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진리를 찾아서
1987년 3월 8일, BYU 근동 연구 예루살렘 센터에 80명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날 새벽, 라마트 라헬 키부츠에 이삿짐 트럭 3대와 버스 2대가 도착했다. 예루살렘의 남동쪽 변두리에 위치한 이 공동체는 BYU 유학생들이 지난 7년간 거주하며 공부해 온 곳이었다. 새로운 센터로의 이사를 갈망했던 학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소지품과 학교의 장비를 모두 차에 실었다. 새 숙소에 도착하자, 그들은 띠처럼 길게 늘어서서 책, 상자, 여행 가방 등을 스코푸스산의 오르막 계단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유학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데이비드 갤브레이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교직원들이 건물을 준비하느라 쉬지 않고 일했지만 건물의 일부는 아직 미완공 상태였다. 직원들은 세탁기와 건조기를 설치하고, 방을 배정하고, 물품을 구입했다. 어찌 된 일인지 센터에서 사용할 수건과 화장지를 구입하는 것을 잊어버리긴 했지만, 그것들은 텔아비브에서 오는 중이었다.
2년 전, BYU 총장 제프리 알 홀런드는 전도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정통파 랍비들은 이 합의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공사 현장과 시장실 밖, 그리고 데이비드의 집 앞에서 계속 시위를 벌였다.
교회는 호의를 사기 위해 이스라엘의 큰 홍보 회사 중 하나를 통해 신문과 텔레비전에 정보 제공 광고를 냈다. 교회에 우호적인 몇몇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정치인들에게 성도들의 정직을 보증하는 서신을 보냈다.
최근까지 예루살렘의 시 조사관은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는 누구도 건물을 점유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BYU 교직원은 센터의 완공된 구역, 즉 숙소와 일부 강의실이 있는 1층부터 4층까지에 대해 이사 허가를 받았다. 시 조사관은 시의 여러 부서가 허가를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학생들이 이사한 후, 데이비드는 그들을 큰 강의실로 불러 모아 건물 관리법에 대한 3시간짜리 오리엔테이션 모임을 진행했다. 이날은 센터 건립을 반대하는 이들의 항의조차 없이 평화롭게 지나갔다. 해 질 녘 학교에서는 예루살렘 구시가의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학교는 고대의 도시와 그곳에서 신앙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데이비드는 그날 늦게 홀런드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드디어 새 건물에 들어왔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여러 달을 시멘트와 석재로 된 건물에서 일했습니다. 학생들은 이 건물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으며, 차가운 석재 복도와 활기 없는 강의실들이 이제 행복의 기운을 풍깁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교회 회장이 된 지 얼마 후 러셀 엠 넬슨 장로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장로님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회 제반사를 담당하고, 더불어 동유럽 국가들을 개척하는 특별 임무를 수행하셔야 합니다.”
넬슨 장로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나는 심장을 여는 의사다. 국가를 여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중동부 유럽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간 후로, 교회는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이 임무는 외교 분야를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의아했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님 같은 변호사를 보내면 좋지 않을까?’
얼마 후, 미국과 소련의 외교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1986년 10월, 소련의 종교 문제 협의회 의장인 콘스탄틴 하르체프는 워싱턴 디시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을 만났다. 그는 소련에 종교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 모임에 대해 알게 된 넬슨 장로는 하르체프를 만나 논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총관리 역원 두 명을 보낼 것을 교회에 제의했다. 제일회장단은 넬슨 장로와 함께 칠십인 정원회의 한스 비 링거 장로를 보내기로 했다.
1987년 6월 10일 아침, 넬슨 장로와 링거 장로는 모스크바에 있는 하르체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하르체프는 업무차 출장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넬슨 장로가 말했다. “저희가 대표하는 교회가 러시아에 세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르체프는 성인 회원 스무 명이 거주하는 구역이나 도시에는 교회를 등록할 수 있다고 재빨리 설명했다.
넬슨 장로는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를 수 있는 방문자 센터나 읽기 공간을 소련에 열 수 있는지 물었다.
“안 됩니다.” 의장이 말했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넬슨 장로가 말했다. “회원이 있어야 인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경전을 읽고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이나 방문자 센터 없이는 회원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그쪽 문제죠.” 하르체프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며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고는, 그동안은 하르체프의 두 대리인과 이야기해 보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리인들은 넬슨 장로와 링거 장로에게 좀 더 많은 정보를 주었다. 그들 말로는, 소련 국민들은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공공연하게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나라 안에서 전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정부는 종교 서적의 수입을 규제했다. 개인들은 각자 집에서 종교 예배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예배에 초대하고, 관심을 표현한 사람들과 믿음을 나눌 수 있었다.
시내에는 예배 장소도 몇 곳 운영되고 있었다. 대리인들은 넬슨 장로와 링거 장로가 현지 러시아 정교회, 제칠일 안식일 재림파, 복음주의 기독교도, 유대교 교구의 지도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넬슨 장로와 링거 장로는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을 표방하는 국가에 종교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슨 장로와 링거 장로는 소련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요건을 생각하며 이 일은 달성 불가능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선교사도 읽기 공간도 하나 없이 교회가 인가를 받는 데 필요한 20명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 넬슨 장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붉은 광장으로 갔다. 이 대광장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소련 정부의 본부인 크렘린궁 바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고, 그는 날이 밝으면 그곳을 찾을 수천 명의 군중을 생각했다. 모스크바에 온 후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외과의, 미국인,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사도로서 모스크바에 왔다. 소련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 지금, 자신의 임무가 너무도 벅차게 여겨질 수 있었지만 그는 희망이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사도들은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어.’ 구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모든 족속과 나라와 방언과 백성을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복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위한 것이었다.
넬슨 장로는 방문 보고서에 중동부 유럽과 같은 곳의 문호를 개방하시는 주님의 권능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다. “우리는 모든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작더라도 함께 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4억 3천만 영혼의 운명과 구원이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1987년 8월 6일, 사도 댈린 에이치 옥스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많은 청중을 앞에 두고 연단에 서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발생한 폭탄 사건으로 후기 성도 2명이 목숨을 잃은 지 2년이 지났다. 당시 희귀 문서 판매상이었던 마크 호프만은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그가 교회의 성스러운 역사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기 위해 만든 몇몇 문서를 포함하여 교회에 팔고 거래한 문서 중 다수를 위조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2년 동안 BYU의 학자들은 사람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많은 것을 연구했다. 『BYU Studies』[BYU 스터디스]와 이 대학의 종교 연구 센터에서는 조셉 스미스와 그의 번역을 다룬 중요한 기사와 새 책을 출간했다. 또한 ‘고대 연구 및 몰몬 연구 재단’은 누구보다도 몰몬경과 값진 진주를 확고하게 지지하며 많은 학문적 저술을 남긴 휴 니블리의 전집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BYU는 교회의 역사, 교리, 관행에 관한 기사가 담긴 『Encyclopedia of Mormonism』[몰몬이즘 백과사전]을 출판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출판사와 협정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마크 호프만의 속임수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고, 이로 인해 BYU는 교회 역사와 호프만 사례를 주제로 학술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오늘, 옥스 장로는 그 비극을 둘러싼 사건들 가운데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학술회의에 왔다.
청중들도 알고 있듯 마크는 현재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지난 1월, 그는 실수로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폭탄 한 개를 포함해 총 세 개의 폭탄을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그가 수사관들에게 한 이야기는 복잡하고 비극적이었다. 그는 평생 교회 회원으로 생활했지만 청년 시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위조에 능란하게 되었고, 교회 역사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문서들을 위조했다. 나중에 그는 이러한 위조 문서를 만든 것이 돈을 벌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교회를 난처하게 하고 교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할 목적에서였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속임수를 숨기기 위해 계획적으로 두 사람을 살해했다.
옥스 장로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 대중 매체에서 이 살인 사건을 주목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부 논평자들은 고든 비 힝클리 회장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마크에게서 사기 문서를 매입한 것을 비난하며, 참으로 영감받은 지도자라면 위조 문서에 속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가 가장 의미심장한 호프만 문서들을 출판하고 학자들에게 이를 연구하도록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역사적 쟁점들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옥스 장로는 학자들도, 전국에서 인정받는 위조 문서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그 문서들을 진본으로 인정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신뢰의 태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개인적인 성역을 수행하려면, 해마다 만나는 수백 명 한 사람 한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지도자는 끊임없이 의심하기보다는 가끔 기대에 어긋나는 편이 낫습니다.” 그들이 사기꾼 몇 명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조언과 위로를 주기 위해 필요한 대가였다.
교회가 조직되기 전에도 주님께서는 조셉 스미스에게 그가 “항상 악인과 의인을 분별할 수는 없”으리라고 경고하셨다. 마크 호프만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만적인 사람들로부터 교회 회원과 지도자들을 항상 보호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옥스 장로는 말씀을 마치며, 모든 사람이 그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악에 맞서 순진하기만 하다면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는 모두 정직하고 객관적인 학문과 진실하고 존중하는 종교적 신앙이라는 도구로 진리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 더 조심해야 합니다.”
1988년 4월 30일, 아이잭 “아이크” 퍼거슨은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차드 은자메나의 열기를 느꼈다. 그 순간, 이곳의 날씨는 자신이 살던 유타주 바운티풀의 시원한 봄 날씨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상기했다. 주위에는 흰색 튜닉(상체를 덮는 의복의 일종—옮긴이) 차림에 머리덮개를 쓴 사람들이 보였다. 사막은 지평선을 향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제일회장단의 요청으로, 아이크는 교회 인도주의 프로젝트를 확인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사막 언저리에 온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교회는 금식 헌금을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돕는 데 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가 기근으로 황폐해진 후, 그 나라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아이들을 비롯해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나는 구호 캠프를 담은 텔레비전 영상은 성도들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1985년 1월 27일, 교회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특별 인도주의 금식을 하여 아프리카 구호를 위한 금식 헌금 6백만 달러를 모금했다.
몇 달 후, 칠십인 제일 정원회의 회장 중 한 명인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교회가 가장 좋은 일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인도주의 단체를 찾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다. 공중 보건 분야에서 박사 학위와 전문 경험을 가진 아이크는 유타주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인도주의 기부금을 관리하도록 고용되었다. 업무 첫날 그는 컴퓨터와 전화를 제공받았고, 금식을 통해 모금한 지원금 수백만 달러를 에티오피아에 분배할 권한도 받았다.
밸라드 장로의 활동을 바탕으로 아이크는 기부금을 가장 잘 사용할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다른 국제 원조 단체들에 연락했다. 그런 다음 에티오피아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인접 국가들에서 활동하는 원조 단체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했다. 첫 번째 금식이 있은 지 10개월 후, 교회는 기아 구제를 위해 두 번째 금식을 했다.
성도들의 기부가 에티오피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 복지 서비스부는 세계 다른 지역의 구호 기관과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이크는 카리브해에서 건강 박람회를 개최하고, 뇌성 마비에 걸린 헝가리의 어린이를 돕기 위해 의료 장비를 보내고, 볼리비아에 예방 접종이 제공되게 하는 등의 과정을 도왔다.
은자메나에 도착한 아이크는 차드와 니제르의 인도주의 현장을 방문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교회가 산림녹화 프로젝트에 수십만 달러를 기부한 니제르의 마지아밸리도 방문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계곡의 비옥한 농지와 점차 잠식해 가는 사막 사이에서 “생울타리” 역할을 하는 가뭄에 강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했고, 교회의 인도주의 협력 단체 중 한 곳을 대표하는 이들이 그를 차에 태우고는 조림지를 지나갔다.
아이크는 나무가 바람에 의한 침식 작용을 막고 양, 염소, 소에게 먹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나무는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연료 공급원이 되기도 했다. 이 지역의 농부들은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로 농업 생산량을 30퍼센트까지 끌어올려 사막의 황폐화로부터 많은 생명을 지켜냈다.
며칠 후, 아이크는 비행기를 타고 가나로 갔다. 이제 그곳의 교회에는 하나의 선교부와 수십 개의 지부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협력 단체인 아프리케어를 만났다. 아크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128킬로미터 떨어진 아보모수라는 마을에 자리한 약 5만 평 규모의 교회 복지 농장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농장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식량 공급량이 격감한 후 1985년에 만들어졌다. 미국에 있는 교회 복지 농장과 마찬가지로, 이 농장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동시에 독립성과 자립심을 키워 주었다. 현지 성도들은 가나 아크라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농장을 관리했다. 처음에는 모든 노동자가 자원봉사자였다. 하지만 이제 농장에서 노동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했으며, 노동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회원이었다.
세 번의 재배 기간이 지나자, 농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옥수수, 카사바, 플랜테인(요리용 바나나) 등의 작물을 생산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농장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유지비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아프리케어 컨설턴트들은 아보모수 사람들이 농장을 협동조합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교회가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농장이 현지 사회에 기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면 전통적인 재배 기술을 사용하는 현지 농부들도 지역 사회에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을 것이었다. 또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농장에 약간의 재정적 지원을 하되, 그 성과에 대해서는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아이크와 컨설턴트들은 가나를 떠나기 전에 현지 부족장을 포함한 아보모수 지역 사회 구성원 150여 명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계획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많은 농부들이 협동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를 보였다.
같은 해 4월, 마누엘 나바로는 아버지를 찾아와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페루의 리마에서 지내며 그곳의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입학에 도전하려면 6개월을 더 공부해야 했다.
“마누엘, 대학 진학을 계속 준비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선교 사업을 준비하고 싶은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마누엘은 선지자가 봉사할 수 있는 교회의 모든 합당한 청년 남성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축복사의 축복문에도 선교 사업이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등록한 후에 선교 사업을 나갈 계획이었다. 그는 선교 사업에 앞서 대학교에 먼저 등록해 두면 선교 사업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시간을 두고 결정하라고 했다.
마누엘은 곧바로 몰몬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렇게 하면서 결정을 인도하는 영을 느꼈다. 이튿날, 그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선교사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좋다. 너를 도와주마!”
마누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근처 은행의 직원들을 몇 명 알고 있었기에 마누엘은 자신이 은행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차에 태우고 시내에서 지부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는 현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감독관에게 공사팀에 마누엘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이죠.” 감독관이 말했다. “아드님에게 일을 맡기겠습니다.”
마누엘은 6월에 공사팀에 합류했고, 급여일이 될 때마다 감독관은 수표를 건네며 선교 사업에 사용할 것을 상기시켰다. 마누엘의 어머니도 그가 수표의 금액 대부분을 선교사 기금과 십일조로 떼어 두도록 도와주었다.
선교 사업에는 큰 비용이 들었는데, 페루의 경제난으로 인해 그곳의 많은 성도들은 선교사 기금을 전액 부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년 동안 모든 전임 선교사들은 자신과 가족, 회원들, 심지어는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존하여 선교사 기금을 마련했다. 킴볼 회장이 자격을 갖춘 모든 청년 남성들에게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촉구한 후, 교회는 회원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반 선교사 기금에 헌금하도록 권유했다.
이제 선교사 기금의 3분의 1을 현지에서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나머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선교사들은 일반 기금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페루와 다른 남미 국가에서는 현지 회원들이 선교사들에게 매일 한 끼의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돈을 절약하도록 돕는 제도를 마련했다. 마누엘은 선교사 기금의 절반을 지불했고 나머지 비용은 부모가 지불하기로 했다.
마누엘은 약 6개월간 일한 후 선교사 부름장을 받았다. 아버지는 부름장을 바로 열어 봐도 좋고, 일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성찬식에서 읽어도 좋다고 말했다. 마누엘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가 퇴근할 때까지는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어머니가 집에 도착하자, 마누엘은 봉투를 열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의 서명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부름장의 나머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고, 한 단어 한 단어에 심장이 뛰었다. 마누엘은 자신이 페루 리마 북 선교부에서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뻤다.
그는 늘 자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었다.
1989년 4월 연차 대회 마지막 모임에서,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의 연단 근처에 앉아 연사들의 영감받은 메시지를 기쁘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말씀할 시간이 되자, 그는 말씀을 전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는 제2보좌인 토마스 에스 몬슨에게 자신이 그 모임을 위해 준비한 말씀을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선지자는 교회의 다양한 그룹, 즉 청녀와 청남, 어머니와 아버지, 독신 성인 여성과 독신 성인 남성에게 직접 말씀을 전했다. 이제 그는 어린이들에게 말씀하고 싶었다.
“저는 여러분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의 말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당시 12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교회의 초등회 조직에 속해 있었다. 1988년에 본부 초등회 회장인 드완 제이 영과 초등회 임원회는 몰몬경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라”라는 문구를 그해의 주제로 선택했다. 또한 영 회장과 임원회는 어린이들에게 몰몬경에 대해 배우도록 권유했다.
벤슨 회장은 전 세계 어린이들이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들은 가정의 밤과 초등회에서 몰몬경에 대해 노래하고, 몰몬경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 보고, 몰몬경의 메시지를 가르치는 게임을 했다. 어떤 어린이들은 전 세계에 배부될 몰몬경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벌기도 했다.
벤슨 회장은 그 연차 대회에서 어린이들에게 날마다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권고했다.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을 감사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벤슨 회장은 성역을 행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해 여러 번 말씀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사명 중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몰몬경을 인용했다. 성도들이 곧 사용할 수 있게 될 새로운 초등회 노래책은 그런 메시지를 더 강하게 담고 있었다. 『어린이 노래책』에는 “구주”를 주제로 한 섹션이 새로 생겼으며, 이전 노래책인 『다 함께 노래를』보다 예수님에 관한 노래가 더 많이 수록되었다.
벤슨 회장은 그리스도께 개심하고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활용하도록 거듭 권유했다. 선지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 일은 우리 개인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동시에 그는 성도들에게 의롭게 살 것을 격려했다. 어린이들에게 했던 말씀에서 그는 자신의 믿음을 수호할 용기를 가지라고 했다. 또한 그는 사탄이 그들을 유혹하려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탄은 사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러분이 외설물, 마약, 불경한 언행, 부도덕 등과 같은 나쁜 일에 빠지도록 유혹하게 합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은 비디오, 영화, 텔레비전을 피하라고 했다.
말씀이 끝나갈 무렵, 벤슨 회장은 두려움 속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아동 학대와 방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고, 교회는 현지 지도자들이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지침을 발표했다.
선지자는 말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는 분에게 이야기하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님, 교사, 감독 또는 친구가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몬슨 회장이 자리에 앉은 후, 청중은 미리 녹화된 영상을 시청했다. 그 영상에서 벤슨 회장은 그의 무릎 주위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런 다음 태버내클 합창단이 “난 하나님의 자녀”를 불렀고, 폐회 기도로 대회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