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훌륭하게 싸우고
모세세 무티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에 니우에의 예배당 건축 현장에 모였다. 유타주 옥든 출신의 건축 감독관인 아치 카틀 장로는 새 집회소와 선교 본부를 건축하기 위해 1957년 3월에 가족과 두 명의 통가 선교사와 함께 섬에 들어왔었다. 이제, 드문드문 서 있는 야자나무 아래 니우에 최초의 상설 후기 성도 예배당이 마침내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모세세는 섬에서 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는 다른 통가인 선교사와 함께 예배당 외벽에 벽돌을 쌓고 있었다. 섬에는 남자들이 해야 할 힘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현지 남자들에게 도움을 받기가 어려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있는 헌신적인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자주 건설 현장에 나와 모래를 운반하거나 다른 일들을 거들었다.
지방부 회장인 척 우드워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예배당 건축 공사가 더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모세세는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니우에에는 자원봉사 노동자가 부족했다. 따라서 척은 노동 선교사로 부름받은 것이 아닌데도 건축 공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고 지방부 성도들의 영적 복지에는 그만큼 시간을 덜 쏟을 수밖에 없었다.
모세세는 항상 척에게 인내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한번은 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상기해 주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자녀들이죠. 저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결점도 찾지 못했어요. 그들의 장점을 찾고 장점에 집중합시다.”
게다가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예배당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산호를 부수고, 터를 파고, 콘크리트를 붓고, 회반죽을 준비하는 등의 모든 일을 손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물집이 잡히고 베이는 등의 부상을 겪는 일이 허다했다. 때로 사람들은 그저 봉사하는 마음을 기를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실례를 들기 위해, 모세세는 척에게 자신이 노동 선교사로서 리아호나 칼리지를 건설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우리 다섯 명이서 리아호나 건축을 시작했는데 1년 남짓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우린 미래 세대를 그리며 건물을 올렸지요.”
모세세도 척에게 인내심을 보였다. 그와 살라비아는 선교사 척과 이야기하고 조언을 나누며 많은 밤을 보냈고, 척은 그들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척은 부부를 “파파(아빠)”와 “마마(엄마)”로 부르기 시작했다. 척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탓에 척의 어머니는 홀로 여섯 자녀를 키워야 했다. 척은 많은 분노와 고통을 안고 있었으므로 지금 자신의 삶에 모세세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척은 이렇게 기록했다. “모세세 장로님은 신앙과 봉사의 의미를 제대로 아신다. 장로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수년이 걸려서야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따금 척은 다른 곳에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느 날, 그는 리아호나 칼리지에서 권투팀을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고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선교 사업 전에 프로 권투 선수로 생활했었다. 만약 선교부 회장에게 자신을 통가로 보내 리아호나 칼리지에서 교사 겸 권투 코치로 선교 사업을 마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떨까? 어쨌든 그 학교에서는 이따금 선교사들이 근무를 맡아 하지 않는가.
모세세는 반대했다. 1년이 넘도록 척과 가까이 일하며 그를 가르치면서, 모세세는 하나님이 이 청년을 니우에로 보내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척은 더 많이 노력해 자신에게 주어진 양보다 더 많은 분량을 수행했다. 모세세와 살라비아가 선교사들과 다른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 끼니를 거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부부가 먹을 양을 충분히 남기기 위해 티 내지 않고 최대한 음식을 적게 먹기도 했다.
1957년 6월, 모세세와 살라비아는 척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들이 얼마나 성전에 가고 싶은지를 언급했다. 그들은 뉴질랜드에 성전이 거의 완공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까지 가는 일은 여전히 재정적으로 부담이 컸다.
부부의 말에 감동한 척은 리아호나 칼리지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자 하는 소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만약 자신이 선교 사업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가서 권투 챔피언 상금이 걸린 권투 시합에 나간다면 어떨까? 무티 가족이 새 성전에 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큰 시합 말이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위해 베풀어 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다.
나흘 후, 그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매니저 조니 피터슨에게 니우에로 권투 장비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 무렵 극동 남부 선교부는 새로운 선교사가 절실했다. 홍콩에서 봉사하던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이 건강상 이유로 막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래서 선교부에 예상치 못한 공석이 생겼던 것이다. 남아 있는 자매들에게 곧장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그랜트 히튼 회장은 노라 쿠트를 현지 전임 선교사로 불렀다.
지난 2년 동안 노라는 선교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히튼 가족은 처음 홍콩에 도착해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연락하기 위해 노라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선교 본부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노라는 히튼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 주는가 하면, 선교사들에게 광둥어와 표준 중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리고 루아나 히튼과 함께 도시의 어린이들을 위해 주일 학교 수업에서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노라는 선교사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또 다른 현지 성도인 리 나이 켄이라는 장로는 홍콩에서 단기 선교 사업을 했으며, 히튼 회장은 열정적으로 더 많은 현지 성도들을 선교사로 불렀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중국어와 현지 문화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하는 일이 많았다. 도시의 많은 사람이 외국인을 의심스러워했고 장로들을 미국 정부의 요원들과 혼동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노라와 중국 성도들은 이미 현지 문화를 알았고 언어 장벽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가르친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졌다. 중국 본토에서 온 난민이었던 노라는 주택과 일자리가 부족한 혼잡한 도시에서 삶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다.
홍콩에 있는 많은 교회 회원과 예비 성도들은 난민이었으므로, 히튼 회장은 그들에게 영적 복지를 제공할 방법을 모색했다. 1952년에 교회는 개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 회원이 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일곱 가지 공과, 즉 토론을 도입했다. 히튼 회장과 그의 선교사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고 있는 많은 홍콩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현지의 필요에 맞는 17개 복음 공과를 개발했다. 이 공과들에서는 신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와 의식, 회복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종자들은 침례를 받은 뒤에 새로운 회원을 위한 20개의 추가 공과를 들었다.
선교사로 성별되기 전날 밤, 노라는 생생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주변이 온통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운 분주한 거리에 서 있었는데, 아름다운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고 즉시 평안과 고요를 느꼈다. 건물 안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노라는 그들 중 몇 사람이 지금 홍콩에서 봉사하는 선교사임을 알아차렸다.
다음 날 노라는 선교 본부에 자신의 도착을 알리며 장로들에게 그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성전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는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척 우드워스의 권투 장비는 1957년 10월에 니우에에 도착했고, 무티 가족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그의 훈련을 응원했다. 살라비아는 그에게 감자 자루로 샌드백을 만들어 주었고, 필요할 때는 모세세가 샌드백 수선을 도왔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섬에서 수행할 책무가 많았기에 척도 무티 가족도 훈련에 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척은 달리기를 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밖이 어두웠기 때문에 무티 가족의 열여섯 살 된 아들 파울라가 오토바이를 타고 척을 따라가며 전조등으로 길을 비추곤 했다.
다행히 척은 권투하기 좋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산호 부수는 일을 한 덕에 그는 몸이 강건했다. 또한 그는 예배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섬에서 몇 차례 권투 시합을 열었다. 하지만 가끔 하는 훈련만으로 시합에 나갈 수 있을까?
선교 사업 전에 척은 미국 서부와 캐나다에서 열리는 프로 권투 시합에 나가기 위해 많은 시간을 체육관에서 훈련하면서 보냈다. 시합 때 만난 상대는 대부분 삼류 선수들이었지만, 에저드 찰스나 렉스 레인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룬 경험도 있었다.
후기 성도이자 유명한 헤비급 선수인 렉스와의 시합은 척의 선수 생활에서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렉스는 권투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척보다 11킬로그램 가량 몸무게가 더 나갔다. 게다가 그가 가차 없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척은 잔인한 10라운드 내내 로프에 내몰린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척은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심판은 렉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현지 신문은 “우드워스는 상대가 안 됐다.”라고 보도했다.
12월에 뉴질랜드의 권투 협회는 “통가의 어뢰”라는 별명을 가진 키티오네 라베를 척의 상대로 낙점했고, 그 소식은 니우에에도 전해졌다. 렉스 레인과 마찬가지로 키티오네도 덩치와 힘을 이용해 상대를 응징하는 황소 같은 선수였다. 그는 세계 최고의 헤비급 권투 선수 중 한 명과 싸웠을 때도 2라운드에서 녹아웃 펀치로 승리를 거둔 전력이 있었다.
새 예배당에 지붕을 얹은 직후인 1958년 1월 초, 척은 다른 장로 몇 명과 함께 선교사 부름에서 해임되었다. 살라비아는 모세세 가족의 사랑과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하는 작별 편지를 척에게 써 주었다. “아들아, 최선을 다하거라. 약해지지 말 거라. 그러면 승리할 거야. 너의 힘에 우리의 기도가 더해진다면, 그 무엇도 너를 막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주실 것을 믿는다.”
시합은 1958년 2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모세세와 살라비아는 자녀들과 함께 하루 종일 금식하며 척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수십 명의 교회 회원 및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에 모여 라디오로 경기를 청취했다. 방송이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세세가 방송을 니우에어로 통역했다.
1만 5천 명에 달하는 기록적인 인파가 권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뉴질랜드 오클랜드 칼로 공원에 모였다. 권투장에 들어가는 척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키티오네는 척보다 9킬로그램이나 몸무게가 더 나갔다. 척은 시합 여러 날 전 키티오네가 자신을 가리켜, 자기를 상대로 단 한 라운드도 버티지 못할 “참새”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키티오네는 벨이 울리기 무섭게 척에게 달려들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신음하듯 말했다. “참패하겠군.”
척은 돌격을 피해 키티오네에게 잽을 날렸지만 키티오네는 꿈쩍도 안 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잽싸게 연타로 반격하며 척의 머리와 몸통을 강타하고 녹아웃을 노렸다. 그러더니 자세를 취해 강력한 레프트 훅을 가했다. 척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키티오네의 글러브가 그의 턱에 퍽 하고 날아들었다. 척은 타격을 입고 로프로 내쳐졌다. 그 순간, 주변이 온통 희미해지는 듯했다.
눈앞이 빙빙 돌아가는 상황에서 척은 반사적으로 키티오네를 와락 붙들고 버텼다. 심판은 둘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벨이 울리고 1라운드가 끝이 났다.
척은 구석에서 기다리는 동안 머리가 맑아졌다. 2라운드가 시작되자, 그는 새로운 기세로 권투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마지막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된 키티오네는 주먹을 휘두르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척의 발놀림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는 구석을 벗어나 상대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해 잽을 날렸다. 키티오네는 척의 펀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척은 자신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득점이 쌓이며 관중들이 자신을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는 12라운드 만에 끝났고, 심판은 척의 승리를 선언했다. 키티오네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즐거운 시합이었습니다. 우드워스는 훌륭하고 빠른 선수이고,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이튿날 모세세는 척에게 전보를 보냈다. “훌륭하게 싸우고 승리를 거둬 주어 정말 고맙네.” 척은 그에 대한 답으로 모세세 부부가 남은 선교 사업 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뉴질랜드 성전에도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송금했다.
몇 달 뒤 지구 반대편에서는 독일 민주 공화국 경찰이 스물일곱 살의 헨리 부르크하트를 체포했다. 부르크하트는 베를린 서부 지역에서 교회의 독일 북 선교부 회장인 버티스 로빈스를 만난 후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동부 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관할 지역인 서베를린으로 여행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헨리처럼 그곳을 자주 오가면 의심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갈라진 지 10년이 돼 갔다. 두 나라는 미국, 소련, 그리고 그 각각의 동맹국 사이에서 벌어진 냉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계속했다. 동독 영토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동독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여러 국가 중 하나로 부상했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이 강대국들은 세계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며 더 강력한 무기와 더 정교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앞을 다퉜다. 적대국들 간에는 신뢰가 남아 있지 않았고, 누구라도 적에게 비밀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헨리는 아무 저항 없이 경찰이 끌고 가는 대로 동베를린 외곽의 쾨니히스 부스터하우젠이라는 마을의 한 역에 당도했다.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한동안 그와 그의 가족을 감시한 터였다. 선교부 회장단 제1보좌로 부름받은 그는 로빈스 회장 및 다른 미국 교회 지도자들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런 연락을 계속하며 서베를린을 자주 방문한다는 이유로 그는 국가의 적으로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1955년 11월에 스위스 성전에서 인봉된 헨리와 그의 아내 잉아는 동독으로 돌아와 종교인에 대한 정부의 많은 제한 사항을 받아들였다. 동독에는 외국인 선교사나 지도자가 없었고, 헨리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역원들과 직접 연락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와 성도들은 성찬식 말씀을 전할 때마다 먼저 말씀을 정부 관리에게 제출하여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동독에서 가장 높은 위치의 교회 지도자가 되면서 헨리는 그에 따르는 임무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그는 잠깐 집에 들를 때만 잉아와 갓 태어난 딸 하이커를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선교부 곳곳을 다니며 전국 45개 지부에 흩어진 5천 명의 성도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교회 회원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누군가에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권유하거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헨리도 영향을 받았다. 2년 전 경찰이 현지 선교사들이 교회의 다른 회원을 방문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때, 그는 선교사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경찰의 “더 나은 협조”를 요청하는 공식 항의서를 정부에 제출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정부 관리들을 공손히 대하며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보통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날 헨리는 쾨니히스 부스터하우젠의 경찰서에서 밤새 심문을 받았다. 그의 차에는 로빈스 회장이 준 몇 가지 선물과 교회의 동독 사무실에서 사용할 자료들이 실려 있었다. 경찰은 이 물건들을 보고, 헨리가 동독 국민은 외국 단체로부터 기증품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을 위반했다며 그를 비난했다. 그가 “경제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헨리는 그런 금지령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매달 서베를린을 오간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심문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로빈스 씨를 만나는 유일한 목적은 종교적인 활동이나 그런 활동과 관련된 재정적인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선교부 회장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도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헨리는 말했다. “매달 모임을 할 때 이런 물건이나 약을 선물받았습니다. 드레스덴에 있는 우리 사무실에서도 우편으로 오는 소포를 받습니다. 해외에서 오는 소포도 받고 있고요.”
경찰은 선물을 압수하고, 헨리의 서류 가방을 뒤지고, 그가 가져온 선교부 보고서 일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헨리에게 로빈스 회장을 만난 것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읽어 본 뒤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서명하라고 명령했다. 이미 새벽 4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그들은 그날 수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를 구금에서 풀어 주었다.
헨리의 체포는 훨씬 더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경찰은 교회의 독일어 잡지인 『디아 스턴』을 소지한 동독 선교사 한 명을 붙잡아서 9개월간 감금한 일도 있었다. 헨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 장로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돕고자 애썼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 잡지를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고, 적어도 그 일에 만큼은 정부 관리들도 완강했다.
경찰과 그런 갈등이 이어지면서 헨리는 다른 사람이 돼 갔다. 이제 그는 당국을 상대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나 성도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날마다 복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 발은 이미 감옥에 들인 채 서 있는 듯한 느낌에 익숙해져 있었다.
1958년 4월 12일 아침, 모세세와 살라비아 무티는 처음으로 뉴질랜드 성전을 보았다. 오클랜드에서 남쪽으로 12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뉴질랜드 성전은 드넓은 강이 굽이치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풀이 무성한 언덕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전은 스위스 성전처럼 단순하고 현대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철근 콘크리트 벽은 흰색으로 마감됐고, 약 45미터 길이의 첨탑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무티 부부는 성전 일반 공개에 참여하기 위해 때맞춰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뉴질랜드, 호주, 그리고 태평양의 섬들에서 온 수천 명 인파가 성전을 보고자 열망했기에, 모세세와 살라비아는 1시간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성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현지 성도들의 크나큰 희생에 감사했다. 니우에의 예배당과 오세아니아 도처에서 늘고 있는 교회의 건물들처럼, 이 성전도 주로 노동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이 노동 선교사들은 성전뿐 아니라 인접한 곳에서 교회가 운영하는 새로운 고등학교인 ‘뉴질랜드 처치 칼리지’의 캠퍼스를 짓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해 왔었다.
성전을 둘러본 다음 날, 모세세는 초청을 받아 그 지역에 있는 통가 성도들의 성찬식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연단으로 가면서 그는 20년 전에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자신에게 한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당시 그는 모세세가 자비를 전혀 들이지 않고 성전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모세세는 척 우드워스에게 그 약속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척은 무티 부부의 성전 여비를 지불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그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모세세는 회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후기의 선지자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간증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제 아내와 제가 그분이 하신 말씀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척이 무티 가족을 위해 치른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희가 오늘 저녁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한 형제가 베풀어 준 절대 시들지 않을 사랑 덕분입니다.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그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일주일 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이 뉴질랜드에 와서 성전을 헌납했다. 이 건물은 거의 40년 전 그가 사도로서 처음으로 전 세계를 순방하는 임무를 받고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전한 예언이 성취된 결과였다. 당시 그는 마오리족 성도들에게 언젠가 그들이 성전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말씀을 통역했던 스투아트 메하가 이제 엔다우먼트를 마오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막 마친 터였다.
맥케이 회장은 성전 헌납 기도를 드리면서 성전과 교회 건물들을 짓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노동 선교사와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기도했다. “공헌하신 모든 분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몇 갑절로 번영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휘장 저편에서 지금 감옥 문이 열려 구원을 선포받을 수천, 어쩌면 수백만 영들에게서 감사를 받고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며칠 후, 모세세와 살라비아는 엔다우먼트를 받고 현세와 영원을 위한 인봉을 받았다. 모세세는 성전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느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성전에 계셨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그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을 경험하고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제가 교회에서 했고 하고 있는 모든 일은 다 성전에 이르게 하는 일들입니다. 성전은 가족이 결합하여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