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41장: 고린도후서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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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5장

고린도후서 소개

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는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이 두 번째 서한은 고난 가운데서도 위안을, (바울 자신이 본보기가 되었듯이) 연약함 가운데서도 힘을, 거짓 교사들과 참된 교사를 분별함이라는 주제로 잘 알려져 있다.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바울의 모범과 가르침은 모든 성도에게 자신이 마주한 상황이나 결과와 관계없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영원한 성약에 참되고 충실하도록 권유하는 역할을 한다.

고린도후서는 누가 기록했는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이 두 번째 서한에는 이 기록을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썼다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고린도후서 1:1 참조), 이 서한은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위해 쓴 것일 확률이 높다.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다수 언급한 것은 그가 단독으로 이 서한을 썼음을 시사한다.(고린도후서 11:16~33; 12:1~14; 13:1 참조)

고린도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직후 에베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소동이 일어났고(사도행전 19:23~41 참조), 결국 그는 마게도냐로 떠났다.(사도행전 20:1; 고린도후서 2:13; 7:5 참조) 그가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 고린도후서를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약 주후 57년으로 추정된다. 고린도전서 외에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서한을 두 개 더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서한에 그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5:9; 고린도후서 2:3~4, 9; 7:8~12 참조)

고린도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마게도냐에 있는 동안, 디도는 바울이 앞서 보낸 서한을 고린도 성도들이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린도후서 7:6, 13 참조) 고린도의 지부는 발전하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를 부패시키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한 이후, 아마도 두 번째 방문에서 성도 중 일부를 질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린도후서 2:1; 12:21 참조) 그 예루살렘 지역 출신의 일부 성도들은 고린도로 와서 성도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고린도후서의 많은 부분은 이 달갑지 않은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들을 다룬다. 바울은 그들을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고린도후서 11:13) 그들 중 일부는 바울이 부정직한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며 사도로서 그가 지닌 권세에 이의를 제기하기까지 했다.

바울의 서한은 그의 말씀을 더 듣고자 하는 사람들과(고린도후서 1~9장 참조), 회개하려 하지 않고 그의 권고를 거부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록되었다.(고린도후서 10~13장 참조) 대체로 고린도후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 서한의 몇 가지 목적이 드러난다 (1) 이전에 보낸 서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을 강화한다. (2)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리를 부패시킨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품성과 권세를 옹호한다.(고린도후서 10~13장 참조) (4)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후하게 기부하도록 권한다.(고린도후서 8~9장 참조)

고린도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지닌 사도의 권세와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응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자전적인 몇몇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지닌 “육체[의] 가시”에 대해 썼다.(고린도후서 12:7)

바울의 서한 중 다수가 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이 서한의 대부분은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굳건하게 맞섰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행복과 안녕을 염려하는 애정 어린 신권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고린도후서 전체에 걸쳐서 드러난다.

이 서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간이었을 사건을 언급했다. 고린도후서 12장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현은 부활 때 있을 영광의 등급에 관한 이전의 교리적인 발언과 함께(고린도전서 15:35~44 참조), 교리와 성약 76편에 기록된 조셉 스미스의 시현과 유사한 성경상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썼던 여러 서한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개요

고린도후서 1~5장바울이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하신다고 간증했다. 그가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당부했다. 복음과 주님의 영이 하는 일은 모세 율법의 조문보다 더 영광스럽다. 바울이 역경을 겪는 독자들을 격려하고, 지상 생활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상의 영원성에 비하면 일시적인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함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고린도후서 6~13장바울이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반대에 맞서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진실성을 변론하고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분리되라고 권고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대해 가르쳤다.(고린도후서 7:10 참조)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므로 계속해서 후하게 기부하라고 권고했다.(고린도후서 9:7) 그가 “거짓 사도[들]”을 강력히 반박했다.(고린도후서 11:13) 바울이 주님 안에서 자랑하며, 자신이 겪은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자전적으로 상세히 전했다. 그가 셋째 하늘에 대한 시현을 기록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살피고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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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에 있는 유적

그리스의 고린도에 있는 유적

고린도후서 1~5장 소개 및 연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이 두 번째 서한에서 우리는 일부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 사이에 불화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 고린도 교회 회원들의 소수 무리는 바울을 반대하며 그들 가운데에서 바울의 영향력이 축소되기를 바랐다. 바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일부는 그가 이전에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서 그것을 취소한 일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불신했다.(고린도후서 1:15~19 참조) 바울은 자신의 행위와 성역을 변호하고(고린도후서 2:12~17; 3:1~6; 4:1~5; 5:19~20 참조), 고린도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때 얻는 평안을 가르쳤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바울은 독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되도록 독려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린도후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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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과 연대표

고린도후서 1~5장 주해

고린도후서 1:3~10. 하나님 아버지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고린도후서 1장 3~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바울은 성도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쓰면서 “위로”와 “건지다”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하나님의 위로는 고린도후서의 처음 몇 장에 걸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바울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홀로 고난을 겪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심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과 동반자들이 아시아에서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진심 어린 말로 강하게 표현했다.(고린도후서 1:8~10 참조) 바울은 자기 자신보다는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그 깊은 절망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시험 받기 위해 우리는 도전과 고난에 맞서야만 합니다. 때로는 긴 터널 끝에 불빛도 없고 밤의 어둠을 밝혀 줄 서광도 없는 듯해 보입니다. 우리는 비탄과 산산이 부서진 꿈에 대한 실망, 사라져 버린 희망에 대한 절망감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의 간절한 바람처럼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라며 탄식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8:22] 우리는 비관이라는 일그러진 거울로 우리 자신의 불행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느낌과 비탄, 그리고 혼자인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신앙으로 우리의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들어올리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고통을 항상 없애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러분이 어떤 폭풍을 겪고 있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을 사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과거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감”,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90쪽)

고린도후서 1:4. “우리로 하여금 … [그]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환난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타인을 위로하겠다는 결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나타내는 특징이며 침례의 요건이기도 하다.(모사이야서 18:8~10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올슨 에프 휘트니(1855~1931)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비통과 재난의 날에 도움과 위로를 받기 위해 누구를 바라봅니까? … [우리는]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현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그들의 동정심과 애도를 풍성하게 전해 줍니다. 그들이 직접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고난을 겪게 하시는 그분의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그들이 더욱더 그분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제껏 겪었던 것보다 또는 앞으로 겪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으셨으며, 따라서 그분은 동정심과 위로의 위대한 근원이십니다.”(“A Lesson from the Book of Job,” Improvement Era, Nov. 1918, 7; 또한 제임스 이 파우스트, “시련 속에서 연단됨”, 리아호나, 2006년 2월호,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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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보고 있는 여성과 남성

고린도후서 1:11.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의 기도로 강화된다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위해 기도를 함으로써 그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바울은 그런 지지에 대해 감사를 표현했다.(고린도후서 1:1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도 교회 회원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지해 주는 것에 대해 교회의 모든 총관리 역원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했다. “우리 중 누구도 여러분의 기도와 지지 없이는 봉사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지지와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가 있습니다.”(“너희의 신앙으로 인하여”,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6쪽)

고린도후서 1:15~20. “예 하고 아니라”

고린도후서 1장 15~20절에 나오는 이 어려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그 계획을 변경했다며 경솔하고 사려 깊지 못하다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응답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하루는 “예”(예, 가겠습니다.)라고 했다가 그다음 날에는 “아니요”(아니요, 못 갑니다.)라고 했다며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바울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바울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친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라는 뜻을 내비친 듯하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자신과 동반자들이 가르친 메시지는 참되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신뢰할 수 있고 변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해 언제나 “예”라고 하신다. 즉, 성취하신다, 또는 “아멘”이라고 하신다.

고린도후서 1:21~22. 기름 부음과 인봉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선교 동반자들이 하나님에게서 “기름을 부[음]”과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했다.(고린도후서 1:21~22) 여기서 기름 부음은 구약전서에 나오는 왕, 제사, 선지자들이 신성하게 성임된 직무에 성별되기 위해 받은 것과 유사하게,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바르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출애굽기 29:7; 열왕기상 1:34, 39; 19:15~16 참조)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성신을 보내시고 그 은사에 따른 풍성한 축복을 주셨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서 성령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경우에는 이 의미가 맞는 것 같다. 바울이 하나님에게서 “인치[심]”을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그리스어는 하나님이 당신의 도장을 그에게 찍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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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반지

도장이 새겨진 고대 반지. 이러한 반지는 점토나 밀랍 위에 찍어서 문서나 기타 물건의 소유주라는 형적을 남기기 위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치”셨다고 기록했다.(고린도후서 1:22)

사진 촬영: 리처드 엘 더블유 클리브

고린도후서 1:22; 5:5. “성령”의 “보증”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 따르면, 보증[earnest]이란 단어는 “서약 또는 보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구매자가 뭔가를 사겠다는 계약을 체결할 때 지불하는 보증금을 의미하는 상업적 용어이다. 바울이 사용했듯이(고린도후서 1:22; 5:5; 에베소서 1:14), 이 말은 주님께서 영생의 기쁨에 대한 맛보기로서 성신을 현세의 우리에게 주심을 의미한다. 이 영은 또한 주님께서 충실한 이들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그분의 보증이다.”(Bible Dictionary, “Earnest”; 또한 요한1서 4:13; 교리와 성약 88:3~5; 로마서 8:14~16 주해에베소서 1:13~14 주해 참조) 주님의 영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여졌으며 그분의 약속이 우리 삶에 효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후서 2:1~4. 지도자들은 사랑으로 교회 회원들을 훈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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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검 영 회장

브리검 영 회장

사진 촬영: 찰스 알 새비지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보낸 서한에서 회원들을 훈계했기에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이 일부 있었음을 인정했다. 모든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경고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을 진다.(야곱서 2:2 참조) 브리검 영(1801~1877) 회장은 교회 지도자들이 권고할 때 이따금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때로 나는 많은 형제들에게 엄격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그들을 훈계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이 불꽃처럼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을 둘러쌀 수 있도록 그들이 생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 sel. John A. Widtsoe [1954], 115)

고린도후서 2:5~11. 타인을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

고린도후서 2장 5~11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사랑과 동정심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범법자가 고린도전서 5장 1절에서 언급된 사람인지, 아니면 또 다른 범죄자, 즉 바울과 그의 가르침에 반대한 고린도의 거짓 교사 중 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범법자가 누구이든 간에, 교회에서 그에 대해 선도 조치를 취했던 것이 분명하다.(고린도후서 2:6 참조)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그 사람이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고린도후서 2:7)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고했다.

칠십인 정원회의 시 맥스 콜드웰(1933~2012) 장로와 리운 지 오튼은 타인을 용서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구원을 향한 그의 진보를 막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며, 그에게 속죄에 따른 용서의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철학은 그 영혼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로 가득 차 있다.”(Sacred Truths of the Doctrine and Covenants, 2 vols. [1993], 1:314; 또한 교리와 성약 64:9~11 참조)

고린도후서 2:11. “우리는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교회 선도 조치를 받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들 사이에 불화가 심화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린도후서 2:11 참조) 사탄은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이미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만일 성도들이 회개한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사탄은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탄에게 “속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린도후서 2:11)

사탄을 이길 힘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그가 인간의 자녀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방법을 파악하는 것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탄은 아버지의 계획에서 중요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방해하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사탄은 구주와 그분의 신성한 권세를 방해하며 속죄의 효력을 무효하게 하며, 계시를 흉내 내어 혼동시키며,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꾀어내며, 개인에게 주어진 책임을 가볍게 여기게 하며, 성별의 구별을 혼란시키며, 결혼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하고, (특히 자녀를 의롭게 양육하게 될 부모들에게) 산아 제한을 시키려고 노력합니다.”(“위대한 행복의 계획”,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72쪽)

고린도후서 2:14~17. “우리는 …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지니는 특징에 대해 좀 더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성도들을 지지하시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했다.(고린도후서 2:14) 그런 후 그는 성전에서 태우는 제물과 향의 비유를 들어,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칭했다.(고린도후서 2:15) 성전의 번제물에서 나는 연기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으로 묘사되었다. (출애굽기 29:18; 레위기 1:9, 13, 17; 민수기 15:7 참조) 마찬가지로, 의로운 성도들의 삶, 그리스도처럼 되어 가고 있는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번제를 상징했다.(고린도후서 2:15)

16절에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듣는 이들에게 미친 영향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적들에게는 성도들의 향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사망의 냄새와 같았으나, 사도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생명의 냄새였다.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말하면서, 구주의 은혜로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주를 대표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았으며,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라고 했다.(고린도후서 2:16~17)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사용된 혼잡하다[corrupt]라는 단어는 밀매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가져온 말로, 특히 불순하거나 불량한 제품을 팔던 사람들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바울은 돈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고린도에서 일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그 메시지를 불순하게 하지도 않았다.

고린도후서 3:1~2. 일부 사람들은 교회 회원들의 모범을 보고 교회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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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료품을 나누는 여성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 회원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친절한 행위와 봉사를 목격한 뒤 교회에 대한 호의를 보이기도 한다.(고린도후서 3:2 참조)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을 반대하고 자신의 명성을 손상시키려는 사람들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수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합법적인 사도임을 증명하는 추천서가 정말로 필요하겠느냐?” (고린도후서 3:1 참조) 이 질문에서 바울은 새로운 지역 사회를 방문할 때 추천서를 지니고 다녔던 고대의 관습을 언급한 것이었다.(또한 사도행전 18:27; 로마서 16:1~2 참조) 그러한 추천서에는 주로 사람들에 대한 소개, 그들의 성품에 대한 증명, 그들이 불법 침입자나 사기꾼이 아님을 증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 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 이미 최고의 “추천서”가 되며,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내신 편지와 같기에, 바울이 올바른 권세를 지녔음이 그것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말했다.(고린도후서 3:2~3 참조; 또한 고린도전서 9:2 참조)

교회 회원들이 곧 뭇사람이 읽는 편지와 같다는 바울의 말은, 교회 회원들이 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보고 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교회를 알고 그 참됨을 판단하게 됨을 시사한다. 가게 주인이 그가 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단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가 사는 삶에 따라 판단을 받으신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궁극적 의미에서 복음은 돌판이나 경전이 아니라 충실하고 순종하는 개개인의 몸에 쓰여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진리가 담긴 살아 있는 편지이며, 그들의 삶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펼쳐진 책과 같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414)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업을 좌절시킬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바로 회원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리와 표준에 불순종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 각자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사업은 세상이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판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와,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올바른 일을 하게 해 주는 자제심과,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대업을 선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의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51쪽)

고린도후서 3:3. “육의 마음판”

바울은 모세 율법의 계명이 돌판에 쓰인 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복음을 “육의 마음판”에 쓸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3)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복음의 교리가 우리 육의 마음판에 쓰일 때 그것은 우리 “성품의 일부가” 된다고 설명했다.(“경전의 안내에 따라 생활함”, 리아호나, 2001년 2월호, 21쪽) 복음 교리를 내면화하는 이 과정은 성신의 권능을 통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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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판을 들고 있는 모세

입법자 모세, 테드 헤니거. 한때는 계명이 돌판에 쓰였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그것을 “육의 마음판”에 쓸 수 있다.(고린도후서 3:3)

고린도후서 3:6.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성약을 의미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칭했다. 그는 모세 율법인 옛 성약을 “조문”으로, 새 성약을 “영”으로 언급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다음과 같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계명에서 “영” 또는 “왜”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에 적용하여 설명했다.

“대체로 교리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주며, 원리는 ‘무엇?’이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는가, 또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언급 없이 어떻게 하는가를 강조할 때마다 정도를 지나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일에서라도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고 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고린도후서 3:6)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님은 아론 신권 집사들이 따르는(흰 셔츠를 입고, 가능하다면 넥타이를 매고, 또 단정한 방법으로 성찬을 전달하는 일과 같은) 규칙이 주님께서 성찬식에서 우리가 성취하기를 바라시는 것(성약을 새롭게 하고 경건한 방법으로 속죄를 기억하는 일)을 뒷받침한다는 점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그들에게 성찬식의 교리와 원리를 가르치는 예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아론 신권과 성찬”, 리아호나, 1999년 1월호, 37~40쪽 참조]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규칙보다는 교리와 원리의 인도를 받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나는 그들에게 올바른 원리를 가르쳐 그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게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년), 284]. 우리는 그러한 상황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대해 주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정도를 지나쳐”, 리아호나, 2003년 3월호, 24쪽)

고린도후서 3:6~17. 새 성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다

고린도후서 3장 6절14절에 “언약[testament]”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diathēk의 주된 의미는 “성약”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명확하게 신약전서[New Testament]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성약을 의미한 것이었다. 바울이 “구약[old testament: 옛 언약]을 읽”는다고 언급한 것은(고린도후서 3:14) 옛 성약, 즉 기독교인들이 구약전서[Old Testament]라고 부르는 책에 실린 모세 율법을 의미했다.

바울이 새 성약이 사람들의 마음에 쓰인다고 가르친 것은(고린도후서 3:3 참조) 예레미야의 다음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 새 언약을 맺으리라.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1:31, 33) 바울은 또한 구약전서에 나오는 비유를 들어서, 모세의 얼굴에 덮인 “수건”과 경전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덮인 “수건”에 대해 이야기했다.(고린도후서 3:13~16; 또한 출애굽기 34:29~35 참조) 바울은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율법을 이해하는 데 “완고하[blinded]”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14; 또한 로마서 11:7, 25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가면 그 [오해의] 수건이 벗겨지리라”라고 나온다. 이것은 마음을 주께로 돌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이는 영이 그들에게 경전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3:16~17; 조셉 스미스—역사 1:73~74 참조)

고린도후서 3:12.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소망의 교리에 대해 읽어 보려면, 히브리서 6:11, 18~19 주해를 참조한다.

고린도후서 3:17. 주님의 영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바울은 우리 마음에서 맹목의 수건이 벗겨지면, 주님의 영이 우리 삶에 자유를 가져오게 된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17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대적의 사로잡힘에서 자유로워진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복음은 너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억압의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욕구를 다스리고 행위를 인도하는 자유의 계획입니다. 그 열매는 달콤하고 그 상은 풍성합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5, 78; 또한 요한복음 8:30~32 주해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선택의지와 자유를 파괴하려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모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던 영원한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자녀들이 당신을 따르거나 아니면 당신의 율법을 거역하고 루시퍼와 함께 멸망하도록 [전세]에서 선택의지의 율법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시험의 기간인 이 지상 생활에서 인간에게 선택할 자유, 즉 순종하여 구원을 얻거나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을 자유가 다시금 주어졌다. 사탄은 늘 인간의 선택의지를 멸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는 여러 교회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예배의 자유를 거부하게 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강압한다.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개개인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거부하는 정부 및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권능으로 인도받지 않는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415–16)

고린도후서 3:18.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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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이 우리 내면에 역사할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린도후서 3:18) 그분께 더 가까워진다고 기록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변화하다[changed]”(metamorphoō)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7장 2절마가복음 9장 2절에서 “변형하다[transfigured]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변화하다[transformed]”로 번역된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단어는 극적이며 근본적인 변화, 탈바꿈을 나타낸다.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당신처럼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수단이다. 앨마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날 때 우리의 모습에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고 가르쳤다.(앨마서 5:14; 로마서 8:29 주해 참조)

“영광에서 영광에”라는 문구는 “점점 더 영광을 더하여” 또는 “더 높은 등급의 영광에”로도 번역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점차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되는 인간의 잠재력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우리 영의 아버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용모, 성품을 띠기 시작한다.(모사이야서 5:7 참조)

고린도후서 4:3~4. “이 세상의 신”

“이 세상의 신”이란 사탄으로, 그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영적으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 복음을 감춘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다음과 같이 바울의 말을 해설했다. “이 세상은 지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감각적이고, 육욕적이며, 사악한 사회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악인들이 멸망하여 그 멸망이 ‘세상의 종말’이 될 때까지[조셉 스미스—마태 1:4] 존속할 세상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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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항아리들

현대의 이스라엘에 있는 “질그릇”(고린도후서 4:7).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전하는 동료 성역자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의 “보배”가 담긴, 평범한 질그릇에 비유했다.(고린도후서 4:6~7) 바울은 미천하고 평범한 선교사들과 그들이 지닌 빛,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루는 대비를 통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신성한 목적이 드러난다고 말했다.(고린도후서 4:7)

고린도후서 4:5~10.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전하는 동료 성역자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의 “보배”가 담긴, 평범한 질그릇에 비유했다.(고린도후서 4:6~7) 바울은 겸손하고 평범한 선교사들과 그들이 지닌 빛,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루는 대비를 통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신성한 목적이 드러난다고 말했다.(고린도후서 4:7)

고린도후서 4장 8~10절6장 4~10절 11장 23~33절에는 바울이 선교사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겪었던 많은 고난이 실려 있다. 이 고난 중 다수는 극심한 것이었으나, 바울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도움과 격려를 받았기에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었다는 간증을 전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나오는 바울의 시련에 대한 묘사가 구주께서 겪으신 커다란 고통을 묘사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언젠가 우리는 [구주께서] 받으신 몰인정한 대우, 그분께서 경험하신 거부, 그리고 그분께서 견디셔야 했던 불공평을 기억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러한 것들을 겪을 때 그리스도께서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셨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4:8~9 참조)”(“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69쪽)

제일회장단의 조지 에이 스미스(1817~1875) 회장은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조카인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서 바울의 영감 어린 말씀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았다. “그는 내게 닥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노바스코셔의 탄광에서 가장 깊은 웅덩이에 빠졌다 하더라도, 혹은 온 로키 산맥이 나를 뒤덮을지라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낙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 매달려 신앙을 행사하고 큰 용기를 가지고 산의 꼭대기로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235쪽)

고린도후서 4:17. 필멸의 상태에서 겪는 고난을 영원한 관점에서 봄

칠십인 정원회의 폴 브이 존슨 장로는 우리가 필멸의 상태에서 겪는 고난을 영원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바울의 말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 바울이 ‘환난의 경한 것’이라 표현한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매를 맞고, 돌을 맞고,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고, 옥에 갇히는 등 수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23~28 참조] 저는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가 겪는 환난이 경하다고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현세와 영원한 세상에서 받게 될 축복과 성장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환난은 참으로 가볍습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리아호나, 2011년 5월호, 79쪽; 또한 로마서 8:17 주해 참조)

브리검 영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영광과 불멸과 영생의 관을 쓰게 될 모든 예지의 존재는 영광과 승영을 얻기 위해 예지의 존재가 경험하도록 예정된 온갖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 얻은 영광을 얻고 싶다면 아브라함이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에녹, 노아,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분들의 충실한 자녀들과 충실한 선지자들 및 사도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면, 우리는 장차 해의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일한 경험을 겪어야 하고 동일한 지식과 예지와 엔다우먼트를 받아야 합니다. … 지금까지 여러분이 겪어 온 시련과 경험은 전부 여러분의 구원에 필요한 것들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검 영[1997년], 261~262쪽)

고린도후서 5:1~4. 부활체로 “덧입기를 … 사모하노라”

고대에도 현대에도 육체가 부정적인 것이며 영이 육체를 떠나 영으로만 생활하는 상태가 더 좋은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서한을 쓰면서, 필멸의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불멸의 부활체로 “덧입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했다.(고린도후서 5:1~4; 또한 고린도전서 15: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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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기

본부 청녀 회장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수잔 더블유 태너 자매는 갓 태어난 손녀에 대해, 그리고 “깨끗한 육신을 새로이 입고 … 온 하늘의 영에게서” 느낀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그분과 같이 될 잠재력을 지닌 그분의 자녀임을 간증드립니다. 이 육신이라는 신성한 선물을 큰 관심을 갖고 다룹시다. 우리가 합당하다면 언젠가는 저의 갓 태어난 손녀와 같이, 영과 불가분하게 결합된 순수하고 깨끗하며 완전한 영화로운 육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대했던 이 은사를 다시 받고(교리와 성약 138:50 참조) 기쁨으로 소리칠 것입니다.(욥기 38:7 참조)”(“육신의 신성”, 리아호나, 2005년 11월호, 13, 15쪽)

고린도후서 5:6~7.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바울은 우리가 필멸의 육신으로 있는 동안은 “주와 따로” 있다고 가르쳤다. 이 말은 우리가 필멸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상에 있는 동안에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린도후서 5:6~7) 우리가 태어날 때 전세에서 살았던 하늘 집의 기억을 가리기 위해 우리 마음에 휘장이 드리워진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전세의 삶을 기억하지 못한 채 신앙으로 배우고 생활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구주께서 모범으로 보이신 길을 따른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가장 풍성한 축복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이를 윌포드 우드럽(1807~1898)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우리는 휘장 저편으로 가게 될 때, 무언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신앙으로 행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 영원한 심판, 해의 왕국,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기름 부음과 엔다우먼트로 주신 위대한 축복들은 모두 미래를 위한 것이며 성취될 것들입니다. 이는 그것들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휘장이 우리에게 드리워진 육신으로 있는 동안에는 결코 앞으로 올 세상에서 우리 앞에 있을 일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윌포드 우드럽[2004], 154쪽)

고린도후서 5:10~11.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현세에서 신앙으로 행해야 하고, 불멸의 부활체를 얻고자 애써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고 가르친 후에(고린도후서 2:1~8 참조), 선하든지 악하든지 간에 우리가 필멸의 삶을 사는 동안 행한 것들에 대해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가르쳤다.(고린도후서 2:10 참조)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5:11) 이 말은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이 주님을 두려워하며, 즉 경외하며 그분에게 보고할 책임이 있음을 알기에, 사람들이 그 큰 심판의 날을 위해 준비하도록 부지런히 그들을 설득했다는 의미이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심판의 날에 구주께서 하시는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아들께서 온 지상을 심판하신다. 하지만 그분의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정하다.[요한복음 5:22, 30 참조] …

예수께서는 거룩한 사람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은 심판을 수행하고 큰 마지막 날에 재판하는 자리에 앉으며 모든 사람에게 불멸을 입고 나아와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할 권능을 받으셨다.[요한복음 5:27 참조]”(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192, 195; 또한 요한복음 5:22, 27, 30 주해 참조)

고린도후서 5:14~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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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

구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 주디스 메르. 구주의 속죄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구주의 권능을 통해 “구원”받았듯이[온전해졌듯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권능이 있다.(누가복음 8:43~48)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다면 영적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속죄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은 더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린도후서 5:14~15, 17)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에는 우리 본연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변화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구주의 속죄를 통해 가능합니다. 진정으로 개종하면 개인은 믿음과 마음과 삶에 변화가 생겨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며(사도행전 3:19; 제3니파이 9:20 참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의식적인 결심이 그에 뒤따릅니다.

… 구원과 승영의 의식과 성약을 존중하고(교리와 성약 20:25 참조)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함을 지니고 힘써 앞으로 나아가[며]’(니파이후서 31:20) 신앙으로 끝까지 견디면(교리와 성약 14: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린도후서 5:17 참조)”(“주께로 돌이켰고”, 리아호나, 2012년 11월호, 107쪽)

고린도후서 5:18~21.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며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후(고린도후서 5:9~11 참조),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죄를 짓지 않았음이 명시된 성경 구절은 단 몇 개에 불과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다.(또한 히브리서 4:14~15; 7:26; 베드로전서 2:22; 요한1서 3:5 참조) 21절은 또한 속죄의 목적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방법이 가장 분명하게 언급된 성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21)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내가 너희의 죄를 취하고 내 의를 너희에게 주겠노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이는 우리의 모든 죄는 그분에게 놓였으며,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음에도 그 모든 죄를 짊어지셨음을 뜻한다. 이 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하여, 구주의 의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화목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목이란 죄와 영적인 어둠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속량하며 하나님과 화합 및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화목을 이루면 하나님과 인간은 더는 원수가 아니게 된다. 한때 육욕적이고 사악했던 인간, 세상의 방식에 따라 생활했던 인간이 성신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거듭나며,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422–23; 또한 로마서 5:11 주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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