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제26장: 요한복음 14~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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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장

요한복음 14~16장 소개 및 연대

지상 성역 마지막 날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구주께서는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 순종, 성신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진리들을 전하셨다. 그 진리들은 제자들이 구주의 체포와 십자가형 사건에 대비되고, 구주의 왕국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때 주님께서 전하신 가르침에는 “왕국에 대한 몇 가지 신비로운 비밀, 감춰진 몇 가지 심오한 교리들, 영의 권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1979–81], 4:73) 성신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구주의 이 말씀은 경전을 통틀어 성신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가르침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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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과 연대표

요한복음 14~16장 주해

요한복음 14:1~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구주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하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내 아버지 왕국에는 많은 왕국이 있도다’라고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순서에 따라 해의 왕국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거처가 있으며, 그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다른 거처가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219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구주께서 구원의 계획의 일부로서 온 인류를 위해 “[많은] 거할 곳”, 즉 영광의 왕국들을 준비하셨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조셉 스미스가 계시를 받고 교회를 조직했을 당시,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들은 구주의 속죄가 인간들 대부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소수만이 구원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끔찍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끝없는 고통의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조셉에게 계시된 위대한 교리를 통해 구원의 계획이 이생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들과 책임질 수 있는 연령 이전에 사망한 아이들 및 이해력이 없는 자를 비롯한 온 인류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영들은 태어날 때부터 궁극적으로 부활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고, 영과 육신은 재결합하여 이 지상에서의 상태를 초월하는 영광의 왕국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76:89 참조] 예외는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자들에게 적용됩니다.[이사야 14:12~15; 누가복음 10:18; 요한계시록 12:7~9; 교리와 성약 76:32~37 참조]”(“우리 아버지의 계획—모든 자녀들에게 충분한 계획”,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36~37쪽)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영어의 if라는 단어가 when으로 수정되어 있어서 구주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겠노라. 그런 후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14:3)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6) 그분은 자신이 길을 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는 것 이상의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길”(그리스어 hodos)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데 사용되는 도로를 말하며, 또한 행동 방침이나 “인생의 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요한복음 14장 6절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분은 이시다. 구원은 그분이라는 길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라는 길을 통해서 온다. 구주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6)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분이 그 거룩한 속성의 화신이시기 때문이다. (앨마서 5:48) 그리고 그분은 생명이다. 생명의 빛이 그분에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과 그분의 권능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생명의 빛을 거두어 가시면 그 즉시 사망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분 없이는 불멸의 삶도, 끝이 없는 영광의 삶인 영생도 없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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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눈으로 보는 베들레헴 풍경

목자의 눈으로 보는 베들레헴 풍경, 알 라운즈. 길이 그려진 이 그림은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하신 가르침을 형상화한 것이다.

칠십인의 로렌스 이 코브리지 장로요한복음 14장 6절을 인용하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길”처럼 따르도록 권면했다.

“행복과 성취를 위한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분이 그 길이십니다. 다른 모든 길은 그것이 어떤 길이건 무슨 길이건 간에 어리석은 길입니다. …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그분의 권능을 부여받아 화평, 빛, 힘, 지식, 자신감, 사랑과 기쁨을 얻을 수 있거나, 아니면 어느 길이든 무슨 길이든 다른 어떤 길로 가 그분의 도움과 권능 및 인도를 받지 못하는 어둠, 혼란, 의구심, 슬픔과 절망의 삶을 홀로 살 수도 있습니다. 자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길이 더 쉽습니까? …

행복과 성취를 위한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십니다.”(“길”,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34, 36쪽)

요한복음 14:7~11; 16:25.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실 때 자주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4~16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40차례 이상 나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기를 바라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빌립의 간청에 응하여, 당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한복음 14:8~1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 주셨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님의 속죄의 고통과 희생을 포함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에서,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또 모든 시대와 나라에 걸쳐 그분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완벽하게 헌신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에서 그분의 아버지, 즉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의 참된 본질을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당시나 현재의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고, 그분에게 더 온전하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그분을 보다 완전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조치로,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분의 독생자며 완전한 아들을 지상으로 보내셔서, 일상의 도전 속에서 인간들 가운데에 살며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 하나님께서 언제나 모든 인간들을 사랑해 오셨으며,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처럼 인간들도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간청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도 그들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깊은 헌신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위선자를 꾸짖고 신앙을 호소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오래 참고 선함으로 가득 찬’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Lectures on Faith (1985), 42] 그분의 생애를 통해, 특히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는 내 자신의 자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니라’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의 위대하심”,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70~72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오셨다는 진리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18 주해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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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델 파슨

더 나아가서,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브리서 1:3) 그는 인간으로서, 바로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지상을 걸으셨으며, 그의 제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 14:9) 우리가 사려 깊고 경건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이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즉, 닮았다는 것)이요, 또한 그의 아버지는 인간의 형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필멸의 지상 생활 동안뿐만 아니라 그의 탄생 이전 그리고 부활 이후까지도 하나님 아들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14세 소년이었던 조셉 스미스가 그의 첫번째 시현을 보았을 때,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한 두 개체의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에프 스미스[1998], 334쪽)

요한복음 14:12.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Lectures on Faith[신앙 강좌]에서는 이 말씀을 구주께서 요한복음 17장 20~24절에서 주신 가르침과 연관을 지으면 더 잘 이해된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모든 말씀이 합쳐져서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상태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해야 하며, 그분이 그들 가운데서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다. 그분은 그들이 이런 일을 때맞춰 해야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들은 더 큰 일들을 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했던 더 큰 일은 영원한 세상에서 행해져야 했다. 그분은 그 영원한 세상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그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Lectures on Faith [1985], 77–78)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하신 말씀은(요한복음 14:15) 우리가 계명을 지킬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일이 됨을 가르쳐 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순종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은 즐거움이 됩니다.”(“큰 계명”,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30쪽)

요한복음 14:16~23, 26; 15:26; 16:7. “보혜사”는 성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임

흠정역 성경의 신약전서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그리스어 paraklētos는 요한의 기록에만 나타난다. 이 단어를 구성하는 para는 “곁에”를 의미하며, klētos는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paraklētos란 도우미, 중재자, 옹호자로서 누군가의 곁으로 부름을 받은 이를 뜻한다. 요한의 기록에서, paraklētos라는 칭호는 성신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 후, 그들이 홀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도움을 줄 성신의 동반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4:16, 26; 15:26; 16:7 참조)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인(요한복음 14:16; 기울임체 추가) 성신을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은 구주 본인도 하나의 보혜사임을 의미하였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 두 보혜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보혜사가 언급되었다. 하나는 오순절에 주어진 성신으로, 모든 성도는 신앙과 회개, 침례를 행한 후에 성신을 받는다. 이 첫째 보혜사는 성신이다. …

경전에 언급된 다른 보혜사는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며, 아마도 이 세대 사람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갖고, 죄를 회개하며,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침례를 받고, (안수례로) 첫째 보혜사인 성신을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 겸손하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생활한다면, 이윽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아, 네가 높이 올려질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철저하게 검증하시고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자신을 섬길 결의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때, 그 사람은 자기 부름과 택함을 확실히 하게 될 것이며, 그런 후에는 요한복음 14장 12~2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를 받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16, 17, 18, 21, 23절을 주목해 보자. …

그렇다면 이 다른 보혜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골자이다. 어떤 사람이 이 마지막 보혜사를 얻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에게 임하실 것이다. 즉, 이따금씩 그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그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이며, 그분들은 그와 함께 머무실 것이다. 또한 여러 하늘의 시현이 그에게 열릴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대면하여 가르치실 것이며, 그는 하나님 왕국의 여러 신비를 완전히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History of the Church, 3:380–81)

요한복음 14:18, 2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구주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한동안 그들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그들을 버려두는 것은 아니라며 그들을 안심시키셨다. 그분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18)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제자들의 필멸의 삶에서 구주께서 위안을 주시고 그들과 동반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님이 그토록 길고 외로운 길을 온전히 홀로 걸으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의 고독한 여정은, 그 여정의 축소된 모형의 고독한 길 위를 우리가 걸을 때 위대한 동반자들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로운 보살핌,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변함 없는 동반, 비할 데 없는 성신의 은사, 하늘의 천사들, 휘장 양편의 가족들, 선지자와 사도들, 교사, 지도자, 그리고 친구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분의 복음의 회복으로 인해, 우리의 지상 생활에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다양한 동반자들이 함께합니다. 갈보리 동산에서 울려 퍼진 것은, 간혹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 할지라도, 우리가 절대 혼자 아무 도움도 없이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구속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 아버지와 내가] 너희에게로 [가서] … 거처를 [너희]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14:18; 또한 23절 참조]”(“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8쪽)

요한복음 14:26.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구주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성신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4:26) 성신이 하는 중요한 역할 중 두 가지는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배운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성신은 진리를 증거하는 분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 모로나이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또 성신의 권능으로 너희는 모든 것의 참됨을 알게 되리라.’(모로나이서 10:4~5)”(“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성도의 벗, 1998년 3월호, 8쪽)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글렌 엘 페이스 장로는 우리에게 오는 영적 증거는 이따금 우리가 진리를 기억하도록 돕는 성신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종종 그 [영적 증거의] 느낌은 기억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세에서 이 복음에 대해 처음 배웠습니다. 망각의 휘장을 거쳐 이 지상에 왔지만 우리 모두의 영에 숨겨진 기억 속에는 전세에서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성신은 그 휘장을 젖히고 잠자고 있던 기억을 깨울 수 있습니다.”(“알고 계십니까?”,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79쪽)

요한복음 14:27; 16:3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필멸의 생애 끝자락에 서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시련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으로 평안을 약속하시고,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27; 16:3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진정한 평안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구주를 믿는 신앙을 통해 찾을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광스럽지만 두려운 속죄의 과정을 시작하시기 몇 시간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27)

그분께서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세상이 인정하는 종류의 평화, 곧 다툼과 혼란이 없는 안전과 무사함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분명히 역사 기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초대 사도들은 남은 생애 동안 내내 시련과 박해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평안에 대한 약속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강조체 추가)

평안, 곧 참된 평안, 여러분이 온 영혼으로 참되다고 느끼고 있는 그런 평안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옵니다.”(“왕국의 평화로운 것”,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99쪽)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고난 가운데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 구주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생애에서 어떤 역경을 겪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사납고, 손상을 입힐 수 있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힘을 갖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약화시키기까지 합니다. …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이때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4:27) 그분은 자신의 생애와 성역을 통해 평안을 말씀하셨으며, 그분이 무덤에서 나오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처음 하셨던 인사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과 고통과 번민과 운명의 시달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짊어지셨던 무거운 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선지자 이사야가 그분이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만한 지혜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사야 53:3) 주님의 배는 거의 전 생애 동안 요동쳤으며,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그 배가 갈보리 해안의 절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필멸의 눈으로 생을 바라보라는 권고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어떤 일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영적인 관점으로 압니다.

아무리 폭풍우가 사납게 휘몰아쳐도 구주의 입술과 마음에는 평강이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한 평강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간구드립니다.”(“주여 큰 폭풍우 일고”,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36쪽)

요한복음 14:28~31.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말씀

마지막 만찬을 했던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도들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실 것이고, 또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부활 이후의 성역을 언급하심) 그들에게 거듭 상기시키셨다.(요한복음 14:28 참조) 그분은 루시퍼는 자신을 이길 힘이 없다고 증언하셨다.(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14:30[경전 안내서] 참조) 그분은 자신이 지상 성역을 완수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요한복음 14:31 참조) 구주께서 전하신 마지막 설교의 나머지 부분은 다 함께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서 주어졌다.

요한복음 15:1~8. “나는 참포도나무요”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자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보통으로 포도나무와 포도원을 비유로 사용했기 때문에(이사야 5:1~7; 예레미야 2:21; 호세아 10:1; 야곱서 5장 참조) 제자들은 그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구주께서 사용하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듯이, 어떻게 제자들이 그분에게 완전히 의지했었는지를 가르쳐 준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보다 더 훌륭한 비유는 세상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성임받은 주님의 종인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마치 나무에서 절단되어 버린 가지처럼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가지는 뿌리로부터 흡수하는 자양분 있는 수액에 의해서만 열매를 맺게 되지만 일단 절단되거나 부러져 버리면 시들어 땔감밖에는 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들도 거룩한 사도의 직분에 성임되었을지라도 계속 그리스도와 굳건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강한 자로서 선행을 많이 행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었던들 그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 곧 몇 명의 어부, 한 명의 세리, 그 외에 남다른 재능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 불과했으며, 그들 모두가 진실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예수 그리스도, 6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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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4)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구주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해 거하다라는 단어를 요한복음 15장 1~10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셨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구주께서 가르치신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라는 말은 킹 제임스판 성경의 우아한 영어로 이해하기 쉬운, 아름다운 개념이지만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지금은 영어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언어로 번역된 이 구절을 듣고 주님께서 주신 이 권고에 대해 더 큰 감사를 느꼈습니다. 스페인어로 그것과 유사한 표현은 permaneced en mi입니다. 영어 동사인 ‘abide’처럼 permanecer는 ‘남아 있다, 머물다’라는 뜻이지만, 저와 같은 [영어 사용자는] 영어의 ‘permanence(영속성)’와 같은 어원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머물라—그러나 영원히 머물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오십시오, 그러나 와서 남으십시오. 확신과 인내를 가지고 오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 뒤에 올 모든 세대들을 위해 영원히 오십시오. …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영원히, 단단히, 굳건히, 영원토록 ‘거[해야]’ 합니다. 복음의 열매가 우리 생활을 꽃피우고 축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모두의 구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지닌 그분의 교회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힘의 참 근원이며 또 영생의 유일한 근원[이십니다.]”(“내 안에 거하라”,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32쪽)

요한복음 15:10.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계명을 지키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또한 요한복음 14:15, 21, 23 참조) 우리 시대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슷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에 충실하고 부지런하라. 그리하면 나는 나의 사랑의 팔로 너를 안아 주리라.”(교리와 성약 6:2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그토록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시기에 그들이 계명을 지키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율법에 대한 순종 문제에서 우리를 면제시켜 줄 것이라 여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시며, 전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많은 은사를 부여하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받기 위해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완전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계명에 순종하라는 애정 어린 요구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그분처럼 온전해지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순종할 때 받습니다. 현대에 받은 계시에서 확실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하늘에서 변경될 수 없게 선포된 율법이 있어 모든 축복은 이에 근거를 두나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축복을 얻을 때에는 그것이 근거를 두고 있는 그 율법을 순종하였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니라.’(교리와 성약 130:20~21) …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나 그분의 성스러운 아들이 사랑으로 계명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추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사랑과 율법”,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27~28쪽)

요한복음 3:13~15.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우정의 본보기이시다

구주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맞이할 때가 가까이 다가오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설명하셨다.(요한복음 15:14)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또한 진정한 우정의 표본이신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해 치르실 커다란 희생을 예시하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그분은 그 일을 막 하시려던 참이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구주께서 궁극적인 우정의 행위로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저의 친구이십니다. 저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그분은 저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친구가 되기에 합당하기를 원합니다.”(“나의 간증”, 리아호나, 2000년 7월호, 85쪽)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말린 케이 젠슨 장로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나오는 구주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교회 회원들에게 진정한 우정을 보여 주신 구주의 모범을 따르라며 이렇게 권고했다. “그리스도의 우정을 축복으로 받아 왔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참된 친구가 되어 주기를 간구합니다. 친구가 될 때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을 때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 친구들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간증드[립니다.] … 저는 우리가 스스로 우정을 내보일 때 하나님의 사업과 그분의 자녀들의 행복과 진보에 가장 의미 깊은 공헌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우정: 복음 원리”,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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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사도를 성임하시는 그리스도

열두 사도를 성임하시는 그리스도, 해리 앤더슨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장 16절은 교회의 권세에 대한 교리가 언급된 중요한 성구이다. 구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분의 교회에서, 여러 직분에서 봉사하도록 누가 부름을 받아 성별 될지를 결정하는 분은 주님이심을 보여 준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 원리가 현재의 교회 지도자 직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충실한 교회 회원이라면 교회 직책에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예언에 의하여 또 권세 있는 자에 의한 안수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야 함을 믿[습니다.]’ (신앙개조 제5조)

주님 자신도 그분이 택하신 십이사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16)” (“교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성도의 벗, 1993년 1월호, 54, 59쪽)

요한복음 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 [사람들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생을 살면서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요한복음 15:21) 종종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비난과 박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이 생의 큰 시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믿음이 의심받고 비난받을 때 [옵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주먹을 치켜들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발 물러서서, 기도하고 구주의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거절 당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구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대응한다면, 우리는 좀 더 그리스도처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을 따르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리 원고를 준비하거나 어떤 정해진 공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셨습니다. 사악한 헤롯왕과 대면하셨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에는 자신의 신성과 목적에 대해 간단하고도 강력하게 간증하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돈 바꾸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는 성스러운 것을 보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책임을 행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누가복음 23:34) 비할 데 없이 자비롭게 대응하셨습니다. …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 보복을 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내와 인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구주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우리가 보복하지 않을 때, 즉 다른 뺨을 돌려대고 화를 참을 때, 우리도 역시 구주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를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비난을 돌리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인 그분의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그리스도인의 용기: 제자로서의 대가”,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72쪽)

요한복음 15:22~16:6. “그들이 …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겪고 나면, 그들이 성신의 권능으로 나아가 당신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구주를 증거할 때 생기게 될 부정적인 결과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한복음 16:2~3) 요한계시록으로 알려진, 요한이 세계사에 대해 광범위하게 본 시현은 그와 유사한 비극적 상황이 수세기 동안 지속된 대배도의 일부분이었음을 알려 준다.(요한계시록 6:9 참조)

요한복음 16:12~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구주께서는 마지막 설교를 마치시면서, 성신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6:13) 이 말씀은 하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려 준다. 성신은 모든 경륜의 시대에 구주의 참된 교회를 인도하며, 또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에 준하여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인도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성신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도록 우리가 성신을 구해야 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어려움에 부딪치고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정을 올바르게 내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계획을 세우실 때 여러분이 필멸의 생애 동안 겪을 어려움과 결정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한 도움은 성신을 통한 영적인 인도로 옵니다.”(“영적인 인도를 얻음”,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6쪽)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가 성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떻게 성신을 우리의 인도자로 삼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계명을 통해 지시받은 대로 매주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청결한 손과 순결한 마음으로 성찬을 취함으로써 우리의 성약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교리와 성약 59:8~9, 12 참조)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항상 그의 영과 함께 하[게]’ 되리라는 신성한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20:77) 그 영이 바로 성신으로서, 그분의 사명은 우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4:26; 요한복음 15:26; 요한복음 16:13; 제3니파이 11:32, 36 참조)”(“속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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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의 은사

성신의 은사, 라일 베즈. 성신의 은사는 안수례를 통해 주어진다.

요한복음 16:20~22.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다음에서 쿠엔틴 엘 쿡 장로는 필멸의 삶에서 겪는 시련은 이따금 슬픔을 수반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주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이해할 때 오래 지속되는 큰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해 주는 근원은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구주께서 지상 생활을 마감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져야 할 때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알고 계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면서 그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16) 그들은 아직 부활을 이해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구주께서는 부드러운 말로써 자신은 떠나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들에게 자신이 떠날 때 슬프겠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6:22)

구주의 죽음이 슬픔을 가져왔듯이, 인생의 변화, 즉 죽음, 질병, 가난, 부상 등은 종종 불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늘 슬픔과 비탄을 가져옵니다. 삶이란 쉬운 게 아니며, 그렇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시련과 환란을 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구주께서 이루신 부활과 속죄와 더불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릴 영생의 약속은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이기에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주께서 주신 이같은 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기쁨이란 우리의 삶 가운데 영이 임할 때 옵니다.(앨마서 22:15 참조) 영이 임하면, 우리는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뻐하게 됩니다.”(“기뻐하라!”,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28쪽)

요한복음 16:25.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구주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것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4:7~11; 16:25 주해를 참조한다.

요한복음 16:33. “담대하라”

자신의 지상 성역이 곧 끝나고 제자들이 큰 환란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아신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담대하라”라고 권고하시고, 자신이 “세상을 이기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6:33)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아데마 다미아니 장로는 담대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지상 생활의 시험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는 고난과 고통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이생의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소망을 갖는 것이며, 낙담하지 않으며 신앙을 잃지 아니하며 생을 기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니파이후서 2:25] 그것은 자신감을 갖고 삶을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영원한 안목과 힘을 줍니다.”(“역경 가운데서 담대하며 충실하십시오”,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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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앞에 있는 가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슬픔 대신에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칠십인 회장단에서 봉사하던 조 제이 크리스텐슨 장로는 “담대하라”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주신 하나의 계명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여러분이 지닌 영성의 수준은 또한 여러분이 ‘담대하라’ 그리고 ‘너는 마음을 들어 기뻐하라’라는(교리와 성약 31:3) 주님의 계명을 얼마나 잘 이행하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경전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몇 번이나 명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일이 잘되어 간다면, 모든 청구서를 지급할 돈이 충분히 있다면, [기분이 좋다면, 또는 그 비슷한 어떤 상황이라면]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담대하라는 말은 단순한 제언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입니다.”(“Ten Ideas to Increase Your Spirituality,” Ensign, Mar. 1999,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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