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26장: 봉사하고 싶습니다


제26장

봉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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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공연장 무대에 선 태버내클 합창단

우아라스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 의사들은 마누엘 나바로를 리마의 한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선교부 회장인 엔리케 이바라가 그를 맞이했고, 지역 회장단 일원인 찰스 에이 디디에 장로가 그에게 축복을 주었다. 디디에 장로는 마누엘에게 축복을 주며 그가 곧 병원을 떠나 선교 임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의사들은 마누엘의 다른 부상을 치료하고 나서 다친 얼굴을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폭탄 파편으로 광대뼈가 쪼개지고 오른쪽 눈의 시신경이 절단되어 오른쪽 안구를 제거해야 했다. 리마에 온 마누엘의 부모는 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아들아, 수술을 할 거란다.” 어머니가 말했다.

마누엘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눈에 통증을 느끼지 못했기에 붕대를 감은 이유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위로했다. “우리가 여기 있단다. 우린 너와 함께 있어.”

교회의 전적인 재정 지원으로 마누엘은 안구를 제거하고 손상된 안와를 복구하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친척들은 그가 퇴원 후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누엘은 선교 임지를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주님과의 계약은 2년인데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마누엘이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리마에서 학교에 다니던 고향 친구 루이스 팔로미노가 문병을 왔다. 마누엘은 부상으로 인해 루이스와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지만 선교사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선교 사업을 완수하겠다는 마누엘의 결정에 놀라며 감명을 받았다.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어.” 루이스가 말했다. “넌 어떻게 그렇게 강한 신앙을 가졌니?”

폭발 사고가 있은 지 6주 후, 마누엘은 병원을 떠나 리마에 있는 선교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테러의 위협이 있었으며, 그는 폭발 차량과 비슷한 차를 볼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밤에는 약 없이는 잠을 자기 어려웠다.

날마다 선교부 사무실의 장로들 중 한 명이 마누엘의 붕대를 갈아 주었다. 마누엘은 차마 거울로 잃어버린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병원을 떠난 지 약 3주 후, 그는 의안을 받았다.

어느 날, 루이스는 마누엘을 만나러 선교부 사무실에 왔다. 그가 말했다. “침례를 받고 싶어. 뭘 해야 하니?” 선교부 사무실이 루이스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몇 주 동안 마누엘과 그의 동반자는 근처 예배당에서 루이스에게 나머지 토론을 가르쳤다. 마누엘은 친구를 가르칠 수 있어서 기뻤고, 루이스는 선교사들과 함께 세운 모든 목표를 열심히 완수했다.

1990년 10월 14일에 마누엘은 루이스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는 여전히 부상으로 힘들어했지만, 그 시련으로 인해 고향 친구에게 침례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선교 사업에서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루이스가 물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포옹했고, 마누엘은 강한 영을 느꼈다. 그는 루이스도 그 영을 느꼈음을 알았다.

마누엘은 루이스의 침례를 기념하며 성경책을 선물했다. 표지 안쪽에는 이런 말을 적어 넣었다. “암울한 날이 오면 새로 태어난 오늘을 기억하렴.”


한편, 유타주의 데리어스 그레이는 친구인 마저리 “마리” 테일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마리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 가족 역사 도서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계보 전문가였다. 그녀는 방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중요한 기록이 담긴 마이크로필름 몇 개를 발견하고 기쁨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제대로 보려면 여기로 직접 와야 해.”라고 그녀는 말했다.

흥미를 느낀 데리어스는 마리를 만나기로 했다. 가족 역사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계보 센터였으며,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데리어스는 처음 이 도서관에 갔을 때만 해도 가족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알게 된 것 외에는 자신의 조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마리는 데리어스가 더 많은 답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흑인은 아니었지만 데리어스에게 그의 가족과 미국 흑인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을 능숙하게 알려 주었다.

데리어스가 가족 역사 도서관에 도착하자, 마리는 그에게 자신이 찾은 기록들을 보여 주었다. 1865년에 미국 의회로부터 인가를 받은 Freedman’s Savings and Trust Company[프리드먼의 저축신탁회사]는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나 한때 노예로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재정적 보증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은행에 계좌를 개설했으나, 은행은 9년 만에 파산하여 고객들이 힘들게 벌어 저축한 돈을 날리고 말았다.

은행은 파산했지만 계보학자들은 그 기록을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노예가 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찾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공동묘지 명부, 유권자 등록부, 출생 및 사망 증명서 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족의 이름과 날짜를 찾는 데 사용하는 기록은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거나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은행 기록에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름과 노예가 된 장소 등 계좌 소유자에 관한 수많은 개인 정보가 담겨 있었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는 고객의 신체 사항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데리어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이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사자들에게는 그 기록 자체가 큰 문제였다. 기록부를 작성한 은행 직원들이 알파벳순이 아닌 계좌 개설순으로 계좌 소유자의 이름과 세부 정보를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사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때까지 기록부를 한 줄 한 줄 낱낱이 살펴보아야 함을 의미했다.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기록을 더 잘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리는 데리어스에게 제네시스 그룹의 구성원들이 기록을 복사하고 색인 작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 일을 할 시간이나 개인용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충분하지 않았다. 데리어스는 사도들 중 한 사람에게 교회가 도와줄 수 있는지 문의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받은 사도는 지지 의사를 밝혔으나, 이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맡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시 교회 본부에서는 대체로 이름 초출 프로젝트를 후원하지 않았다. 그 일은 스테이크와 와드에서 맡아 했다.

선택지가 없어지자 마리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지난 25년 동안 교회는 45개국에 1,200개가 넘는 가족 역사 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들은 교회 안팎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보통 이 센터들은 스테이크에 부속되어 있었지만, 마리는 최근 유타 주립 교도소에 가족 역사 센터가 문을 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감자들은 일주일에 한 시간씩 이 센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와 데리어스가 그들을 모집하여 프리드먼의 은행 프로젝트를 돕게 하면 어떨까?

마리는 교도소의 가족 역사 책임자와 이야기했고, 얼마 후 수감자 네 사람이 자원하여 그 기록에 관해 열심히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90년 9월, 가나의 앨리스 존슨은 타코라디에 있는 Holy Child Teacher Training College[홀리 차일드 교사 양성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가나 정부가 나라 안에서 교회 운영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그녀의 선교 사업이 갑자기 끝나 버린 지도 1년이 넘었다. 처음에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의 권유로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다음 학년도에 양성 대학에 입학했다.

‘동결’이 지속되자, 앨리스와 교회의 회원들은 매달 가정 예배를 하는 데 익숙해졌다. 가나 아크라 지방부 회장인 엠마누엘 키시는 선교부 회장 대리이자 가나의 교회 감리 역원이 되었다. 그는 가나 전역을 광범위하게 다니면서 성도들을 만나고 강화했다. 정부가 교회의 “필수 모임”을 일시적으로 지속할 수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교회의 일부 직원들은 복지, 교회 교육 및 배부 분야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들은 십일조나 헌금을 낼 수 없었지만, 일부 회원들은 수입을 따로 떼어 놓고 다시 헌금할 수 있게 될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윌리엄 아쿠아를 포함하여 잠시 케이프코스트에 투옥되었던 성도들과 달리, 앨리스는 동결 기간에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몇몇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개인 집에 모여 성찬을 취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했다. 명찰도 선교사 복장도 하지 않은 채 선교사로 계속 봉사하던 그녀의 부모님은 근처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나곤 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교회의 정규 모임이 재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정체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1990년 11월, 앨리스는 정부가 교회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결이 시작될 때부터 키시 회장과 성도들은 정부 관리들에게 제한 조치를 끝내도록 로비를 해 왔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릇된 보도에 대응하여 교회의 교리와 역사를 설명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고 정부 지도자들에게 직접 청원도 했다. 관리들이 교회의 과거 신권 제한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을 때, 성도들은 흑인 회원들이 교회의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기 성도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다른 교회들도 동결로 인해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고 성도들의 예배할 권리를 옹호해 주었다.

금지령을 해제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은 가나에서 교회의 실무를 담당하는 지역 관리자인 아이작 애디였다. 그는 가나 대통령 제리 롤링스의 이부형제였다. 그런데 두 형제는 사이가 소원했고, 아이작은 동결에 관해 제리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실무 책임자인 조지스 보닛이 제리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도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아이작은 그렇게 했고, 영의 감화를 받았다. 그는 제리를 만나기로 했다. 그날 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서로의 견해 차이가 해소되었다. 다음 날, 정부는 동결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교회의 공개 모임에 다시 참석하게 된 앨리스는 감정이 북받쳤다. 그날 거의 100명에 가까운 성도들이 타코라디 지부에 참석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러 연단에 올라갔기 때문에 모임은 2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앨리스는 기쁘기도 했지만, 코포리두아에서 자신의 선교 사업을 통해 개종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지난 1년 반 동안 그들이 복음에 충실하게 생활했는지 궁금했다. 일부 교회 회원들은 낙담하여 교회를 떠난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동결이 끝난 직후, 가나에 최초의 스테이크 두 개가 조직되었다. 케이프코스트에서는 앨리스의 아버지 빌리 존슨이 스테이크 축복사로 봉사하도록 부름받았다. 한편, 정부는 성도들이 나라에서 선교 사업을 재개하는 것을 허용했다. 가나 아크라 선교부의 회장으로 새로 부름받은 그랜트 건넬은 접견을 위해 앨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동결 이전에 봉사했던 선교사 60명을 찾아냈고, 그들이 선교 임지로 돌아갈 의향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다시 선교사로 봉사하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요.”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 “저는 지금 바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뭐라고요?” 그녀의 빠른 대답에 놀란 선교부 회장이 물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앨리스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분을 위해 교육은 기꺼이 미룰 수 있었다.

앨리스는 곧 선교 임지로 복귀했다. 회복된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의 많은 시간을 바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때,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과연 내 딸이로구나.” 그가 말했다.


마누엘 나바로가 1991년 3월에 선교 사업을 마치자, 부모님은 그를 데리러 리마에 왔다. 마누엘은 스테이크가 조직된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선교부 회장이 그를 선교사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마누엘은 아직 페루 남부에 있는 고향 나스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봉사한 지역에 있는 친구에게 그녀의 침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일주일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어느 날 아침, 마누엘과 그의 아버지는 아침 식사로 먹을 빵을 사러 나갔다. 아버지는 깜빡하고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 다시 안으로 향했다. “여기서 기다리렴.” 아버지가 말했다.

순간 마누엘은 얼어 버렸다. 오랫동안 선교사 동반자와 함께 지내 왔기에 거리에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그곳에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난 더 이상 선교사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스카로 돌아온 후에도 마누엘은 선교 사업 이후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부상 탓도 컸다. 한쪽 눈으로만 보며 악수를 하는 것은 전만큼 쉽지 않았다. 그는 계속 엉뚱한 곳에 손을 내밀곤 했다. 그러다 지부의 한 형제가 그와 함께 탁구를 하기 시작했고, 한쪽 눈으로 작고 하얀 공을 쫓아가는 것은 거리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4월에 마누엘은 대학에서 자동차 기계학을 공부하기 위해 더 큰 도시인 이카로 이사했다. 이카는 나스카에서 160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그곳에는 친구들과 가족도 살고 있었다. 그는 이모 집에 살면서 혼자 방을 썼다. 어머니는 그를 걱정하며 거의 매일 밤 그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아들아, 잊지 말고 항상 기도하렴.” 그는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카 스테이크에서는 젊은 미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어울리도록 격려하기 위해 종교 교육원 수업을 제공하고 활동과 영적 모임을 할 수 있게 독신 성인 그룹을 두었다. 이카에서의 이런 활동과 새로운 와드는 마누엘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교회에서는 아이들은 그의 의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성인들은 그를 여느 회원과 다르지 않게 대했다.

어느 날, 이카 스테이크의 회장인 알렉산더 누네스가 마누엘에게 접견을 하자고 했다. 마누엘은 십 대 시절 나스카에서부터 누네스 회장을 알고 있었으며, 교회 교육 기구 코디네이터였던 누네스 회장은 그의 세미나리 수업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마누엘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

접견 중에 누네스 회장은 마누엘에게 스테이크 고등평의회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다.

“우와!” 마누엘은 혼잣말을 했다. 스테이크 부름에서 봉사하는 성도들은 보통 마누엘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더 풍부했다. 그러나 누네스 회장은 그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마누엘은 자신이 담당하는 와드들을 방문했다. 처음에 그는 와드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닌 부름에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교회 지침서를 공부하고 스테이크에 보고하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직책에 비해 자신이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스테이크에서 성도들과 간증을 나누고, 영적 모임에 참석하고, 청년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 혼자 있을 때면, 자신이 당했던 공격을 생각하면 슬프고 치가 떨리기도 했다. 경전에는 충실한 사람들이 질병에서 치유되거나 위험에서 보호받는 기적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경전에는 바로 구출을 받지 못한 채 고통과 부당함을 겪었던 욥과 조셉 스미스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때때로 마누엘은 자신의 부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부상을 입은 후 몇 달 동안 테러리스트들은 교회 회원과 선교사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했으며, 이로 인해 페루 성도들 사이에 슬픔과 공포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고 있었다. 페루 정부는 테러 단속을 시작했고, 그에 따라 테러 공격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회의 현지 성도들은 “주님을 신뢰하라”라는 운동을 시작하여 자국의 폭력에서 벗어나도록 금식하고, 기도하고, 신앙을 행사했다.

마누엘은 학업과 교회에서의 봉사가 고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님을 신뢰했고 자주 그분을 생각했다.


마누엘이 선교 사업을 마치고 귀환할 무렵, 제일회장단의 제1보좌였던 고든 비 힝클리는 주님의 집을 지을 부지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젊은 사도였던 그는 아시아에서의 교회의 발전을 감독했으며, 교회의 성장세를 보고 매우 기뻤다. 이제 이 지역에는 일본, 대만, 한국, 필리핀에 20만 명의 성도와 4개의 성전이 있었다. 미얀마, 라오스, 몽골, 네팔과 같은 국가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에는 새로운 지부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교회의 아시아 지역 사무실이 있는 홍콩은 영국 영토였다. 그러나 6년 후면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이 영국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홍콩이 반환되면 중국은 홍콩의 경제 및 정치 체제를 존중하고 국민의 종교 활동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더라도 1만 8천 명의 성도들이 홍콩에 살고 있었으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주권이 넘어가기 전에 그곳에 주님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느꼈다.

힝클리 회장은 하루 종일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적당한 금액의 장소를 찾지 못했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의 경우, 교회는 교외에 성전을 지었기에 도시에 값비싼 부지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홍콩은 인구가 5백만 명이 넘는 인구 밀집 지역이어서 적당한 토지를 취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힝클리 회장은 교회가 홍콩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작은 부지 중 한 곳에 성전을 지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고층 다목적 건물을 상상했다. 그러면, 저층을 예배실과 선교부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최상층 3개를 성전으로 사용하는 거야. 그러면 짓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건물을 지은 적이 없었고, 그는 그것이 홍콩 성도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1991년 6월 15일, 헝가리의 역사적인 건물인 부다페스트 오페라 하우스에서 태버내클 합창단이 1,400명의 청중을 위해 마지막 앙코르 공연을 펼치자 장내에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러셀 엠 넬슨 장로와 그의 아내 단첼도 있었다. 그들은 3주간 순회공연을 하는 합창단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고 있었다.

넬슨 장로는 중동부 유럽의 정부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5년간 앞장서서 교회의 노력을 이끌어 왔다. 헝가리를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공산주의 지도부에서 벗어나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렸고, 정부는 교회를 공식 인가했다. 동독과 서독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며, 동독의 오래된 규제는 막을 내렸다. 이제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서도 선교사 활동이 허용되었다.

합창단의 순회공연은 가교를 놓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박수 소리는 음악회가 바로 그 일을 해냈음을 의미했다.

공연이 끝난 후, 한 헝가리 남성이 합창단원에게 말했다. “아내와 저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합니다.”

다음 날 넬슨 장로는 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성찬식에서 말씀을 했다. 연회장에서는 4년 전 그가 복음이 전파되도록 헝가리를 헌납했던 언덕이 내려다보였다. 그 당시 그는 부다페스트의 유일한 교회 회원을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그 언덕에 있었다. 이제 헝가리에는 4백 명의 성도가 살고 있었다.

합창단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독일, 폴란드, 소련으로 가서 공연을 했다. 넬슨 장로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를 만났다. 교회는 그곳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인도주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7년 넬슨 장로가 소련을 방문한 이후 그곳에는 중대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은 외국인들에게 더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으며, 몇몇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민들은 이제 자국의 일을 더 주도적으로 관리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종교의 자유가 많아졌고, 종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다.

소련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소련 국민들이 해외를 다니고, 회복된 복음을 찾고, 복음 지식을 얻어 귀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0년에 러시아 레닌그라드와 에스토니아 탈린에는 교회를 등록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성도들이 있었다. 그 사이에 핀란드의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을 지원하는 임무를 받았다.

모스크바에 간 넬슨 장로는 러시아 정부가 교회에 대해 매우 관대해진 것을 알고 놀랐다. 지난 몇 년간 그는 동유럽의 정부 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대서양을 건넜다. 처음에 그들은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는 자신의 노력을 허사로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주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 레닌그라드에는 지부가 하나 있었다. 비보르크와 모스크바시의 교회 회원들도 소규모 모임에 대해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진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넬슨 장로는 소련에서 가장 큰 공화국인 러시아 전역에서 곧 교회가 공식 인가를 얻기를 바랐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태버내클 합창단의 음악회가 끝난 후, 넬슨 부부와 옥스 장로는 길을 건너 교회가 만찬을 주최하는 메트로폴 호텔로 향했다. 넬슨 장로는 워싱턴디시에 있는 교회의 국제 업무 사무소 책임자인 베벌리 캠벨 덕분에 이 순회공연 기간에 그러한 만찬과 연회에 여러 번 참석했었다. 베벌리는 이 역할을 통해 교회 대표자들과 전 세계의 정부 관리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고 관계를 구축했다.

만찬에서 넬슨 장로는 마이크 앞에 서서 많은 고위 인사들을 향해 참석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런 다음 그는 러시아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앞으로 청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감사히 듣겠습니다.” 넬슨 장로가 말했다.

루츠코이 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내빈 여러분, 오늘 저녁 이곳에서 이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등록한다는, 1991년 5월 28일 자 등록 양식을 읽어 드리겠니다.”

루츠코이 부통령이 그 문서를 읽는 동안 넬슨 장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발표가 곧 나오기를 바랐지만 그날 밤에 그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공식 인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가 러시아에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교회 출판물을 발행 및 배부하고, 더 많은 단위 조직을 설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음 날, 넬슨 장로는 옥스 장로를 비롯한 몇몇 인사와 함께 정부 관리들을 방문했고, 그 가운데 크렘린 궁전 부근의 작은 공원으로 가서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일주일 후, 두 사도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벤슨 회장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들은 교회를 러시아에 등록한 문서의 사본을 보여 주면서 이제 동유럽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벤슨 회장은 기쁨으로 얼굴이 빛났다.

  1.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2, 6–7, 9, 12;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1–4; Chuquimango, Oral History Interview, 7.

  2. Navarro, Email Interview;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9–10;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5–6.

  3. Palomino, Oral History Interview, 1–2, 4;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11.

  4.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7, 10–11;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6–8; Navarro, Email Interview;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20, 2022], 1–3; Palomino, Oral History Interview, 4, 6.

  5.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25–26, 228, 287, 292;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95, 297–98; Taylor, Oral History Interview, [16], [21], [35]; R. Scott Lloyd, “Golden Anniversary of Microfilming,” Church News, Dec. 3, 1988, 8; “‘Remarkable Growth’ in Church Will Increase Interest, Tourism in Utah,” Church News, Feb. 4, 1989, 10. 주제: 가족 역사와 계보

  6.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26, 287; Josiah, “Providing for the Future,” 2, 5, 7–9; Osthaus, Freedmen, Philanthropy, and Fraud, 1–3, 8–9, 95–96, 201–8; Fleming, Freedmen’s Savings Bank, 129–30. 주제: 노예 제도와 노예 제도의 폐지

  7. Bob Mims, “Ex-slave Files a Prize for History Buffs,” Salt Lake Tribune, Feb. 21, 2001, A1, A8; Bob Mims, “Rich Lode of Black History Opens,” Salt Lake Tribune, Feb. 27, 2001, B1; Rose and Eichholz, Black Genesis, 22–23, 39, 49; Blockson, Black Genealogy, 2–5, 40–41, 44–45; Gray, “Tracing Ancestors”;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27.

  8.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26–27, 287; Jason Swensen, “Freedman’s Bank,” Church News, Mar. 3, 2001, 3.

  9. Gray, Oral History Interview, 226–27, 287–88; Allen, Embry, and Mehr, Hearts Turned to the Fathers, 272–73, 280–82, 312–17; Gray, Interview [Oct. 2022], [13]; Nelson, Elijah Abel Freedman’s Bank Project, [4]–[5]; “Operating Statistics: Family History Department,” Dec. 14, 1990, 19–20b, Family and Church History Department, Annual Reports, CHL; Jason Swensen, “Freedman’s Bank,” Church News, Mar. 3, 2001, 3.

  10.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9]–[10], [12]–[13]; Alice Johnson Haney, “Mission Interrupted by the ‘Freeze,’” Liahona, Dec. 2015, Africa West Area local pages, A4–A5.

  11. Kissi, Walking in the Sand, 200–203, 207. 주제: Ghana[가나]

  12.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8], [11]–[14]; Alice Haney to Brenda Homer, Email, Feb. 22, 2024, Alice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CHL; Alice Johnson Haney, “Mission Interrupted by the ‘Freeze,’” Liahona, Dec. 2015, Africa West Area local pages, A4.

  13. Kissi, Walking in the Sand, 204–32, 239; Bruce Olsen to Eric Otoo, June 23, 1989,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Stokes, Oral History Interview, 16–21; Haws, “The Freeze and the Thaw,” 35–37. 주제: 신권 및 성전 제한

  14. Kissi, Walking in the Sand, 200, 205; Bonnet, Oral History Interview [2017], 2, 4–7; Robert Sackley, “Historical Report,” 1–2, in Africa Area, Annual Historical Reports, 1990; Bonnet, Journal, Dec. 10, 1990; see also Georges Bonnet to Richard Lindsay, Memorandum, Nov. 24, 1990, Georges Bonnet, Oral History Interview [2023], CHL.

  15.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14]–[16]; Directory of General Authorities and Officers, 1991, 44; James E. Faust to First Presidency and Council of the Twelve, Memorandum, Dec. 19, 1990, Gordon B. Hinckley, Area Files, CHL; Kissi, Walking in the Sand, 238–39.

  16. Africa Area, Annual Historical Reports, 1991, [4]; Faust, Journal, Apr. 20, 1991; Gunnell and Gunnell, Oral History Interview, 6, 14–15.

  17.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17]–[18]; Alice Johnson Haney, “Mission Interrupted by the ‘Freeze,’” Liahona, Dec. 2015, Africa West Area local pages, A5.

  18. Kissi, Oral History Interview, 34–35; Haws, “The Freeze and the Thaw,” 39; Gunnell and Gunnell, Oral History Interview, 15; Haney, Oral History Interview, [17]–[18].

  19.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8–10, 12;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15;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20, 2022], 8; Navarro, Email Interview.

  20.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Jan. 2023], 2;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10–12;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20, 2022], 7; Nunez, Oral History Interview, [00:01:54]–[00:04:03], [00:04:29]–[00:04:42], [00:16:20]–[00:16:54], [00:29:45]–[00:29:57]. 주제: 고등평의회

  21.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Aug. 2022], 10, 12;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10, 2022], 14; Navarro, Oral History Interview [May 20, 2022], 8; Cook, Oral History Interview, 5–17, 27–35. 주제: Peru[페루]

  22. Hinckley, Journal, Apr. 22, 1991; Gordon B. Hinckley, “Struggle for Peace,” Jan. 27, 1991, Gordon B. Hinckley Addresses, CHL; Deseret News 1991–1992 Church Almanac, 84; Missionary Department, Annual Reports, 1991, 7–8; see also Chou and Chou, Voice of the Saints in Mongolia, 1–27. 주제: Gordon B. Hinckley[고든 비 힝클리]; India[인도]; Malaysia[말레이시아]; Singapore[싱가포르]

  23. Howard W. Hunter to Merlin Lybbert, Nov. 7, 1990,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Circular Letters, CHL; Woodger, “Hong Kong Temple,” 57–58; Hook, “From Repossession to Retrocession,” 1–29; Hinckley, Journal, Oct. 22, 1986; Feb. 11, 1992; May 6, 1992; July 26, 1992. 주제: Hong Kong[홍콩]

  24. Hinckley, Journal, Apr. 22, 1991, and Dec. 6, 1994; Gordon B. Hinckley, in Hong Kong Temple, Dedication Services, 8, 67; Nicholas D. Kristof, “Hong Kong Symbol Looks Away,” New York Times, Jan. 7, 1991, D1; Britsch, From the East, 295.

  25. Condie, Russell M. Nelson, 285–86; Gerry Avant, “Choir Leaves Trail of Joyful Tears,” Church News, July 6, 1991, 3, 8–9; Jay M. Todd, “An Encore of the Spirit,” Ensign, Oct. 1991, 32–35, 44. 주제: Russell M. Nelson[러셀 엠 넬슨]; Tabernacle Choir[태버내클 합창단]; Hungary[헝가리]

  26.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74; Hans B. Ringger, Spencer J. Condie, and Albert Choules Jr. to Russell M. Nelson, Oct. 31, 1989; L. Tom Perry to Priesthood Executive Council, Oct. 1, 1991, Missionary Executive Council, Meeting Materials, CHL; Gaddis, Cold War, 237–57; Kuehne, Mormons as Citizens of a Communist State, 346–54; Nelson, Oral History Interview, 1; Jay M. Todd, “An Encore of the Spirit,” Ensign, Oct. 1991, 33. 주제: Bulgaria[불가리아]; Croatia[크로아티아]; Poland[폴란드]; Romania[루마니아]; Slovenia[슬로베니아]

  27. Gerry Avant, “Singers Are Celebrities in Hungary’s Capital City,” Church News, June 22, 1991, 4; Dell Van Orden, “Church Granted Legal Recognition in Hungary,” Church News, July 2, 1988, 13; Russell M. Nelson, Hans B. Ringger, and Spencer J. Condie, “Report Trip to Hungary,” Apr. 19–22, 1987, Russell M. Nelson, Area Files, CHL; Jay M. Todd, “Church Growth in Tour Areas,” Ensign, Oct. 1991, 37.

  28. Condie, Russell M. Nelson, 286–87; Jay M. Todd, “Tour Milestones,” Ensign, Oct. 1991, 44–46, 48; Browning, Russia and the Restored Gospel, 20–48; Gaddis, Cold War, 237–57. 주제: Estonia[에스토니아]; Russia[러시아]

  29. Jepson, Journal, June 23–24 and 29, 1991; Condie, Russell M. Nelson, 287; Nelson, “Lord Uses the Unlikely”;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91, 194–96, 204.

  30. Browning, Russia and the Restored Gospel, 38–39, 44, 87, 137–38; “Registration of Leningrad Branch Approved,” Church News, Sept. 29, 1990, 3; Russell M. Nelson to First Presidency and Quorum of the Twelve, Memorandum, Nov. 2, 1990, Russell M. Nelson, Area Files, CHL;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81, 194–95.

  31. Joan Browning to Family, June 30, 1991, Gary L. Browning Papers, CHL; Jerold D. Ottley, Oral History, 1991, 19–20, Jerold D. Ottley, Mormon Tabernacle Choir History, CHL; Bardsley, Journal, June 24, 1991; Russell M. Nelson to Pierce Campbell and Beverly Campbell, July 9, 1991, Beverly B. Campbell Papers, CHL.

  32. “Announcement of Official Recognition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in the 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June 24, 1991, Mormon Tabernacle Choir, Chronological Files, CHL;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80–81; “Certificate of Registration of the Charter of a Religious Association for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May 28, 1991, in Liudmila S. Terebenina, “History of the Church in the USSR and in Russia,” 38.

  33.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81; Gerry Avant and Matthew Brown, “Church Is Recognized by Russian Republic,” Church News, June 29, 1991, 3; Browning, Oral History Interview, 1–2; Browning, Russia and the Restored Gospel, 151.

  34. Joan Browning to Family, June 30, 1991, Gary L. Browning Papers, CHL; Dew, Insights from a Prophet’s Life, 197–98; Nelson and Oaks, Oral History Interview, 8; Nelson, “Lord Uses the Unlikely”; Hinckley, Journal, May 30,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