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손을 잡고
2006년 초, 콩고 민주 공화국의 윌리 비넨은 수도 킨샤사로 이사해 전기 공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킨샤사에서 약 1,500킬로미터 떨어진 루푸타 마을에서 농부로 일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지부 선교사로 봉사하는 동안 침례주었던 릴리라는 젊은 여성과 결혼해 있었다. 그들은 두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지난 2년 동안 릴리와 아이들은 킨샤사에 살고 있었다. 그동안에 윌리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다시 학교에 다니는 데 필요한 돈을 벌었다.
3월 26일, 선교부 회장인 윌리엄 메이콕은 루푸타에 첫 지방부를 조직하고 윌리에게 지방부 회장으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주었다. 윌리는 자신이 없었지만 이사 계획을 단념하고 부름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릴리와 아이들은 루푸타로 돌아왔고, 윌리는 가족과 함께 지내며 새로운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교회를 이끌도록 부름받은 성도는 윌리만이 아니었다. 최초의 전임 선교사들이 가나와 나이지리아에 온 지도 거의 30년이 지났으며, 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20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다. 이제 콩고 민주 공화국, 케냐, 콩고 공화국, 가나,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마다가스카르,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짐바브웨에 스테이크가 있었다. 따라서 구주와 그분의 회복된 교회의 가르침에 굳건한 기초를 둔 강한 현지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필요했다.
노베르트 오운류라는 코트디부아르 사람은 대학교에 다니던 1995년에 교회에 들어왔다. 2년 후 코트디부아르에 첫 스테이크가 조직되었을 때 그는 감독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스테이크가 분리되었을 때는 스테이크 회장이 되었다. 5년 후, 그와 아내 발레리는 새로 창설된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선교부의 선교부 지도자로 부름받았다.
같은 시기에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는 전직 방송 기자이자 라디오 디제이였던 아비가일 이투마가 자신의 와드에서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외향적이고 재미있는 아비가일은 주변 모든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녀의 와드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다시 교회로 데려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녀는 이 여성들 중 한 명을 자신의 2보좌로 불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매들을 만나고 교회에 초대했다.
아비가일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힘을 믿었다. 일요일이면 그녀와 보좌들은 방문 교육에 관한 공과를 거듭 가르쳤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포기하지 않았고, 얼마 후 점점 더 많은 자매들이 서로 성역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호부조회 모임 참석률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편, 케냐의 조셉과 글라디스 시타티는 교회에서의 봉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시타티 가족은 1986년 3월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전에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따금 그들은 현지 기독교 교회에 참석했지만 영적으로 강화되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일요일이면 조셉은 일을 하거나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런데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시타티 가족은 교회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고, 교회가 자신들의 삶의 중심이 되자 가족끼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조셉은 수년 동안 지부 및 지방부 회장으로 봉사했으며, 1991년에는 케냐에서 교회가 공식 인가를 받도록 힘을 보탰다. 2001년에 케냐 나이로비 스테이크가 조직되었을 때, 그는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3년 후인 2004년 4월에는 칠십인 지역 관리 역원이 되었다. 한편 글라디스는 지부에서 주일학교, 초등회, 청녀, 상호부조회, 세미나리 교사는 물론 상호부조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1991년에 시타티 가족은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성전으로 가서 케냐인 가족으로서는 최초로 현세와 영원을 위해 인봉되었다.
조셉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모두 아주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전에서 인봉된 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서는 열여덟 살의 블레이크 맥키온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 휴학이 1년 이상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면 2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많은 또래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졸업 후 단기 일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블레이크는 집 근처 수영장에서 인명 구조원으로 일해 왔고, 그 일을 좋아했다. 최근에 그는 시드니의 인기 해변인 본다이비치의 인명 구조원에 관한 새로운 리얼리티 TV 쇼, Bondi Rescue[본다이 레스큐]를 보고 해양 인명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본다이비치는 그의 집에서 약 6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일주일간의 “직업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통해 일용직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또한 그는 해양 인명 구조원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체력 검사도 받았다.
검사는 어려웠지만 블레이크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집사 시절 스테이크 청남들과 함께 산악자전거를 탄 후로 운동에 흥미가 생겼다. 20세기 초에 교회는 청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스카우트 활동을 채택했지만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호주에서는 현지 단위 조직의 약 3분의 1이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했지만, 블레이크의 스테이크는 스카우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마련한 특별 안내서를 사용하여 청남 활동을 계획했다.
청남들을 데리고 산악자전거를 타러 갔던 지도자인 맷 그린은 블레이크에게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결합한 스포츠인 철인3종경기를 소개했다. 맷의 지도와 조언으로 블레이크는 절제력과 집중력을 길렀다. 그리고 본다이비치에서의 체력 검사에서, 블레이크는 수년간 공들인 훈련과 시합의 결실을 보았다.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훈련생 인명 구조원으로 고용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블레이크는 평일에 해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인명 구조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본다이 레스큐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쇼의 제작자들은 곧 촬영진에게 그가 인명 구조원 장비를 사용하고, 해변에 오는 사람들을 돕고, 해변 규칙을 시행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을 녹화하게 했다. 그들은 그가 처음으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는 순간도 포착했다.
블레이크는 그 일을 즐겼다. 직원 중 유일한 교회 회원이었던 그는 삶과 가치관이 자신과는 매우 다른 동료 인명 구조원들 때문에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그는 자신의 표준을 낮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2007년 초, 블레이크와 인명 구조원들은 위험한 구역의 물속에서 한 남성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대응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45분 동안 수색했지만 익사했거나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고, 해변에 온 2만 5천 명 중 실종된 친구나 가족을 신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인명 구조원들은 자신들이 본 사람이 해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기를 바라며 수색을 포기했다.
2시간 후, 한 청년이 구조탑에 있던 블레이크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잠시만 거기 계세요.”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인명 구조원들에게 가서 사실을 알렸다.
그들은 구조용 보드와 제트 스키를 타고 다시 물속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상공에서 바다를 순찰할 수 있도록 경찰 헬리콥터에도 연락했다. 한편 블레이크는 청년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남아서 실종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블레이크는 그들에게 침착하게 말하면서도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까 걱정이 됐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구조대원 한 명이 파도 아래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한 인명 구조원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 남자를 데리고 해변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를 소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블레이크는 그 소식을 듣고 몸이 휘청였다. ‘나도 다른 구조원들도 꼼꼼히 해변을 살폈는데 어떻게 그 남자를 놓친 것일까?’ 블레이크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 겪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는 죽음이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밤 블레이크가 일을 마쳤을 때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이 목격한 비극의 냉혹함에 대해 생각하면서 구원의 계획을 되새겼다. 평생 그는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 후 몇 주 동안 그는 이러한 원리를 믿는 신앙에서 위안을 얻었다.
2007년 3월 31일, 성도들은 줄리 비 벡, 실비아 에이치 얼리드, 바바라 톰슨을 새로운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으로 지지했다. 당시 실비아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선교사 훈련원 원장인 남편 제프와 함께 봉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리브해 지역의 선교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지만 교회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새로운 부름으로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인 최초로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얼마 후,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 대리인 보이드 케이 패커는 이 새로운 회장단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그는 책장에 한 줄로 꽂힌 여러 권의 바인더를 보여 주었다. “저는 이것들을 약 15년 동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바인더 안에는 천 페이지가 넘는 상호부조회 역사가 들어 있었다. 수십 년 전 젊은 사도 시절에 그는 상호부조회의 총관리 역원 고문을 지내면서 상호부조회와 당시 회장이었던 벨 스패포드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나중에 그는 작가인 루실 테이트와 일레인 해리스에게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상호부조회의 역사를 편찬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결과가 이 바인더에 담겨 있었다.
“이것들은 제 개인 소장본입니다. 이것들을 자매님들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는 새 회장단에게 말했다.
보니 디 파킨 회장의 지도하에 본부 상호부조회 임원회는 1992년에 상호부조회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장편 역사서인 『Women of Covenant: The Story of Relief Society』[성약의 여성: 상호부조회 이야기]를 공부했었다. 이제 벡 회장과 그녀의 보좌들은 바인더에 있는 역사를 읽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바인더들을 나누어 갖고 각 권을 차례로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상호부조회의 비전과 목적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들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상호부조회는 원래 신권 권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상호부조회의 활동과 노력은 수년에 걸쳐 변화해 왔으며, 병원을 설립한 회장단도 있었고 사회 복지 사업과 문맹 퇴치 등의 봉사 활동에 집중한 회장단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상호부조회에서 변함없이 핵심이 되었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부 회장단은 상호부조회가 그저 일요일에 참석해야 하는 또 다른 반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 걱정이었다. 특히 교회와 회원들이 잘 확립된 곳에서 열리는 주중 상호부조회 모임과 활동은 봉사나 복음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교 행사인 경우가 많았다. 많은 회원들이 상호부조회의 영감받은 시작이나 다채로운 역사를 알지 못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상호부조회에 대해 거의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본부 회장단은 교회의 여성들이 상호부조회 자매로서의 정체성에서 힘과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상호부조회 회장단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부조회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 조직의 핵심 메시지와 교회의 세계적 자매애를 위한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부 회장단의 각 구성원은 미국 외 지역에 살고 있었으므로 언어, 문화, 경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부조회 회원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명확하고 단순한 메시지를 만들어야 함을 알았다.
본부 회장단이 함께 확인한 상호부조회의 세 가지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개인의 의로움과 신앙을 키운다. 둘째, 가족과 가정을 강화한다. 셋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구제한다. 앞으로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앙, 가족, 구제”를 장려하기로 했다.
그들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교회 지침서』의 상호부조회 편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이전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도 알고 있었듯이, 지침서의 복잡한 언어는 일부 회원들이 읽고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 있었다. 벡 회장과 보좌들은 지침 중 일부가 전 세계 성도들보다는 유타주 회원들에게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교회 회원들이 현지의 필요 사항과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읽기 쉬운 지침서를 원했다.
현행 지침서에는 상호부조회에 할애된 분량이 20쪽이 넘었다. 벡 회장은 상호부조회 편을 훨씬 더 짧고 단순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와 보좌들은 신앙, 가족, 구제를 바탕으로 4쪽 분량의 문서 초안을 작성하여 개정판을 감독하는 사도인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에게 제출했다. 옥스 장로는 초안이 마음에 들었지만 지침을 더 추가할 것을 권했다. 그들은 그것을 12쪽 분량으로 늘렸고, 내용을 승인받았다.
이 지침서는 상호부조회의 많은 프로젝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실비아는 개정 작업을 돕는 동안 훈련, 방문 교육, 새로운 자매들을 상호부조회에 통합시키는 일을 전담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다. 또한 그녀는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상호부조회 자매들을 만나고 그들의 필요 사항을 돌보았다.
그녀와 보좌들은 모든 사람이 상호부조회의 비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도록 돕겠다고 결심했다.
2007년 5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는 후기 성도인 실비나 모우센은 고민에 빠졌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우울증과 심각한 정신병을 진단받은 여동생을 부양해 왔다. 그 기간 실비나는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겪었고, 셋째 아이를 낳았으며,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한편 그녀의 남편 다비드는 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애쓰고, 학업을 계속하고, 교회에서 봉사했다. 서로 엇갈리는 일정 때문에 그녀는 주중에 남편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실비나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고, 자신이 당황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차를 몰고 슈퍼마켓에 갔다가 갑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또 어느 날은 아들 니콜라스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가 실수로 다른 아이의 손을 잡기도 했다. 최근에는 엉뚱한 날에 딸을 파티에 데려다주었다.
실비나가 의사에게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자, 의사는 그녀가 우울증 증상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상담 치료를 받고 교사 일을 쉬면서 약물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다.
실비나는 조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여동생을 돌보면서 정신 질환이 복합적이며 때로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유전적 요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을 강인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자신은 고난을 겪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 중에 다른 사람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다. 한동안 그녀는 자신이 받은 진단에 대해 웬만하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비나는 여동생과 자신의 정신 건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면서 비슷한 증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그런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교회의 한 여성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어 교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녀가 현지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그들은 대개 그녀에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을 신뢰하라고 제안했다.
실비나는 경험상 그것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실비나는 그녀에게 전문적인 도움을 구하도록 격려했다. 몇 달 후, 실비나는 그 여성이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였으며 호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최근 몇 년간 정신 질환에 대해 보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온정으로 대할 것을 촉구해 왔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 정신 건강 자원을 제공했다. 지금은 ‘후기 성도 가족 서비스’라고 불리는 ‘상호부조회 사회 봉사부’는 오랫동안 성도들에게 상담을 비롯한 여러 정신 건강 관련 지원을 제공해 왔다. 가족 서비스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일본에서만 기관을 운영했지만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더 많은 국가로 확장되는 중이었다. 칠레와 같은 남미의 일부 복지 서비스 센터에서는 상담과 더불어 훈련된 치료사도 제공했다. 또한 교회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도 정신 건강 지원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인도양에서 쓰나미가 발생한 후, 후기 성도 가족 서비스에서는 사람들이 상실과 트라우마에 대처하도록 돕기 위해 피해 지역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실비나는 의사의 조언을 따르면서 건강이 좋아졌다. 상담 치료, 휴식, 약물 치료 외에도 그녀는 운동과 음악을 통해 위로받았다. 또한 그녀는 삶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았다. 집에서는 다비드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퇴근 후 성전에서 만나 함께 엔다우먼트 의식을 받기도 했으며, 그저 함께 식료품점에 갈 때도 있었다.
실비나는 가족 선언문에서도 특별한 힘을 얻었다. 가족 선언문은 하나님의 영의 딸과 아들들이 전세에서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그들이 “영생의 상속자”로서 신성한 운명을 향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이 진리를 알게 되자 그녀는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목적과 방향, 균형감을 얻을 수 있었다.
교회에서 그녀는 상호부조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보좌들에게 더 많이 의지했다. 그녀는 구주께 의지했고, 그분에 대한 신앙은 그녀에게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에 성찬 기도를 더 주의 깊게 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찬 의식에 대해 더 깊이 숙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다비드가 그녀에게 신권 축복을 주며 그녀의 정신이 그녀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기능할 것을 약속했다. 친구들도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그녀의 오빠는 성전 기도 명부에 그녀의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실비나는 영적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구주께서 자신의 고난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려움을 혼자서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치유되는 동안 친구와 가족, 그리고 주님의 지지를 받았다.
2007년 6월, 엑토르 다비드 에르난데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눈 밑에 그늘이 생긴 그는 아내 에마와 함께 앉아 자신이 수업 시간에 잠이 들어 버렸다고 말했다.
에마와 엑토르 다비드가 과테말라시티 성전에서 인봉된 지 1년 반이 지났다. 이제 두 사람은 온두라스에 있는 집 근처 공립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일과 학업, 결혼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어린 아들 오스카르 다비드도 돌보고 있었다.
그들이 다니는 대학은 학기마다 제한된 과목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는 에마와 엑토르 다비드가 졸업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의미했다. 게다가 둘은 갓난아기의 부모가 되어 밤잠을 못 잘 때가 많아지면서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에마와 함께 앉아 있던 엑토르 다비드는 조금 전에 성적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좌절했다.
에마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가진 선택지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그녀는 영구 교육 기금에 대해 생각했다. 에마는 수년간 교회의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엑토르 다비드도 둘만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이제 그들은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립 대학에 들어가서 영구 교육 기금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에마가 제안했다.
엑토르 다비드는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회계 프로그램을 전공하고 졸업하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에마가 언급한 사립대에도 비슷한 금융학 전공이 있었다. 또한 1년이 3학기로 이뤄졌으므로 더 많은 수업을 듣고 더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그동안 영구 교육 기금을 이용하면 비싼 대학 학비를 지불할 수 있었다.
“좋아요.” 엑토르 다비드가 동의했다. 하지만 그는 에마도 학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영구 교육 기금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우린 공부를 할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나도 공부하고, 당신도 공부하는 거예요.”
“좋아요.” 에마는 그 계획에 신이 나서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으로 영구 교육 기금 대출을 신청하고 사립 대학에 입학했다. 에마는 신앙을 행사해 은행 일을 그만두었으며, 그렇게 해서 집에서 오스카르 다비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영구 교육 기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미래의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이 수업은 참가자들이 이상적인 직업을 찾고 이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했다.
에마의 과제 중 하나는 자신의 재능과 관심사를 적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창의적이며, 비즈니스 광고에 관심이 있다고 적었다. 그런 후 그녀는 마케팅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에마는 그들과 이야기한 뒤 경영학에서 마케팅 및 광고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에마는 그 과목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사립대에서 처음으로 마케팅 수업을 들으면서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구 교육 기금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학생과 부모 역할을 둘 다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녀와 엑토르 다비드는 여전히 밤잠을 자지 못했고 각자의 책임을 다하기가 어려웠다. 에마는 학업을 미뤘다가 나중에 마쳐야 할지 며칠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힘든 순간이면 에마와 엑토르 다비드는 “지금이 때이다”라는 좌우명을 서로에게 거듭 말해 주었다.
2008년 1월 12일,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솔트레이크시티 묘지에 있는 아내 마조리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죽은 지 4년이 돼 가고 있었다. 그녀는 가나 아크라 성전 헌납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프기 시작해 몇 달 후인 2004년 4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힝클리 회장과 자매는 종횡무진 전 세계를 함께 누비며 성도들에게 성역을 베풀고 동반자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아내를 몹시 그리워했다. 그가 외로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를 지켜준 것은 오직 교회에서의 봉사와 가족뿐이었다.
힝클리 회장은 매주 아내의 묘소를 방문해 꽃을 놓고 66년간의 결혼 생활을 회상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덤에 너무 자주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변함없이 아내의 무덤을 찾았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의 전부였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매주 아름다운 꽃을 두고 가는 것이다.”
이번에 와 보니, 무덤에는 지난 몇 주 동안 있었던 화환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힝클리 회장은 화환들을 좀 더 거기에 두기로 했다.
얼마 후 선지자는 자리를 마련해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바라는 것들을 받아 적게 했다. 아흔일곱 살의 그는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교회 회장이었다. 몇 년 전에 암 수술을 받은 그는 아직 살아 있지만 몸에 암이 퍼진 상태였다. 그는 지상에서의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아내와 마찬가지로 벚나무 관에 묻히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구술했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이 컨퍼런스 센터에서 치러지기를 바랐다. 대규모 청중석에 빈자리가 생길지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그 건물의 첫 삽을 뜨고 헌납했으므로 내 장례식은 그곳에서 열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힝클리 회장은 긴 장례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지침서』에서 권고한 대로 자신의 장례식은 90분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제1보좌였던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사회를 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태버내클 합창단이 수년 전에 자신이 작사한 찬송가인 “승리한 나의 구속주”를 부르도록 요청했다.
승리한 나의 구속주
살아 계심을 아오니
고통과 사망 이기신
나의 왕 나의 구속주
선지자는 장례식 구술을 마치면서 힝클리 자매를 언급했다. 그는 자신들의 결혼 성약이 내세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 옆에 묻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내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사랑하는 영원한 동반자와 함께 손을 잡고 불멸과 영생의 길을 걷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