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제10장: 중요한 건 시간


제10장

중요한 건 시간

글자와 그림이 있는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1966년 봄, 아지즈 아티야 박사는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안내원을 따라 문서 창고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파일이 하나 있었다. 파일을 열어 본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파피루스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지만 아지즈는 거기서 두 남자의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사자 형상의 긴 의자에 누워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옆에 서 있었다. 긴 의자에 있는 남자의 양팔과 몸통,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조각은 없었다. 하지만 문서를 보존하기 위한 일차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누군가 파피루스를 종이에 붙이고 분실된 부분을 대충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아지즈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유타 대학교에서 역사학 및 언어학 교수로 재직하며 오랫동안 성도들 가운데 생활했기에 그 그림이 값진 진주의 아브라함서에 나오는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림은 아홉 개의 다른 파피루스 조각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아지즈는 파피루스를 면밀히 살펴보다가 그것들이 한때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소유였음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발견했다. 증명서는 1856년에 작성된 것으로, 조셉 스미스 삼세, 에머 스미스, 에머의 두 번째 남편인 루이스 비더몬의 서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 조각들은 선지자 조셉과 다른 성도들이 1835년에 유물 전시업자에게서 네 구의 미라를 구입했을 때 얻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묶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 조셉은 아브라함서로 불리는 번역문과 함께 파피루스의 그림을 출판했었다. 그런데 조셉이 사망하고 몇 년이 흐른 후에 에머가 미라와 파피루스를 팔았고, 새 주인은 그것들을 나눠서 일부를 가까운 박물관에 팔았다.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수십 년 동안 화재로 소실됐다고 여겨졌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 일부가 동부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것들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지즈는 말했다. 그 조각들이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던 그는 성도들이 다시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돕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해, 열네 살의 이사벨 산타나는 새로운 환경에 몹시 위축돼 있었다. 멕시코 북부의 도시인 시우다드오브레곤에 살던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교회 소유 학교인 센트로 에스콜라 베네메리토 데 라스 아메리카스에 다니기 위해 막 집을 떠나온 참이었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7백만 인구가 생활하는 성장 가도의 대도시였고, 모두 옷차림이나 말하는 방식이 그녀의 고향 사람들과 무척 달랐다.

이쪽 사람들은 “부탁해요”, “고마워요”, “실례해요”를 무척 격식을 차려 말했다.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는 회복된 복음이 1800년대에 뿌리를 내렸고, 이제 그곳에는 두 개의 튼튼한 스테이크가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멕시코의 후기 성도는 약 5천 명에서 3만 6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회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은 멕시코 성도들의 자라나는 세대가 학교 교육과 직업 훈련을 위해 가능한 모든 기회를 누리게 하고 싶었다. 1957년, 제일회장단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멕시코의 교육을 조사하고 전국에 교회 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관해 의견을 내게 했다. 그 뒤 위원회는 도시 지역에 멕시코의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할 학교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국에 최소 12개의 초등학교를 개설하고 멕시코시티에 중등학교, 단기 대학, 교원 양성 학교를 개설하도록 제안했다.

당시에 교회는 뉴질랜드, 서사모아, 아메리칸사모아, 통가, 타히티, 피지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몇 년 후 칠레에 두 개의 초등학교를 열었을 무렵, 교회는 멕시코에서도 교육을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사벨이 베네메리토에 도착할 무렵, 교회가 멕시코에서 운영하는 25개 초등학교와 2개의 중등학교에는 약 3천8백 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 있었다.

베네메리토는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1964년에 멕시코시티 북쪽에 위치한 35만여 평의 농장에서 문을 열었다. 이사벨은 오브레곤에서 교회가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 학교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집이며 가족과 1,6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서 생활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간절히 수업을 듣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멕시코의 후기 성도들이었다. 학생들은 스페인어, 영어, 수학, 지리, 세계사, 멕시코 역사, 생물, 화학, 물리를 필수 과목으로 수강했다. 미술, 체육, 기술 수업에도 등록할 수 있었다. 학교와 별개로 운영되는 세미나리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종교 교육을 제공했다.

이사벨의 아버지는 교회 회원이 아니었지만 베네메리토에 가고자 하는 딸의 소망을 지지했고,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 힐다가 함께 입학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힐다는 한 살 어렸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년으로 이사벨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이사벨이 혼자 학교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사벨과 힐다는 어머니와 함께 베네메리토로 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학교에는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운동장은 진흙탕이었고, 학교 건물은 몇 채 없었으며, 학생들이 거주할 작은 기숙사가 열다섯 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교정의 규모에 감탄했다.

이사벨의 그룹은 2번 건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기숙사 사감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사감은 그들에게 세탁기, 소지품을 보관할 수 있는 옷장, 이층 침대가 두 개씩 있는 침실들을 보여 주었다. 기숙사에는 침실이 네 개에 식당과 주방, 거실도 있었다.

이사벨은 다른 학생들을 관찰하고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베네메리토에는 5백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멕시코 남부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사벨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먹는 것도 더 다양했다. 그들의 음식은 맛이 훨씬 맵고 재료도 달라서 아사벨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적 차이와 관계없이 베네메리토의 모든 학생은 동일한 규칙을 준수해야 했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고, 가사를 하고, 수업에 참석하는 엄격한 일과를 따랐다. 또한 교회에 가고 기도를 하는 등의 튼튼한 영적 습관을 기르도록 장려받았다. 가족들이 각자 다른 종교를 가진 가정에서 자란 이사벨과 그녀의 여동생은 베네메리토에 오기 전에는 그런 일들을 규칙적으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 도착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이사벨은 일부 학생들이 집을 그리워하며 그곳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새로운 사람들, 음식, 관습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남아 성공하기로 결심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1967년 1월 1일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아흔네 살까지나 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집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며 자신이 겪은 많은 경험을 돌아보았다. ‘행복하고 흥미로운 삶이었어! 정말 긴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군.’

그러나 선지자는 새해를 고대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은 문제로 가득하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날마다 전쟁, 인종 및 정치적 불안, 자연재해에 대해 보도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높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걸쳐 많은 사람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지역 사회를 분열시킬 격렬한 지역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맥케이 회장은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인 베트남에서 10년 넘게 계속되는 내전을 우려했다.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최근 남베트남에 45만 병력을 배치했다. 이제 게릴라식 전쟁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고, 양측 모두 무수한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에는 교회의 지부가 몇 개 있었다. 그 지부들에서는 약 300명의 현지 성도들이 미군에서 복무 중인 4천 명의 교회 회원 중 일부와 함께 모임을 했다. 얼마 전에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고든 비 힝클리 장로와 칠십인 제일 평의회의 매리온 디 행크스 장로가 전쟁으로 파괴된 베트남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힝클리 장로는 성도들과 함께 지방부 대회에 참석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 땅을 헌납하고 그 나라에 다시금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했다. 그는 이렇게 간청했다. “전쟁의 소음이 그칠 날을 앞당겨 주시옵소서.” 그날 저녁, 교회 지도자들이 간증을 하는 동안 멀리서 “쿵”하고 포격 소리가 울렸다.

1967년, 맥케이 회장의 바람과 달리 혼란과 분쟁은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6월에는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 그 지역이 불안에 휩싸였다. 그다음 달에는 오랫동안 계속되던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불안이 내전으로 번졌다. 한편 베트남에서 사상자가 늘고 전쟁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에서는 빈번하게 반전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위는 때로 폭력적인 형태로 번지기도 했다. 또한 전국에서 인종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폭력의 물결이 여러 주요 도시를 뒤흔들었다.

선지자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이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 낙담한 일부 청소년들은 부모와 조부모의 가치관과 문화에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청소년이 해로운 약물을 시험 삼아 복용하고, 난잡한 성행위를 하고, 상스러운 언어를 사용했다.

교회의 청소년들을 사랑한 맥케이 회장은 그들이 이러한 경향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가치관과 표준이 같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키울 수 있는 주중 종교 수업인 세미나리나 종교 교육원에 참석하도록 후기 성도 청소년들을 격려했다. 또한 최근에 교회는 청남 청녀들이 깨끗한 생활, 데이트, 춤, 복장, 예절에 대한 교회 표준을 알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도록 돕기 위해 『청소년의 힘을 위하여』라는 소책자를 제작했다. 그러나 그는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 역시 도덕적인 생활을 할 때 행복해질 수 있음을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 줄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1967년 10월 연차 대회에서는 맥케이 회장이 건강이 좋지 않아 직접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로버트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도록 부탁했다.

선지자는 대회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이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저는 ‘하나가 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없으며 회원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교회의 협의부는 여러 프로그램을 통합하고 신권과 가정 및 가족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을 단합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해의 그 무렵까지 교회의 협의부는 미국 외 국가에서 출판되는 교회 잡지의 내용을 표준화하고 통일된 교과 과정을 도입했다. 맥케이 회장은 교회의 세계적인 성장에 부응하여 스테이크 회장단의 훈련을 도울 69명의 “십이사도 지역 대표”를 불렀다. 전 세계에서 교회가 효율적이고 일관되게 운영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성도들이 사회 불안과 사회의 가치관 변화에 직면하자, 맥케이 회장과 교회의 본부 지도자들은 상호 연계 프로그램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통일된 메시지와 안정적인 기초를 제공하기를 바랐다.

맥케이 회장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난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교회 조직의 틀에서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일하며 목적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해 한국 서울에서는 황근옥이 송죽원에서 약 80명의 고아 소녀를 돌보고 있었다. 1964년에 이 여자 보육원이 그녀를 원장으로 고용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이곳의 개신교 후원자들에게 자신이 후기 성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교회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실 근옥이 1962년에 침례를 받자 그녀가 가르치던 기독교 학교는 그녀를 해고했었다.

이제 한국에는 3,300명가량의 성도가 있었다. 한국 최초의 후기 성도인 김호직은 1951년 미국 유학 시절에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호직은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교수와 문교부 차관을 지냈고, 자신이 가르친 일부 학생들에게 회복된 복음을 소개했으며, 1959년에 사망했다. 그 학생들은 미군들과 함께 한국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탰다. 몰몬경의 한국어 번역본은 1967년에 출판되었다.

근옥은 보육원의 후원자들에게는 자신이 교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후기 성도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했으며, 주일학교 청소년 반을 가르쳤다. 그리고 보육원을 돕고 싶어 하는 교회 회원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옥은 스탠리 브론슨이라는 미군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서울에 주둔해 있는 후기 성도였는데, 보육원을 방문해서 노래로 아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스탠리가 찾아왔다. 그는 2미터 가까운 장신으로, 모든 사람을 내려다봐야 했다. 소녀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즐거워했다. 군에 징집되기 전에 포크송 음반을 한 장 녹음했던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한 장 더 음반을 녹음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모두가 모이자 근옥이 스탠리에게 말했다. “형제님이 기타를 치시기 전에 아이들이 형제님을 위해 준비한 노래를 먼저 들려 드릴게요!”

소녀들은 근옥의 독려로 손님들에게 곧잘 노래를 선보인 덕에 연습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스탠리는 소녀들이 자신에게 불러 준 노래들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 화음이 완벽히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소녀들과 함께 노래하기 위해 자주 보육원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는 그들에게 함께 음반을 녹음할 것을 제안하며 음반 판매 수익금은 보육원을 위해 쓰자고 했다.

근옥은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소녀 시절 그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북한에서 온 전쟁 난민이었던 그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든든한 가족과 지역 사회의 지원 없이 소녀들이 한국에서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았다. 한국 사람은 흔히 부모 없는 소녀들을 멸시했으며 그들은 큰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근옥은 교육을 받기 위해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고향을 잃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는 소녀들이 스탠리와 함께 공연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가치를 깨닫고, 다른 한국인들이 또한 이 소녀들의 가치를 깨닫기 바랐다.

스탠리는 녹음실 한 곳을 찾아냈고, 그 후 몇 달 동안 근옥은 그와 소녀들이 노래를 연습하고 녹음하는 과정을 도왔다. 스탠리는 군에서 30일의 휴가를 받자 녹음한 것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레코드판을 만들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에서 촬영되던 미국 인기 텔레비전 특집 방송에서 소녀들과 함께 공연을 하기로 했다.

1968년 초, Daddy Big Boots: Stan Bronson and the Song Jook Won Girls[대디 빅부츠: 스탠리 브론슨과 송죽원 소녀들]이라는 음반이 서울에 들어왔다. 근옥은 음반 발매를 한국의 큰 행사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한국 대통령, 미국 대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을 지역의 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발매 기념식에 초대했다. 실제로 참석한 사람은 미국 대사뿐이었지만, 다른 고위 인사들은 대신 대표자들을 보냈고 발매 기념식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송죽원의 소녀들에게 공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인 트루먼 매드슨이 자신의 동료인 역사학과 교수 리처드 부시먼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리처드는 자신이 방금 읽은 학술 기사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 글을 쓴 웨슬리 월터스는 미국 중서부의 장로교 목사였다. 그는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이 그릇됨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년 동안 비평가들은 자주 교회의 성스러운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려 했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입증되지 않은 동일한 주장을 수차례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 기사는 달랐다. “충분히 조사하고 잘 쓴 기사일세.” 리처드는 트루먼에게 말했다. 사실 또 다른 동료 교수도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리처드는 트루먼에게 그 기사의 사본을 보냈다. 웨슬리 월터스는 조셉 스미스가 1820년 봄에 하늘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논박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첫번째 시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선지자의 주장을 조사했다.

여러 해 동안 후기 성도들은 선지자 조셉이 첫번째 시현에 대해 작성한 두 가지 기록만을 알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기록은 1838년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값진 진주에 실려 있었다. 다른 기록은 1840년대 초에 교회 신문인 『타임즈 앤드 시즌즈』에 실린 바 있었다. 그러나 최근 브리검 영 대학교의 한 대학원생과 교회 기록 보관인은 교회가 수집한 조셉 스미스의 기록들에서 첫번째 시현에 관해 그보다 더 먼저 기록된 두 개의 문서를 발견했다.

웨슬리는 그 네 가지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만한 점을 밝혀내기 위해 그것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는 현지의 종교 부흥을 계기로 기도를 통해 주님을 찾게 되었다는 선지자의 주장을 조사했는데, 첫번째 시현이 일어나고 거의 5년이 지날 때까지 스미스의 집 근처에서 일어난 부흥의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웨슬리에게 이는 조셉 스미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꾸며 냈음을 의미했다.

트루먼은 웨슬리가 조사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첫번째 시현과 교회 초기에 대해서는 역사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에 그는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과거에 선교부 회장이었던 그는 하늘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다는 선지자 조셉의 강력한 간증 덕분에 많은 사람이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다. 첫번째 시현에 대한 공격은 회복의 기초에 대한 공격으로 보였다.

그 기사를 읽은 트루먼은 역사가 몇 명을 솔트레이크시티로 모았다. 그들은 모두 존경받는 학자이자 헌신적인 교회 회원이었다. 그들은 웨슬리의 기사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갈고닦은 능력을 활용하여 교회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을 비롯한믿음 있는 다른 이들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기원부터 새로운 연구를 착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첫번째 시현에 대한 웨슬리 월터스의 주장이 일파만파 퍼질 것이었다.

트루먼을 필두로 학자들은 후기 성도 학자들에게 교회의 초기 역사를 연구하도록 장려하는 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회는 웨슬리의 기사에 대응하기 위해 다섯 명의 역사가를 미국 동부로 보내 종교 부흥과 첫번째 시현을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할 자금이 없었다.

위원회는 먼저 개인 기부자들을 대상으로 조사 자금을 모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트루먼은 제일회장단에 도움을 구했다. 맥케이 회장과 그의 보좌들은 교회 역사를 연구하고 보존하려는 다른 노력을 지원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에는 1839년부터 1846년까지 교회의 본부였던 일리노이주 나부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토지와 건물을 구입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금을 제공했다.

제일회장단은 조셉 스미스의 파피루스 조각에도 관심을 보였다. 엔 엘돈 태너 회장은 아지즈 아티야 및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긴밀히 협력하여, 미술관이 파피루스를 교회에 기증하는 식으로 돌려주게 했다. 미국 전역의 신문에서 이 인수 사실을 보도했으며, 교회는 기자 회견을 열고 『임프루브먼트 이라』에 파피루스 조각들의 이미지를 게재했다. 그런 후 제일회장단의 요청으로, 브리검 영 대학교의 교수인 휴 니블리가 추가 연구를 위해 그 조각들을 대여했다. 교회의 선도적인 학자로 고대의 세계를 연구하던 휴는 몰몬경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역사적 증거를 발견했으며, 아브라함서에 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68년 봄, 트루먼은 제일회장단에 보내는 서한에서 조사를 위한 여행 자금으로 7천 달러를 요청하며 이렇게 적었다. “첫번째 시현이 역사적인 면으로 맹공격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처음에 제일회장단은 그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교회는 전 세계에 점점 더 많은 예배당을 짓느라 빚을 지게 되었고, 그 후로 교회 지도자들은 지출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끈질겼다. 최근에 그는 교회사를 주제로 한 대회에서 웨슬리 월터스를 만났는데, 그때 조셉 스미스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그의 결의를 알아차렸다.

트루먼은 제일회장단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자료를 먼저 손에 넣으려 할 겁니다. 저희는 행동을 미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그는 5천 달러를 요청했다.

맥케이 회장과 보좌들은 그의 요청을 재고하고 조사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9월 어느 따뜻한 오후, 열네 살의 마에타 홀리데이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풀러턴으로 향하는 버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밖 고속도로 양옆으로 오렌지 과수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타와 애리조나 경계의 황야에 위치한 그녀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마에타는 나바호 공화국의 디네, 즉 시민이었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 지역에서 자랐다. 그녀의 종족은 네 개의 신성한 산이 경계를 이루는 그 지역에서 조상 대대로 생활해 왔다. 19세기, 미국 정부는 후기 성도를 포함한 백인이 정착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나바호족과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빼앗은 땅에 이 보호 지역과 이와 유사한 다른 보호 지역들을 마련했다. 많은 원주민 가족은 열악한 보호 지역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되자 어려움을 겪었다.

마에타가 살았던 나바호족 보호 지역은 광대했다.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고, 그래서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기가 어려웠다. 반면 정부가 지원하는 기숙 학교는 대개 초만원에 자금도 부족했다. 상황이 이러하자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모들은 자녀들을 보호 지역 밖의 학교에 보내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마에타는 교회의 Indian Student Placement Program[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캘리포니아에 와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백인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마에타의 언니들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었고, 마에타도 언니들처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스스로 바라서 프로그램에 참가하고도 자신을 돌봐 줄 새로운 가족을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배치 프로그램은 1954년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 장로의 인도에 따라 설립되었다. 당시의 많은 후기 성도들처럼,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몬경 백성의 직계 후손으로 여겼다. 그는 교회 회원들에게 레이맨인 형제 자매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고 성약의 백성으로서 신성한 운명을 성취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배치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후기 성도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보호 지역에 있는 집을 떠났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학생들이 더 좋은 학교에 다니고 복음 중심의 가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1968년까지 63개 이상의 부족에서 온 약 3천 명의 학생들이 캐나다와 미국의 7개 주에 있는 가정에 배치되었다. 배치 프로그램의 모든 학생은 후기 성도였지만, 개중에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교회 모임에 참석한 경험이 거의 없는 학생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이 프로그램을 이끌던 글렌 밴 왜거넨은 유타주 커내브에서 한 가족과 함께 생활하던 마에타에 관해 듣게 되었다. 마에타는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했고 그들의 딸과도 잘 지냈다. 글렌은 마에타에게 9학년부터는 캘리포니아에서 배치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권유했고, 그녀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에타는 캘빈 홀리데이와 에벌린 크랭크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딸 중 막내였다. 그녀의 부모는 결혼 초기에 교회의 회원이 되었으나 이후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마에타는 여덟 살에 침례를 받았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며 자신이 받은 침례의 중요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에타의 부모는 딸이 더 좋은 교육을 받기 바랐기에 마에타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곧바로 딸을 애리조나에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기숙 학교에 보냈다. 그래서 마에타는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마에타는 부모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들이 행복한 보호 지역 가족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두 번 재혼했다. 마에타의 어머니는 재혼 중에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은 데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마에타의 몫이 돼야만 했다. 어머니가 떠나 있는 동안 마에타와 동생들은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여러 날을 지낸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마에타는 상한 양고기와 통조림 몇 개 등으로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마에타가 밖에서 불에 튀긴 빵을 만드는데 어머니가 마에타를 보며 말했다. “애 낳는 것 말고 네가 뭘 하겠니.” 그 말을 듣고 마에타는 상처를 받았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난 무언가를 이루고 말 거야.’

캘리포니아 남부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마에타는 어머니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중년 부부가 문으로 들어오자 긴장이 됐다. 마에타는 생각했다. ‘이제 저분들이 내 새 부모님이야.’

양아버지인 스펜서 블랙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 마에타는 살면서 겪은 폭력적인 남성들 때문에 다소 경계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양어머니 베나에게서는 푸근한 느낌을 받았다.

부부는 마에타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 집의 자녀들을 만났다. 집에는 열다섯 살 루시와 열세 살 래리가 있었고, 독립한 큰 자녀가 세 명 더 있다고 했다. 마에타는 커다란 벽난로와 꽃들로 가득한 정원이 있는 새집에 익숙해졌다. 늘 언니 동생들과 방을 같이 썼던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만의 침실을 갖게 되어 무척 기뻤다.

하지만 마음이 완전히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도시는 위압적이었고 빽빽한 연무가 가득했다. 양부모는 친절했지만, 마에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따금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친절을 이용해 자신에게 집안일을 떠맡기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에타는 캘리포니아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침대에 누워 고속도로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차 소리에 괴로워하며 조용한 나바호 보호 지역을 그리워했다.

  1. Jay M. Todd, “Egyptian Papyri Rediscovered,” Improvement Era, Jan. 1968, 13–14; Fragment of Book of Breathing for Horos–A, between 238 and circa 153 BC, in JSP, R4:8–9; Nibley, Message of the Joseph Smith Papyri, 183–84; Muhlestein, “Papyri and Presumptions,” 40, 44–45.

  2. McKay, Diary, Nov. 27, 1967; “Arabic Documents to U,” Deseret News, Dec. 15, 1966, C1; “U. Professor to Speak on Mideast,” Salt Lake Tribune, Oct. 4, 1959, A17; Jay M. Todd, “Egyptian Papyri Rediscovered,” Improvement Era, Jan. 1968, 13–14; “A Facsimile from the Book of Abraham, No. 2.”

  3. Jay M. Todd, “Egyptian Papyri Rediscovered,” Improvement Era, Jan. 1968, 12–14, 16; Lewis Bidamon, Emma Smith Bidamon, and Joseph Smith III to Abel Combs, Certificate of Sale, May 26, 1856, CHL.

  4. 『성도들』, 제1권, 제20장; Book of Abraham and Related Manuscripts,” in JSP, R4:xix–xx, xxiii–xxix; Peterson, Story of the Book of Abraham, 203–16, 242–47; Gee, “Stranger in a Strange Land,” 501–3. 주제: 아브라함서 번역

  5. Jay M. Todd, “Egyptian Papyri Rediscovered,” Improvement Era, Jan. 1968, 14.

  6. Isabel Santana entry, Births and Blessings, 1958, Obregon Branch, Northern Mexican Mission, 158–59, in Mexico (Country), part 6, Record of Members Collection, CHL;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Jan. 5, 2022], 1–2, 22–23;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32–33; Morgan, “Benemérito de las Américas,” 108, 110.

  7. 『성도들』, 제2권, 제31장; 『성도들』, 제3권, 제31장; Deseret News 1991–1992 Church Almanac, 178, 190; Morgan, “Century of LDS Church Schools in Mexico,” 364; Missionary Department, Full-Time Mission Monthly Progress Reports, Jan. 1966; Daniel Taylor to Ernest L. Wilkinson, Sept. 26, 1962, Church Educational System, Harvey L. Taylor Administrative Files, CHL; Morgan, “Benemérito de las Américas,” 94, 96–97.

  8. Romney, Journal, Nov. 19, 1957; Feb. 6, 1958; Apr. 5, 1958; Nov. 5, 1959; Dec. 9, 1959; Bentley, Life and Family of Joseph T. Bentley, 98–99; Daniel Taylor to Ernest L. Wilkinson, Sept. 26, 1962; Harvey Taylor to M. James Penton, Sept. 7, 1966, Church Educational System, Harvey L. Taylor Administrative Files, CHL; Taylor, Story of L.D.S. Church Schools, 1:34–45, 62–71; 2:6–11; Griffiths, “Globalization of Latter-day Saint Education,” 82, 97–125. 주제: 교회 아카데미; American Samoa[아메리칸사모아]; Chile[칠레]; Fiji[피지]; 멕시코; New Zealand[뉴질랜드]; Samoa[사모아]; Tonga[통가]

  9. Joseph Bentley, “El Arbolillo (The Little Tree),” in Joseph Bentley to N. Eldon Tanner, Apr. 29, 1968, Church Educational System, Harvey L. Taylor Administrative Files, CHL; Morgan, “Benemérito de las Américas,” 99–104; Taylor, Story of L.D.S. Church Schools, 2:6–15, 18–19, 21, 24;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34–35.

  10.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2–3, 10;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Jan. 5, 2022], 16;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16; Taylor, Story of L.D.S. Church Schools, 2:4, 5, 20; Harvey Taylor to Marion D. Hanks, Apr. 19, 1966, Church Educational System, Harvey L. Taylor Administrative Files, CHL; Morgan, “Impact of Centro Escolar Benemérito,” 156.

  11.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32;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1; Wagner and Wagner, Historia, 39; Church Board of Education, Executive Committee Minutes, Aug. 26, 1965; Romney, Journal, Oct. 26, 1966.

  12.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1–4;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32–34;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Jan. 5, 2022], 1–2, 23; Wagner and Wagner, Historia, 39.

  13.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Feb. 2, 2022], 2, 10; Santana and Machuca, Oral History Interview, 2–4; Isabel Santana, Oral History Interview [Apr. 19, 2022], 25.

  14. McKay, Diary, May 24, 1960; Mar. 28, 1964; Aug. 19, 1965; Aug. 22, 1966; Nov. 7, 1966; Jan. 1, 1967; Henry D. Taylor, in One Hundred Thirty-Sixth Annual Conference, 83; Garrow, Protest at Selma, 161–66; Patterson, Grand Expectations, 580–81, 598, 620–21.

  15. Powaski, Cold War, 135–60; Hartlyn and Valenzuela, “Democracy in Latin America since 1930,” 139–43; Falola and Heaton, History of Nigeria, 158–75.

  16. McKay, Diary, Jan. 1, 1967; Patterson, Grand Expectations, 512–17, 594–99; Boot, Invisible Armies, chapter 52.

  17. Gordon B. Hinckley, “Asian Diary,” Instructor, Sept. 1967, 346–47; Marion D. Hanks to First Presidency, Jan. 18, 1967,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1967 Membership Population Report,” 2; McKay, Diary, Jan. 20, 1966; Apr. 15, 1966; Sept. 15, 1966; Nov. 17, 1966.

  18. Gordon B. Hinckley, “Asian Diary,” Instructor, Sept. 1967, 346–47; Marion D. Hanks to First Presidency, Jan. 18, 1967, First Presidency, Mission Correspondence, 1964–2010, CHL; Allen Rozsa, Memorandum, Oct. 31, 1966, Gordon B. Hinckley Files, circa 1935–70, CHL; Hinckley, Journal, Oct. 30, 1966; Palmer, Church Encounters Asia, 143.

  19. McKay, Diary, Jan. 1, 1967; Steininger, Germany and the Middle East, 108–19; Gould, Struggle for Modern Nigeria, 8–9, 63, 211; Patterson, Grand Expectations, 448–49, 579–81, 588–89, 598–600, 620–30; Lytle, America’s Uncivil Wars, chapter 8.

  20. David O. McKay, in One Hundred Thirty-Seventh Annual Conference, 5–7; Lytle, America’s Uncivil Wars, chapters 8 and 9; “Early Registrations Show Banner Year for Seminaries,” Church News, Sept. 7, 1957, 12; For the Strength of Youth, 3–16; see also Patterson, Grand Expectations, 669–72.

  21. David O. McKay, Hugh B. Brown, in One Hundred Thir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4–5, 94149.

  22. Hugh B. Brown, Harold B. Lee, in One Hundred Thir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25–26, 98–108; Henry A. Smith, “Top Church News of ’67,” Church News, Dec. 30, 1967, 5; Correlation Executive Committee, “Church Curriculum Programs: Time Changes,” Instructor, Sept. 1967, 361. 주제: Church Growth[교회의 성장]

  23. David O. McKay, Harold B. Lee, in One Hundred Thirty-Seventh Semi-annual Conference, 5–10, 98–108.

  24. “LDS Teacher Helps Korean Orphans,” Church News, Feb. 6, 1971, 7; Hwang, “Hwang Keun Ok,” 293;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Ensign, Oct. 1993, 46;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 4–5;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2.

  25. “1967 Membership Population Report,” 2; Palmer, Church Encounters Asia, 94–98, 108; “Korean Student at U. of U. Called to Far East Mission,” Church News, Nov. 17, 1956, 10; Joseph Lundstrom, “President McKay Given New Korean Translation,” Church News, Aug. 31, 1968, 3. 주제: Servicemember Branches[군인 지부]; South Korea[대한민국]

  26. Hwang, “Hwang Keun Ok,” 293;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2, 91;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Ensign, Oct. 1993, 46–47; “LDS Teacher Helps Korean Orphans,” Church News, Feb. 6, 1971, 7.

  27.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2–4, 27–28;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Ensign, Oct. 1993, 46.

  28.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Ensign, Oct. 1993, 46–47; Hwang, “Hwang Keun Ok,” 293;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2–3, 27–28; “Shoes Big, Heart Bigger,” Church News, May 25, 1968, 10.

  29.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2–3; Sarah Jane Weaver, “Orphanage Founder’s Life Spent Serving,” Church News, Aug. 19, 2000, 4, 7; Shirleen Meek Saunders, “Whang Keun-Ok: Caring for Korea’s Children,” Ensign, Oct. 1993, 46; Hwang, “Hwang Keun Ok,” 291–92;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3.

  30.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9–10, 13, 28–31, 74, 81–82;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 4, 9; “Shoes Big, Heart Bigger,” Church News, May 25, 1968, 10.

  31. Bronson, Oral History Interview, 15–16, 52, 74–75; Roby, Oral History Interview, 1–4.

  32. Richard Bushman to Truman Madsen, Memorandum, Oct. 17, 1967, Truman G. Madsen Correspondence, CHL; Walters, “New Light on Mormon Origins,” 59–61; Godfrey, “Kenneth W. Godfrey,” 254; Harper, First Vision, 211–14.

  33. Harper, First Vision, 204–6, 214–15; “첫번째 시현 기록”, 복음 주제 관련 글, ChurchofJesusChrist.org/study/manual/gospel-topics-essays; Allen, “Significance of Joseph Smith’s ‘First Vision,’” 29–46. 주제: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 기록

  34. Harper, First Vision, 214–16; Walters, “New Light on Mormon Origins,” 60–73.

  35. Harper, First Vision, 219; Bushman, “First Vision Story Revived,” 82–83; Truman Madsen to First Presidency, Apr. 17,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36. Harper, First Vision, 219–20; Allen and Arrington, “Mormon Origins in New York,” 241–42.

  37. [Truman Madsen] to Harold Snow, Nov. 9, 1967; Truman Madsen to “Dear Brethren,” Jan. 18, 1968, Truman G. Madsen Correspondence, CHL; Allen and Arrington, “Mormon Origins in New York,” 241–42; Truman Madsen to First Presidency, Apr. 17,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Pykles, Excavating Nauvoo, 18–19, 53–128.

  38. Jay M. Todd, “Egyptian Papyri Rediscovered,” Improvement Era, Jan. 1968, 13–14; Tanner, Journal, Nov. 26–27 and Dec. 5, 1967; “Mormons Get ‘Lost’ Egyptian Papyrus Texts,” Los Angeles Times, Nov. 28, 1967, section 1, 4; “Old Papyri Find Linked to Mormons,” Sun (Baltimore), Nov. 8, 1967, A3; George W. Cornell, “Missing Documents Found,” Austin (TX) Statesman, Nov. 30, 1967, A5; “LDS Orders Papyri to Y. for Study,” Salt Lake Tribune, Nov. 29, 1967, B2.

  39. Nibley, Lehi in the Desert and the World of the Jaredites, 20–95; Nibley, Approach to the Book of Mormon, 164–89, 256–69; Nibley, Since Cumorah, 251–58, 297–327.

  40. Truman Madsen to First Presidency, Apr. 17,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41. First Presidency to Truman Madsen, May 8,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Spencer W. Kimball, Journal, Dec. 14, 1961; Lee, Diary, Dec. 7, 1961, and Dec. 17, 1963; Tanner, Journal, July 17, 1964, and Dec. 2, 1965; Quinn, Mormon Hierarchy, 120–23; Durham, N. Eldon Tanner, 208–9. 주제: 교회 재정

  42. Truman Madsen to Hugh B. Brown and N. Eldon Tanner, May 15,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Harper, First Vision, 221; McKay, Diary, May 24, 1968; First Presidency to Truman Madsen, June 4,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43.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6–97;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4, 6–7, 29–30, 51, 69–70.

  44.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89; Berlo, “Navajo Cosmoscapes,” 11; Prucha, Great Father, 1:562–81; 2:631–58, 814–40; 『성도들』, 제2권, 제5장 및 제8장; Garrett, Making Lamanites, 43–57; White, Roots of Dependency, 290–315; Bailey and Bailey, History of the Navajos, 26–28, 295–96.

  45.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5, 49–50, 67–68;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2, 96.

  46. Allen, “Rise and Decline of the LDS Indian Student Placement Program,” 88–96, 100–101; First Presidency to Spencer W. Kimball, Sept. 6, 1968, First Presidency, General Administration Files, 1921–72, CHL; Dorothy O. Rea, “Indian Student Plan,” Deseret News, Aug. 22, 1968, E8. 주제: Indian Student Placement Program[인디언 학생 배치 프로그램]; 레이맨인의 뿌리; Spencer W. Kimball[스펜서 더블유 킴볼]

  47.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6–97;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2–3, 6.

  48.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0–91, 94–96;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2, 55, 71, 137.

  49.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6, emphasis added;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16–17.

  50.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5, 48–49; Black and Black, Life Stories, [4].

  51.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3–4, 10, 25–26, 48, 68; Shumway and Shumway, Blossoming, 92; Black and Black, Life Stories, [158]; Pierce, Oral History Interview, 2–4.

  52. Maeta Beck and Dennis Beck, Oral History Interview, 6–7, 9–10, 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