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4장: 이제 달라졌어요


제14장

이제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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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놓인 복잡한 의료 기기

1972년 2월,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방사선 치료로 인후암은 제거되었지만, 이미 약해진 목소리가 심하게 손상되어 이제 그가 하는 말은 속삭임에 불과했다. 또한 쇠약해진 심장은 계속해서 불안과 기력 쇠진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분명 건강을 잃어 가고 있다.”

제일회장단은 킴볼 장로의 허약한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그의 여행 일정을 줄였다. 그는 옥든 성전과 프로보 성전 헌납식에 참석했고, 예비 선교사들에게 부름을 주었으며, 새로 창설된 교회 역사부와 점점 늘어나는 역사부 직원들에게 조언을 했다. 그는 아직도 이런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이 점점 교회에 짐이 되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건강이 악화되자, 그와 카밀라는 해롤드 비 리 회장과 엔 엘돈 태너 회장을 만났다. 러셀 엠 넬슨 박사도 그들의 논의에 의학적 전문 지식을 보태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

킴볼 장로는 말했다. “저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제 목숨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현재 속도로 계속 상태가 나빠지면 앞으로 두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는 복잡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수술을 잘 알았던 넬슨 박사는 두 가지 수술이 따로따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먼저 결함이 있는 대동맥 판막을 제거하고 인공 대동맥 판막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회술을 통해 좌전하행 관상 동맥에 혈관을 이식해야 합니다.”

“그런 수술을 받으면 어떤 위험이 따릅니까?” 리 회장이 물었다.

넬슨 박사는 킴볼 장로가 고령이기에 뒤따를 위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말했다. “저희는 이 연령대의 환자에게 그 두 가지 수술을 모두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위험이 매우 높은 수술이라는 것뿐입니다.

“저는 늙었고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킴볼 장로가 지친 듯 말했다. “주님께서는 저를 즉시 고쳐 주실 수도 있고, 그분이 원하시는 만큼 오래도록 살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늙어 가고 있고 다른 이들이 제 일을 그저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그분께서 굳이 저를 원하시겠습니까?”

리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스펜서!”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형제님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형제님은 죽지 않아요. 자신을 돌보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형제님이 해야 할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킴볼 장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술을 받겠습니다.”


두 달 후, 유타주의 반대편에 있는 버지니아주 햄프턴에서 오즈먼드 형제들(앨런, 웨인, 메릴, 제이, 도니)이 경기장 무대에 올라서자, 수천 명의 소녀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맞이했다. 열네 살에서 스물두 살에 이르는 이 형제들은 높은 칼라와 반짝이는 모조 다이아몬드가 달린 밑단이 넓은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노래와 춤을 시작하자 팬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무대 밖에서는 올리브 오즈먼드가 소녀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모습을 두고 귀엽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남편 조지 오즈먼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그때만 해도 자녀들이 팝 음악의 스타가 되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 성도 대열에 오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부부의 첫 두 아들인 벌과 톰은 청각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는 올리브와 조지에게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부부는 그 뒤로 일곱 명의 자녀를 더 가졌다. 모두 청력이 온전했다.

앨런과 웨인, 메릴, 제이, 도니는 어렸을 때 화음을 넣어 노래하는 법을 배웠고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텔레비전 쇼에서 고정 출연자가 되었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들이 이전에 부르던 노래들을 더 현대적인 사운드로 바꾸고 싶어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록 음악의 빠른 리듬과 전기 기타를 좋아했다. 그러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록 음악이 너무 자극적이라고 생각하며 우려를 내비쳤다. 올리브와 조지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부부와 자녀들은 록 음악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올리브는 아들들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음악이 그러한 영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청중에게 다가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말하곤 했다. “너희는 특별한 사명이 있단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 재능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어.”

1970년, 오즈먼드 형제들은 메릴과 도니를 리드 보컬로 세워 “One Bad Apple[한 개의 썩은 사과]”이라는 곡을 녹음했다. 이 음반은 큰 인기를 얻었고 형제들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 후 올리브와 조지는 아들들이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다른 록 스타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할 때, 오즈먼드 가족은 지혜의 말씀에 순종했다. 오즈먼드 형제들은 광란의 파티에 가는 대신 가족과 함께 가정의 밤을 하고, 교회에 참석하고, 순회공연 중에 영적 모임을 했다.

형제들은 유명세를 얻은 뒤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을 만났다. 스미스 회장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의무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중에 스미스 회장의 보좌인 해롤드 비 리는 세상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보고 교회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 그들이 믿는 것을 옹호하도록 격려하며 이렇게 가르쳤다.

“항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때든지, 여러분을 해의 왕국에 가장 가까이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런 후 그는 산상 수훈에 나오는 구주의 다음 말씀을 인용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래지 않아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오즈먼드 가족과 연관시켰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리브는 거의 항상 자신의 종교와 그것이 가족의 건전한 생활 방식과 경쾌한 음악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했다. 형제들도 기자들과 대화할 때면 자신들의 신앙을 숨김없이 이야기했으며, 팬들은 종종 교회에 대한 질문을 담아 우편물을 보내왔다. 미국에서는 교회가 특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즈먼드 가족이 공연하는 도시에는 대개 와드와 지부가 있었다. 따라서 팬들은 더 쉽게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다른 후기 성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최근 『Church News』에는 오즈먼드 가족을 통해 교회를 알게 된 사람들의 편지가 발췌되어 실리기도 했다. 한 팬은 오즈먼드 가족의 행복하고 친밀한 모습을 보고 후기 성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이 당신들의 종교와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버지니아 콘서트에서는 오즈먼드 가족의 막내인 여덟 살 지미가 형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올리브는 열두 살 된 딸 마리와 함께 무대 뒤에 남아 현지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저는 집에서 멀리 떠나 있을 때도 지금 있는 곳을 집과 같은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올리브는 설명했다. 그녀는 가족이 순회공연을 함께하며 서로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오즈먼드 형제들은 야심 찬 새 음반을 공동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여태 해 온 어떤 일보다 더 심오하고 개인적인 작업이었다.

올리브는 말했다. “제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아들들을 따르는 어린 팬들은 그들에게서 뭔가를 찾고 있답니다.”


한 달이 지난 1972년 4월 12일 아침, 러셀 엠 넬슨 박사는 개심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수백 번 수술을 했지만 주님의 사도를 수술한 적은 없었다. 그는 킴볼 장로의 수술에 대해 기도하고 최선의 수술 방법을 고민했지만, 그도 다른 어떤 외과의도 과연 그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 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넬슨 박사는 전날 리 회장과 태너 회장에게 요청하여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가 실수 없이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축복했다. 그들은 그에게 그의 부족함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주님께서 이 수술을 하도록 그를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수술은 8시에 시작되었다. 수술실에서 마취과 의사가 킴볼 장로에게 진정제를 투여했고, 넬슨 박사의 전공의가 몇몇 간호사 및 다른 팀원들과 함께 수술을 보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옆에는 킴볼 장로의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고 온몸에 혈액을 뿜어 줄 인공 심폐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넬슨 박사의 지시에 따라 수술팀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상된 판막을 인공 판막(금속 케이지 안에 있는 작은 플라스틱 공)으로 교체했다. 그 장치는 그의 엄지손가락 둘레의 절반 정도 크기였다.

판막을 제자리에 맞춘 넬슨 박사는 봉합을 시작했다. 그는 한 땀 한 땀을 정확하게 꿰매 판막 밑에 달린 고리를 천천히 주변 조직에 연결했다.

그런 후 그는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류를 막는 장애물을 우회하여 혈액을 흐르게 하는 수술에 집중했다. 그는 킴볼 장로의 가슴 아래로 흐르는 동맥을 찾아서 아래쪽 끝을 절단하고 막힌 혈관 바로 아래 위치시켰다. 그런 뒤 다시 작고 꼬불꼬불한 실로 건강한 동맥을 단단하게 봉합했다.

넬슨 박사는 그 일을 하면서 수술이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수천 번의 복잡한 조작과 동작을 요하는 수술이었고, 각각이 수고로운 기술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수술 중에 단 하나의 실수나 오류도 발생하지 않았다. 수술이 시작된 지 4시간 이상이 지나 마침내 킴볼 장로에게서 심폐기를 분리할 때가 되자 의료진은 그의 심장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심장은 즉시 살아났다.

수술이 끝난 후 넬슨 박사는 리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성전에 모여 킴볼 장로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넬슨 박사는 리 회장에게 그가 받은 수술에 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막 완벽한 경기를 펼친 야구 투수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주님이 그의 솜씨를 키워 주신 덕분에 그는 신권 축복에서 약속받은 대로 수술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리 회장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킴볼 형제님의 수술이 잘되어 심폐기를 떼어 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같은 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마흔한 살의 엘베시오 마르틴스가 퇴근 후 차를 몰고 귀가하다 교통 체증으로 길에 멈춰 섰다. 앞에는 끝없이 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정체는 금방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엘베시오는 자신이 수년간 느꼈던 영적 갈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젊어서부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열한 살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오렌지를 따는 일을 했다. 나중에 그의 가족이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사한 후에는 배달원으로 일했다. 고용주들은 그를 신뢰하고 그의 근면함을 높이 샀다. 그러다 마침내 후다 투린호 지 아시스를 만나 결혼했고, 그녀는 그에게 야간 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다.

엘베시오는 수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고 대학에서 회계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런 후 그는 석유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직원이 200명이 넘는 부서의 장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와 후다, 그리고 두 자녀인 마르쿠스와 마리사는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교 행사에 초대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엘베시오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한 살면서도 충족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와 후다는 다양한 종교를 접해 보았고, 강신술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여러 기독교 종파를 탐구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들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렇게 차까지 막히자 엘베시오는 더욱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도로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어딘가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에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가족과 제가 겪고 있는 혼란을 정녕 당신께서는 보지 못하십니까? 저희가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하십니까? 왜 저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그가 간청을 마치자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엘베시오는 돌아와 차를 몰았고,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2주 후, 마르틴스 가족은 현관문 밑으로 들어온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한쪽에는 구주의 사진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모임 일정이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이튿날 그 카드를 가지고 회사에 갔다.

“부장님, 거기 가지 마세요.” 한 직원이 말했다. “거긴 북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요. 아는 사람이 없다면 저 같으면 안 갑니다.”

엘베시오는 직원의 말을 믿고 더는 교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두 명의 선교사 토머스 매킨타이어와 스티브 리처즈가 마르틴스 가족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들어선 순간 엘베시오는 평온한 느낌이 집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알아차렸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선생님의 가족에게 드릴 축복이 있습니다.”

“원합니다.” 엘베시오가 말했다. 하지만 먼저 그는 질문이 있었다.

엘베시오는 그들이 교회에 관해 말하는 몇 가지 일반적인 정보를 들어 본 뒤 한 가지 어려운 질문을 했다.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인 그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당신들 교회의 본부가 미국에 있다면 그 종교는 흑인을 어떻게 대합니까? 교회에서 흑인을 받아들이나요?”

매킨타이어 장로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선생님, 정말로 알고 싶으십니까?” 그가 물었다.

“네.” 엘베시오가 대답했다.

매킨타이어 장로는 흑인들도 침례를 받고 교회에 회원으로 참여할 수는 있지만 신권을 소유하거나 성전에 참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엘베시오와 후다는 그의 대답을 받아들이고 신권과 복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질문했다. 선교사들은 각 질문에 침착하고 빠짐없이 대답해 주었다.

선교사들이 떠날 무렵에는 4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그날 밤, 엘베시오와 후다는 선교사들이 가르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고 자신들의 질문에 충분한 답을 얻었다고 느꼈다.

얼마 후 마르틴스 가족은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했다. 예배식은 훌륭했고 회원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얼마 뒤 지부 회장이 마르틴스 가족의 집에 들러 그들의 가정 복음 교사가 될 두 사람을 소개했다.

마르틴스 가족은 계속해서 교회에 참석하고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신앙이 커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리우데자네이루 지방부의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영을 느끼고 교회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 후, 주일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열세 살 마르쿠스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달라졌어요. 엄마 아빠 얼굴에서 빛이 나요. 저는 그 이유를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덕분이에요.”

엘베시오는 길가에 차를 세웠고 그곳에서 가족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저녁 성찬식을 위해 다시 예배당을 찾은 마르틴스 가족은 지부 회장에게 자신들이 침례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무렵 어느 날, 오즈먼드 가족의 매니저인 에드 레플러가 오즈먼드 가족에게 영국에서 공연을 하면 어떨지를 물었다. 형제들의 노래 “Down by the Lazy River[천천히 흐르는 강가에서]”와 도니의 솔로 음반인 “Puppy Love[풋사랑]”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북미의 모든 사람이 오즈먼드 형제들을 아는 것 같았고, 이제는 유럽의 십 대들도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올리브가 말했다. “물론이죠.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바로, 여왕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녀는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에드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얼마 후, 에드는 오즈먼드 가족에게 엘리자베스 이세 여왕과 그녀의 남편 필립 공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다고 알렸다. 게다가 올리브의 바람도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녀와 조지는 휴식 시간에 왕실의 부부를 만나도록 초대를 받았다.

올리브는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 만남을 위해 정장과 흰 장갑을 구입했다. 또한 새 경전을 사서 대담하게도 그것을 여왕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오즈먼드 가족은 5월에 런던에 도착하여 며칠 동안 노래를 연습했다. 공연은 1972년 5월 22일 런던 웨스트엔드의 유명한 극장인 런던 팔라디움에서 열렸다. 이 공연은 영국과 미국의 가수, 배우, 코미디언들이 출연하는 텔레비전 자선 콘서트였다.

올리브와 조지는 쇼 전반부 동안 마리와 함께 객석에 앉아 있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쇼를 기획한 사람인 루 그레이드가 조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서두르세요!”

올리브와 조지는 일어서서 황급히 루를 따라갔다. 하지만 통로 끝에 다다르기 전에 올리브는 여왕에게 줄 선물을 좌석 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경전은 그대로 두고 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날 밤 여왕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표시하고 주석을 다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 터였다. 게다가 그녀는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달려가 경전을 집어 들었다.

루가 그녀와 조지를 여왕 앞으로 안내하자 올리브는 여왕 부부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선물을 전달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나왔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조지가 멈춰 서서 필립 공과 함께 사냥과 낚시에 관한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올리브는 가까이에 또 다른 왕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표준 경전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떠난 후에 여왕님께 제 작은 선물을 전해 주시겠어요?”

그는 눈을 반짝이며 올리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여왕을 불렀다. “엘리자베스! 오즈먼드 부인이 선물을 가져왔어요.”

여왕이 말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군요. 이리로 오세요.”

올리브는 당황했지만 그렇게 했다. “여왕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는 어디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알지 못한 채 설명을 이어갔다. “여왕님께 무엇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 저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가져왔답니다.”

“부인은 이것 없이 괜찮으세요?” 여왕이 물었다.

올리브가 대답했다. “네, 저는 똑같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왕은 경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오즈먼드 부인. 소중히 간직할게요. 벽난로 선반에 놓아두겠습니다.”

올리브는 긴장을 풀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 여왕과 짧게 이야기한 뒤 아들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오즈먼드 가족이 귀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에드 레플러가 올리브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떠셨어요?”

“일생일대의 감동이었어요. 여왕께 몰몬경도 한 권 드렸고요.” 올리브가 말했다.

“뭐라고요?” 에드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결례를 범하시다니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여왕은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서 몰몬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에드의 말을 듣고 올리브는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여왕에게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회복된 복음을 들어 볼 권리가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녀가 정말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가족들이 비행기에 탑승하고 모두가 자리를 잡자 올리브는 앉아서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교리와 성약 1편 23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복음의 충만함이 연약한 자들과 단순한 자들에 의하여 세상 끝까지 그리고 왕들과 통치자들 앞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니라.”

올리브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의심은 사라졌고, 그녀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1972년 6월 15일 저녁, 열여덟 살의 마에타 홀리데이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한 체육관에서 5백여 명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틈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그녀와 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었다. 그들은 모자와 가운을 맞춰 입었는데, 여학생은 빨간색이었고 남학생은 검은색이었다.

마에타에게 졸업은 그녀가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곧 그녀는 위탁 가정을 떠나 스스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배치 프로그램의 많은 졸업생들처럼 그녀도 브리검 영 대학교에 다닐 계획이었다. 당시 BYU에는 5백여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있었는데 대부분 마에타와 같은 나바호족이었다. BYU에서는 이 학생들에게 후한 장학금을 주었으므로 마에타의 위탁부모인 베나와 스펜서 블랙은 마에타가 장학금을 신청하도록 도와주었다.

마에타는 블랙 부부가 자신을 계속 지지해 줄 것임을 알았다. 4년 전에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왔을 때, 그들은 곧바로 그녀를 딸처럼 대했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안정된 가정을 제공해 주었고,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임을 느끼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그녀는 그들과 함께 살기 오래전부터 교회에 들어왔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중심을 두면 가족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한 모든 학생이 위탁 가정 사람들과 그런 훌륭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학생들은 위탁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그 가정의 부모 또는 형제자매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원주민 문화를 접하도록 도와주려는 위탁 가정의 노력에 저항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 중에는 자신들의 전통과 배치 프로그램의 경험을 모두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찾아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보호 지역으로 돌아와 지역 사회를 강화했으며, 그곳에서 후기 성도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마에타의 경우, 그녀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베나는 그녀에게 나바호 유산을 소중히 여기도록 격려했다. 한번은 베나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단다. 하나님은 네가 특별하다는 걸 알고 계셔. 몰몬경은 너희 민족에 관한 것이거든.” 당시의 많은 성도들처럼 베나는 몰몬경에 나오는 약속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마에타를 성약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리하이와 새라이아의 후손으로 여겼다.

“마에타, 네게 바라는 것이 있어.” 베나가 말했다. “나는 네가 언젠가 성전에서 결혼하기를 바라. 그리고 네가 계속 교회에 나갔으면 좋겠고 네가 특별하다는 것과 우리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네게 꼭 알려 주고 싶어.”

마에타는 졸업장을 받았지만 베나가 가르쳐 준 것들을 아직 모두 완전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또한 위탁 가정 사람들을 존경했지만 자신이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거나 그런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가 자식을 건사하지 못하고 허덕이던 모습을 본 그녀는 결혼이나 가정을 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졸업 후 마에타는 자신이 지원한 BYU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로보로 가는 버스에 오르며 그녀는 자신의 미래와 신앙에 대해 생각했다. 교회에 다니고 세미나리에 참석하는 것은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자신이 회복된 복음을 미래의 일부로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BYU에 가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 난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할까, 되지 말아야 할까?’

그녀는 베나와 스펜서에게서 배운 교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블랙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그 가족의 일원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마에타는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분은 지금까지 늘 내 곁에 계셨어.’


1972년 8월 26일, 멕시코시티의 아디토리오 나시오날 국립극장 야외에 노란색 폭스바겐을 주차하던 이사벨 산타나와 그녀의 남편 후안 마추카는 공기에 감도는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멕시코와 중미 지역에서 온 1만 6천여 명의 성도들이 지역 연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형 대회장에 모여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이 대회는 총관리 역원들의 말씀을 직접 듣는 첫 번째 기회가 될 것이었다.

교회는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의 지시에 따라 지역 연차 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교회 회원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리는 연차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개최하는 대회는 그들이 함께 모여 현지 및 총관리 역원들의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 지역 연차 대회는 1971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개최되었다. 8만 명이 넘는 교회 회원이 있는 멕시코는 미국을 제외하고 성도들의 숫자가 가장 많은 곳이므로 그런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사벨과 후안은 대회장으로 가면서 깜짝 놀랐다. 멕시코 전역은 물론 멀리 과테말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의 교회 회원들까지도 그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성도들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4,800여 킬로미터를 여행한 터였다. 멕시코 북서부에서 온 한 여성은 충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5개월 동안 이웃들의 빨래를 했다. 타코와 타말레를 팔고 세차를 하고 정원 일을 해서 경비를 번 성도들도 있었고, 소유물을 팔거나 돈을 빌려서 온 성도들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음식을 살 돈이 없어서 금식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베네메리토는 멀리서 온 많은 성도들에게 숙소를 제공했다.

마추카 부부가 극장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근처에 차 한 대가 서더니 스펜서 더블유 킴볼과 그의 아내 카밀라가 내렸다. 4개월 전 심장 수술을 받은 킴볼 장로는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맡은 많은 책임을 다시 수행할 만큼 충분히 회복된 상태였다. 사실 그는 그날 오후 늦게 성도들에게 말씀을 할 예정이었다.

대회를 계획하는 과정을 도운 이는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었지만 그는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교회와 회원들을 위해 수십 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긴긴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사도로서 그는 복음 교리와 역사적 주제에 관해 폭넓은 저술 활동을 이어갔고, 계보 및 성전 사업을 진척시켰으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필리핀과 한국을 헌납했다. 그는 교회의 회장으로서 페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첫 스테이크를 승인했고, 전 세계에서 세미나리와 종교 교육원의 수를 극적으로 증가시켰으며, 교회의 홍보 활동을 재활성화했고, 교회의 부서들을 전문화했다.

그는 마지막 연차 대회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일 중 복음을 전파하고 지상에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 있든 하늘 아버지의 모든 자녀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 있는 선지자들이 계시한 대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가입하도록 권유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해롤드 비 리가 교회 회장으로 성별되었으며 킴볼 장로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새로운 회장이 되었다.

이사벨과 후안은 국립극장 안으로 들어가 수천 명의 성도들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극장에는 무대 둘레로 4단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단상에는 멕시코 북부의 교회 회원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연단이 있었고, 총관리 역원과 다른 연사들을 위한 등받이가 높은 의자들이 놓인 공간도 있었다.

대회는 멕시코 북부의 후기 성도 정착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최근 제일회장단의 보좌가 된 매리온 지 롬니 회장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스페인어로 멕시코와 중미의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멕시코 정부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런 다음 엔 엘돈 태너 회장이 말씀을 전하며, 멕시코와 미대륙의 다른 스페인어 사용 국가들에서 교회가 발휘하는 힘을 칭송했다. 그는 통역을 통해, “전 세계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지도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발전하는 이 지도자들을 돕기 위해, 최근에는 교회의 일반 지침서인 『General Handbook of Instructions』이 연계되어 스페인어를 포함한 12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은 동일한 방식에 따라 교회를 관리할 수 있었다.

태너 회장은 이렇게 간증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교회와 왕국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에서 받는 축복에 대해 간증합니다.”

이사벨은 연사들의 말씀을 들으며 멕시코의 후기 성도가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베네메리토에서 받은 교육을 통해 그녀는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의 가치, 회복된 복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의 가치를 배웠다. 이 학교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잠재력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는 소심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의 교사들을 통해 무수한 방법으로 축복을 받았다. 날마다 공부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렀고, 진리에 대해 열렬한 간증과 자신감을 갖고 생활했다.

이제 수많은 성도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곳은 내 뿌리야. 나는 여기에 속해 있어.’

  1. Spencer W. Kimball, Journal, Nov. 8–9, 22, and 29, 1971; Dec. 31, 1971; Jan. 20, 1972; July 2, 1972; Russell M. Nelson to Spencer W. Kimball, Sept. 21, 1972, in Spencer W. Kimball, Journal, Apr. 11, 1972. 주제: Spencer W. Kimball[스펜서 더블유 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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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Osmond, Journal, May 1972; Osmond and Osmond, Oral History Interview, 22; Osmond and Romanowski, Life Is Just What You Make It,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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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Allen, “Rise and Decline of the LDS Indian Student Placement Program,” 96–97; “Indian Unity Caravan Leaves West Jordan for Arizona,” Salt Lake Tribune, Aug. 19, 1972, B12; Garrett, Making Lamanites, 109–10, 114, 118–23, 130, 134–35, 156–58, 192–203, 238–41;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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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20–21;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16; Jay M. Todd, “The Remarkable Mexico City Area Conference,” Ensign, Nov. 1972, 89–90; J M. Heslop, “Spirituality Themes Conference,” Church News, Sept. 2, 1972, 3; Holzapfel and Lambert, “Photographs of the First Mexico and Central America Area Conference,” 69; Kimball and Kimball, Spencer W. Kimball, 398–403.

  39. Monson, Journal, Apr. 11, 1972; Lee, Diary, July 2, 1972; Tanner, Journal, July 2,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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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President Harold B. Lee Ordained LDS Leader,” Deseret News, July 7, 1972, A1.

  43. Romney, Journal, Aug. 26, 1972; J M. Heslop, “Spirituality Themes Conference,” Church News, Sept. 2, 1972, 3; First Mexico and Central America Area General Conference, 4;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16–17; Holzapfel and Lambert, “Photographs of the First Mexico and Central America Area Conference,”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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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1–4, 17–18;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1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