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놀랍고 경이로운 방법
스펜서 더블유 킴볼은 회장직을 맡은 지 5년이 지날 무렵 나이의 영향을 느끼고 있었다. 1979년 3월에 그는 여든네 살이 되었다. 의사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 휴식을 더 취하라고 조언했지만, 그와 아내 카밀라는 계속 바쁜 여행 일정을 유지했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잘 뿐이었다.
그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고 싶지 않아요. 다가올 세상에서 승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나이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의사들은 그의 두개골 안쪽에 피가 고이는 것을 발견했고, 뇌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즉시 그를 수술실로 보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한 달 후 킴볼 회장 부부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선지자가 성지를 방문한 것은 교회가 최근 감람산에 건설한 6천여 평의 아름다운 공원인 올슨 하이드 기념 공원을 헌납하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의 시장인 테디 콜렉의 권유로 조성됐고 3만 명의 개인 기부자들이 자금을 제공한 이 공원의 이름은 유다 백성의 집합을 위해 그 땅을 헌납하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한 약속의 땅으로 바치기 위해 1841년에 이 도시에 왔던 후기 사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콜렉 시장은 예루살렘 주변에 더 많은 녹지를 조성하기를 원했으며 하워드 더블유 헌터 장로와 협력하여 공원을 현실화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이 기념 공원이 그렇듯 전 세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빛과 진리를 그 지역에 더해 주려는 교회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다. 킴볼 회장은 ‘성지’를 비롯한 곳들에 나타나는 여러 종교적 전통을 깊이 존중했다. 그는 구원과 지속적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하나님의 빛이 무함마드, 공자, 개신교 개혁가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이 하나님께 깨우침을 받았다고 믿었다.
제일회장단은 최근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종교적 믿음, 인종, 국적을 불문한 모든 남성과 여성의 영원한 복지를 위한 특별한 사랑과 관심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하이드 장로가 헌납 기도를 했던 날을 기념하던 1979년 10월 24일, 킴볼 회장은 콜렉 시장과 팔짱을 끼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공원을 걸어 내려갔다. 선지자는 힘겨운 걸음을 옮기면서도 공원에 있어서 좋았다. 공원에서, 그는 구주께서 걸으시고 가르치셨던 많은 장소들을 볼 수 있었다.
언덕 기슭에는 헌납식을 위한 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헌터 장로가 헌납식의 시작을 알렸고, 그 도시에서 공부하는 BYU 학생들을 포함한 3백 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동트니 날이 밝는다”를 불렀다. 그런 다음 콜렉 시장이 일어나 예루살렘의 오랜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처럼 많은 세대를 이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이 훌륭한 관계가 다가오는 모든 세기 동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킴볼 회장은 말씀할 차례가 되자 성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리셨습니다. 이 바로 아래편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그분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도록 속죄의 그 부분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공원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헌납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곳이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지난 세월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베푸셨던 영광과 앞으로 임할 더 큰 영광을 명상하는 안식처가 되게 하옵소서.”
모임을 마치기 위해 이스라엘의 교회 지방부 회장인 데이비드 갤브레이스가 폐회 기도를 드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이 영적 공원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의 모든 이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명상의 장소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이곳을 통해 우리 모두가 형제애와 평화의 유대로 결속될 수 있게 하옵소서.”
킴볼 부부가 예루살렘을 떠나기에 앞서 데이비드는 그들에게 기념 공원 근처에 있는 토지 몇 곳을 보여 주었다. 몇 년 전부터 교회는 예루살렘에 BYU 유학생들에게는 주거를, 현지 지부의 성도들에게는 집회소를, 방문객들에게는 환대 공간을 제공할 캠퍼스를 짓고자 했다. 이 부지는 성전산(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종교 유적지-옮긴 이)이 보이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엄격한 토지 사용 제한법으로 인해 민간 단체는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킴볼 회장은 그곳이 자신이 본 장소 중 센터를 짓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킴볼 부부는 10월 26일에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얼마 후, 킴볼 회장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릴 지역 대회 참석 준비를 하던 중 왼손에 감각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입원했고, 의사들은 그의 두개골 안쪽에 더 많은 피가 고인 것을 발견했다.
그 무렵, 코스타리카에서 살던 서른다섯 살의 실비아 얼리드는 가족과 함께 과테말라로 이주했다. 엘살바도르에서 개종했고 약 15년 전에 과테말라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실비아는 남편 제프와 여섯 자녀와 함께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프는 중미 지역 교회의 실무 책임자였다. 이 직책과 더불어 전 세계 다른 유사한 직책들은 감리 감독단 사무실의 교회 교과 과정 자료 배부, 교회 재산 관리, 새 집회소 부지 구매 등의 업무를 돕기 위해 1979년에 신설되었다.
얼리드 가족은 학년 초에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그들은 현지와 해외의 학생들이 함께 다니는 영어 학교에 아이들을 등록했고 일요일이면 시내의 큰 스페인어 와드에 참석했다.
실비아가 선교사로 봉사하던 1960년대에 중미에는 약 11,000명의 교회 회원이 있었고 스테이크는 없었다. 그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은 지부들에서 오랜 시간 봉사했는데, 그 지부들에서는 대부분 선교사들이 지도자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과테말라 사람들은 여러 언어와 방언을 사용했지만, 실비아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오로지 스페인어로만 가르쳤다.
그 후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교회 회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80년 무렵에는 과테말라에만 5개의 스테이크와 약 18,000명의 교회 회원이 있었고, 현지 지도자들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웃 나라인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파나마에도 각각 스테이크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거의 1,000명에 달하는 중미 출신의 여성과 남성이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장과 함께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미에서는 점점 더 많은 토착민들이 교회에 가입하고 있었지만, 그들 다수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다. 다른 개종자들도 회복된 복음의 가르침을 배우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교회는 몰몬경의 일부를 현지 토착어인 키체어, 켁치어, 카치켈어, 맘어로 번역하는 것을 승인했다. 또한 새로운 개종자들은 교회가 당시에 도처의 회원들에게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제작했던 간단하고 읽기 쉬운 주일학교 교재인 『복음 원리』도 공부할 수 있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전 세계의 후기 성도들이 매주 함께 모이는 방식도 조정해야 했다. 교회는 반세기 동안 안식일의 각기 다른 시간에 주일학교, 신권회, 성찬식을 열었고 주중에 초등회, 상호부조회, 청소년 모임을 열었다. 그러나 집회소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자차도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없는 성도들은 보통 이 일정을 따르기가 버거웠다.
그런데 최근 사도 보이드 케이 패커가 과테말라를 방문해 고지대에 작은 집회소 아홉 곳을 헌납한 바 있었다. 이들 집회소 덕분에 많은 교회 회원들이 이동 시간을 크게 줄였고, 제프는 중미의 시골 지역에 집회소를 더 많이 지을 것을 추천했다. 과테말라 고지대의 선교부 지도자들도 시골 지역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모이는 일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계획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각각 모임을 하고 그동안 초등회 어린이들도 따로 모임을 했다. 그런 다음 모든 연령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성찬식을 가졌다.
과테말라시티에 있는 실비아와 제프의 와드는 전통적인 모임 일정을 따랐다. 하지만 얼리드 가족이 새로운 집에 정착해 나가던 1980년, 제일회장단은 과테말라 시골 지역에서 사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일정을 교회 전체 모임용으로 발표했다. 이제 모든 와드와 지부에서는 주중에 서로 다른 시간에 모임을 하는 대신 일요일에 세 시간씩 모임을 갖게 되었다.
시험적으로 이 일정을 시행하는 와드나 지부에서는 교회 참석률이 향상되었으며, 성도들은 가정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은 전 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들은 가족들에게 안식일을 함께 보내고 가정을 모든 사람이 사랑과 격려, 지지,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만들 것을 독려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유가가 치솟고 있었으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일정을 통해 성도들이 연료와 교통비를 절약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실비아는 세계 어디에서나 성도들이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는 일정으로 모임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딸들은 십 대가 되면 일요일에 청녀 반에 참석할 수 있었고, 제프와 아들들은 아침 신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일정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1980년 4월 6일 아름다운 부활절 아침, 고든 비 힝클리 사도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은 교회 창립 150주년이었다. 그와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뉴욕주 페이에트에 와 있었다. 1830년에 성도들이 처음으로 모임을 했던 피터와 메리 휘트머 농장에서 연차 대회의 일부를 방송하기 위해서였다.
교회는 창립 150주년을 맞아 기념할 일이 많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은 전 세계 국가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81개국에 전파되어 오랫동안 그 메시지를 갈망해 온 사람들에게 목적과 희망,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성전의 수는 증가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호주, 칠레, 일본, 멕시코, 사모아, 타히티, 통가, 미국에서는 주님의 집이 새로 발표되거나 건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충실한 십일조와 현명한 재정적 투자 덕분에 교회는 매년 수백 개의 새로운 집회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건물들을 지을 때는 여전히 회원들이 적은 비율의 건축비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교회는 더 이상 건축을 담당할 노동 선교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힝클리 장로는 교회가 여전히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의 와드나 지부는 새로운 회원을 보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며, 힝클리 장로는 교회 회원 450만 명 중 절반이 신앙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고 추산했다. 또한 교회의 급속한 세계적 성장과 재정적 안정, 그리고 독특한 가르침을 주류 기독교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로 인해 비평가들은 후기 성도들을 공격하는 소책자와 서적,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제일회장단이 현재의 정치 문제를 언급하자 교회가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에 대해 비판이 일자, 힝클리 장로는 이에 대응하여 최근 그 주제에 관한 교회의 주요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다. 1980년 2월에 발표된 이 성명서는 여성의 평등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다시금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에 대한 제일회장단의 우려를 언명했으며 교회는 도덕적 문제에 관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확언했다.
교회 역사를 공부했던 힝클리 장로는 성도들이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을 되풀이하여 겪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교회는 더 강해졌다. 최근에 그는 동료 사도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켰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교회는 놀랍고 경이로운 방법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며 확장될 것입니다.”
교회는 두 장소에서 연차 대회를 방송한 적이 없었으므로, 힝클리 장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 시간 일찍 휘트머 농장에 도착했다.
최근에 교회는 그의 지시에 따라 휘트머 부지에 역사적인 통나무집과 현대적인 집회소를 지은 터였다. 그와 킴볼 회장은 통나무집 안에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할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진행 상황이 현장의 대형 위성 안테나를 통해 실시간으로 솔트레이크 태버내클과 전 세계 예배당으로 전송될 것이었다.
힝클리 장로와 킴볼 회장은 통나무집을 둘러본 후 리허설을 했다. 선지자가 최근에 수술을 받고 아직 회복 중이었으므로, 힝클리 장로는 그가 말씀을 전할 기력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전날, 태버내클에서 대회의 시작을 알리던 킴볼 회장은 피곤해 보였고 목소리도 좋지 않았다. 리허설을 하는 지금 그는 힘겹게 말씀을 이어 가고 있었다.
힝클리 장로는 선지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최근에 교회는 칠십인 제1 정원회의 고령 회원들을 현역에서 은퇴하게 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교회 회장과 사도들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봉사를 계속했으므로, 건강 문제로 인해 성도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대개 제일회장단의 보좌들이 회장을 도와 더 많은 일을 수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킴볼 회장의 보좌인 엔 엘돈 태너와 매리온 지 롬니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선지자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송은 정오에 시작됐다. 태너 회장이 태버내클에서 대회 모임을 시작했고, 힝클리 장로와 킴볼 회장은 휘트머의 오두막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송을 시청했다. 기도와 합창단의 찬송이 끝나자 킴볼 회장이 일어섰고, 영상은 그가 통나무집에서 성도들을 환영하는 장면으로 전환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 서서, 교회가 이 작은 시작에서 현재의 놀라운 위상으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것을 바친 분들의 위대한 신앙과 업적을 마음속으로 되새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의 눈을 통해 교회의 확실하고도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힝클리 장로는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킴볼 회장은 아무 어려움 없이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선지자가 말씀을 마치자, 힝클리 장로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작성한 특별 선언문을 발표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르치고, 지상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회개를 하도록 간청하고, 성스러운 의식인 죄 사함을 위한 침수로써의 침례와 성신의 은사를 위한 안수례를 집행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힝클리 장로는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강력한 영을 느꼈다. “우리는 앞서가신 분들의 희생을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묵상합니다. 또한, 후세대들의 축복과 유익을 위해 그 유산을 기반으로 더욱 성장해 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교회가 통합 모임 일정을 채택한 직후, 과테말라시티에서는 실비아 얼리드의 감독이 그녀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초등회에서 봉사하는 자매님들이 새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초등회가 성인반과 동시에 열렸기에 초등회 교사들은 오랫동안 즐겁게 참석해 왔던 주일학교, 상호부조회, 신권회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등회 시간이 이전보다 두 배로 길어졌으므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활기 넘치는 아이들을 관리하면 지치기가 쉬웠다.
“자매님들이 초등회 두 시간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몰라 아이들을 그저 뜰로 데려가 놀리곤 합니다.”라고 감독은 설명했다. 감독은 초등회 지도자들이 새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따르기를 원했다. “자매님이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비아는 초등회에서 “함께 나누는 시간”이 가장 힘든 시간임을 알게 됐다. 그 시간은 아이들이 모두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생활하는 것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실비아는 초등회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공과에 음악, 시각 자료, 연극을 포함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복음을 주제로 하는 한 활동에서 아이들은 커다란 퍼즐을 맞추었다. 또 다른 시간에는 지도자가 상상 온도계의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는 시늉을 하면 아이들은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노래를 불렀다. 또한 아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같은 경전 이야기를 연극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실비아가 초등회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녀와 제프는 1980년 4월에 솔트레이크시티에 방문했다가, 제일회장단이 중미 실무 사무실의 본부를 과테말라 밖으로 이전할 계획임을 알게 되었다. 과테말라는 20년이 넘도록 내전에 휩싸여 있었고 반란군이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실비아와 제프도 과테말라로 이주한 이후 분쟁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족은 별다른 걱정 없이 교회와 학교에 다니고, 쇼핑을 하고, 가족 소풍을 가며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리드 가족이 유타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교회는 실무 사무실을 코스타리카 산호세로 옮겼다. 주로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에서 업무를 보던 제프에게 사무실 이전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실비아도 코스타리카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가 가족과 함께 과테말라에서 생활한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실비아는 그 나라에서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녀는 특히 과테말라 청남 청녀들이 선교 사업을 나가기 위해 돈을 저축하고 청소년 반 및 세미나리 수업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을 느꼈다.
1980년 7월, 얼리드 가족의 이사를 앞두고 와드에서는 그들을 위해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과테말라 사람들은 계속되는 시련에 직면해 있었지만, 얼리드 가족은 그곳의 성도들이 끝없이 번영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전으로 교회 모임이 방해받거나, 선교부 지도자나 선교사들이 그 나라에서 추방되는 일은 없었다.
얼리드 가족은 슬프긴 했지만 주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기꺼이 가고자 했으며, 어디에 있든 그분의 왕국이 건설되는 것을 돕고 싶었다.
얼리드 가족이 코스타리카로 이주할 즈음,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무 살의 올가 코바르소바가 브르노에 있는 대학교에서 체육 교육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수업에서 요가와 요가가 몸과 마음에 끼치는 유익에 관해 배우게 되었다. 이에 매료된 그녀는 요가를 더 알고 싶었다.
어느 날 같은 수업을 듣는 한 친구가 그녀에게 현지 요가 강사인 오타카르 보이쿠브카에 대해 이야기했다. 올가는 그 친구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오타카르는 자그마한 노인이었는데, 미소 띤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순간 올가는 노인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 오타카르는 올가와 친구를 만나는 동안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타카르는 자신이 인생에서 겪은 시련에 대해 이야기했다. 1940년대에 그는 수익성 좋은 공장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정부가 정권을 잡은 후, 국가는 공장을 강탈하고 오타카르를 수용소로 보냈다. 아내인 테레지에 보이쿠프코바는 뒤에 남아 한동안 홀로 두 자녀를 키워야 했다. 그 후 테레지에는 세상을 떠났으며, 이제 오타카르는 아들 가드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오타카르의 이야기를 듣고 올가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대부분 침울하고 냉소적이었다. 그녀는 오타카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고도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올가는 곧 오타카르를 다시 방문했다. 이번엔 가드도 함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요가에 관심이 있으세요?”
올가가 대답했다. “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두 분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배우고 싶어요. 요가 때문에 행복하신 것 같아서요.”
그들은 영성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타카르는 말했다. “하나님은 영혼에 기쁨과 생명과 사랑을 심어 주시기 위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어요.”
무신론 사회에서 자란 올가는 하나님이나 인생의 목적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개신교 조상들을 둔 그녀는 이제 종교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종교에 관심 두지 말라고 했던 교수나 학교 친구들과는 달리, 오타카르는 그녀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 주제를 다룬 책도 빌려주었다.
올가는 공부를 하다 보니 삶에서 더 많은 목적을 찾고 싶어졌다. 그녀는 오타카르와 만남을 이어갔고, 그의 믿음에 대해 배우면서 점점 더 행복해졌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올가는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영적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어느 날 오타카르는 존 에이 윗소 장로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관해 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다. 올가는 그 책을 읽고 성도들에게 매료되었다며 오타카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체코 몰몬의 주소를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오타카르가 말했다. “주소는 필요 없어요. 올가 양은 지금 몰몬의 집에 있으니까요.”
오타카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침례를 받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먼저 교회 회원이 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50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모든 외국인 후기 성도 선교사들을 국외로 강제 추방했지만 그와 약 245명의 교회 회원들은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했으며 프라하, 플젠, 브르노의 개인 집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올가는 오타카르에게서 몰몬경을 빌렸다.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라는 리하이의 말을 읽었을 때, 그녀는 마치 잃어버린 진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사랑과 빛이 온몸의 세포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알았다. 또한 그분들이 자신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심을 느꼈다.
올가는 난생처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오타카르의 아파트로 가서 물었다. “새사람처럼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네,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성경을 펴서 예수님이 침례에 관해 가르치신 부분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올가가 물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죠.” 그가 말했다. 그런 다음 올가는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먼저 받아야 할 몇 개의 토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녀를 다음 주 일요일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성도들의 모임에 초대했다. 올가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오타카르의 아파트 위층 방에 모였다. 그곳에는 이 작은 그룹이 앉을 소파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종교를 경계하는 이웃들이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올가는 일곱 명의 회원이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연령이라는 사실에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