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응답이 올 거야
“어떻게 생각해요?”
마르코 비야비센시오는 질문을 하고 아내 클라우디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콰도르 마찰라의 통신 회사에 다니는 그는 방금 고용주에게서 에콰도르 동부 아마존 열대 우림의 작은 도시인 푸에르토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에 새 사무실을 열 기회를 제안받았다.
마르코는 승진을 의미하기도 하는 그 자리에 관심이 있었지만 클라우디아의 동의 없이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일을 하려면 부부는 네 살배기 아들 사이르를 데리고 64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마르코와 마찬가지로 클라우디아도 대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열대 우림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큰 변화일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코를 지지했고 그가 승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시골로 이사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족 관계가 더 돈독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와 마르코는 푸에르토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에 대해 똑같은 의문이 있었다. “거기에 교회가 있을까?” 부부는 둘 다 귀환 선교사였으며, 교회는 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아들이 초등회에 참석하고, 복음을 배우고,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자라기를 원했다. 에콰도르에는 20만에 육박하는 후기 성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수도인 키토와 1999년에 주님의 집이 헌납된 과야킬 같은 주요 도시 근처에 살았다.
현지에서 엘코카로 알려진 푸에르토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는 비교적 작은 도시였지만, 몇 년 전 그곳에서 석유가 발견된 후 급격히 성장해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교회 웹사이트의 ‘교회 찾기’ 기능을 사용하여 그 근처 와드나 지부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와 클라우디아의 친구들이 직장 때문에 그곳으로 이사한 몇몇 교회 회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마르코와 클라우디아는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제안에 대해 기도한 후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비야비센시오 가족은 2009년 2월에 엘코카에 도착했다. 엘코카는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비야비센시오 가족은 놀랍게도 그곳이 나머지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디를 보아도 용무를 보러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부가 교회의 회원임을 알게 된 집주인은 회원들이 함께 모여 경전을 읽는 곳을 안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그 사람들한테 집을 세줬거든요.” 주인은 말했다.
그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9시에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리아호나』를 읽고, 경전을 공부했다. 또한 그들은 에콰도르 키토 선교부의 회장인 티모시 슬론에게 연락했고, 슬론 회장은 그들을 방문하도록 두 명의 선교사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4시간 거리에 살았으므로 엘코카에 자주 오지는 못했다.
마르코와 클라우디아, 사이르는 매주 일요일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이르는 초등회를 그리워하며 다른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했다. 마르코와 클라우디아도 옛 생활을 그리워했지만, 주님을 섬기는 일에 몰두하면서 향수병은 잦아들었다.
선교사들이 오자, 마르코는 더 많은 회원을 찾도록 도와 달라며 말했다. “장로님들, 이 도시를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알아본다면 현지에 있는 다른 회원들과 모임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의 교회 회원들은 조금씩 매주 일요일 모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룹에도 합류했다. 그룹이 커지자, 마르코는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더 많은 교회 회원을 찾기 위해 매주 오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엘코카의 성도들은 교회의 기본 단위 조직 프로그램을 따르도록 승인을 받았다.
앤절라 피터슨 폴렌타인은 자신들은 생물학적 자녀를 갖기가 매우 어려울 것임을 알게 되자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아는 사람 중에는 이런 일을 겪어 본 사람이 없어요.”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전 본부 청녀 회장이었던 아데스 캡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앤절라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그 자매님 부부는 자녀를 갖는 축복을 받지 못했단다. 하지만 자매님은 자신을 불임 여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을 헤쳐 나가는 모범이 되었지.”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걸림돌로 여겨서는 안 된다. 네가 모성과 가족에 관한 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평생 그 문제와 계속 부딪히게 될 거야.”
어머니는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다. “너와 존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또 이 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꿋꿋하게 견디며 주님께서 네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시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응답이 올 거야.”
앤절라는 어머니의 사랑과 지지를 느꼈으며, 존과 함께 입양이나 체외 수정과 같은 부모가 되기 위한 다른 길을 모색하는 동안 더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들은 후기 성도 가족 서비스와 뉴질랜드 국가 프로그램을 통해 입양을 알아보다가 입양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는 동안 앤절라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와 금식, 성전 예배에 의지했다. 그녀는 구주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그분께서 자신이 시련을 견디도록 도와주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 시련을 그냥 없애 주시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 시기에 존은 그녀를 위로했다. 존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앤절라는 여전히 벽에 걸려 있는 가족 선언문에 눈길이 갔다. 그녀는 늘 그 가르침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선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는 부분을 읽을 때면 이따금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과 존이 자연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계명을 어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불임 치료를 시작하면서도 앤절라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무렵 그들은 뉴질랜드 플렌티만에 있는 대도시인 타우랑가로 이사했고, 앤절라는 스테이크 청녀 회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새로운 부름은 그녀를 위축시켰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녀는 다른 지도자들에게 지시를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청녀들과 관계를 맺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이었다. 그녀는 청녀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곧 예상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이 소녀들과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앤절라는 청녀들의 부모보다 젊었기 때문에 많은 청녀들은 그녀를 우러러보며 그녀의 조언을 마음에 새겼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청녀들을 격려하고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자녀가 없기에, 그녀는 청녀들이 믿을 수 있는 어른에게서 필요로 하는 시간과 조언을 자신이 더 제공해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폴렌타인 부부는 와드와 스테이크의 다른 가족을 도우며 기쁨을 느꼈다. 그들은 자주 바비큐 파티나 야외 영화의 밤, 가정의 밤을 열었다. 연차 대회 때는 청녀들을 초대해 크레페를 먹은 뒤, 스테이크 센터로 가서 청녀 총회 방송을 함께 시청하곤 했다. 성탄절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래서 부부는 성탄절 전야가 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니우에섬에서 온 몇몇 이민자 지인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다. 이런 활동을 할 때는 항상 그들의 집이 아이들로 가득했으며, 앤절라와 존은 아이들과 그 부모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앤절라가 벽에 걸려 있는 가족 선언문 액자 앞을 지나가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평의회는 … 엄숙하게 선언한다.”
‘나는 정말로 이것을 믿는가?’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말을 하는 이분들이 선지자와 사도들임을 정말로 믿는가?’ 그녀의 경험은 가족 선언문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선지자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자신과 존이 영원한 세상에서 부모가 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식 덕분에 그녀는 구원의 계획 속 결혼과 가족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앤절라는 가족 선언문이 자신이 워싱턴 디시에서 만난 기계공과 중동의 관리에게 어떻게 영감과 감명을 주었는지를 기억했다. 선언문에서 가르치는 진리들은 강력했고 그녀의 삶과 연결돼 있었으며, 그녀는 그 진리들을 믿었다.
마르코 비야비센시오는 신속히 에콰도르 엘코카에 통신 사무실을 개설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것은 날마다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직원들은 통신 업계의 새내기였기 때문에 고객의 필요 사항을 적절하게 충족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했다. 게다가 고객을 찾는 것도 문제였다. 새로 생긴 사무실이었던 터라, 마르코와 그의 팀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업을 홍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사무실은 번창하고 있었다.
마르코는 바쁜 만큼 자주 가족과 교회를 위해 시간을 냈다. 한 달 한 달이 지날수록 일요일 아침 성찬식에 오는 사람도 점점 많아졌다. 주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 했다.
이제 선교사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이곳에 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회로 초대했다. 마르코와 클라우디아는 이 그룹이 지부가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궁금했다.
비야비센시오 가족이 엘코카에 도착한 지 7개월쯤 지났을 때, 선교부 회장인 티모시 슬론이 도시를 방문했다. 마르코가 현지 교회 그룹을 이끌었기 때문에, 슬론 회장은 그에게 함께 엘코카를 둘러보는 동안 자신을 성도들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르코는 오전의 나머지 시간과 오후까지 선교부 회장과 함께 도시를 돌아다녔다. 슬론 회장은 특히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들을 만나고 싶어 했고, 그중 몇 명과 접견을 했다. 그는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마르코에게도 가족과 직업, 교회에서의 경험에 대해 물었다.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 슬론 회장은 마르코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성도들이 모임을 하는 집으로 가서 빈방을 찾았다. 그런 후 슬론 회장은 이 도시에서 지부 회장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형제님이 적임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주님의 이 부름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네.” 마르코가 답했다.
다음 날인 2009년 9월 6일, 슬론 회장은 오레야나 지부를 조직하고 마르코를 지부 회장으로 성별했다. 일주일 후, 키토의 교회 지역 사무실에서는 지부 모임 장소에서 사용할 의자, 칠판, 책상 등의 물품을 보내왔다.
지부에는 청녀 회장으로 봉사하는 클라우디아를 포함해 많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교회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르코는 그들을 훈련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지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봉사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책임을 배우도록 돕기 위해 온갖 교회 교재와 비디오 등 수중에 있는 자원을 모두 사용했다. 엘코카에서는 휴대전화가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중에 그는 지부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 지부 업무를 수행하고, 활동을 계획하고, 동료 성도들의 필요 사항을 충족시켜 주었다.
지부가 교회로부터 받은 물품 중에는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도 있었다. 교회는 현지 지도자와 서기가 십일조와 성찬식 참석자 수 등의 데이터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기록하고 보고할 수 있도록 ‘회원 및 지도자 서비스’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마르코는 기술 업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컴퓨터에 익숙했으므로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빠르게 배웠다. 그렇지만 엘코카에는 컴퓨터가 드물었기 때문에 몇몇 새로운 지도자들에게는 그가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다행히 그들은 영의 인도를 받고 열성적으로 배워 기술에 쉽게 적응했다.
지부 평의회 모임이 있을 때면 마르코와 지도자들은 돌보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 관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었다. 평의회 회원들은 지부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마르코와 지도자들은 지부 모임과 활동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방문객과 새로운 회원들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지부가 조직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교회는 라디오, 텔레비전, 위성, 인터넷을 통해 반연차 대회를 방송했다. 이러한 채널은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보급돼 있었지만, 엘코카 지부는 아직 위성 텔레비전을 이용할 수 없었고 대회를 실시간으로 시청할 만큼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키토의 교회 사무실에서 스페인어로 녹화된 대회 DVD를 지부에 보내왔다.
마르코와 지부의 지도자들은 대회를 생방송으로 시청하는 경험을 재현하고자 녹화물을 모임별로 나누어 주말 동안 보여 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집회소에 의자, 텔레비전, 확성기를 설치하고 각 회원에게 특별 초대장을 보냈다. 클라우디아가 맡은 일은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모임을 하는 날, 성도들은 안식일 복장을 하고 왔다. 연차 대회를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모임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주의 깊게 연사의 말씀을 듣고 태버내클 합창단의 음악을 즐기는 동안 영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회원들 중에는 교회가 작고 지역에만 국한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회를 시청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적인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성도들이 주님의 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었다.
2010년 초에 카리브해 섬에는 17만 명 이상의 교회 회원이 살고 있었다. 이 성도들의 3분의 2가 거주하는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18개의 스테이크와 3개의 선교부가 있었다. 1998년에 교회는 카리브해 지역의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선교사 훈련원을 설립했다. 2년 후인 2000년 9월, 힝클리 회장은 이곳에 와서 이 지역 첫 번째 주님의 집인 산토도밍고 성전을 헌납했다.
1978년에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이 나라의 유일한 성도였던 여남은 명의 교회 회원들이 공항에 나와 선교사들을 맞이했다. 그중에는 로돌포와 노에미 보덴도 있었다. 보덴 부부와 그들의 일부 자녀들은 3개월 전에 자신들의 친구들인 존과 낸시 래플라이, 에디와 메르세데스 암파로를 통해 교회에 들어왔다. 그 후 수년간 로돌포와 노에미는 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회복된 복음은 카리브해의 다른 국가들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 서쪽의 섬인 자메이카에서는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이미 1850년대부터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교회가 그곳에 설립된 것은 1970년대에 자메이카 태생의 개종자 빅터와 버나 뉴전트가 교회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였다. 어느 날, 빅터와 버나는 미국인 동료 폴 슈메일로부터 몰몬경을 한 권 받았다. 폴은 그들에게 교회 영화인 Man’s Search for Happiness[인간의 행복 추구]도 소개했는데, 영화에 담긴 메시지와 폴의 그리스도와 같은 모범이 빅터에게 영감을 주었다.
뉴전트 가족은 1974년 1월 20일에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4년 후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의 계시로 인해 뉴전트 가족을 비롯한 아프리카 흑인 혈통의 사람들이 신권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자, 그들은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인봉되었다.
같은 해인 1978년에 또 다른 미국 후기 성도인 그레그 영이 바베이도스에서 친구인 존과 준 네이미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에 바베이도스의 첫 지부가 조직되었으며 존은 지부 회장으로, 준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이후 바베이도스는 서인도 제도 선교부의 본부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 그레나다, 과들루프, 세인트루시아, 마르티니크, 세인트빈센트, 프랑스령 기아나, 신트마르턴 등 인근 국가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한편, 아이티에서는 칠레 태생의 아이티인 알렉산드레 모라가 친척을 통해 교회를 알게 되었다. 알렉산드레의 친척은 플로리다주의 선교사들로부터 몰몬경을 비롯한 교회 출판물을 얻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간증을 읽은 알렉산드레는 자신이 사용할 몰몬경을 한 권 달라고 청하여 그 책이 참되다는 증거를 받았다. 아직 아이티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플로리다주로 날아가 그곳에서 선교부 회장을 만나고 1977년 7월에 침례를 받았다. 그런 후 그는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1년 후, 선교부 회장은 아이티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레의 친구 22명의 침례를 집행했다.
아이티는 사회적, 정치적 불안에 휩싸일 때가 많았지만 그 후에도 수년간 교회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성장했다. 2009년 말 아이티에는 2개의 스테이크와 2개의 지방부에 약 1만 6천 명의 성도들이 퍼져 있었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에서 엄청난 지진이 발생해 가옥이 무너지고 후기 성도 42명을 포함하여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그들의 회복력은 시험대에 올랐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솔린 생텔루스는 포르토프랭스 집회소에서 감독과 모임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 올겐은 현지 호텔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지진이 나자 부부는 베이비시터가 어린 세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자신들의 아파트로 급히 달려갔다. 아파트 건물은 잔햇더미가 되어 있었다.
올겐은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부디 저희를 도와주세요.”
구조대원들은 10시간 동안 잔해를 파헤쳤다. 어느 순간, 다섯 살배기 맏이 간치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인 “난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따라간 구조대원들은 간치와 동생들, 그리고 베이비시터를 구조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교회는 현지 지도자와 인도주의 단체를 도와 의사, 텐트, 음식, 휠체어, 의료용품, 기타 필수품을 제공했다. 또한 교회는 재난으로 집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집회소를 개방했다. 이후 교회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었다.
구조된 간치 생텔루스는 심각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플로리다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현지 교회 회원들은 생텔루스 가족을 돕기 위해 장난감, 음식, 기저귀 등의 물품을 가져왔다. 그들의 친절에 올겐은 눈물을 흘렸다.
2010년 9월, 콩고 민주 공화국 루푸타의 주민들은 교회가 후원하는 깨끗한 물 송수관 설치를 거의 완료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방부 회장인 윌리 비넨은 기자와 이야기하면서 송수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전기가 없어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깨끗한 물이 없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기자가 알아차렸든 그렇지 않든 윌리는 평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었다. 전기 공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루푸타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계획은 바뀌었고, 그는 전기 없이도 잘 해냈으며 성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 지역의 모든 가족은 수인성 질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겪었다. 교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찬식에 사용할 깨끗한 생수를 구입하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일하면 루푸타의 삶은 곧 바뀔 터였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부터 시내와 주변 지역에 있는 모든 동네가 송수관 작업 날짜를 배정받았다. 작업일이 되면 프로젝트 담당 단체인 ADIR의 트럭들이 아침 일찍 해당 동네에 도착하여 자원자들을 태워 공사 현장으로 데려갔다.
지방부 회장인 윌리는 모범적인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동네가 작업을 맡은 날이면 그는 간호 업무를 제쳐 두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루푸타와 깨끗한 수원 사이에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언덕과 계곡들이 있었다. 송수관은 중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원자들은 물이 제대로 흐르게 하기 위해 도랑을 파고 정확하게 도관을 묻어야 했다.
윌리와 자원자들은 모든 것을 손으로 파냈다. 도랑은 폭이 약 45센티미터, 깊이는 약 1미터가 되어야 했다. 어떤 곳은 모래땅이어서 작업이 빨리 진행되었다. 그러나 또 어떤 곳에서는 나무뿌리와 돌들이 뒤엉켜 있어서 고된 일을 하기도 했다. 자원자들은 그저 덤불숲에 불이 나거나 사람을 물어뜯는 곤충의 서식처를 건드려 작업이 더뎌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날에는 거의 150미터에 달하는 도랑을 팔 수 있었다.
루푸타 지방부의 성도들은 동네마다 일정하게 할당받은 작업 외에도 특별 교대 작업을 했다. 특별 작업을 하는 날에는 교회의 남성들이 그 날짜에 배정된 자원자들과 함께 도랑을 팠으며, 상호부조회 여성들은 작업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성도들이 프로젝트에 헌신했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지역의 사람들은 교회를 회원들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 사회를 돌보는 기관으로 여겼다.
2010년 11월 송수관 공사가 끝나자, 물이 도달하는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루푸타로 왔다. 루푸타에는 도관에서 나오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 버팀대를 높게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물탱크를 얹었다. 하지만 송수관이 정말로 물탱크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물을 날라 올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윌리도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 수문이 열렸고, 물탱크로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모두의 귀에 울렸다. 군중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각각 여러 개의 수도꼭지가 장착된 수십 개의 작은 콘크리트 급수소는 이제 루푸타 전역에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축제에는 루푸타와 인근 마을에서 1만 5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부와 부족의 고위 인사, ADIR 임원, 교회의 아프리카 남동 지역 회장단 일원도 귀빈으로 참석했다. 물탱크 중 하나에는 하늘색으로 다음 글귀가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마실 수 있는 물을 제공해 주신
교회에 감사합니다
ADIR에 감사합니다
손님들이 도착하여 특별 제작된 정자 아래 앉자, 청소년 후기 성도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찬송가를 불렀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군중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잠잠해지자, 윌리는 교회의 현지 대표자로서 마이크를 입에 대고 청중에게 연설했다. “예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오늘 루푸타에 물이 온 것도 기적입니다.” 그는 말했다. 그는 군중에게 교회가 지역 사회 전체를 위해 송수관을 후원했다고 말하며, 모두에게 송수관을 잘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왜 교회가 루푸타 같은 곳에 그토록 관심을 두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