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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14장
누가복음 9~14장 소개 및 연대
누가복음 9~14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구주의 성역이 새로운 시기에 접어 들었음을 보여 준다. 그분은 더 큰 책임을 맡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고, 십이사도와 칠십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도록 권능을 부여해서 그들을 내보내기 시작하셨다. 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심, 기도, 신앙, 회개, 희생, 겸손, 인내 등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면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셨다. 그분은 또한 영적인 우선순위보다 현세적인 염려를 더 중요시하는 경향과 위선에 대해 경고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면서부터 제자의 요건을 점점 더 강조하셨는데(누가복음 9:51), 그분은 자신이 그곳에서 고통받고 죽게 될 것임을 아셨다.(누가복음 9:22, 31 참조) 구주께서는 지상 사명 중 이 어려운 국면에 접어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모범을 보이셨으며, “모범의 힘”으로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강화하셨다.(Neal A. Maxwell, “The Pathway of Discipleship,” Ensign, Sept. 1998, 13)
누가복음 9~14장 주해
누가복음 9장.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의 다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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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1~6. 구주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도록 십이사도를 세상으로 내보내셨다. | |
누가복음 9:7~9. 헤롯은 침례 요한을 사형에 처했으며,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 |
누가복음 9:10~17.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셨다. | |
누가복음 9:18~22. 베드로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했다. | |
누가복음 9:23~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 |
누가복음 9:28~36. 변형이 일어났다. |
마태복음 17:1~13, 마태복음 17:2, 마태복음 17:3, 마태복음 17:3~5, 마태복음 17:3~9 |
누가복음 9:37~42. 한 남자의 더러운 악령 들린 아들이 고침을 받았다. | |
누가복음 9:46~48. 제자들이 자신들 중에 누가 큰 자인지를 물어보았다. | |
누가복음 9:49~50.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
누가복음 9:7~9. 헤롯이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다
누가복음 9장에 언급된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대헤롯 즉, 헤롯대왕의 아들이다. 분봉 왕[tetrarch]이란 단어는 엄밀히 말하면, 나라의 4분의 1을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렸다. 헤롯 안디바는 침례 요한을 사형에 처했는데, 위대한 사람이라 알고 있던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서 헤롯 안디바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말라기가 예언했던 일라이어스(엘리야의 그리스어)이며 예언대로 그가 다시 돌아왔을 거라는 소문도 들었다.(말라기 3:1; 4:5 참조) 이에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했다.
누가복음 9:51~56.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명을 완수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갈 시간이 되었음을 아셨기에(누가복음 9:51 참조), 사마리아의 마을에 자신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도록 사자를 보내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을 증오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구주를 마을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주께서는 인내와 관용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타이르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 않다고 가르치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역사적인 긴장 관계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4:19~24 주해를 참조한다.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권면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교회 회원들에게 우리와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라고 부탁했다. “다른 신앙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정중한 예의와 상호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교리의 우월성을 가진 집단으로 당파를 이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편협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기꺼이 지켜 주어야 합니다.”(“이 사업은 주님의 사업입니다”, 리아호나, 1995년 7월호, 70쪽)
누가복음 9:57~62.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또한 마태복음 8:19~22 참조)
“어떤 사람”이 구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하자, 그분은 자신의 집이 없음을 내비치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대답하셨다.(누가복음 9:58) 그분의 사명은 편안하지도, 쉽지도 않았다. 이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임을 시사한다.
누가복음 9:59~60.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유대인 문화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으며, 여기에는 부모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야 하는 책임도 포함되었다. 가족들은 장례를 위해 시신을 염하여 무덤에 안치한 후, 일반적으로 1년 후에 돌아와 두 번째 장례로 뼈를 유골 단지[ossuary]라 부르는 돌 상자에 넣는다. 만일 그 제자가 아버지의 두 번째 장례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면, 구주께서 하신 대답은 이제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할 시간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누가복음 9:59~60 참조) 그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망한 다른 가족들과 함께 무덤에 놓아두는 것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구주의 대답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신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구주의 말씀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해 애도하거나 장례 시에 적절한 존중을 보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자의 최우선 사항은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었다.
누가복음 9:62. “뒤를 돌아보는”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 시작하면서 뒤를 돌아본 사람을 언급한 구주의 비유에 대해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정한 후 뒤를 돌아보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가르치셨다. “고랑을 곧게 파 나가기 위하여 쟁기를 든 사람은 자기 앞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진리의 길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동안 자신이 있었던 지점을 보려고, 혹시 뒤돌아본다면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그 결과 비뚤어지고 불규칙적인 고랑이 생깁니다. 우리는 새로운 회원 여러분이 새로운 자신의 목표에 주의를 고정시켜 놓고 자신의 성장과 소중한 가치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축복을 되새기는 경우 이외에는 결코 자신의 과거 문제나 범법을 되돌이켜 보시지 않기를 권고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가 아니라 앞에 놓여 있는 영생과 구원의 기쁨에 에너지를 집중시킨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나는 ‘살아 있는’ 회원입니까?”, 성도의 벗, 1987년 7월호, 18쪽)
누가복음 10:1~16. “주께서 따로 칠십인을 세우사”
누가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분을 위한 길을 준비하도록 십이사도 외에도 칠십인을 부르셨다고 기록한 복음서 저자이다. 구주께서 칠십인을 부르시고 그들을 가르치신 내용은(누가복음 10:1~16 참조) 십이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과 유사했다.(마태복음 10장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현대의 사도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갈 수가 없기에 대신 칠십인 정원회 일원들을 지명하여 성역을 베풀게 한다고 설명했다.
“모든 칠십인은 사도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 십이사도가 수적인 제약으로 갈 수 없는 곳에는 칠십인이 갑니다. 칠십인들은 교회의 초창기 시절과 마찬가지로 온 세계로 보내집니다.”(“Fledgling Finches and Family Life”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Aug. 18, 2009], 4; speeches.byu.edu)
오늘날 칠십인은 “순회 성역자”로 불린다.(교리와 성약 107:97) 한편, 집사와 교사와 장로들은 “교회의 상주 성역자”로 지명된다.(교리와 성약 84:111; 124:137)
누가복음 10:2.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구주께서 구원의 추수에 참여하도록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기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부르고 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해서 전했다.
“오랫동안 선지자들이 가르치신 내용을 되새겨 드리겠습니다. 모든 합당하고 건강한 젊은 남성은 선교 사업을 준비해야 합니다. 선교 사업은 신권 의무이며, 많이 받은 자인 우리에게 주님께서 바라시는 의무입니다. 청남 여러분, 선교 사업을 준비할 것을 권고합니다. …
청녀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청남들처럼 전임 선교사로 봉사할 신권 책임은 없지만 여러분도 선교사로서 귀중한 공헌을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봉사를 환영합니다.”(“다시 함께 만나서”,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5~6쪽) 추수와 일꾼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9:37~38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0:29~37.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에 응하여(누가복음 10:29), 구주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0:30~37 참조)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느꼈다. 이 두 부류는 보통으로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유대인에게 동정 어린 행동을 보였던 “사마리아인은 우리에게 순수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라고 가르쳤다. 헌터 회장은 또한 이 비유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친구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이웃을 만들어 놓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경계선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협한 애착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주님의 시금석”, 성도의 벗, 1987년 1월호, 44쪽)
누가복음 10:31~36.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모세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준수하는 교사와 본보기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도록 임명되었다. 이 신권 소유자들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잘 알고 있었다.(레위기 19:18) 사실, 레위인들은 특히 여행자들을 경제적으로나 여러모로 도와야 할 책임이 있었다.(레위기 25:35~36 참조) 그러나 구주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계명을 어겼다. 그들은 모두 다친 사람을 보았으나 “피하여 지나”갔다.(누가복음 10:31~32)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전 율법 또는 랍비의 전통을 따랐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거나 어느 민족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웃이 아니므로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여 줄 의무가 없었던 것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전 율법 또는 전통이 요구하는 바는 따랐으나 순수 모세 율법에서 요구하는 바는 따르지 않았다.
모순되게도, 성문화된 모세 율법에 따른 제사장과 레위인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마리아인이었으며, 반면 구전 율법 또는 전통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에 대한 변명의 구실이 되어 주었다.
예수님에게서 그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비유가 실화라고 느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1,035미터의 고도차가 있었는데(누가복음 10:30), 그 당시에는 강도와 도둑이 들끓어 “붉은 길” 또는 “피의 길”로 알려져 있었다.
누가복음 10:33~35. “기름과 포도주”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의 상처를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 주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약효가 있다. 기름은 통증을 완화하고, 포도주는 소독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포도주와 기름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기도 한다.(마태복음 26:27~29 및 마태복음 26:36 주해 참조) 사마리아인이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는 그가 다친 유대인에게 보여 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비유는 구주께서 치르신 속죄를 상기시켜 준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하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죄가 낳은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신다. 그분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다.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안전을 가져다주시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돕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속죄를 통해 우리의 회복을 위한 값을 친히 지불하셨다.
누가복음 10: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우리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빗대어 보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우리 각자는 지상 생활이라는 여정을 통해, 자신만의 여리고 길을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리고 길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저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요? 강도를 만나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제가 알아보지 못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부상당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갈까요?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저는 그것을 보고,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을 따라 갈 때 완전으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여리고 길”, 성도의 벗, 1989년 9월호, 2~3쪽)
누가복음 10:38~42.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유대인 사회에서 환대는 매우 중요했다. 여성의 명예와 명성은 그녀가 손님을 대접하는 역할에 관하여 문화적인 기대치를 얼마나 잘 이행하느냐에 일정 부분 달려 있었다. 이런 사회적 관습 때문에,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에게 일을 거들지 않는다고 불평한 것은(누가복음 10:40 참조) 대체로 당시 사람들 눈에는 당연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라고 응답하심으로써(누가복음 10:42) 동생의 선택을 칭찬하셨다. 구주의 응답으로 명확해진 것 중 하나는 비록 좋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의로운 교회 회원들이 마리아처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들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저 어떤 것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을 모두 다 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모자랍니다.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활에서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이 원리를 마르다의 집에서 가르치셨습니다. …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 것은 칭찬 받을 일이지만(41절), 위대한 스승에게서 복음을 배우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복되다는 가르침이 경전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사도행전 20:35; 앨마서 32:14~15 참조) …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책 또는 잡지 읽기를 선택하는 동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건전한 오락물을 시청하거나 흥미로운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좋거나 가장 좋은 선택들이 있습니다. …
개인 및 가족 시간을 사용하는 데는 더 좋은 것이 있고 또 가장 좋은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 내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몇 가지 좋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는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발전시키고 우리 가족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좋은 것,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104~105, 107쪽)
누가복음 10:40~42. 마르다의 성품
칠십인 정원회의 그레고리 에이 슈바이처 장로는 교회 회원들에게 마르다가 이 한 가지 경우에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였다고 해서 그녀를 성급하게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권유했다.
“여러 주일학교 공과에서 이 이야기가 다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마르다가 신앙적인 면에서 약간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마르다라는 여인의 이해력과 간증을 제대로 보여 주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주께서 그녀의 오빠인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 도착하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은]’ 이는 마르다였습니다.”
구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부활이라는 위대한 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녀에게 자신을 믿는지 물으셨다.
“이에 마르다는 강한 간증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20~27 참조] …
많은 자매님들이 첫 번째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이 마리아에 속하는 사람인지 마르다에 속하는 사람인지 고려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진리는 올바른 판단력으로 한 사람을 제대로 아는 데에서 나옵니다. 마르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면서 우리는 그녀가 영성이 깊고, 생명을 지배하는 구주의 신성한 권능과 그분이 짊어진 사명에 대해 훌륭한 간증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마르다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우리는 이 훌륭한 여인의 진정한 성품을 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올바른 판단력을 키우고 남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103~104쪽)
누가복음 11:1~4. 주기도문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마태복음 6:9 주해, 마태복음 6:10 주해, 마태복음 6:13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1:5~10.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
누가복음 11장 5~10절에 나오는 구주의 가르침에는 비유가 하나 나오는데, 이는 종종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로 불린다. 여행자가 떡을 얻기 위해 찾아간 친구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낸다.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의롭게, 충실하게 기도를 드리면, 그분은 자녀들을 향한 넘치는 선함과 사랑과 염려를 갖고 계시기에 하늘의 문을 여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이 비유의 도입 부분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그분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틀림없이 너희에게 주시리라.”(Joseph Smith Translation, Luke 11:5)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이 비유에 나오는 친구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이기적인 인간도 이웃이 올바른 목적으로 끊임없이 요구하면 들어준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의로운 목적과 신앙으로 끊임없이 간구하면 틀림없이 허락해 주신다는 것이 이 비유의 교훈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거절은 하나님의 현명하시고 인자하신 기다림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참다운 요구와 참다운 신앙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더욱 열렬히 간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때때로 기도의 응답을 늦게 주시기도 한다.”(예수 그리스도, 440~441쪽)
누가복음 11~12장.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누가복음 11~12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 중에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의 다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누가복음에서 각 주제가 나오는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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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14~23. 악령 | |
누가복음 11:24~26. 빈 집의 비유 | |
누가복음 11:27~32. 요나의 표적 | |
누가복음 11:33~36. 빛과 어둠 | |
누가복음 11:37~54.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다 | |
누가복음 12:1~5. 위선 | |
누가복음 12:22~32. 사도들에게 조언하시다 | |
누가복음 12:32~34. 하늘에 있는 보물 |
누가복음 12:13~15.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는 구주의 경고는 형제의 소유를 탐하여 불평한 것으로 여겨진 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이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화는 우리가 특히 타인의 결점을 찾는 경향이 있을 때(마태복음 7:3~5; 누가복음 10:40~42 참조), 어떻게 주님께서 종종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시는지를 설명해 준다.(이더서 12:27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탐심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탐심을 물리치십시오. 그것이 이 후기의 큰 고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욕심과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속박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과 과중한 부채로 이어지곤 합니다.”(“세상의 부채, 하늘의 부채”,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40쪽)
누가복음 12:16~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누가복음 12장 17~19절에서 내가와 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기심을 보여 준다. 이 부자는 재물을 다른 사람과 나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소유한 부의 원천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는 구주와는 달리, “소출이 풍성”한 것은 “그 밭” 덕분임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농작물이 자라도록 지구를 창조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누가복음 12:16) 결국 그 부자가 정죄받은 근거는 현세적인 양식을 저장한 현명한 처신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영적으로 준비하지 않은 데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구주께서 탐심이 많은 사람에게 주신 경고와(누가복음 12:13~15 참조), 그다음에 이어지는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더해 주었다. “탐심 많고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둔 사람과 나눈 이 대화에서, 그리고 그에 따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둔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잃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비유 자체는 세속적인 마음을 비난하고, 사망과 심판은 피할 길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들이 침입하여 훔쳐가는 것들보다는 영원한 부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474)
누가복음 12:38. 재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구주의 가르침
누가복음 12장 35~40절에 나오는 구주의 비유에서 우리는 언제 “그 주인”이 돌아올지 모르는 종들에 해당한다. 그들은 주인의 귀환을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주의 재림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주님께서 단지 재림 때만이 아니라 “밤” 중 어느 때라도 오실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죽으면 그분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라. 그가 밤 초경에 오고 또한 이경에 오며 또다시 삼경에 올 것이라.
또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에 대하여 기록된 것같이 그는 이미 왔느니라. 그리고 또다시 그가 이경에 오거나 삼경에 올 때,그가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을 알게 될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는 그 종들의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먹는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섬길 것임이니라.
또한 이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이르노니, 이는 주의 오심은 밤의 도적 같다는 이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그것은 마치 집 주인 된 어떤 사람과 같으니, 만일 그가 자기 재물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도적이 와서 그의 재물을 가져다가 자기 동료 사이에 나누느니라.”(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12:41~45[경전 안내서])
누가복음 13: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몇몇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한 무리의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당국에게 성전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짐작하건대 이는 폭동을 진압하는 중에 일어난 일 같다. 구주께서는 이 경우를 들어서 재난이 항상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셨다. 그분은 또한 그 점을 입증하기 위해 듣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목숨을 잃은 일을 상기시키셨다. 더 나아가 그분은 이 기회를 빌어 모든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구주의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사고로 죽었거나,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역병에 시달리거나, 자연재해로 재산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정인들을 지목하여 그들이 그런 징벌을 받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부당하다. 각각의 고통이나 사고에 대해 그러한 것이 단지 그 사람의 악한 행실에 대한 천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 주님께서는 가장 의로운 성도들도 시험하기 위해 어려움을 주신다. 박해는 … 충실한 사람들의 유산이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는 예수님의 결론에서 배울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은 죽임을 당한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 간에 의로움에는 차이가 없으며, 살아 있는 사람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과 함께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 더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현세적으로 멸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475–76)
누가복음 13:6~9.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구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신 후(누가복음 13:1~5 참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인 유대인을 나타낸다. “포도원”은 세상을, “포도원지기”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낸다. 삼 년 동안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렸으나 얻지 못했다. 그는 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마지막으로 일 년을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동안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포도원에서 제거해야 했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구주의 가르침을 강조한 것이다. 이전에, 침례 요한도 이와 유사한 메시지를 언급했다.(누가복음 3:8~9 참조)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구주께서는 이스라엘이 기회가 주어진 시기 내에 의롭게 되지 못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셨다.(누가복음 13:33~35 참조)
누가복음 13:10~17. 안식일에 병을 고침
구주께서 18년 동안 신체적 고통을 겪었던 여인을 고치시자(누가복음 13:10~17 참조), 그 치유가 행해졌던 회당의 회당장은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에 대해 불평했다. 이에 대해 구주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며, 이와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위선이라고 가르치셨다. 이 응답에서, 안식일에 할 수 없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 보다는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에 대한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마태복음 13:31~32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3:23~30. “좁은 문”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에 대한 질문을 받으신 구주께서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응하지 못하게 될 구원의 조건을 비유로 가르치셨다.(누가복음 13:23~30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좁은 문”은(24절) 누가복음 9~14장 전반에 나오는, 엄격한 제자의 요건에 관한 주제를 강화한다. 좁은 문 또는 협착한 길이란 비유는 필수적인 의식과 성약을 받고 지킬 필요성을 묘사하기 위해 경전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다.(니파이후서 31:17~18; 교리와 성약 132:19~25 참조) 구주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구주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제자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해의 왕국에서 배제될 것임을 경고한다.
누가복음 13:31~35.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탄식하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탄식하신 일에 대해서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마태복음 23:37~39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4:1~6.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구주께서 지상 성역을 베푸시던 당시,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자신이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동물은 기꺼이 구하려 하면서도 사람을 구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다.(누가복음 13:15~16; 14:5~6 참조) 우리 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과 모순되는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가복음 14장 5절에 근거한 “수렁에 빠진 소”라는 말을 사용한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은 안식일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고의로, 혹은 습관적으로 안식일을 합당하게 준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구주께서는 소가 안식일에 수렁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소도 매주 일부러 수렁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53, 55)
누가복음 14:7~11.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장 1절에는 구주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는 점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가르침의 배경을 이해하게 해 준다.(누가복음 14:11) 또한 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명예로운 자리를 스스로 구했는지 눈여겨 보셨다고 나와 있다. “높은 자리”라는 말은 명예로운 자리를 의미한다. 관습에 따르면, 가장 명예로운 손님이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구주께서는 이 상황을 포착하여 겸손과 승영 간의 관계에 대한 영원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 또한 교리와 성약 101:42 참조)
누가복음 14:12~24. 큰 잔치의 비유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기록된 대로 겸손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드셨다. 그분은 우리가 특히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을 잘 대해 줄 때, “의인들의 부활” 시에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런 다음 구주께서는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4:15~24 참조) 이 비유에서 잔치는 복음의 축복을 나타낸다. 이 복음 잔치는 특별히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만족감을 안겨 줄 수 있다. 우리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초대를 거절할 수도 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복음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들은 잔치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축복은 아직 초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나타내며, “잔치할 시각에 [종]”은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나타낸다.
후기의 계시에서는 이 비유를 다른 상황에 적용한다. 후기에는 모든 민족이 “주의 집의 만찬”에 초대될 것이다. 첫 번째로 “부자와 유식한 자, 현명한 자와 고귀한 자”가 초대받을 것이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에 가난한 자, 저는 자, 그리고 앞 못 보는 자, 그리고 듣지 못하는 자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와 … 예비된 주의 만찬을 취[할]” 것이다.(교리와 성약 58:9~11)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 중 하나가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한 말은(누가복음 14:15) 복천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종들이 성찬 빵과 물을 함께 취할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교리와 성약 27:5~14 참조)
칠십인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던 에프 버튼 하워드 장로는 교리와 성약 58편 8~10절을 언급하면서, 이 성구들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염려가 어떻게 복음의 축복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지를 이해시켜 준다고 설명했다. “주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에 대해 직접 해설을 하시는 것이라면, 물론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현세적인 문제, 예를 들어 밭, 소 몇 마리, 또는 잔치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아내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주목할 때, 겁이 납니다. 이 비유에서 재물의 역할을 살펴볼 때, 우리는 거기에 큰 위험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영원한 중요성을 띠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Overcoming the World,” Sept. 1996, 13)
누가복음 14:18~20. 변명을 늘어놓음
큰 잔치의 비유에 나오는 변명은 주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 변명은 손님들이 사전에 참석하겠다고 이야기했더라도 결국 참석하고 싶어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처음 두 명의 손님은 밭을 보지도 않고 구매하거나 시험도 안 해 보고 다섯 겨리의 비싼 황소를 사는 등 터무니없는 재정적 투기에 정성을 들이기 위해 잔치 참석을 거절했다. 자신이 최근에 결혼했다는 세 번째 손님의 변명은 좀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신명기 24:5 참조) 하지만 이것은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나오는, 배우자라도 주님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구주의 가르침에 대한 예가 된다.
칠십인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던 에프 멜빈 하몬드 장로는 우리에게 변명하지 말고 주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하라고 권고했다. “우리가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려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이 그런 변화를 뒤로 미루며, 긴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비유는 ‘주님, 지금은 저를 성가시게 하지 마세요’ 비유로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핑곗거리를 대려고 합니다. 모든 합리화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며, 거의 항상 현세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지혜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십일조의 법입니다. 마지못해 순결의 법에 따라 생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구주의 초대를 거절하거나 미루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 왕이신 그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Parables of Jesus: The Great Supper,” Apr. 2003, 52)
누가복음 14:26. “미워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맥락 속에서 “미워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덜 사랑하다” 또는 “덜 존경하다”라는 뜻이다. 구주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을 취소하신 것이 아니라(출애굽기 20:12) 우선순위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셨다. 제자는 가족에 대한 헌신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우선시해야 한다. 이 가르침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0:34~37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4:26~33. 희생은 모든 제자에게 요구된다
누가복음 14장 26~33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계속 제자로 남기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하는 희생에 대해 가르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엘 앤더슨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희생을 감수한 새로운 개종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당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막 귀환한 상태였고, 수많은 가능성이 제 앞에 펼쳐진 듯했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있을까요?
당시 고든 비 힝클리 장로님께서는 [1973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아시아에서 온 한 젊은 해군 장교를 만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장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미국에서 훈련받는 동안 교회에 대해 배웠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모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힝클리 회장님께서 그 장교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의 민족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형제님이 기독교인, 특히 몰몬 교인이 되어 귀국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장교는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제 가족은 실망하겠죠. … 저의 미래와 경력에 있어서 모든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힝클리 회장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기꺼이 치르시겠습니까?’
눈물에 젖은 어두운 눈빛을 한 그는 이런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복음이 참되지 않습니까?’
힝클리 회장님께서는 ‘예, 참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장교는 다시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The True Strength of the Church,’ Ensign, July 1973, 48 참조]
여러 해를 지내오면서 저는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이 참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질문은 제가 적절한 관점에서 어려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스물한 살의 청년으로서 힝클리 회장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학업에 전념할 필요가 있었으며, 학교에 계속 다니기 위해 일자리도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특별한 젊은 숙녀가 저와 사귀어 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방법도 알아내야 했으며, 또한 저는 다른 가치 있는 활동을 즐겼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많은 일 중에서 어떻게 우리의 길을 찾습니까? 우리는 관점을 단순하게 만들고 순화시킵니다. 어떤 것은 악하며 피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은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은 중요한 것이며, 어떤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이것이 참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74쪽)
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14:28. 계명에 따라 생활하라
칠십인 정원회 일원으로 봉사하던 래리 더블유 기븐스 장로는 복음에 정주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계명에 따라 생활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14장 28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 명하는 바를 명심하여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명심하라’라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가 ‘명심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축복들이 있습니다.
젊은 형제 자매 여러분,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때, 인생의 유일한 참된 안전은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
정직, 겸손, 순결, 지혜의 말씀, 그리고 성전 결혼과 관련하여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인생의 초기에 단호하게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곧고 좁은 길 위에, 아니, 곧고 좁은 길의 가운데에 머무십시오. 표류하지 마시고, 방황하지 마시고, 장난삼아 하지 마시고, 조심하십시오.
… 여러분이 계명에 따라 산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를 명심하라”,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103~104쪽)
누가복음 14:34~35. 세상의 소금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구주의 가르침에 대한 더 많은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마태복음 5:13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