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하나의 대가족
1996년 초, 필리핀 일로일로 스테이크의 상호부조회 회장인 마리단 나바 솔레스타는 자신의 스테이크 회장인 비르길리오 가르시아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몇 달 전 그녀는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단 앞으로 편지를 써서 일레인 엘 잭 회장의 제1보좌인 치에코 오카자키의 방문을 요청했었다. 마리단은 오카자키 자매가 대회에서 신앙을 고취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영감을 받았으며, 일로일로 스테이크의 여성들이 그녀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오카자키 자매가 이 스테이크를 방문하도록 지명된 사실을 가르시아 회장이 말해 준 것이다.
최근 교회는 중요한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미국 밖 성도들이 미국 안 성도들보다 더 많아진 것이다. 마리단과 그녀의 남편 세브는 둘 다 10여 년 전에 교회에 들어왔다. 그들은 1984년에 마닐라 성전에서 인봉되었으며 이후 세 아들을 낳았고 아들들은 이제 일곱 살, 아홉 살, 열 살이 되어 있었다. 마리단이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은 후 5년 동안 필리핀 교회의 회원 수는 8만 명 이상 늘어 있었다. 필리핀의 총 회원 수는 36만 명으로, 미국, 멕시코, 브라질, 칠레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후기 성도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미국 외 지역 출신 총관리 역원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이미 칠십인 제일, 제이 정원회에는 아르헨티나의 안헬 아브레아, 브라질의 엘리오 다 호샤 카마르고와 엘베시오 마르틴스, 칠레의 에두아르도 아얄라, 과테말라의 카를로스 에이치 아마도, 멕시코의 호레이쇼 에이 테노리오, 일본의 요시히코 기꾸찌, 한국의 한인상, 필리핀의 아우구스토 에이 림 등의 회원이 있었다. 1995년에 제일회장단은 지역 대표의 자리를 대체할 지역 관리 역원 직책을 신설하여 전 세계 각지의 단위 조직을 지원하는 신권 지도자를 늘렸다. 하와이에서 나고 자란 오카자키 자매는 교회 본부 회장단에서 봉사하는 최초의 아시아계 인물이었다.
마리단은 일로일로시티에서 교회의 성장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스테이크에는 8개의 와드와 6개의 지부가 있었고, 그녀를 비롯한 스테이크의 지도자들이 모든 단위 조직을 방문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마리단은 제약 회사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어서 늘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여성들에게 성역을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들이 강한 회원으로 성장했지만, 필리핀에는 교회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는 성도들도 많았다. 마리단은 이따금 그들을 방문했는데, 그럴 때 그들은 그녀와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방문을 받아들이며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리단은 이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부 여성들이 교회의 동료 회원들에게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신앙을 잃었거나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간 여성들도 있었다. 일부 여성들은 필리핀에서 교회가 사용하는 두 가지 주요 언어인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둘 다 몰랐기 때문에 모임에 즐겁게 참여하지 못하거나 모임에서 많은 것을 얻지 못했다. 교회는 약 200개의 필리핀 언어와 방언으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의사소통은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큰 문제였다.
오카자키 자매는 1996년 2월 24일 아침에 일로일로시티에 도착했다. 환영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마리단과 가르시아 회장 일행은 공항에서 오카자키 자매, 아우구스토 에이 림 장로와 미르나 림 자매를 만났다.
그날 나머지 시간 동안 마리단과 스테이크 회원들은 오카자키 자매와 림 장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첫 번째 모임에서 오카자키 자매는 교리와 성약 107편을 사용하여 교회에서 자신의 의무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저녁 모임에서 그녀는 스테이크의 모든 회원에게 하늘 아버지께 축복을 구하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말씀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마음속 소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확신을 가지고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있을 때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고, 오카자키 자매는 일로일로시티 와드의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에서 오카자키 자매는 마리단에게 상호부조회 자매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모국어로 권고하도록 가르치고 격려했다. 그날 오후 스테이크를 떠나기 전에 오카자키 자매는 마리단에게 지도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주었다.
몇 달 후, 마리단과 필리핀 성도들은 또 다른 교회 지도자인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교회 회장이 된 후로 전 세계를 다니며 성도들을 방문해 왔다. 필리핀에서 그는 마닐라와 세부시티를 방문했다.
마닐라에 있는 동안 그는 현지의 텔레비전 방송국들로부터 교회에 관한 질문들을 받고 답했다. 그중에는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가 최근 발표한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여러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결혼과 가족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해 왔다. 이 선언문은 남녀 간의 결혼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가족이 그분의 구원 계획에서 필수적인 것임을 단언했다. 또한 생명의 신성함을 옹호하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신성한 본성과 운명을 지닌, 하늘 부모의 사랑받는 아들과 딸임을 선언했다. 또한 이 선언문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사랑하고 의롭게 기르며, “신앙, 기도, 회개, 용서, 존경, 사랑, 동정심, 일 그리고 건전한 오락 활동”을 바탕으로 가정을 꾸릴 때 동등한 동반자로서 함께 일할 것을 촉구했다.
힝클리 회장은 필리핀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조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인종이나 피부색 등에 관계없이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가족의 일원입니다.”
이후에 그는 3만 5천 명의 성도들로 가득 찬 대경기장에서 말씀을 전하며 자신은 가끔 교회가 필리핀에서 그토록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답은 간단합니다. 이 교회는 가치관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닻, 즉 진리의 견고한 닻으로 서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교회에 가입하고 그 가르침을 고수하는 모든 남성과 여성은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행복한 남성과 여성이 되고, 마음속에 주님과 그분의 방법에 대한 큰 사랑을 품게 될 것입니다.”
1996년 3월 어느 날 저녁, 베로니카 콘트레라스는 남편 펠리신도와 함께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와드 건물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다섯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주고자 칠레 남부의 작은 도시인 팡기푸이에서 수도로 막 이사한 터였다. 그들은 이제 칠레 산티아고 성전과 가까워졌으며, 세미나리 수업과 청소년 활동을 제공하는 스테이크에 속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 아니었지만 부부는 집회소에서 몇몇 교회 회원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문은 잠겨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부부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선교사 두 명을 멈춰 세우고 감독에게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감독은 콘트레라스 가족의 집에 와서 그들을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감독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참석하는 일요일에 교회에서 직면할 상황을 알지 못했다.
팡기푸이에서는 성도들이 집회소를 집처럼 여기며 깨끗하게 잘 관리했었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집회소에 들어선 베로니카는 바닥과 벽에 난 신발 자국과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복도를 다니면서 생긴 바퀴 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한 와드의 기록에는 7백 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지만, 성찬식에서는 대부분의 좌석이 비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콘트레라스 가족이 새로운 와드에서 발견한 문제는 칠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남미에는 전 지역에서 개종자 침례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수십 개의 스테이크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 많은 새로운 회원들은 침례를 받은 후 회복된 복음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수년 동안 최근 개종자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1986년에는 칠십인의 현지 신권 직분이 없어지며 현지 장로 정원회에 힘이 더해졌다. 또한 선교사들은 새로운 회원들과 우정을 쌓는 데 시간을 더 할애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며, 교회는 최근 개종자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여섯 가지 새로운 회원 토론 시리즈를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토론을 아예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산티아고에 있는 것과 같은 와드들은 일이 너무 많아 감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와드에는 전체 성도 수에 비해 모임에 참석하는 회원이 너무 적었다.
콘트레라스 가족의 새 감독은 선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업무를 분담할 보좌가 없었다. 또한 그는 직장에서 장시간 근무해야 했으므로 평일에 회원들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베로니카와 펠리신도는 감독을 만났을 때 어떤 부름이든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겠다고 제안했다. 얼마 뒤 그들의 큰딸은 와드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았고, 아들들은 다른 청남들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 펠리신도는 가족 역사 및 성전 사업을 돕고 스테이크 고등평의회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한편 베로니카는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봉사에 동참했다. 하지만 와드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았다.
1992년 10월에 홍콩 성전 건축이 발표되자 노라 쿠트 주는 무척 기뻤다. 그녀가 극동 남부 선교부에서 봉사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레이먼드 주라는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길렀다. 하지만 그녀는 홍콩에서 초창기에 교회로 개종한 중국인으로서 그곳에서 했던 경험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레이먼드는 온 가족이 성전 헌납식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에요.” 노라가 말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레이먼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 해요.”
가족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으며, 주님의 집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1963년에 미국으로 이민할 때 먼저 하와이에 들러 라이에 성전에서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나중에 그녀와 레이먼드는 로스앤젤레스 성전에서 인봉되었고, 그 후 얼마 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 있는 그들의 집 근처에 오클랜드 성전이 헌납되었다. 마침내 노라와 레이먼드는 오클랜드 성전의 봉사자가 되었고, 노라는 표준 중국어, 광둥어, 몽족어 및 기타 언어로 성전 의식을 집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5월에 홍콩 성전이 완공된 후, 교회는 2주간 일반 공개를 했다. 노라는 가족과 함께 성전 헌납식 사흘 전인 5월 23일 저녁에 홍콩에 도착했다. 노라는 공항에서 나오면서 온몸으로 후끈하고 습한 공기를 느꼈다.
“홍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음 며칠 동안 노라는 가족을 데리고 시내를 관광했다. 큰딸 로린도 홍콩에서 선교 사업을 했기에 그들은 함께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하게 되어 기뻤다. 노라가 한때 알았던 거리와 건물들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자, 그들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녀가 그들을 데리고 간 첫 번째 장소 중 한 곳은 성전이었다. 성전은 그녀가 젊었을 때 많은 시간을 보냈던 옛 선교 본부 자리에 세워졌다. 노라는 그 장소가 그토록 성스러운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더없이 기뻤다.
5월 26일 일요일 아침, 가족은 노라의 선교부 회장이었던 그랜트 히튼과 극동 남부 선교부에서 봉사했던 다른 옛 선교사들과 함께 특별 성찬식에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히튼 회장과 선교사들은 간증을 했다. 노라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일어서서 간증했다. “제 안에서 영이 불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땅과 이 선교부의 산물입니다. 그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날 아침, 노라와 그녀의 가족은 홍콩 성전 해의 왕국실에 함께 앉았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모임을 시작하고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 장로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노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인생을 한 바퀴 돌아 시작점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42년 전, 그녀는 홍콩에서 해롤드 비 리 장로에게 교회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었다. 당시 홍콩의 성도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제 홍콩에는 주님의 집이 있고,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모임을 마치면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헌납 기도문을 낭독했다.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여 이곳에 있는 당신의 많은 아들과 딸들의 삶을 축복했습니다. 저희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신과 맺은 성약에 참되고 충실한 모든 이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지역에 있는 당신의 교회는 이제 이 성스러운 성전의 헌납으로 완전히 성숙해졌습니다.”
다 함께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을 부르는 동안 노라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폐회기도가 끝나자, 그녀는 남편과 자녀들을 끌어안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저녁, 노라의 가족은 귀환 선교사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라가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심으로 그녀를 맞이했고, 가족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경외감을 느꼈다.
노라가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기억하나요?” 그가 물었다.
노라는 그를 쳐다보았고 누군지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그녀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만났던 선교사 중 한 명인 해럴드 스미스였다. 노라는 자녀들에게 해럴드를 소개했다.
“내가 한 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가 말했다. 그는 노라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어떻게 잊겠어요.” 노라가 말했다.
1997년 5월, 수년간의 전쟁과 정치적 혼란 끝에 자이르 정부가 붕괴했다. 30년 넘게 나라를 지배했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정권의 종말을 막을 힘이 없었다. 자이르 동쪽에 이웃한 국가인 르완다의 군대가 자국의 내전에서 추방된 반란군을 색출하러 자이르에 들어왔다. 곧이어 다른 동아프리카 국가들도 자이르에 들어왔고, 결국 다른 군대들과 힘을 합해 약해진 세코 대통령을 축출한 뒤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국가명을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 분쟁이 격화되는 동안에도 교회는 기능을 멈추지 않았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는 약 6천 명의 성도들이 살고 있었다. 킨샤사 선교부에서는 17명의 전임 선교사가 다섯 개의 나라를 담당했다. 1996년 7월에는 이 지역 부부 몇 쌍이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성전에서 성전 축복을 받기 위해 2,8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여행했다. 몇 달 후인 11월 3일에 교회 지도자들은 콩고 민주 공화국의 첫 스테이크이자 아프리카 최초의 프랑스어권 스테이크인 킨샤사 스테이크를 조직했다. 선교부에는 5개의 지방부와 26개의 지부도 있었다.
루푸타의 윌리 비넨은 이제 스물일곱 살이었고, 자국의 불안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선교부 회장단의 보좌인 은탐브웨 카브위카에게 이 소망을 전하자 실망스러운 소식이 돌아왔다.
카브위카 회장은 말했다. “형제님, 선교사로 봉사하려면 25세가 넘지 않아야 합니다. 형제님을 선교사로 부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후 그는 윌리를 위로하려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형제님은 아직 젊어요.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윌리에게는 그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서 실망감이 솟구쳤다. 나이 때문에 선교사로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였다. ‘나에게 그 모든 일이 일어났는데 왜 예외를 둘 수 없는 걸까?’ 그는 애초에 왜 주님께서 자신에게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영감을 주셨는지 궁금했다. 그는 그 속삭임을 따르기 위해 공부하고 일할 기회도 미루었는데, 도대체 무얼 위해서였단 말인가?
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런 일로 괴로워할 순 없어.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 머물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997년 7월에 루푸타 성도들은 공식 지부로 조직되었다. 재정 서기와 지부 선교사로 부름받은 윌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주님께서 자신을 준비시키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여기가 내 선교부야.’ 그는 생각했다.
루푸타 지부의 다른 성도들 몇 명도 지부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윌리는 일주일에 사흘은 농작물을 돌보았다. 다른 날에는 집집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다. 그런 후에는 하나밖에 없는 바지를 빨았다. 다음 날 깨끗하게 입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어떤 동력으로 그렇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특히 빈속으로 나가야 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복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이 누리는 축복을 자신의 종족,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조상이 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선교 사업은 힘든 일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부 선교사들을 위협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몬경을 없애기 위해 모이기도 했다. 그들은 말했다. “몰몬경을 불태웁시다. 그러면 교회가 사라질 테니.”
그러나 윌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노력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와 동반자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악취가 풍겼다. 안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내가 좀 아픕니다.”
윌리와 동반자는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고, 몹시 야윈 듯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기도해도 될까요?” 그들이 물었다.
남자는 그렇게 해 달라고 했고, 선교사들은 그의 병이 사라지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드린 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그 집으로 가니 밖에서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들이 기도한 후로 그는 몸이 나아져 있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아직 교회에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준비된 사람들도 있었다. 매주 윌리와 다른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도 만났는데, 그들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싶어 했다. 어느 토요일에는 30명이나 침례를 주기도 했다.
루푸타의 교회는 이제 막 성장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1997년 6월 5일,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멕시코 콜로니아후아레스의 커다란 차양막 아래 연단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약 6천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교회에는 여러분을 조금 안쓰럽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라고 그는 청중에게 농담을 했다. “다른 모두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1880년대 미국 정부가 복수결혼에 대한 불시 단속을 벌이는 동안, 미국에서 온 교회 회원들은 콜로니아후아레스와 멕시코 북부의 다른 소도시들에 정착했다. 이 도시들은 주요 도시에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건조한 치와와 사막에 위치해 있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현지 학교인 후아레스 아카데미가 곧 100주년을 맞게 되어, 힝클리 회장은 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온 터였다.
힝클리 회장은 콜로니아후아레스 성도들의 역사를 알고 있었으며, 신앙을 지키려는 그들의 결심을 존경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고난과 곤경의 시기에 서로를 도왔습니다. 달리 여러분을 도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힝클리 회장은 학교 졸업식에서 말씀을 전하고 새로 개조된 아카데미 건물을 재헌납했다. 그런 후 콜로니아후아레스 스테이크의 회장인 메레디스 롬니가 북쪽으로 약 320킬로미터 떨어진 텍사스 엘패소 공항까지 그를 태워 주었다.
엘패소로 가는 길은 험하고 울퉁불퉁했다. 처음에 힝클리 회장은 롬니 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잠시 후 대화가 끊겼고, 힝클리 회장은 콜로니아후아레스 성도들과, 그들이 주님의 집에 참석하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조용히 숙고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전 세계 성도들과 관련이 있었다. 현재 계획 중이거나 건축 중인 성전이 12개 이상 되었으므로 교회 회원의 85퍼센트가 곧 성전 반경 약 480킬로미터 내에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 북부에서 상파울루 성전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했던 성도들은 브라질 북동부 해안 도시인 헤시피의 새로운 성전과 훨씬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파울루에서 북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인 캄피나스에 세워질 것으로 발표된 성전은 브라질의 60만 성도들에게 더 많은 성전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머지않아 포르투알레그리, 마나우스, 쿠리치바, 브라질리아, 벨루오리존치,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도시에도 성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힝클리 회장은 성전이 더 많은 성도들에게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에 전념하는 데 주님의 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최근 선지자는 새로운 개종자 중 단 20퍼센트만이 1년 후에도 교회에 계속 참석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깜짝 놀랄 비율에 대해 근심한 그와 그의 보좌들은 5월에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간증을 얻었지만 성도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따뜻한 우정을 느끼지 못한 모든 연령대의 많은 형제 자매들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권 축복과 성전 성약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한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모든 새로운 회원에게는 세 가지, 즉 친구와 책임, 그리고 복음 공부를 통한 영적인 자양분이 필요합니다.”
콜로니아후아레스를 방문하면서, 힝클리 회장은 교회가 현지 성도들에게 그런 지원을 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주님의 집이었다. 전 세계 외딴곳의 다른 스테이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전을 이용하고 관리할 성도들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 성전을 짓는 것을 정당화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성전의 세탁실과 구내식당 같은 시설의 높은 비용에 대해 생각했다. 그 두 가지는 성전 참여자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참여자들이 자기 성전복을 가져오고 음식도 다른 곳에서 먹는다면 어떨까?’
수년 동안 힝클리 회장은 전 세계에 더 많은 성전을 짓기 위해 일부 성전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다. 이미 교회는 라이에, 상파울루, 프라이베르크, 홍콩 등지에서 현지 성도들의 필요에 맞게 성전의 설계를 조정했었다. ‘침례실과 확인실, 예비 의식실, 엔다우먼트 의식실, 인봉실 등 꼭 필요한 것만 갖춘 성전을 짓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만방에 주님의 집이 세워져 더 많은 성도들이 더 가까운 곳에서 성스러운 성약과 의식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후 힝클리 회장은 자신이 구상하는 성전의 형태에 대한 간단한 평면도를 그렸다. 영감은 분명하고 강하게 왔다.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한 그는 그것을 몬슨 회장과 파우스트 회장에게 보여 주었고, 그들은 그 개념을 승인했다. 십이사도 정원회도 그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마침내 힝클리 회장은 이 평면도를 교회 건축가에게 가져갔다. 건축가는 도면을 살펴보고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