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모든 곳에서 축복을
1962년 봄, 청녀 상호향상회 임원회의 임원인 루스 펑크는 일에 파묻혀 있었다. 상호향상회의 연례 대회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녀는 이 행사를 위해 공동으로 뮤지컬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1890년대에 시작된 이 대회를 위해, 교회 본부 지도자들에게서 권고와 훈련을 받고자 하는 약 2만 5천 명의 청소년 지도자가 솔트레이크시티에 모일 예정이었다. 루스와 그녀가 속한 위원회의 위원들은 대회를 위해 멋진 쇼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배우고 또 일하고 있었다.
첫 공연이 가까워지자, 루스는 교회의 중점 사항을 다루는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 모임에 초대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고,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남편 마커스와 네 아이들도 겨우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밤이 되자 루스는 서둘러 모임으로 향했다. 모임에는 교회 본부의 몇몇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회의실을 가득 메우고 교회의 기본 목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모임의 진행자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리드 브래드퍼드였다.
처음에 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갈 무렵 리드가 말했다. “펑크 자매님, 아직 생각을 말씀하지 않으셨네요.”
“음, 제가 아주 강하게 느끼는 사실이 있습니다.” 루스가 입을 열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 많은 사람들처럼 교회 회원들도 이혼과 청소년 범죄 같은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우려가 깊어지고 있었다. “가족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모임이 끝났고, 루스는 다시 자신이 맡은 일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상호향상회 대회가 끝나고 뮤지컬 공연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뒤, 그녀는 사도인 매리온 지 롬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루스 자매님, 자매님에게 협의 위원회에서 봉사하는 부름을 드리려고 합니다.” 롬니 장로가 말했다.
루스는 가슴이 철렁해서 물었다. “협의 위원회가 뭔가요?”
그녀는 곧 해롤드 비 리 장로와의 오리엔테이션 모임에서 답을 알게 되었다. 이 위원회가 주로 담당하는 일은 교회의 모든 교과 과정을 기본 복음 원리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하면서, 위원회는 신권, 가정, 가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의 중심으로서 새롭게 강조하는 일 또한 하게 될 예정이었다.
리 장로는 성인, 청소년,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각 위원회에 대해 설명했다. 놀랍게도 루스는 수년간 청소년과 관련된 부름을 행하며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 위원회에 부름받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위원회의 다른 위원들(여성 3명, 남성 5명)도 직장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위원 중 가장 젊은 사람은 서른네 살의 토마스 에스 몬슨이었다. 그는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캐나다 선교부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막 귀환했다고 했다.
몇 달 후 위원회는 교회에서 과거에 시행했던 공과 계획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위원은 교회 교과 과정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내도록 격려받았다. 위원회는 앞으로 수년간 연구와 노력에 힘을 기울여야 했지만, 루스는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최선을 다해 돕고 싶었다.
교회 본부의 다른 곳에서는 사도이자 사업가이며 교회 복지 프로그램의 전 책임자였던 헨리 디 모일이 맥케이 회장의 새 제1보좌로 부름받아 봉사하고 있었다.
본래 선지자는 1959년 5월 스티븐 엘 리차즈가 사망한 후 그를 불러 제1보좌인 제이 르우벤 클라크와 함께 회장단에서 봉사하게 했었다. 2년 후 클라크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자 맥케이 회장은 휴 비 브라운 사도를 회장단의 제3보좌로 지명했다. 1961년 10월에 클라크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맥케이 회장은 모일 회장과 브라운 회장을 각각 자신의 제1보좌와 제2보좌로 지명했다.
모일 회장은 제일회장단의 제1보좌로서 교회 선교사 프로그램의 모든 측면에 관여했으며, 그 임무를 무척 좋아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모일 회장은 모든 선교부가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게 할 책임이 있었다. 그의 감독에 따라 전 세계에서 침례가 30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선교사들은 한 달에 평균 221시간을 일했는데, 이는 1960년보다 44퍼센트 더 높은 수치였다.
사업을 경험해 본 모일 회장은 높은 수치와 탄탄한 비율이 감사했다. 그러나 개종자들이 잠깐만 교회에 오고 만다면 선교 사업에서 숫자는 별 의미가 없었다. 모일 회장은 사람들이 삶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이뤄 나가기를 원했다.
맥케이 회장과 마찬가지로, 그도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모든 회원은 선교사” 접근법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단순히 선교사 야구팀에서 뛰기 위해 교회에 들어오면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선교부들이 진정한 개종보다 할당 인원을 강조할 때면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는 선교사들을 만나서, 가족들을 가르치고 개종자들이 교회에서 환영받는 느낌을 받게끔 돕도록 권고했다. 또한 청소년은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만 침례받을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협의 위원회가 조직된 얼마 후 모일 회장은 한 모임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해롤드 비 리 장로는 선교 사업을 포함하도록 협의 프로그램을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모일 회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교회 복지 프로그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리 장로와 함께 봉사했으며 그를 친한 친구로 여겼다. 그러나 협의 프로그램의 다른 측면들과 달리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모두가 기억하는 한, 선교 사업은 제일회장단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제일회장단은 선교사 부름을 주고, 선교부 회장을 지명하고, 선교부 사무실과 직접 서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리 장로의 제안대로라면 제일회장단의 보좌가 아닌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 교회 선교사 위원회를 이끌게 됐다. 제일회장단은 선교부를 방문한 사도로부터 서면 보고를 받고 귀환하는 선교부 회장으로부터 구두 보고를 받겠지만, 선교부들을 직접 관리하는 책임은 대부분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9월 18일, 모일 회장은 리 장로가 제안한 협의 프로그램을 확장하는 계획에 대해 맥케이 회장과 의견을 나눴다. 그는 현재의 체계가 잘 운영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새로 제안된 계획을 채택하면, 선교 사업은 제일회장단의 손을 떠나게 됩니다.” 모일 회장이 말했다.
맥케이 회장도 인정했다. “교회가 조직된 이래로 선교 사업은 항상 제일회장단이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매우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제일회장단은 곧 더 많은 책임을 위임해야 할 것이었다. 돌보아야 할 선교부는 64개, 선교사는 1만 명이 넘었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날 조짐이었다. 이미 모일 회장과 두 명의 보조는 일주일 중 많은 시간을 선교사 부름에만 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집회소 용지 매입과 같은 행정 문제에 관해 선교부 회장들과 끝없이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맥케이 회장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제일회장단이 계속 새로운 선교부 회장을 부르는 편을 원했다. 하지만 리 장로의 제안대로 변경하는 것을 고려할 의향도 있었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더 들어보고 싶었다.
몇 달이 지난 1963년 1월 11일, 『데저렛 뉴스』에 예상치 못한 헤드라인이 등장했다. “교회가 나이지리아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다”
사도 엔 엘돈 태너와 그의 아내 세라가 서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불과 며칠 만에 나온 발표였다. 2주간의 여정 중에 태너 장로는 나이지리아의 관리들과 담화를 나눴고 수백 명의 예비 성도를 만났으며, 회복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 땅을 헌납했다. 태너 부부가 유타로 돌아오자 맥케이 회장은 러마 윌리엄스를 비롯한 몇 사람에게 부름을 주고, 여행 비자를 받는 즉시 나이지리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게 했다.
나이지리아 아바에 있는 예비 성도 그룹의 지도자인 찰스 아구는 이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그 그룹은 인원이 150명이 넘었고 이 숫자는 빠르게 늘고 있었다. 1961년 러마가 나이지리아를 방문했을 때, 찰스는 러마와 친구가 되어 그 여정의 일부를 함께했었다. 그와 그의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잘 이해했으며 회복에 대해 한결같은 신앙이 있었다. 러마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찰스는 맥케이 회장에게 전할 메시지를 녹음하며. 그는 이렇게 간증했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요구하시는 모든 계시와 예언이 이 교회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권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이 교회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후로 찰스와 러마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찰스는 러마가 다시 와서 서아프리카에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1963년 2월에 러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순간 우리는 이곳에서 정말 큰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찰스는 신권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지리아에 교회가 설립되더라도 자신이 지부 회장으로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태너 장로가 이곳에 방문했을 때 한 말에 따르면, 찰스와 나이지리아의 지도자들은 성임되지 않은 채로 지방부 또는 그룹의 지도자로서 그곳의 회중을 계속 인도하게 될 것이었다. 또한 나이지리아 성도들은 신권 성임이 필요하지 않은 부름도 전부 수행할 수 있었다.
찰스는 매주 러마가 나이지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러마는 거의 모든 편지에서, 나이지리아 정부가 여행 비자를 승인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누구도 일이 그토록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던 3월, 찰스는 『나이지리아 아웃룩』[Nigerian Outlook]이라는 신문에서 우연히 교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캘리포니아의 한 후기 성도 모임을 방문한 나이지리아 대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남학생은 거기서 신권 제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기사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어느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치는 신봉자를 둔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그는 나이지리아에 교회를 설립하도록 허용하면 나이지리아의 명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여겼다.
나이지리아는 겨우 몇 년 전 영국에서 독립한 터라 이 기사에는 나이지리아에 미치는 외부의 영향력에 대해 광범위한 의혹이 반영되어 있었다. 비자가 지연되는 것이 이 기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찰스는 그것을 러마에게 보냈다. 교회 본부에서 공식 대표를 보내면 이 기사로 인한 피해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러마는 동의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들이 나이지리아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도록 제안한 이유는 수천 명의 나이지리아인들이 인내하며 끈질기게 회복된 복음을 구한 덕분이었다. 누군가 나이지리아에서 교회를 변호해야 한다면 신앙이 있는 나이지리아 사람들이 적임자라고 러마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와 영감을 통해, 정부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진정성을 확신시켜 줄 것들을 말하고 행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찰스는 나이지리아의 또 다른 예비 성도인 딕 오보트를 만나, 함께 『나이지리아 아웃룩』에 교회에 대한 광고를 실었다. 광고에서 그들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회복, 교리 확립에 있어서 현대 계시의 역할, 모든 사람의 영적 및 현세적 복지에 대한 교회의 관심에 대해 간증했다.
찰스는 이 광고가 성도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이 교회를 모르던 시절, 그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규율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러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고 직업적으로 발전했으며, 모든 곳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1963년 3월, 침례받은 지 4개월 된 열세 살 델리아 로촌은 십일조를 내고 싶었다. 그녀는 우루과이 남부의 도시인 콜로니아수이사에 있는, 약 20명의 회원이 소속된 지부의 회원이었다. 그녀는 십일조가 계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행하고 싶었다.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수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교회 회원이 아닌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머니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라고 제안했다.
델리아는 이웃에 사는 한 노인에게 신선한 물을 길어다 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싶다고 했고, 노인도 동의했다. 델리아는 날마다 유리병을 가지고 집 근처 우물로 가서 4리터가량 물을 채워 그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몇 주 동안 그렇게 번 돈을 모아 지부 회장인 빅토르 솔라리에게 십일조로 1페소를 가져갔다.
지부 회장이 물었다. “번 돈이 모두 얼마인가요?”
“3페소에요.” 델리아가 대답했다.
솔라리 회장이 말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퍼센트를 내는 거예요.” 그녀가 번 돈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페소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 돈을 내고 싶어요.” 델리아가 말했다.
솔라리 회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금식 헌금으로 냅시다.” 그는 금식 헌금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뒤 델리아가 첫 헌금 명세서를 작성하도록 도와주었다.
얼마 뒤 솔라리 회장은 델리아에게 접견을 하자고 했다. 델리아는 한 번도 지부 회장실로 불려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긴장이 됐다. 지부 회장실은 아담했고 철제 책상과 함께 교회 교재가 잔뜩 꽂힌 책장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델리아는 책상 옆 의자에 앉았는데, 발이 바닥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솔라리 회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부의 초등회 회장이 가르치는 일을 하느라 다른 지역으로 막 이사를 했는데, 델리아가 대신 초등회 회장 부름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선교사들이 지부의 지도자 직책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루과이 선교부 회장인 토머스 파이언스는 북미 선교사들을 지도자 직책에서 해임하고 대신 현지 성도들을 부르는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킴볼 장로가 1959년에 남미 대륙을 순방한 이후 남미의 선교부들은 현지 성도들을 지도자로 부르는 것을 우선 사항으로 삼고 있었다. 현지 성도들, 심지어 열세 살밖에 안 된 성도들에게 현지에서 봉사할 기회를 더 많이 마련해 주는 것은 남미에서 스테이크를 설립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다.
델리아는 초등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초등회 회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부름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걱정이 되었다. 델리아의 부모님은 이혼을 한 데다 양쪽 모두 교회 회원이 아니었다. 아버지 쪽 가족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델리아가 교회 회원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델리아가 선택한 종교를 좀 더 이해해 주었지만, 부름 때문에 집과 학교에서 해야 할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염려할 것 같았다.
“자매님의 어머니와 이야기해 볼게요.” 솔라리 회장이 말했다.
약간의 설득이 필요했지만, 지부 회장과 델리아는 어머니와 합의점을 찾았다. 지부의 초등회가 열리는 토요일이면 일찌감치 집안일을 끝낸 다음 교회 임무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허락을 얻은 것이다.
델리아는 성별을 받고 새로운 부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지부였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서 초등회 아이들을 이끌고 가르쳐야 했다. 솔라리 회장은 델리아를 훈련하기 위해 두꺼운 초등회 교재와 지침을 타자기로 옮겨 적은 두 장의 종이를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기도하세요!”
델리아는 첫 공과 준비를 앞두고 먼저 지침을 읽었다. 그런 다음 초등회 교재를 펴고 그 위에 손을 얹은 뒤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린이들에게 이 공과를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같은 시기, 열여덟 살의 수지 타우스는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베벌리 지부에서 침례를 받은 지 2년이 가까워진 지금, 그녀는 선교사가 되어 영국에 있는 교회 건축부 사무실에서 서기로 봉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집을 떠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사실 수지가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 회원이 되었던 수지의 어머니는 한 선교사에게서 마음이 상한 후 교회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수지는 그런 일로 주저하지 않았다. 수지는 교회에 들어온 뒤로 선교사가 되어 봉사하는 것을 항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지부의 청남인 제프 더닝이 수지를 역까지 배웅했다. 제프는 약 1년 전에 교회에 들어왔는데, 두 사람은 지부의 우정 증진 위원회에서 함께 봉사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제프의 강한 간증과 헌신은 현지 교회 지도자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는 이미 다양한 부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수지는 남쪽으로 가는 내내 어서 빨리 건축부에서 봉사하고 싶었다. 교회는 1960년 7월에 유럽에서 노동 선교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선교부 회장들은 곧 선교부 야구팀을 통해 교회에 가입한 후 교회에서 계속 활동적으로 생활하던 일부 청소년을 포함한 수백 명의 현지 성도들을 “건축 선교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 성도들은 비좁은 임차 회관 대신 널찍한 새 예배당에서 모임을 할 날을 고대할 수 있었다. 사실 수지와 제프는 이미 여러 날 동안 저녁 시간과 토요일에 베벌리의 예배당에서 건축 선교사들의 일을 도운 경험이 있었다.
수지는 새로 조직된 영국 북동 선교부의 회장인 그랜트 손에게서 봉사 부름을 받았다. 젊은 여성은 21세가 되어야 전도 선교사로 부름받을 수 있었지만, 건축 선교사는 더 어린 나이에도 될 수 있었다. 수지는 회계 법인에서 비서로 일했기 때문에 다양한 사무를 수행할 줄 알았다. 건축부는 비서 업무 경험에 대해 그녀를 면접한 뒤 “탁월한 점수”를 주었다.
런던에 간 수지는 다른 자매 선교사 두 명과 함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기도와 찬송, 경전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 뒤에는 종일 서신을 타자하고, 모임에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속기록을 옮겨 적고, 예배당 헌납식에 참석하고 헌납식을 기록했다.
건설 중인 예배당 중에는 맥케이 회장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웨일스 머서티드빌의 집회소도 있었다. 이 예배당은 1961년 3월에 착공됐으나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건물을 헌납하기로 한 1963년 1월에야 공사에 속도가 붙었다.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그 후 8개월 동안 예배당 건설에 3만여 시간을 헌납했으며, 건물은 8월 23일에 완공되었다.
이틀 후, 수지를 비롯한 1,300명의 인파가 헌납식에 참석하기 위해 새 집회소에 모였다. 수지는 맥케이 회장을 보자마자 영혼을 가득 채우는 화평과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납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난 후, 수지는 어머니로부터 격앙된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 당장 집에 오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절대 돌아오지 마라.”
수지는 부모님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교 사업을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부모님의 조언과 교회의 가르침이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 너무 혼란스럽고 걱정스러워.”
오래지 않아 그녀는 손 회장에게 자신의 딜레마를 이야기했다. 손 회장은 이렇게 권고했다. “남아서 선교 사업을 완수하세요. 주님께서 방편을 마련하실 겁니다.”
수지는 그 권고를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제프에게도 말했다. “부모님도 언젠가 이해해 주실 거야. 이게 주님의 일이 아니라면 난 집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1963년 초, 해롤드 비 리 장로와 그의 위원회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에 신권 협의에 대한 최종안을 제출하자, 맥케이 회장은 흔쾌히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이 계획은 교회의 전체 프로그램을 포괄하며, 교과 과정을 서로 연계시키려는 위원회의 원래 임무를 크게 확장한 것이었다. 교회 조직은 이제 총관리 역원의 인도 없이는 공과를 출판하거나 정책을 발표할 수 없었다. 새로운 체계에 따라 교회는 네 개의 영역(복지, 계보 및 성전, 가정 복음 교육, 선교사)을 나눠서 관리하게 되었다. 각 영역은 사도 또는 감리 감독이 이끄는 약 2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감독하게 될 것이었다.
리 장로는 4월 연차 대회에서 협의 프로그램에 관해 말씀하며, 가정은 의로운 삶의 토대이며 교회 조직은 가정을 돕고 지원하기 위해 신권 권세 아래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기본 원리에 입각하여, 저희는 모든 신권 및 보조 조직의 교과 과정과 활동에 대한 상호 연관성을 연구했습니다.”
모일 회장과 브라운 회장은 맥케이 회장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맥케이 회장이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로그램의 일부 기능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리 장로와 논의한 후 브라운 회장은 우려를 해소했다. 모일 회장은 계획을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선교부 감독권을 제일회장단에서 십이사도 정원회로 옮기는 것이 맞을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리 장로와 모일 회장은 수년간 친한 동료로 지낸 사이였다. 모일 회장이 제일회장단으로 부름받았을 때 리 장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나중에 리 장로의 아내인 펀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모일 회장은 그를 위로하고 그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지금 리 장로는 협의 프로그램에 대해 친구의 진심 어린 지지가 간절했다.
교회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리 장로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고 결혼 경험이 없는 학교 교사 조앤 젠슨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결혼을 결정한 뒤 맥케이 회장에게 결혼식을 집행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선지자는 기쁘게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결혼식 전날, 리 장로는 자신뿐 아니라 모일 회장과도 절친한 친구인 매리온 지 롬니에게 증인 중 한 사람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모일 회장이 다가와 자신도 결혼식에 참석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협의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 차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증인이 되어 주겠나?” 리 장로가 물었다.
모일 회장은 감격했다. “그렇게 해도 되겠나?”
“맥케이 회장님이 우리 결혼식을 집행하시고 자네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네.” 리 장로가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맥케이 회장은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해롤드와 조앤을 남편과 아내로 인봉했다. 롬니 장로와 모일 회장은 이 성스러운 의식의 증인 역할을 했다.
몇 달이 지난 9월, 모일 회장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로 갔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교회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교회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3억 6천7백만 평 규모의 가축 목장을 시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리 장로는 하와이에서 스테이크 대회를 감리하고 있었다. 어느 이른 아침, 그는 유타에서 걸려 온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브라운 회장이었다. 모일 회장이 플로리다 목장에서 잠을 자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리 장로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날 오전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사흘 후, 모일 회장의 장례식에서 리 장로는 솔트레이크 태버내클 연단에 서서 자신과 매리온 지 롬니가 헨리 디 모일과 나눈 우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셋은 의지가 굳고, 고집이 셌습니다. 하지만 우리 셋만큼 서로를 존중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