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실재하며 측량할 수 없는
2011년 2월, 마르코와 클라우디아 비야비센시오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잡지 편집자인 조슈아 퍼키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깜짝 놀랐다. 작년에 조슈아는 잡지에 전 세계 성도들에 관한 기사를 더 많이 게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에콰도르 엘코카에 왔었다. 그는 며칠 동안 비야비센시오 가족과 지부의 회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교회 모임과 세미나리 수업에 참석하고, 그곳 주민들의 사진을 찍었다.
조슈아가 방문했을 당시 엘코카 지부는 겨우 설립 1주년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 지부는 성장했고, 28명이던 회원 수가 83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마르코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필요한 존재이며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도록 지부 회원들이 노력한 덕분에 그런 성장이 가능했다고 여겼다. 마르코는 조슈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새로운 개종자에게는 친구와 책임, 하나님의 선한 말씀에 의한 양육이 필요하다고 하신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여전히 지부 청녀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던 클라우디아도 동의했다.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인상이 좌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녀들에게 각 영혼이 주님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칩니다.”
많은 회원들이 조슈아에게 진심 어린 이야기와 간증을 나눠 주었다. 지부 상호부조회 회장인 로우데스 첸체는 자신과 회장단이 지부 여성들에게 봉사하면서 경험한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매들이 문제를 겪고 있다면 곁에서 도와줍니다. 우리는 자매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와 지부의 도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조슈아는 비야비센시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교회 잡지에 게재할 짧은 영상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등회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온라인 시리즈에 포함될 영상이었다. “One in a Million[백만 명 중 한 명]”이라고 하는 이 시리즈에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간증을 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영상 중에는 우크라이나 소년이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의 권유로 키이우의 새 성전 초석에 회반죽을 바른 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있었고, 자메이카 소녀가 학교에서 좋은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있었다.
각 영상은 약 1분 30초 분량이었다. 조슈아는 마르코와 클라우디아에게 그들의 아들인 여섯 살 사이르를 영상에 담아도 될지 물었다. 친척들과 떨어져 지내고 초등회 반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기간은 사이르에게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더 많은 어린이들이 교회에 오면서 사이르는 다시 초등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영상이 사이르에게 자신의 신성한 정체성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사이르에게 좋아하는 일, 음식, 교회 찬송가에 관한 질문을 보냈고, 클라우디아와 마르코는 사이르가 답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이르는 클라우디아와 함께 녹음하고 싶어 했고, 클라우디아는 아들과 함께 녹음한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음성 파일을 조슈아에게 보냈고, 그 파일에 조슈아가 엘코카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몇 장이 더해졌다. 얼마 후 영상이 완성되어 온라인에 게시되자, 비야비센시오 가족은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을 시청했다. 사이르는 완성작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영상은 가족사진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스페인어로 “제 이름은 사이르이고, 저는 에콰도르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사이르의 조그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에는 엘코카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등장했고, 사이르는 좋아하는 음식과 스포츠, 그리고 엘코카의 다채로운 새와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이르는 지부가 설립되기 전에 엘코카로 이사했던 일도 이야기했다. “저희가 갈 교회가 없었어요. 곧 다른 가족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더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어요.”
“우리는 모두 선교사예요! 이제 초등회에 친구들이 많아요. 저희는 전 세계 다른 어린이들처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노래해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는 ‘난 하나님의 자녀’예요.”
아들과 함께 앉아 있던 클라우디아는 복음이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를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다. 그 영상은 하나님께서 엘코카 같은 장소를 지켜보시고 그녀와 마르코, 사이르, 그리고 지부의 성도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는 사이르가 영상을 통해 그가 초등회 같은 크고 중요한 조직의 일원이며 어린 나이에도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2011년 2월 말, 에마 에르난데스는 아버지에게 직접 졸업식 초대장을 전했다. 6년 전, 아버지는 에마가 지금의 남편 엑토르 다비드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엑토르가 에마의 학업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구 교육 기금의 재정 지원을 통해 에마는 온두라스의 명문 대학에서 마케팅 학위를 취득했다.
아버지는 에마가 학위를 받아 기뻤고, 에마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가 딸의 결혼에 대해 마음을 바꾼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결혼식이 다가올 무렵, 에마는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기도했었다. 어머니도 엑토르 다비드가 딸의 좋은 짝임을 그가 알아보게끔 도와주었다. 최근에 에마의 아버지는 여러 해 만에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부지런한 장로 정원회 회장의 성역과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과 성약을 맺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결합된 결과였다.
에마는 아버지가 교회로 돌아온 것이 기뻤다. 그녀와 어머니는 그의 마음이 변화되어 가족이 함께 주님의 집에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수년 동안 기도해 왔다. 이 기도는 2010년 4월 1일 아침에 응답되었다. 그날 몇 명을 제외한 에마의 온 가족은 영원히 서로 인봉되기 위해 과테말라시티 성전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았고 그녀가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성전에 들어섰을 때 성전 정원은 새로 심은 꽃들로 꾸며져 있었다.
인봉실로 들어간 에마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부모님을 보고 영을 느꼈다. 그들이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는 화평과 사랑의 기운이 감돌았다. 의식이 끝난 후, 그들은 해의 왕국실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에마는 아버지의 품에서 전해지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이 인봉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그녀와 엑토르 다비드는 가정을 꾸리고 늘 교회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둘 다 교육 목표를 달성했다. 에마는 마케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했고, 이제 이 분야에서 일자리를 얻을 만한 지식과 도구를 갖추고 있었다. 엑토르 다비드는 금융학 학위를 취득했고, 두 사람 모두 더 큰 수입으로 가족을 돌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마가 공부하는 동안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성숙해진 것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학업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학위를 마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영구 교육 기금 덕분에 그런 걱정은 사라졌고, 가족의 지원으로 꿈을 좇을 힘을 얻으며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받았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커져, 그녀와 엑토르 다비드는 교회에서의 봉사를 구주께 감사드리고 사랑을 드러낼 기회로 여겼다. 이제 에마는 자신이 받은 교육을 활용하여 영구 교육 기금에서 빌린 돈을 갚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2011년 3월 4일 에마의 졸업식 날, 가족들은 그녀의 졸업식을 위해 대학 체육관에 다시 모였다. 그녀는 검은색 학사모에 가운을 맞춰 입고 졸업식 예행연습을 하기 위해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일찍 도착했다. 가족이 도착했을 때, 에마는 엑토르 다비드와 오스카르 다비드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다른 친척들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줄지어 서 있는 대학 관계자들 앞을 걸으며 그들과 악수를 하고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을 때, 에마는 자신이 받은 축복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졸업식이 끝났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안아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우리 딸 축하한다.” 아버지는 어깨의 짐을 벗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편안하게 부담을 내려놓은 모습을 보고 기뻤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신이 공부하는 동안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엑토르 다비드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고마워했다.
에마는 엑토르를 안고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2011년 4월 2일 아침,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컨퍼런스 센터 연단에 서서 교회의 연차 대회를 위해 모인 수천 명의 성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건물을 계획했을 당시만 해도 이 건물이 가득 차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번 보십시오.”
이 대회는 그가 교회 회장으로 봉사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열렸으며, 이 부름으로 인해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바쁘게 지냈다. 그는 이제 1,400만 명이 넘는 전 세계 성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여러분의 신앙과 복음에 대한 헌신, 서로에게 보이는 사랑과 염려, 와드나 지부 또는 스테이크나 지방부에서 여러분이 펼치는 봉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후기 성도라는 것이 신이 나는 시기였다. 반세기 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특히 미국에서 교회의 평판이 좋다는 것에 대해 기뻐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교회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았다. 수십 년간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선교 사업, 효과적인 홍보 활동, 크고 작은 인도주의적 지원 프로젝트, 성도 개개인이 일상에서 보이는 겸손한 행동을 통해 교회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친숙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도 교회는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2002년 동계 올림픽 기간에 나온 교회에 관한 보도는, 2002년 올림픽의 조직 위원회 위원장이자 저명한 후기 성도 정치가인 밋 롬니가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면서 쏟아진 각광의 서막으로 드러났다. 그는 2008년에는 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2012년에 다시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높았다. 후기 성도들은 국회의원과 재계 지도자로서 화제가 되었다.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와 프로 스포츠 경기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성도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록스타나 콘서트홀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은 이들도 있었다. 또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이들도 있었는데, 몇몇 소설은 블록버스터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교회와 회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를 오해하거나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몬슨 회장과 지도자들은 사회가 오랜 기독교 가치관과 교회의 가르침 및 관행에서 멀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런 경향은 결혼에 대한 믿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최근 몇 년간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성 소수자) 옹호자들은 동성 결혼에 대한 권리를 얻고자 로비 활동을 벌였다. 교회와 신앙에 기반을 둔 여러 단체들은 남녀 간의 결혼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확언하며 이러한 조치에 반대해 왔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2008년 11월 캘리포니아에서,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규정하는 주 헌법 개정안에 대해 주민 투표를 하게 됐을 때였다. 교회는 신앙에 기반을 둔 여타 단체들과 함께 이 제안을 지지하는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지도자들도 캘리포니아주의 회원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홍보하도록 격려했다.
이 제안은 가까스로 통과되었지만 교회는 투표에서의 역할로 인해 상당한 비판을 받았고 일부 사람들은 성전 밖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몬슨 회장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결혼에 대한 교리와 교회의 표준을 수호하는 데 끊임없이 헌신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에 대해, 그리고 결혼을 남녀 간의 성스러운 결합으로 규정하고 가르치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이 결혼에 관해 교회와 똑같은 믿음을 가진 다른 단체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 소수자 집단과의 공통점을 찾는 데 점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혼과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후기 성도들에게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사랑하고 존중하며 성 소수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규탄하도록 독려했다. 2009년 11월, 교회는 솔트레이크시티 의원들과 함께 성적 성향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정하게 주택을 가질 권리를 지지했다. 성 소수자인 교회 회원들은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들을 위해 더 나은 자원을 제공하고 더 깊은 공감을 끌어 내기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개발된 자원 중에는 새로운 교회 웹사이트도 있었다. 교회의 새 웹사이트에서는 성도들과 그 가족들의 경험과 간증을 담은 기사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수잔 바우저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도 그중 하나였다. 후기 성도인 그녀는 여성에게 마음이 끌리는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수년간 몸부림쳤다. 그녀는 계속 교회에 나갔지만 때로는 마음이 두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여정을 함께해 준 친구들과 가족의 도움으로 그녀는 더 평화로운 지점에 도달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지금 내 일부이고 앞으로도 내 일부일 거야. 난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할 수 있어. 구주께서는 여전히 내 삶에 함께하실 수 있어.’ 그녀를 향한 구주의 사랑은 이따금 그녀가 느끼는 공허함을 채워 주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자신의 말을 기꺼이 듣고자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고, 그것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에게는 그저 제 얘기를 들어주며 저에 대해 알기를 원했던 신권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몬슨 회장은 2011년 4월 연차 대회를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구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빛을 비추도록 촉구했다. “우리가 우리 교회 회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손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는 국가에서 훌륭한 국민이 되고, 거주하는 지역 사회에서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정직과 성실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강조했다. 최근 언론의 관심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들어보았지만 교회의 신앙과 핵심 메시지에 대해서는 각자 매우 다양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대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이 달라져야 함을 알았다. 후기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심도 없어야 했다.
2011년 8월 17일, 실비아와 제프 얼리드는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로 날아갔다. 나흘 후면 실비아가 태어나고 자란 그 도시에서 주님의 집이 헌납될 것이었다. 이 성전은 그녀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으로 부름받고 얼마 후에 발표되었는데, 그녀는 새로운 책임으로 인해 착공식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일회장단의 초청으로 헌납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녀와 제프는 감격했다.
실비아는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에서 4년 동안 봉사했다. 그 기간 동안 신앙, 가족, 구제라는 주제는 상호부조회 조직의 모든 노력을 이끌어 왔다. 상호부조회 회장단은 개정된 『교회 지침서』를 사용하여 현지 상호부조회 지도자들이 계시를 받고, 교회 평의회에서 일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성역을 베풀고, 기타 책임을 수행하도록 훈련하기 위해 세계 각지를 방문했다. 실비아도 5개 대륙의 20개국에 있는 상호부조회 자매들을 방문했다.
또한 회장단은 상호부조회 임원들과 협력하여 전 세계 새로 부름받은 지도자들에게 즉각적인 훈련을 제공하는 영상을 제작했다. 이 영상들은 상호부조회 웹페이지에서 접속할 수 있었으며, 교회 웹사이트의 새로운 온라인 교육 자료 모음인 ‘지도자 훈련 자료실’에 포함되었다.
방문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그들이 집중하는 또 하나의 주된 일이었다. 수년간 교회 잡지에서는 간단한 방문 교육 공과를 게재해 왔다. 이제 이 공과에 더해 자매들의 가르침에 힘을 실어 줄 제언과 자료들이 함께 실렸다. 또한 실비아의 감독하에 상호부조회 임원들은 청녀들의 상호부조회로 옮겨 가는 과정을 지원할 방법도 모색했다. 실비아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동안 현지 상호부조회 및 청녀 지도자들과 자주 이야기하며 두 조직이 더 빈번하게 교류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조직 간의 격차를 해소하게 했다. 또한 그녀는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새로운 회원들에게 다가가고 청녀들의 멘토가 될 방법을 찾도록 격려했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에게서 받은 역사 자료에서 영감을 얻은 상호부조회는 제일회장단으로부터 임무를 받아 『내 왕국에 속한 딸들: 상호부조회의 역사와 업적』이라는 책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책은 전체에 삽화가 들어가 있고, 읽기 능력에 관계없이 모든 독자가 읽을 수 있는 단순한 문체로 쓰였다. 또한 이 책은 23개 언어로 번역되어 교회의 여성들에게 배부될 예정이었다. 회장단은 자매들이 이 책을 통해 과거로부터 배우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들의 영적 유산을 더 잘 이해하며, 신성하게 부여된 상호부조회의 사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산살바도르 성전 헌납식 전날, 실비아와 제프는 성전 건물을 둘러보며 화려한 세부 장식에 감탄했다. 훌륭하게 조각된 목재부며, 엘살바도르 국화인 유카 꽃이 새겨진 채 고정된 유리와 황동 장식은 정말 아름다웠다. 실비아는 성전 입구 부근 추천서 확인대 뒤편에 걸린 구주를 그린 원본 그림도 보게 되었다. 그분은 여덜아홉 살쯤 되는 두 어린이를 팔로 감싸 안고 계셨는데, 중미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배경은 엘살바도르 도처의 초목처럼 무성하고 푸르렀다. 모든 자녀를 향한 구주의 사랑에 감동한 실비아는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헌납식에서 실비아는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엘살바도르 교회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었다. 세계 곳곳을 다니고 있었지만 고국에서 교회가 번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강력한 경험이었다.
해의 왕국실에 앉은 그녀는 자리를 가득 채운 현지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 다수는 나이가 많았고, 그녀처럼 엘살바도르에 교회가 새로 생겼을 때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과 역경에 처할 때가 많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약에 충실했다. 성전이 문을 열면 그들 중에서 의식 봉사자가 나올 것이었다. 그들이 수년 동안 이 성전을 위해 기도해 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실비아는 십 대 시절인 1959년에 교회에 들어왔다. 당시에 가장 가까운 성전은 가는 데만 나흘이 걸리는 애리조나주 메사에 있었다. 이제 엘살바도르에는 10만 명의 성도가 있었다. 그곳의 교회는 실비아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번영해 있었다.
실비아는 자신이 말씀할 차례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생각하고 기도하고 성신을 구할 때 줄곧 사용한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이 헌납식에서 그녀는 모국어로 말씀할 예정이었으며, 그 덕분에 마음 깊이 느끼는 감정을 훨씬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님의 집 안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전 구역 내 여러 집회소에서 방송으로 헌납식을 시청하는 수천 명의 성도들에게도 말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제 마음은 행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전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은 실재하며 측량할 수 없는 축복임을 간증드립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입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성전을 성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눈과 마음은 영원히 이곳에 거할 것입니다.”
6주가 지난 2011년 10월 2일, 콩고 민주 공화국의 루푸타 집회소의 휘발유 발전기에 시동이 걸렸다. 건물 안에는 윌리와 릴리 비넨을 포함한 약 200명의 성도들이 예배실에 설치된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시 후면 교회의 제181차 반연차 대회의 일요일 저녁 방송이 시작될 터였다. 방송은 프랑스어로 통역되는데, 이는 전 세계 성도들이 대회를 시청할 수 있는 51개 언어 중 하나였다. 루푸타의 교회 회원들은 시온의 스테이크 회원으로서 함께 모여 첫 번째 연차 대회를 시청할 예정이었다.
3개월 전에 루푸타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교회가 급속히 성장한 것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넨 가족이 성전에서 인봉된 해인 2008년, 루푸타에는 1,200여 명의 후기 성도가 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곳에는 전임 선교사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 3년 동안 윌리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충실한 지부 선교사들과 협력한 끝에 지방부 성도들의 수를 두 배 이상 늘려 놓았다. 이곳에 깨끗한 물을 공급한 교회의 역할도 분명 여기서 한몫을 했다. 심지어 이 지방부에서는 콩고 민주 공화국과 아프리카, 그리고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34명의 전임 선교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칠십인 정원회의 폴 이 컬리커 장로와 알프레드 켱구 장로가 윌리를 새로운 스테이크의 회장으로 부르자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루푸타 교회에는 스테이크 회장으로서 유능하게 봉사할 수 있는 경험 많은 신권 지도자들이 여럿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끌 차례 아니었나?’
스테이크가 조직된 6월 26일에 윌리는 컬리커 장로와 켱구 장로를 도와 스테이크의 청년 자매와 형제 열다섯 명에게 전임 선교사 부름장을 배부했다. 그 후에 윌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고 미소를 지었다. 종족 분쟁과 유혈 사태로 고향에서 내몰렸던 20년 전, 그는 주님을 위해 전임 선교사로 봉사할 기회를 빼앗겼었다. 하지만 수년간 루푸타에서 헌신적으로 교회에 봉사한 덕분에 그는 자신이 갖지 못했던 기회를 자라나는 세대의 성도들에게 줄 수 있었다.
대회의 방송이 시작되자, 윌리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연사들의 말씀을 들었다. 보통 몬슨 회장은 대회를 시작할 때 첫 번째 연사로 말씀했지만 건강 문제 탓에 컨퍼런스 센터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중간 찬송이 끝난 후, 그는 연단으로 다가가 대회에 참석한 성도들을 환영하며 쾌활한 음성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전했다.
그는 말했다. “분주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더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지는데, 지난 6개월 역시 그랬습니다.”
몬슨 회장은 엘살바도르 성전의 헌납식과 미국 남부 애틀랜타 성전의 재헌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전 건립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신축될 성전 몇 곳을 발표하겠습니다.”
윌리는 귀를 기울였다. 최근 루푸타의 교회 지도자들은 성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루푸타에서 열린 첫 번째 스테이크 대회에서는 성도들이 주님의 집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집중해서 전해진 말씀이 많았다. 루푸타에서는 비넨 가족 외에는 요하네스버그 성전에 가 본 성도가 거의 없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여권을 취득하기가 비교적 수월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기 위한 여행 비자는 그렇지 않았다. 즉, 콩고 민주 공화국의 많은 성도들은 여권 만료를 걱정하며 속절없이 기다린 끝에야 겨우 비자를 받고 성전에 갈 수 있었다.
몬슨 회장이 발표한 첫 번째 성전은 유타주 프로보시의 두 번째 성전이었다. 최근에 프로보시의 유서 깊은 태버내클이 사고로 불이 붙어 불길이 외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린 터였다. 이제 교회는 이 건물을 다시 지어 주님의 집으로 용도를 변경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몬슨 회장은 이어서 말했다. “저는 또한 기쁘게 다음 지역에 세워질 새로운 성전을 발표합니다. 콜롬비아 바랑키야, 남아프리카 더반,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 …”
“킨샤사”라는 말이 들리기 무섭게 윌리와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어나 환호했다. 모두가 정말 깜짝 놀란 소식이었다. 곧, 콩고 성도들은 여행 비자나 여권 만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터였다. 선지자의 이 간결한 발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때까지 교회가 콩고 민주 공화국에 성전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나 암시는 전혀 없었다. 언젠가 주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집을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만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