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값진 축복들
1997년 10월 4일 저녁에 열린 연차 대회 신권 모임에서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새로운 성전 설계안을 발표하고, 세계 각지의 몇몇 새로운 성전에 이 설계를 적용할 계획임을 알렸다.
“우리는 성도들 가까이에 성전을 많이 지어서 그분들이 성전 예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우 값진 축복들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드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 역사부 관리 책임자인 리처드 “릭” 털리는 이 새로운 성전들이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며 전 세계 성도들이 이 성전들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을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가족 역사부는 현재 운영 중인 51개 성전의 대리 의식에 필요한 이름을 제공하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이제 더 많은 성전이 건축될 텐데, 교회는 가족 역사를 수행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릭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성전 사업을 위해 이름을 준비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 국가의 교회 회원들은 보존된 문서에서 조상의 이름을 찾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어떤 회원들은 긴 시간을 들여 어렵게 노력해서야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필요한 마이크로필름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가족 역사 센터에 없는 경우, 회원들은 배송비를 지불하고 몇 주를 기다려 자료를 수령한 뒤 다시 지역 가족 역사 센터로 가야만 마이크로필름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롤필름 하나에는 천여 개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많은 것을 일일이 보고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마저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모든 회원이 가족 역사 센터 가까이에 사는 것도 아니었다.
198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조상의 이름을 찾는 일에 속도가 붙었다. 1980년대 초반에 교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개인 조상 파일(Personal Ancestral File, PAF)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조상에 대한 정보를 기록, 저장, 공유하고 가계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수십만 명의 사용자들이 TempleReady[템플레디]를 통해 손쉽게 이름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개인용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제출하는 과정이 여전히 복잡했다. 개인 조상 파일 사용자들은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는데, 가족 이름을 교회에 제출할 때 기록이 중복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람이 조상을 위한 성전 사업을 하고 난 뒤 모든 사람의 개인 파일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의식이 중복되는 것을 모른 채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의식을 받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힝클리 회장 역시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2년 전에 릭이 가족 역사부에 합류했을 때, 힝클리 회장은 릭을 회의에 불렀다. 그는 교회가 죽은 자를 구속하는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물었다. “릭, 우리가 가족 역사에 투입하고 있는 모든 자원이 영옥에 갇힌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고 확신하나요?”
릭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릭은 시스템을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힝클리 회장도 동의하며 시스템을 고쳐 보도록 지시했다.
선지자의 지시를 받은 가족 역사부는 성전 사업을 위해 더 간단하게 이름을 제출할 방법 즉,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을 만큼 간편한 과정을 개발해야 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기록에서 가족 정보를 초출하여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체계화하는 과정에 속도를 낼 수 있었지만, 중복을 방지하려면 컴퓨터 간 소통이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현 시스템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데이터베이스를 인터넷에서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는 월드 와이드 웹(WWW) 기술이 사용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던 때였고 교회는 온라인 세계에 겨우 조금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1996년에 교회 웹사이트가 만들어졌으나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기술에 여전히 회의적인 데다가 경험도 없었다. 가족 역사부는 데이터베이스 관리용 온라인 플랫폼 구축 기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했다. 그들은 도움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힝클리 회장이 1998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교회는 이미 17개의 성전을 짓고 있었고, 새로운 방식에 따라 30개의 성전을 더 세울 예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운영 중인 51개의 성전 외에 총 47개의 성전이 더 생기게 될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주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온 때로부터’ 2000년이 되는 금세기 말까지 꼭 100개가 되도록 2개의 성전을 더 건립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발표는 릭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욱더 빠르게 가족 역사 사업에 속도를 내야 했다.
1998년 4월 초, 펠리신도와 베로니카 콘트레라스는 칠레 산티아고 성전을 방문했다. 펠리신도는 이제 막 와드 감독으로 부름받았고 자신이 보살피고 있는 성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와드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와드 회원들을 교회에 다시 데려오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기도하면서, 펠리신도는 특히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청소년 중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그중 14명은 선교 사업을 나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선교사로 봉사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칠레 전역에서는 자격을 갖춘 청년들의 10% 미만만이 선교 사업을 나가고 있었는데 펠리신도의 와드에서도 이 추세는 다르지 않았고,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였다. 펠리신도는 청소년들이 교회로 돌아와 선교 임지로 나갈 준비를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후 얼마 뒤, 후안이라는 18세 청남이 오랜만에 일요 모임에 참석했다. 후안은 제사 정원회 회원이었지만 축구 경기를 하기 위해 교회를 빼먹기 일쑤였다. 그는 재능 있는 선수였으므로 프로 선수로 뛰는 것도 가능하다고들 했고, 운동은 그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최근 후안은 외롭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영이 그에게 교회로 돌아가 선교 사업을 나가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하지만 후안은 삶을 바꾸려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간 후안은 펠리신도에게 대화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활동적인 회원이 되기로 했어요.”
펠리신도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후안을 감독실로 불러 접견했다. 두 사람은 선교 사업에 대한 후안의 소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선교 사업을 원하는 젊은 남성과 여성은 영적, 도덕적, 정서적, 신체적인 면에서 특정 표준에 부합해야 함을 알기에, 펠리신도는 후안이 목표를 세우도록 도와주었다.
펠리신도는 후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축복사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준비해서 주님께서 네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보자꾸나.” 그런 후에 그들은 후안의 선교사 지원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또한 펠리신도는 후안에게 몰몬경을 읽고 십일조를 내도록 권유했다. 권유를 받아들인 후안은 그때부터 펠리신도와 정기적으로 만나 선교 사업 준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펠리신도는 와드의 다른 회원들과도 협력했는데, 그는 모든 회원이 친구,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으로 양육되게 하라는 제일회장단의 권고를 인상 깊게 들은 터였다. 교회 본부의 새로운 지침에 따라, 그와 전임 선교사들은 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성찬식에 참석하게 했다. 또한 그와 와드의 회원들은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받는 느낌을 받고 영적인 양식을 취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펠리신도는 사람들에게 교회로 돌아오도록 권유할 때 성찬을 취하고 침례 성약을 새롭게 할 준비를 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돌아오는 회원들이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회개 등의 복음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주일학교 복음 원리반에 참석하게 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와드에서 봉사할 방법을 찾았다.
더불어 주중에 집회소를 개방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청소년들이 저녁에 축구 등의 운동 경기를 할 수 있도록 건물 뒤편 경기장에 불을 밝히는 것에 대한 허가를 얻었다. 와드 회원들은 가정의 밤 등의 활동을 위해 집회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활동의 일환으로 연극을 하고 칠레의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펠리신도는 와드 합창단을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합창단의 음악은 성찬식 모임에 영을 더해 주었다.
교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와드 외원들은 집회소를 더 잘 관리하기 시작했고 건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졌다. 펠리신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찬식 참석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성전에서 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난 1998년 중반, 호주 브리즈번 출신 귀환 선교사인 메리 맥케나는 미국 후기 성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5일 동안 열리는 Especially for Youth[청소년을 위하여, EFY] 대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유타주 프로보로 떠났다. 브리검 영 대학교 캠퍼스는 해마다 성인과 청소년을 위해 강좌와 영적 모임, 활동 등을 하는 교육 주간을 열었는데, 메리는 1년 전 이 모임에 참석해 EFY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프로보에 방문했던 그때, 메리는 영어권 후기 성도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연사이자 작가인 브래드 윌콕스의 강좌를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 메리는 브래드와 교육 주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멈춰 섰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호주의 청소년 지도자인데 호주에 형제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호주에서 첫 번째 지부가 조직된 지 150년이 지날 무렵, 호주의 교회 회원 수는 약 10만 명이 되어 있었다. 호주의 주요 도시에는 대부분 스테이크가 있었고 시드니에는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청소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중에는 선교 사업을 나가지 않거나, 성전에서 결혼하지 않거나,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청소년들도 있었다. 호주 청소년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고 느꼈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는 방법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모범이 필요했다.
브래드는 메리에게서 호주 청소년들의 어려움을 듣고 눈물을 글썽였고, EFY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느 스테이크 청소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EFY도 청소년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그러나 EFY는 현지 스테이크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브리검 영 대학교가 후원했으며 청년 독신 성인 조 고문들이 관리했다. 브래드에게서 EFY가 청소년에게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를 들은 메리는 EFY 같은 경험이 호주의 청남 청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는 다음 몇 달간 이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데 매진했다. 브리즈번과 인근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EFY 같은 모임을 만들기 위해 현지 스테이크의 성도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 년 후 메리는 다시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를 찾아, 캠퍼스의 EFY 책임자인 수전 오버스트리트를 만났다. 브리검 영 대학교가 북미 외 지역에서 열리는 EFY 대회를 후원할 수는 없었지만 수전은 메리와 브리즈번 위원회를 돕고 있었다. 수전은 메리를 조 고문 훈련 모임에 데려갔으며, 다른 EFY 지도자들에게 메리를 소개했다. 한편, 브래드 윌콕스와 또 다른 EFY 연사인 맷 리처드슨은 호주를 방문해 모임에서 말씀을 하기로 했다.
메리는 호주로 돌아갔고 그 후 몇 달 동안 위원회는 정기적으로 만나서 모임을 계획했으며, 참여 스테이크들은 각각 음식, 숙박, 영적 모임, 음악 및 그 외 업무를 계획하는 데 앞장섰다. 스테이크 회장들은 더 많은 연사들을 추천했고 메리는 조 고문으로 봉사할 청년들을 발굴했다. 그중에는 귀환 선교사도 있었고, 선교 사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선교사로 봉사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메리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훈련 과정을 준비했다.
위원회는 EFY를 후기 성도 회원뿐 아니라 브리즈번 지역의 모든 청소년들이 환영받는 행사로 만들고 싶었다. 수백 달러의 참가비를 내야 하는 미국 프로그램과는 달리, 호주 EFY는 지역 스테이크의 보조를 받아 적은 비용으로도 참석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또한 모든 참석자들은 대회에서 교회 표준을 따라야 했지만, 위원회는 회원이 아닌 청소년들도 초대하도록 스테이크들을 독려했다.
1999년 4월에 메리와 위원회는 북미 외 지역에서 열리는 첫 번째 EFY를 브리즈번의 한 스테이크 센터에서 개최했으며, 여기에는 브리즈번과 주변 지역에서 온 약 천 명의 청소년들이 참석했다. 브래드와 맷이 군중 앞에 서서 처음으로 한 일은 청소년들에게서 호응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EFY가 교회에서 열리는 일반적인 대회와 다르다는 것은 이내 확실해졌다.
청소년들은 며칠 동안 연사들에게서 배우고, 노래를 부르고, 춤과 장기 자랑을 즐겼으며, 간증을 나눴다. 한편 사진작가들은 마지막 날 슬라이드쇼를 위해 사진을 찍었다.
메리는 청소년들과 조 고문들이 EFY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대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더 큰 신앙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선교 사업을 나갈 계획이 없었던 조 고문들은 마음을 바꿔서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고, 대회 참석 당시에 교회 회원이 아니었던 일부 청소년들은 선교사를 만나서 침례를 받았다. 청년 독신 조 고문들은 청남 청녀 조직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각자의 와드로 돌아갔다.
EFY가 브리즈번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메리와 위원회는 다시 한번 대회를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 태평양의 섬 피지에 사는 줄리엣 토로와 그녀의 남편 일리에사는 교회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후기 성도였던 줄리엣의 어머니의 간청으로 부부의 큰 아이들이 일요 모임과 주중 세미나리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줄리엣은 이제 선교사들을 불러 자신을 가르치게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토론을 듣고 그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토로 부부의 자녀들은 1999년 3월에 교회에 들어왔고, 그로부터 2주 후에 줄리엣도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일리에사는 여전히 교회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줄리엣은 일리에사가 가족 중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 남편도 교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간곡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줄리엣이 침례받을 당시, 피지에는 4개의 스테이크와 약 12,000명의 회원이 있었다. 피지 성도들은 줄리엣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피지의 수도 수바에 성전이 건축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피지에 교회가 들어온 후, 회원들은 하와이나 뉴질랜드에 있는 주님의 집에 가기 위해 재정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곤 했다. 1983년에 교회가 사모아, 통가, 타히티에 성전을 헌납하자 이러한 부담은 줄어들었지만 셋 중 가장 가까운 곳이었던 통가 누쿠알로파 성전까지 가는 데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었다.
그런데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이 30개의 새로운 성전 중 하나가 들어설 곳으로 피지를 지명하자, 피지 성도들은 정말 기뻤다. 수바에 주님의 집이 생기면 피지 성도들과 섬나라인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키리바시, 나우루, 투발루 성도들이 훨씬 적은 경비로 더 자주 성전에 갈 수 있었다.
성전은 줄리엣이 침례를 받은 지 두 달 뒤인 1999년 5월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줄리엣은 브리검 영 대학교가 수바 소재의 교회 소유 중등학교인 피지 LDS 기술 대학에서 원격 교육 프로그램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리검 영 대학교의 슬로건은 “세계가 우리의 캠퍼스”였고, 학교의 관리자들은 저렴한 방법으로 전 세계 더 많은 회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프로보에 있는 교수가 피지에 있는 학생과 거의 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몇몇 대학 수준의 강좌에 중등교육 졸업자들을 등록시켰다. 브리검 영 대학교의 우수한 학생 진행자가 현지에서 직접 강좌를 관리하고, 강좌를 개설한 브리검 영 대학교의 교수가 약 9천7백 Km 떨어진 곳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낮은 학비를 내고 대학 학위를 얻기 위한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줄리엣은 이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다. 줄리엣과 일리에사는 대학생 때 처음 만났지만 일을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고 결국 가정을 꾸렸다. 줄리엣은 10년 넘게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줄리엣은 교육을 더 받고 싶었고 일리에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일리에사는 아내가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데 동의했다.
수업 첫날, 줄리엣과 학생들은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다수가 중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하거나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고 귀환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회 회원들이었다. 줄리엣과 같이 30대 초반인 학생은 몇 안 되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줄리엣은 자신은 학교에 돌아오기 너무 늦은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수업은 실용적인 사업 기술을 기르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줄리엣과 55명의 학우들은 두 학기 동안 회계, 경영, 경제, 영어, 조직 행동, 교리와 성약 강의를 듣게 될 것이었다. 줄리엣은 자신이 젊은 학생들만큼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 자신의 무지를 알아채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수업에서 바보로 보이기는 정말 싫었다.
학교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목요일 저녁, 프로그램 책임자인 제임스 제이컵이 줄리엣에게 그녀가 그날 밤 근처 교회 건물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줄리엣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제임스를 따라 교회로 갔다. 줄리엣이 도착했을 때 와드 회원 절반이 예배당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엣은 하얀 침례복을 입은 일리에사를 발견했다. 그는 비밀리에 선교사 토론을 들어왔고 이제 비로소 아내와 자녀들처럼 교회에 들어올 준비가 된 것이었다.
줄리엣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알았다. 마침내 자신의 가족이 신앙 안에 하나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가족과 함께 주님의 집에서 인봉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교회가 성전 건축을 서두르기 시작하면서 지도자들은 가족 역사부에 검색용 온라인 가족 역사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승인했다. 가족 역사부는 한 기술 업체를 고용하여 온라인 플랫폼과 인터페이스를 개발했고 가족 역사부 직원들은 새로운 웹사이트에서 사용할 데이터를 준비했다. 기술 업체는 9월이 지나기 전에 시험판을 만들어냈고, 릭 털리와 팀원들은 몇 달 안에 시험용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한편 팀에서는 데이터베이스의 이름으로 Ancestors[앤세스터스], RootSearch[루트서치], KindredQuest[킨드레드퀘스트] 등을 고민했지만, 결국 가족 역사부는 “FamilySearch[패밀리서치]”를 쓰기로 했다. 패밀리서치는 CD-ROM으로 데이터베이스 모음집을 배포하면서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예상대로 1999년 초에 시험용 데이터베이스가 준비되었다. 새로운 웹사이트에서는 사용자들이 4억 명 사망자들의 기록을 열람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다. 회원들이 가족 역사 사업에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얼마나 잘 활용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릭의 팀은 오백만 명의 방문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시험 기간 동안 누군가 웹사이트 주소를 외부에 이야기하면서 FamilySearch.org의 조회 수는 삼백만 회가 넘었고, 며칠 안 되어 조회 수는 1,100만 회가 되었다. 릭과 팀원들은 깜짝 놀라 웹사이트의 수용량을 늘려 출시일에 맞춰 사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준비를 갖췄다.
5월이 되자, 릭은 동시에 진행되는 두 개의 출시 모임 중 하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 디시로 날아갔다. 칠십인 정원회 회장단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가 솔트레이크시티 가족 역사 도서관에서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 릭과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웹사이트가 벌써부터 관심을 받자 릭은 기뻤다. 웹사이트 전체가 공개되지 않았는데도, 출시일 오전까지 웹사이트 조회수는 하루에 3천만 회를 기록했다. 모든 대륙 사람들이 패밀리서치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방문자 중에는 남극 사람도 있었다.
한 사용자는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인터넷으로 가족 역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정말 많이 절약됐습니다. 저는 집에서 가족 역사를 하면서 저녁을 만들고 빨래를 할 수 있어요. 모두 동시에 말이에요!”
또 다른 사용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사이트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해요. 이 웹사이트로 집에서 가족 역사를 시작하면 가족 역사 센터에서 쓰는 시간이 많이 절약될 거예요.”
다음날 릭은 미국의 유명한 아침 텔레비전 방송인 투데이 쇼에 출연했다. 릭은 진행자 케이티 커릭과 함께 카메라 앞 인터뷰석에 앉았다. 릭과 케이티 사이에는 새 패밀리서치 웹사이트를 보여 주는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케이티는 청중들에게 릭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족의 뿌리를 추적하는 일은 아주 인기 있는 취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 최대 규모의 계보 기록을 온라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케이티의 첫 질문은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 “왜 몰몬들은 그렇게 방대한 계보 기록을 가지고 있나요?”
릭은 대답했다. “우리는 가족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회원들이 가족에 관해 조사할 수 있도록 교회는 전 세계에서 기록을 수집합니다.”
릭은 자신과 케이티의 조상 한 명씩의 이름을 사용해서 사이트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조상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방법을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케이티는 이 웹사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손쉽게 가족 역사 사업을 할 수 있는지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이걸 사용하는 데 비용이 드나요?”
FamilySearch.org는 불과 며칠 만에 일억 회의 조회수를 달성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놀라운 출발을 보여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