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삶의 완전한 방식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는 1970년 1월 8일 일지에 이렇게 썼다. “목이 몹시 걱정된다. 목소리가 조금씩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의사들이 암에 걸린 성대를 제거한 후로 십여 년 동안 그의 목소리는 거친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도 교회에서 그가 행하는 봉사를 막지는 못했다. 1966년에 상파울루 스테이크를 설립한 이후, 킴볼 장로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각각 첫 번째 스테이크를 조직했고, 선교 사업을 위해 콜롬비아를 헌납했으며, 에콰도르의 성도들에게 성역을 행했다. 또한 『용서가 낳는 기적』이라는 영향력 있는 책을 집필했으며, 교회의 예산 위원회와 선교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도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계속 안 좋아지자 그는 암이 재발했을지 모른다는 염려 끝에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킴볼 장로의 인후 왼쪽에서 붉은 반점을 발견하고 두 차례 조직 검사를 실시했다. 이 검사로 그의 목소리는 더욱 손상되었고, 그는 말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목에 작은 마이크를 걸어야 했다.
킴볼 장로는 예후를 알아보기 위해 1월 12일에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조직 검사 결과를 살펴보고 다른 전문가들과 상의한 후 암이 재발했다고 판단했다. 킴볼 장로의 목소리를 살릴 희망은 거의 없었다.
킴볼 장로는 앞으로 필요한 치료를 고민하면서, 자신이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물러나고 더 유능한 사람이 그 직책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킴볼 장로는 의사가 한 말을 엔 엘돈 태너에게 이야기했다. 태너 회장은 총관리 역원들이 그를 위해 특별 금식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틀 후 총관리 역원들이 성전에 모였고 이 자리에서 해롤드 비 리가 진심 어린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자, 킴볼 장로가 방 한가운데 앉은 뒤 고든 비 힝클리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 후 방에 있던 다른 사도들이 킴볼 장로 주위로 둥글게 모인 가운데 태너 회장이 기름 부음을 인봉하고 그를 축복했다.
킴볼 장로는 축복을 받는 동안 하늘 아버지와 정원회 회원들을 더욱 가까이 느꼈다. 그는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듯했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성역을 계속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방법을 찾으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상관이 없었다. 축복을 마친 후, 리 장로는 킴볼 장로를 꼭 껴안았다. 원형으로 서 있던 다른 사도들은 모두를 하나를 묶는 그렇게 강력한 영적 경험에 참여한 것은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축복을 받은 지 사흘이 지난 일요일 아침, 뜻밖에 킴볼 장로의 이웃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맥케이 회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그것이 사실인지 물었다.
킴볼 장로가 대답했다. “저는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정말로 선지자가 그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킴볼 장로는 서둘러 교회 행정 건물로 갔다. 선임 사도인 조셉 필딩 스미스가 해롤드 비 리와 함께 맥케이 가족을 만나고 있었다. 킴볼 장로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비서인 조셉 앤더슨과 아서 헤이콕을 찾았고, 그들은 몇 시간 동안 총관리 역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했다.
맥케이 회장의 서거로 교회는 슬픔에 빠졌다. 그는 전 세계 성도들에게 전설적인 사랑을 보였다. 그가 교회를 이끈 기간은 19년에 달했고, 300만 명의 회원 중 3분의 2가 그가 회장으로 봉사한 시기에 침례를 받았다. 그가 1951년 4월에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을 때, 교회에는 184개의 스테이크가 있었다. 그런데 1970년인 지금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14개, 유럽에 13개 스테이크가 있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과테말라, 멕시코, 통가, 우루과이, 서사모아에 새워진 첫 번째 스테이크들을 포함하면 전 세계에 모두 500개의 스테이크가 있었다.
맥케이가 교회를 이끌던 기간에 생긴 스테이크의 90퍼센트가량은 교회가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던 미국과 캐나다에서 조직되었다. 북미에서 교회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대형 호텔 체인의 설립자인 제이 윌러드 매리엇과 아메리칸모터스(American Motors Corporation)의 최고 경영자이자 미시간 주지사였던 조지 더블유 롬니 같은 저명한 후기 성도들 덕분이었다.
맥케이 회장은 4개의 국가에서 5개의 성전을 헌납했으며, 성전 의식문을 12개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감독했다. 또한 그의 재임기에는 북미, 중미, 남미 지역의 200개 텔레비전 방송국과 수십 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연차 대회를 더욱 쉽게 시청하거나 청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 사업과 교회 교육의 옹호자였던 맥케이 회장은 두 분야 모두에서 교회의 노력을 크게 확장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교회 회장으로서 맡은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던 협의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이로써 전 세계 사람들이 회복된 복음의 단순한 진리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명의 성도들이 맥케이 회장의 장례식에 와서 경의를 표했다. 얼마 후, 십이사도 정원회는 조셉 필딩 스미스를 교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지지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아흔세 살의 스미스 회장은 역대 교회 회장 중 최고령자였다. 교회 회장 집무실로 처음 출근하던 날, 그는 이미 60년 가까이 사도직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성도들은 교회사와 경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진 그를 존경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선지자 조셉의 형인 하이럼 스미스의 손자이기도 했다.
스미스 회장은 해롤드 비 리와 엔 엘돈 태너를 제일회장단 보좌로 불렀다. 리 회장은 새로운 임무로 인해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할 수 없었으므로 킴볼 장로가 그를 대신하여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도록 성별되었다.
의사인 그의 친구는 캘리포니아에서 암 치료를 받도록 강권했지만 킴볼 장로는 맥케이 회장의 서거 후 건강에 대한 염려를 제쳐 두고 사도로서의 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병을 어떻게 치료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병자 축복을 받은 후로 말하는 것이 나아졌으므로 목소리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리 회장은 킴볼 장로를 새로운 부름에 성별할 때 그의 건강 문제를 언급하며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전했다.
“우리는 특히 장로님의 목소리를 축복합니다. 장로님이 글만이 아니라 목소리로도 가르침을 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 능력을 보존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장로님이 스스로 삶을 감미롭게 느끼고 주님께서 이제 충분하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지상에 거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마에타 홀리데이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직후,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돌보게 된 베나 블랙과 함께 쇼핑몰에 갔다. 마에타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베나가 운전하는 가는 길을 꼼꼼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마에타는 쇼핑몰에서 필요한 옷을 몇 벌 골랐다. 하지만 집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 베나가 돌아가는 길을 확실히 떠올리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기억이 안 나.” 그녀는 마에타에게 말했다.
마에타는 맞는 길을 가리키며 “이리로 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차근차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했다.
베나는 감탄하며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을 어떻게 아니?”
“저는 어딜 가든 주변을 잘 살펴요.” 마에타가 말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나바호 보호 지역에서 양을 치면서 주요 지형지물을 기억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마에타는 그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학교가 무서웠다. 그곳은 그녀가 이전에 다녔던 어느 학교보다도 훨씬 컸다. 혼잡한 복도에는 사물함이 늘어서 있었다. 거의 모든 학생이 백인이었고, 마에타가 아는 한 자신은 그곳에서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에서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과 달리 그녀는 또래들로부터 인종 편견을 느끼지는 못했다. 반 친구들은 마에타를 환영했고, 그녀는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
와드의 다른 청소년들처럼 마에타도 새벽 세미나리에 참석했다. 마에타와 자매처럼 지내는 위탁 가정의 딸 루시는 수업 시간에 맞춰 와드 집회소에 도착하기 위해 평일 아침마다 5시에 일어났다. 세미나리 첫날, 마에타는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중에야 이유를 깨닫고 생각했다. ‘아, 교회에 대해 배우는 거구나.’
마에타는 세미나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 수업에서 학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고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믿음에 학점을 매길 수 있지?’ 의아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학점을 주시는 걸까?’ 그런데도 그녀와 루시는 수업에 거의 빠지지 않았다.
마에타는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는 동안 학교 합창단에 들어갔다. 다음 해에는 농구를 했다. 농구는 애리조나에서 기숙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운동이었다. 마에타는 농구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팀의 포인트 가드가 되었다. 그녀는 레이업을 하고 파울 라인 측면에서 득점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공을 패스하는 것도 잘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팀의 동료와 코치들은 그녀를 최우수 선수로 뽑았다.
이 배치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에게 매 학년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 여름 동안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를 권장했다. 마에타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가 많은 어머니 에벌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베나는 마에타가 자신의 뿌리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매달 집에 편지를 쓰도록 그녀를 격려했다. 마에타는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애리조나로 가는 버스를 탔다.
1970년 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즈음에 마에타는 어머니의 집이 불에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친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에타는 가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나는 마에타가 동생들이 화재로 잃은 것들을 대신할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하도록 도와주었다.
마에타가 애리조나로 떠나던 날, 베나는 그녀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 주면서 음식과 옷과 담요가 가득 담긴 판지 상자들을 건네며 말했다. “네 가족들에게 주는 거야. 와드에서 준비한 거란다.”
마에타는 상자들이 버스 짐칸에 실리는 것을 보면서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블랙 가족의 친절을 의심하며 그들이 집안일을 시키려고 자신을 데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 후 그녀는 그들이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상자들을 보기 전까지는 위탁 가정 사람들이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해 7월의 어느 무더운 아침, 일본 오사카에서는 열여섯 살 소년 야마시타 가즈히코가 햇빛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이 책에서는 일본어 이름 표기법을 따라 성을 먼저 썼으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일반적인 자료에서는 영어 이름 표기법을 따라 이 이름이 가즈히코 야마시타로 표기되어 있다—옮긴 이) 그는 형 마사히토와 함께 엑스포 ’70에 참석하기 위해 몇 시간을 여행한 터였다. 이 세계 박람회는 전 세계 국가와 단체들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백 개의 전시물과 전시관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박람회의 주제는 “인류를 위한 진보와 화합”이었으며, 관람객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허 속에서 일본이 이룬 인상 깊은 회복의 증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즈히코와 마사히토는 그때까지 같이 몇 개의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미국관에서는 엑스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 중 하나를 보았다. 바로, 전년도의 역사적인 달 착륙에서 가져온 월장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마사히토가 공학 전시회를 찾아다니고 가즈히코는 카메라를 들고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두 형제가 서로 떨어져서 다니는 중이었다. 가즈히코는 일본관에 가서 고국이 세계에 선보이는 전시품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전시관에 도착해 보니 입구 밖 멀리까지 줄이 이어져 있었다. 직원 말로는 적어도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가즈히코는 그렇게 오래 뜨거운 햇빛 아래 서 있기보다는 다른 곳에 가 보기로 했다. 5분에서 10분 정도 걸었을 때 아름다운 흰색 건물처럼 보이는 전시관이 하나 나타났다. 그 전시관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높은 첨탑도 있었는데, 그 위에는 긴 나팔을 부는 남자의 황금색 동상이 있었다. 가즈히코는 그곳이 무엇을 전시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줄이 없어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일본식 정원을 지나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원이 그와 다른 손님들을 모아 전시관을 안내해 주었다. 가즈히코는 곧 그 전시관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 그 회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다른 세계 박람회들에서도 인기 있는 전시물을 선보여 왔지만, 기독교가 주요 종교가 아닌 나라에 전시관을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시관 건물 1층에는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만든 약 3.7미터 높이의 그리스도상 대리석 복제품이 있었다. 일본 각지에 있는 교회 회원들의 일상 활동을 담은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즈히코의 가족은 불교도였으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다른 손님들은 전시관 2층으로 이동한 뒤 여러 개의 방이 이어진 공간에 들어갔다. 세상의 창조에서 구주가 맡은 역할과 그분의 성역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곳에서 관람객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행복의 계획과 조셉 스미스라는 소년 선지자를 통한 그리스도 복음의 회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전시관의 마지막 관람 구역은 교회가 1964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단편 영화인 인간의 행복 추구[Man’Search for Hapiness]의 일본어판을 상영하는 작은 극장이었다. 이 일본어 영화는 현지 선교부 지도자인 오카자키 에드와 오카자키 치에코의 권유로 일본 현지에서 촬영되었으며, 인기 있는 일본 배우들이 출연했다. 가즈히코는 그중 몇 명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는 어디서 왔는가? 왜 이곳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시관에서 들은 답이 정말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즈히코는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걸 믿으세요?” 가즈히코가 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믿어요.”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이세요?”
가즈히코는 전시관을 나와 다시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다 곧 카메라를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전시관으로 돌아갔더니 그곳에서 직원이 잃어버린 카메라를 찾아 주었다.
가즈히코는 감사의 표시로 일본어 몰몬경을 한 권 구입하고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남겼다. 하지만 교회에 대해 특별히 더 알아볼 마음은 없었다.
3개월 후, 두 명의 선교사가 도쿄 외곽에 있는 그의 집에 나타났다. 그들이 정말로 방문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들을 만나서 기뻤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1970년 9월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에서는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벨 스패포드가 상호부조회 연례 대회에 참석한 수천 명의 후기 성도 여성들 앞에 섰다. 대개 이 행사는 전 세계 여성들이 함께 모여 경험을 나누고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기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다른 대회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침울했다.
스패포드 회장은 말했다. “우리는 위기가 거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쟁과 시민들의 소요 장면이 하루가 멀다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났다. 인종 갈등은 여전히 심각했고, 저명한 정치인과 시민 평등권 지도자들의 암살은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젊은이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평화와 평온은 한순간인 것 같았다.
상호부조회 조직은 교회 협의 프로그램에 적응해 가는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과거에는 상호부조회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기금을 모으고 예산을 편성한 후 신권 지도자들에게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제일회장단은 상호부조회가 와드나 지부 예산으로 지원받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지 신권 지도자들은 새로운 체계에 따라 각 와드 조직에 매년 지출할 금액을 책정해 주었다. 각 상호부조회는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추가로 모금 활동을 하는 부담 없이 기금의 사용을 꾸준히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정된 예산의 제약을 받기에 지난 수년간 누리던 재정적 독립은 일부 내려놓아야 했다. 여성들이 수공예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던 전통적 모금 행사인 상호부조회 바자회도 이제 없었다.
다른 변화들도 상호부조회의 관리에 영향을 미쳤다. 상호부조회는 사회봉사 사업의 일환으로 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 교회 입양 및 위탁 보호 서비스, 문제 청소년을 위한 사회 복귀 프로그램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미국 서부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상호 연관된 단일 조직의 주도로 전 세계 교회 회원을 위해 사회봉사를 확대하려는 열망은 조직 재편을 촉발했다.
1969년, 교회의 지도자들은 ‘통합 사회봉사 사업’을 창설하여 신권 역원의 지도에 따라 이 모든 프로그램을 통합했다. 스패포드 회장은 계속 고문으로 활동했지만 더 이상 프로그램을 총괄하지는 않았다.
상호부조회가 변화에 적응하는 동안 스패포드 회장과 보좌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잠재적인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대처했다. ‘성인 협의 위원회’가 상호부조회 공과 집필 임무를 맡았을 때, 상호부조회 회장단은 이를 알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위원회의 의견과 검토를 받는 가운데 상호부조회가 자체적으로 공과를 작성하게 되었다.
스패포드 회장은 회복된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됨에 따라 상호부조회도 이에 적응해야 함을 인식했다. 교회 잡지는 이제 해외 독자들을 위해 17개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부조회 잡지』는 영어와 스페인어로만 출판되었다.
최근에 지도자들은 협의된 메시지를 가능한 한 많은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교회 출판물에 대한 변화를 제안했다. 1970년 6월, 그들은 『교사』, 『임프루브먼트 이라』, 『상호부조회 잡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행 잡지를 폐간한다고 발표했다. 영국의 『밀레니얼 스타』 및 남아프리카의 『쿠모라의 남부 전령사』와 같이 선교부에서 오랫동안 발행되던 영어 잡지의 발행도 곧 종료될 것이었다. 그 대신 교회는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세 가지 새로운 잡지, 즉 성인을 위한 『Ensign』[엔사인], 청소년을 위한 『New Era』[뉴이라], 어린이를 위한 『Friend』[프렌드]를 발행할 예정이었다.
태버내클의 청중 앞에 선 스패포드 회장은 많은 여성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최근의 변화와 씨름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상호부조회 회장단은 잡지의 폐간 소식에 슬퍼하는 여성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터였다. 스패포드 회장은 그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의견이 제안되었을 때, 그녀는 『상호부조회 잡지』가 교회와 자매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했었다. 그런데 이제 어떤 말로 자매들에게 치유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그녀는 몰몬경의 한 구절인 “우리는 행복[의 방식을 좇아] 살았더라”를 말씀의 주제로 삼았다. 니파이 백성들은 시련의 시기에 직면했을 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 그들은 양 떼와 소 떼를 치고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근면한 사람들이었다.
상호부조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조직에 변화가 생겼다고 해서 의로움, 연민 어린 봉사, 창의적 표현, 지역 사회 참여 등 행복에 이르는 요소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스패포드 회장은 이렇게 간증했다. “상호부조회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행복한 삶의 필수 요소를 강화합니다.”
1971년 2월, 개종한 지 6년을 넘어선 데리어스 그레이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살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자신과 친구가 돼 주고 새로운 종교에 적응하도록 도와준 많은 성도들과 우정을 쌓으며 즐겁게 지냈다. 그가 만난 교회 회원 중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업신여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침례받기 전날 밤에 들었던 그 강력한 말씀에 굳게 의지했다. “이것은 회복된 복음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가입해야 하느니라.”
데리어스는 지역 뉴스 방송국인 KSL-TV의 기자로 일했다. 그는 기자가 되기 전에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 그는 KSL을 감독하는 교회 소유 통신 회사의 사장인 아치 매드슨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치가 친절하고 솔직한 사람임을 알게 된 뒤 기자로 일하기로 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길을 열어 주시는 것 같았다.
더라이어스는 일을 시작한 뒤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타 대학교에서 언론학을 공부했다. 또한 솔트레이크시티 와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일학교 관리자로 봉사했다. 그는 아치의 소개로, 유타 호텔에서 일하는 흑인 후기 성도인 먼로 플레밍을 만났다. 먼로의 아내 프랜시스는 4세대 후기 성도이자 제인 매닝 제임스의 증손녀였다. 플레밍 가족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교회에서의 경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나눴으며, 솔트레이크시티 흑인 후기 성도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데리어스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공동체의 사랑받는 여성 수장인 루실 뱅크헤드가 있었다. 프랜시스 플레밍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흑인 후기 성도 개척자들의 후손으로 교회 안에서 성장한 배경이 있었다. 그는 1968년에 교회에 가입해서 유타에서 만난 리사 데리캇과 결혼한 유진 오어도 만났다. 유진과 리사는 그 지역에 사는 흑인 친구들과 우정을 쌓기 위해 여름 소풍을 주최했다.
데리어스는 특히 1944년에 미군 직원으로서 유타로 이주한 흑인 회원인 루핀 브리지포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루핀과 그의 아내 헬레나는 1953년에 교회에 가입하여 신앙 안에서 자녀들을 키웠다. 데리어스는 루핀의 굳건함과 조용한 지혜, 온화한 태도에 감탄했다. 루핀은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를 비롯한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세월 동안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와드, 스테이크, 선교부에서 교회의 흑인 회원들을 주제로 자주 말씀을 전했다.
어느 날 데리어스는 BYU의 홍보 책임자인 히버 울시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데리어스가 KSL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고 BYU가 인종 관련 논란에 직면할 때 종종 도움을 구하곤 했다.
최근 BYU는 교회의 신권 제한에 대해 대중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고, 정치 활동가들은 간간이 시위를 벌이고 BYU 스포츠 행사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논란은 1969년 10월 와이오밍 대학교의 흑인 풋볼 선수 14명이 BYU와의 경기를 앞두고 당일에 검은 완장을 착용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고조됐었다. 와이오밍 대학교 팀의 코치는 그 선수들을 팀에서 쫓아냈고, 이로써 언론의 관심이 고조되며 항의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 와이오밍의 활동가들은 BYU와의 농구 경기에서 한 번 더 시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BYU 총장 어니스트 엘 윌킨슨은 BYU를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히버를 파견해 시위를 조직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게 한 터였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교회의 흑인 회원을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에, 히버는 데리어스에게 전화를 걸어 와이오밍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언제 출발해야 합니까?” 데리어스가 물었다.
데리어스는 급히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그가 학교에 도착하자 히버는 재빨리 인파로 가득한 강당으로 그를 데려갔다. 둘은 주요 활동가들의 맞은편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데리어스는 연신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그들 중 일부가 자신이 교회를 옹호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과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 주말에 있었던 한 모임에서는 데리어스가 교회에 가입함으로써 흑인을 욕되게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데리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흑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지금 흑인입니다. 그리고 흑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저는 흑인이라는 제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흑인의 대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저는 몰몬이기도 합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한 답이 몰몬 교회에 있습니다. 제 피부색과 제 종교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데리어스와 히버의 노력에도 와이오밍 대학교 학생들은 경기 전과 경기 중에 시위를 벌였다. 데리어스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인종 평등에 대한 그들의 열망에 공감했지만, 그들이 교회나 교회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만일 그들이 몰몬 신앙의 원리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편견과 불평등에 맞서 보편적인 시위를 할 의향이 있었다면, 저도 기꺼이 동참했을 것입니다.”
1971년 1월 19일, 마흔두 살의 나이지리아 학교 교사인 앤서니 오비나는 펜과 파란색 종이를 꺼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구원을 찾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끝에 마침내 답을 찾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격렬하게 나이지리아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앤서니와 그의 아내 피델리아, 그리고 그 자녀들은 대부분 집에서만 지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앤서니는 오래된 잡지를 펼쳤다. 그런데 거기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보았다. 큰 첨탑들이 있는 높고 장엄한 석조 건물의 사진이었다.
그는 전에 한 번 그 건물을 본 적이 있었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 꿈에서였다. 그 꿈에서, 구주께서 그를 그 웅장한 건물로 안내하셨다. 그곳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이 다 무엇인가요?” 앤서니가 여쭈었다.
“성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란다.” 구주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기도를 하는 중이란다. 이들은 항상 이곳에서 기도를 하지.”
잠에서 깨어난 앤서니는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는 피델리아와 친구들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아무도 도움이 될 만한 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한 목사에게 인도를 구했다. 목사는 꿈을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언젠가 의문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앤서니는 잡지에서 그 사진을 보자마자 답을 찾았음을 깨달았다. 사진 상단에는 이 건물이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성전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몰몬, 즉 공식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으로 불리는 이 사람들은 다르다.” 거기에는 교회에 관한 자세한 역사와 함께 교회의 기본 교리 몇 가지가 설명되어 있었다. “그것은 삶의 완전한 방식이다. 대단한 노력으로 살아가는 이 공동체를 불태우는 종교적 불꽃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아들과 딸이라는 믿음이다.”
앤서니는 기사를 읽으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친형제들이 근처에 살고 있었기에 즉시 그들을 모아 그 사진과 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건물이 확실해?” 그의 형제 프랜시스가 물었다.
그러나 불행히 당시에는 전시 봉쇄로 교회 본부에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비공식 후기 성도 회중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들 중 다수는 전쟁 중에 흩어졌고, 서로 간의 연락은 물론 교회와의 연락도 끊긴 상태였다. 아니스티 존 이콩과 같은 몇몇 신자들의 소식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 앤서니가 교회에 연락을 취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앤서니는 교회 회장에게 쓰는 편지를 이어가며 자신의 마을에 교회의 지부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몰몬교는 여러 종교 가운데서도 확실히 다릅니다.”
몇 주 뒤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현재 귀하의 나라에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파견된 공식 대표자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적 가르침에 관해 제가 귀하와 서신을 왕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