 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
1999년 10월에 교도소 수감자들은 이름을 초출하는 작업을 마친 후 자신들이 전사한 내용을 신중히 검증했고, 교도소가 3주간 봉쇄되었음에도 2000년 7월 중반에 작업을 완료했다.
프로젝트 조율을 도운 한 수감자는 작업이 완료되자 감정이 벅차올랐다. 그는 이 작업이 그토록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노예가 된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강제로 가족과 헤어지는 가슴 아픈 기록을 읽었고 또 다른 기록에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초출한 한 기록에서는 이름도 없이 노예가 된 아기가 농기구와 맞바꿔지기도 했다.
여러 수감자들이 인생을 바꿔놓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코디네이터가 울고 있는 자원봉사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수감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당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코디네이터는 자원봉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그가 백인 우월주의 단체의 머리글자로 문신을 한 것을 알아차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데이터를 초출하고 나자 데리어스와 마리는 가족 역사 조사자들이 이 데이터를 널리 사용할 수 있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그렇게 할 자원이 없었다. 한 유명 계보 웹사이트가 해당 데이터를 수만 달러에 사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데리어스와 마리는 수감자들의 노력으로 수익을 얻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들은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데이터를 교회에 기부했다.
워싱턴 디시와 그 외 미국 내 11개 도시에 중계된 CD-ROM 공개 행사에서 데리어스와 마리 모두 해당 프로젝트에 대해 언급했는데, 데리어스는 이 기록들에 읽기 고통스럽고 불편한 이야기가 많다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할 때가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종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함께 역사를 나눠야 합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중심은 가족이라고 믿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기록은 얼마나 가족이 중요했는지를 말해줍니다. 노예제라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했고,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습니다.”
마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프리드먼 은행 기록을 찾았을 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노예의 사슬을 끊고 가족의 결속을 다지는 모습을 제 마음속에 그려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이 기록이 계속해서 가족을 한데 모을 수 있기를 바랐다.
펠리신도 콘트레라스가 칠레 산티아고에서 감독으로 부름받자, 그의 아내인 베로니카는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뒤 스테이크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교사라는 새로운 부름을 받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종교 교육원은 일반적으로 미국에 있는 대학 캠퍼스 근처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부터 교회 교육 기구 지도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종교 교육원을 스테이크에서 운영하도록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로 대학생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청년 성인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지역의 교회 교육 기구 관리자가 강좌를 감독했고 스테이크에서 교사를 제공했다.
칠레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12개 이상의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와 더불어 한동안 주중에 종교 교육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회원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학교를 운영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다. 또한 교회의 정책에 따르면, 성도들이 갈 수 있는 일반 학교가 충분히 생기면 교회 학교는 가능한 한 빨리 문을 닫게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1981년에 칠레의 마지막 교회 학교의 문을 닫고 오직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을 통해서만 성도들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종교 교육원에 참석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교회에서 활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전체 청년 성도의 5명 중 1명만이 종교 교육원에 등록돼 있었다. 베로니카가 부름을 받았을 당시에는 스테이크에서 3~4명만이 정기적으로 종교 교육원에 참석하는 상태였다.
베로니카는 청년들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데 종교 교육원 수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교회에서 만난 모든 청년과 그들 부모에게 종교 교육원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와드의 감독들을 만나서 청년들에게 종교 교육원 수업을 권유하도록 독려했다. 특히 그녀가 종교 교육원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나누자, 많은 감독이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 얼마 후, 종교 교육원에 참여하는 학생은 50명을 넘어섰다.
베로니카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바로 오는 이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대부분 수업 시작 전에 식사할 시간이 없었다. 베로니카는 허기로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그들이 도착해서 먹을 것을 준비했다. 보통은 케이크나 간단한 간식거리였지만, 어떨 때는 바비큐 등 더 든든한 요깃거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녀는 어떤 음식을 먹게 될지 학생들에게 비밀로 했는데, 학생들이 궁금해서라도 수업에 오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연초가 되면 베로니카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묻곤 했다. 학생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그녀는 표준 경전과 성전, 선교 사업 준비 그리고 영원한 결혼에 대한 수업을 가르쳤다.
베로니카는 종교 교육원 교재를 시작점으로 삼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하면서 학생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다룰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경전을 한 절 한 절 세세히 다루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학생들이 공부하는 인물들과 선지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청년들에게 질문을 독려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가 바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나 걱정에 대해서는 찾아보고 답을 알려줄게요. 아니면 우리가 같이 찾아볼 수도 있어요.”
종교 교육원 수업에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자, 학생들은 서로 돈독해졌다. 그들은 베로니카와, 또 서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거워했다.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면 베로니카에게 가서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항상 적절한 사람들과 함께 걱정거리를 풀어나가도록 학생들을 격려했다.
“감독님이나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세요. 가정에서 일어난 문제면 반드시 가정에서 해결해야 해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면 감독님과 이야기하세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베로니카는 학생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칠레는 경제난을 겪고 있었고, 많은 청년들은 어떻게 하면 학교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할 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베로니카의 교실 벽에는 “모든 발자취엔 신앙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녀는 신앙으로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한다면 좋은 결과가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지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얻게 될 거예요.”
2001년 5월, 세브 솔레스타는 미국에서 생활하며 직장을 다니기 위해 고향인 필리핀 일로일로 시티를 떠났다. 이는 그가 대학 때부터 꿈꿔온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친구와 친척들이 있었다. 그는 ‘나도 그런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 마리단은 고향을 떠나 지구 반대편으로 간다는 남편의 생각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꿈은 당신만의 꿈이지 내 꿈은 아니에요.” 부부는 세 명의 십 대 아들을 길러야 했고, 제약 회사를 운영해야 했으며, 교회의 부름들을 이행해야 했다. 마리단은 남편이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조언했다. “정말 신중히 생각해야 해요. 부부로서 우리는 한 집,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아야 해요.”
하지만 마리단은 세브의 꿈을 가로막고 싶지 않아서 결국 남편의 미국행을 허락했다. 한 사람은 필리핀에서 생활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해외에서 일하며 떨어져 사는 필리핀 부부들이 많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세브는 미국 서해안에 있는 도시인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삼촌 집에 들어가 지냈다. 그는 병원 근처 묘지에서 교대로 근무하는 직장을 얻었는데, 야간 근무 시간은 힘들고 업무도 쉽지 않았지만 보수가 넉넉했기에 즐겁게 일했다.
주말에는 현지 와드에 참석한 후에 삼촌과 함께 친척들을 방문했다. 그는 새 친구를 사귀고 친척들을 더 가까이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지만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고 아내와 아이들이 그리웠다. 세브와 마리단은 매일 통화하려 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필리핀으로 장거리 전화를 걸려면 한 시간에 10달러짜리 전화 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세브는 캘리포니아에서 5개월간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자가 곧 만료되기 때문에 미국에서 계속 일하려면 비자를 연장해야 했다. 한동안은 충분히 돈을 모은 뒤 마리단과 아들들을 미국으로 와서 살게 하는 것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리단은 미국에서 사는 데 관심이 없었고, 그는 가족 없이 미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미국 동부에서 3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서 뉴욕시와 워싱턴 디시 지역에 있는 건물을 들이받았다. 네 번째 비행기는 승객들이 납치범들에게 저항하고 난 뒤 들판으로 추락했다. 이 테러는 약 3천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고 분노와 공포를 퍼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는 가운데, 미국과 동맹국들은 이번 공격의 배후에 있는 무장 세력에 대항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세브는 텔레비전 뉴스로 이 비극을 접하며 자신이 있는 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아들들은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커가는 동안 인도해 주고 힘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세브는 아들들과 아내와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납치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안 되어 세브는 필리핀행 비행기를 탔다. 계획보다 일찍 돌아가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적인 성공이 아닌 가족에서 오는 것임을 이제 그는 깨달은 것이었다.
9·11 테러가 있은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힝클리 회장은 연차 대회에서 갈등이 자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며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불행히도 우리는 사나운 사람들이 잔인하고 비열한 일을 서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우리의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늘 아래 어떤 명분도 하나님의 사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역경이 그 흉한 머리를 들어 올릴 수도 있고, 세상이 전쟁과 전쟁의 소문으로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 대업은 전진할 것입니다.”
그는 뒤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앞으로 전진하는 가운데, 박해받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며, 이 교회의 회원이 아닐 수도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전하며, 모든 사람에게 인간애를 널리 베풀어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 달 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2002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됐다. 이는 힝클리 회장이 몇 년간 고대해 온 행사였다. 최근에 있었던 테러리스트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경기로 전례 없이 많은 외국인 방문객이 유타를 찾았고, 이 중에는 솔트레이크시의 종교적 유산과 문화에 대해 질문하고자 하는 수천 명의 기자들도 있었다. 힝클리 회장은 선교사들이 올림픽 방문객을 대상으로 한 전도는 없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교회의 지역사회 지원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기자와 방문객들이 성도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2001년 10월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믿음과 관행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새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올림픽 기간 동안, 교회는 기자들을 위해 조셉 스미스 기념관에 미디어 센터를 설치하기도 했다. 교회와 교회 가르침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컨퍼런스 센터에서 열리는 공연 Light of the World[세상의 빛]를 주중 4일간 관람할 수 있었다. 이 공연에서는 교회의 역사와 회복된 복음의 메시지를 다뤘다.
9·11 사태 이후 안전은 올림픽의 큰 관심사였다. 주최 측은 모든 올림픽 경기장을 보호하기 위해 광범위한 보안 조치를 취하면서도, 올림픽 주최 도시로서의 공동체 정신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교회는 올림픽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솔트레이크 올림픽 위원회에 자원을 제공하고 군중을 위한 주차장과 다양한 봉사를 제공했다. 개막식에서는 태버내클 합창단이 전 세계 30억 청중 앞에서 공연했으며, 통역 봉사를 하는 귀환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이 자원봉사로 힘을 보탰다.
올림픽을 마치고 나서 선지자는 이 경험을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교회는 이 올림픽으로 큰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직접적인 전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에서 온 친구와 팬들을 사귀었다. 우리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우리와 친숙해졌다.”
그는 올림픽을 즐기기 위해 솔트레이크시티를 방문한 많은 고위 인사와 국가 지도자, 그리고 기업 지도자를 떠올렸다. 그들은 솔트레이크시티가 “많은 나라의 거대한 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한 브리검 영의 예언이 생각나게 했다.
힝클리 회장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난 2주간 우리가 본 것들 가운데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