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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7장
사도행전 3~7장 소개 및 연대
사도행전 3~6장에서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이룩한 지속적인 성장과 활동을 진술하고, 주님의 택함받은 종들이 어떻게 성신의 인도를 받아 교회를 이끌었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실례들을 기록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남자를 치유한 기적은 열렬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는 청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간증을 전하는 이상적인 기회가 되었다. 5천 명의 남성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사도행전 4:4 참조) 유대인 지도자들은 협박과 투옥, 매질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간증을 수호하며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대응했다.(사도행전 5:29) 사도들과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의 신앙으로 성신이 강력하게 임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성신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을 스데반이 고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하자(사도행전 7:56) 그들은 스데반을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다. 스데반은 종종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로 여겨진다. 후에 사도 바울로 알려진 사울은 그의 처형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도행전 3~7장 주해
사도행전 3:1~5. 성전에 있던 걷지 못하는 남자
베드로와 요한은 일출 후 아홉 시간이 흐른 “제 구 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다. 그들은 성전의 여러 문 중 한 곳에서 돈을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남자를 보게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주목했고, 그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다.(사도행전 3:4)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베드로는 위엄 있게 단순히 ‘우리를 보라’라고 말했다. 즉, ‘우리에 대한 신앙을 행사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역자로서 그분의 이름과 권능으로 행하려 하노라.’라고 말한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45) 걷지 못하는 남자는 신앙을 행사하고 바라보았기에 장애가 치유되었다.
사도행전 3:6.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걷지 못하는 남자는 성전 문에서 돈을 구걸했으나, 베드로는 그에게 훨씬 더 귀중한 것을 주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종교 교육 학부 학장으로 있던 시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한 바가 있다. “베드로에게는 돈이 없었으나 귀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에는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모든 열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권 권능, 뼈와 힘줄을 강화하는 신앙, 기꺼이 기독교인다운 우정을 나누려는 마음 등이 포함됩니다. 그는 은이나 금은 줄 수 없었지만, 언제나 ‘돈 없이, 값없이’ 얻은 것을 줄 수 있었습니다.(이사야 55:1) 그래서 그는 그것을 주었습니다.”(“The Lengthening Shadow of Peter,” Sept. 1975, 30)
사도행전 3:6~8. 베드로는 그를 “잡아 일으[켰다]”
이 남자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의 치유는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남자가 뛰고 걸을 수 있으려면, 약하고, 아마도 기형인 다리에 갑자기 강한 뼈와 근육이 생성되어야 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다면, 그는 평생토록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걸으려면 한번도 배우지 못했던 균형감과 신체 기술도 필요했을 것이다.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주변 사람들을 고양하는 방식의 실례를 들기 위해 베드로가 성전 문에서 남자를 낫게 한 이 기사를 사용하였다. 리 회장은 베드로가 그 남자에게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한 데까지 읽은 후(사도행전 3:6),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저는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마음속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걸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내게 걸으라고 명하다니.’ 그러나 경전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걸으라고 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사도행전 3:7)
여러분은 그 고결한 선임 사도가 이 사람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자, 나의 친구여! 용기를 내십시오. 나와 함께 몇 발자국을 떼어 봅시다. 함께 걸읍시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인 우리에게 주신 권능과 권세로 축복을 받았으니, 걸을 수 있습니다.’ 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기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 서지 않는 이상 타인의 영혼을 고양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구조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를 여러분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타인의 영혼에 불을 지필 수 없습니다.”(“Stand Ye in Holy Places,” July 1973, 123)
사도행전 3:12~16. 치유를 일으키는 권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으로 사도들이 받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가 [구주의] 증인이라”라고 말했다.(사도행전 3:15) 우리 시대의 사도들도 이와 똑같은 역할과 의무를 받는다.(교리와 성약 107:23 참조) 베드로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걷지 못했던 남자를 낫게 한 것은 결코 사람의 힘이 아니며, 그들이 넘겨주어 죽게 한 예수께서 그 남자를 치유하셨다고 주저 없이 간증했다.(사도행전 3:12~16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그리스도의 치유하는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속죄의 권능을 숙고하십시오. 그 권능이 어떻게 여러분을 치유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 여러분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지게 된 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속삭임을 받을 때, 그러한 속삭임은 구속주로부터 오는 권유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곧 그 속삭임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불필요한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이 그분께 있음을 압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십시오”,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88쪽)
사도행전 3:17~21. “새롭게 되는 날”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간증하면서,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경고하고,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임을 가르쳤다. “새롭게 되는 날”은 복천년, 즉 하나님이 지상에 다시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는 때를 의미한다.(사도행전 3:19~20) 이에 관해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새롭게 되는 날은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지상에 다시 보내시는 날인 인자의 재림 때에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언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이날을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28) 그날은 ‘산 위에서 나의 사도들에게 보여 준 그러한 모양으로 지구가 변형될 때’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교리와 성약 63:21) 그날에는 ‘땅이 새로워지고 낙원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개조 제10조) 그날은 이사야가 본 ‘새 땅’의 날로(이사야 65:17), 그 땅은 복천년이 도래하고 사악함이 사라질 때 존재할 것입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67, 43)
베드로는 또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사도행전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그대로 계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예언은 1820년 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스러운 숲에서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나셨을 때 성취되기 시작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사도행전 3장 17~19절을 언급하며, 이 성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해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라고 말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도행전 3:19] … 그들은 이미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기에, 죄 사함을 위한 침례를 받을 수 없었다.”(History of the Church, 6:253)
사도행전 3:22.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라고 했던 예언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7:37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4:7~12. “다른 이름[이] …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문제는 사도행전 4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이다.(7, 10, 12, 17~18, 30절 참조; 또한 사도행전 3:16 참조)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영감 어린 설교를 전한 후, 베드로와 요한은 체포되었다. 이 두 사도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공회 앞에 서서 걷지 못했던 남자를 치유한 일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심문에서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예언을 언급하고, 걷지 못했던 남자가 치유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이며, 이외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다른 이름[은] … 없”음을 선언했다.(사도행전 4:10~12; 또한 니파이후서 25:20; 31:20~21; 모사이야서 3:18; 교리와 성약 18:23; 93:19; 모세서 6:52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할 때 권능이 임하게 된다.(요한복음 16:23~24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띠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영적 권세 및 권능과 관련이 있으며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행하든지 내 이름으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제3니파이 27:7)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서는 모든 일이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어린이들을 축복하며, 간증을 나누고, 설교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성찬을 베풀고, 병자를 축복하고, 묘지를 헌납합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67, 128)
사도행전 4:13. “학문 없는 범인”
베드로와 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받기 전에 서기관이나 랍비가 아니라 어부였다.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학문 없는 자로 여겼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신을 받아 권능을 충만히 받은 후에(사도행전 4:8 참조) 그와 같은 권세로 말을 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사도행전 4:13) 이 “학문 없는” 어부들은 “주께서는 아주 작은 방편으로 현명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많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시[며]”(앨마서 37:7), “하나님께서 …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심을]” 보여 주는 본보기이다.(고린도전서 1:27; 또한 교리와 성약 35:13 참조)
사도행전 4:19; 5:29. “하나님 앞에서 … 옳은”
유대인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지만, 두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 옳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사도행전 4:19; 또한 13~18절 참조) 후에 유대인 공회가 다시 이 명령을 내리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말했다.(사도행전 5:29) 이 초기 사도들처럼 오늘날 교회 회원들도 세상의 방식을 따르라는, 점점 거세지는 압력에 맞서 옳은 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런 압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우리의 결심을 약하게 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압력을 느낍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목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세워 주신 목표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
우리는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보호자, 우리의 안내자와 계시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원방에 세우는 기, 세상을 비추는 빛”,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83쪽)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다른 선택을 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었다. “외로울 것 같고, 친구를 잃을 것 같고, 비난받을 것 같을지라도 의를 행하십시오. 의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시험의 기간을 거친 후에 가장 좋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주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서로 지지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혹독한 비난을 받을 때조차도 의를 수호한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의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할 때, 개인적인 표준을 세우고 그것들을 지키겠다는 성약을 맺을 때, 유혹이 올 때 표준대로 행동할 때, 여러분은 자신이 강화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힘까지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Do What Is Right” [address given at Brigham Young University, Mar. 3, 1996], 5; speeches.byu.edu)
사도행전 4:20~21.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에게 임한 성신의 영향력이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4:8~20 참조) 예레미야도 매일 조롱을 받던 시기에 그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 또한 7~8절 참조) 선지자 이더 또한 성신을 아주 강렬하게 느꼈기에 백성들에게 예언하는 것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이더서 12:2; 또한 고린도전서 9:16; 앨마서 43:1 참조)
사도행전 4:32~35.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예루살렘에 살던 교회 회원들은 헌납의 법에 따라 생활하려 시도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는 말은(사도행전 4:32) 성도들이 모든 자원을 모아서 모두와 공평하게 나누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잉여 자원을 활용하여 그들 가운데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녹의 백성들과 몰몬경에 나오는 백성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헌납의 법에 따라 생활하고자 시도했다.(모세서 7:18; 제4니파이 1:3~18; 교리와 성약 105:3~5 참조)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한 것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2:44~45, 4:32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4:36~37. 바나바가 자기 땅을 팔다
바나바가 자기 땅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준 이야기는 그 뒤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와 매우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사도행전 5:1~10 참조) 바나바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4장 32절에 묘사된 단합과 이타심의 이상적인 본보기인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이기심과 주님께 거짓말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 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사도행전 5:1~10. 정직의 중요성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겠다며 하나님과 엄숙한 성약을 맺었다.(사도행전 4:32~35 참조)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회원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교회에 기부해야 했다. 그들은 땅을 팔아 얻은 전액을 교회에 바치기 싫어서 신권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사도행전 5:1~10 참조) 도둑질과 거짓말로 그 성약을 깨뜨린 일은 사실 재앙을 불러오는 심각한 범법을 저지르는 짓이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성약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강력한 실례이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에는 부정직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숨지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양심이 질식하고, 인간성이 메말라 가며, 자존심이 사라지고, 진실성이 없어집니다. … 자신이 받는 성스러운 신뢰를 잃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필히 정직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정결해야 합니다.”(“An Honest Man—God’s Noblest Work,” May 1976, 61–62)
감리 감독단의 리차드 시 에즐리 감독은 정직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직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기초가 되는 덕목입니다. 후기 성도들에게 정직은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요건입니다. 정직은 우리가 성전에서 맺는 성약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구주의 살과 피를 대신하는 성스러운 상징물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기본적이고 성스러운 성약을 새롭게 합니다. 그 성약 안에는 정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정직은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데에서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수건 세 장과 25센트짜리 신문”,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74쪽)
사도행전 5:11. “교회”
사복음서 안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단 세 번만 언급된다.(마태복음 16:18; 18:17 참조) 그러나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단어는 100번이 넘게 나온다.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주께서 사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을 때, 그 가르침에는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며,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사도행전 1:3)
사도행전 5:12~42. 베드로의 지도력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일화와 가르침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로서 위대한 신앙과 용기, 그리고 권능을 지닌 지도자로 급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종교 교육 학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베드로의 신앙을 믿었던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데리고 거리로 나와 침대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랐습니다.]’ (사도행전 5:15) 혹자는 하나님의 신성한 신권을 지닌 필멸의 인간이 보인 신앙과 권능이 이보다 더 위대한 예를 다른 어느 기록에 단 한 줄이라고 나오냐고 경이로워합니다. …
베드로는 절박함을 느꼈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과감하게 거역했으며, 자신의 안전이 위태로울 수 있는 성전으로 몇 번이고 들어갔습니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은 ‘온 세상에서 제1인자인 사람’이 주님의 집에서 자신을 투옥하고, 매질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권능으로, 있는 힘을 다해 말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커다란 용기와 고결성’을 지니고[Faith Precedes the Miracle (1972), 244] 분명하게 간증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이 일에 대한 증인이요.’ (사도행전 5:29, 32) 그는 투옥되고 매 맞으며 말하는 것을 금지당했지만, 옛 선지자 아빈아다이처럼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다른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 …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사도행전 5:41~42)” (“The Lengthening Shadow of Peter,” Sept. 1975, 35)
사도행전 5:17~20. 주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어 주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성역을 베풀고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가입하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베드로와 요한을 투옥하여 교회의 발전을 저지하려 했다. 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남자를 낫게 해 준 뒤 체포당했던 일과 이번 투옥으로(사도행전 4:3; 5:18 참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도들을 박해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요한복음 15:20; 16:20 참조)
사도행전 5장 19절에 기록되었듯이, 주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어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 주었다. 경전에서 비슷한 기사를 더 찾아보려면, 사도행전 12장 3~11절, 앨마서 14장 22~29절, 힐라맨서 5장 22~23절을 참조한다.
사도행전 5:34~39. 가말리엘
가말리엘은 유명한 랍비인 힐렐의 손자였다.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이자 저명한 유대인 율법 학자였다. 바울은 이 유명한 율법 교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사도행전 22:3 참조) 가말리엘은 관대하고 친절하며, 안식일을 준수하는 표준이 너무 엄격하지 않도록 완화하고, 이혼 법에서 여성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도록 권장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가말리엘의 현명한 조언 덕분에 사도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도들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으나 다시 유대인 공회에 붙잡혀 와 있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발언하면서, 주님이 함께해 주지 않으셨기에 실패했던 운동의 예로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언급했다. 첫 번째는 로마제국에 대항한 유대인의 폭동이었다. 드다라는 사람이 주도하였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약 400명이었으나, 그가 죽임을 당하자 무리가 모두 흩어져 버린 사건이었다. 두 번째는 주후 6년 무렵에 일어난 일로, 갈릴리의 유다와 그를 따르는 한 무리가 로마제국의 과세제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이다. 로마의 무력에 제압당하던 중에 유다가 사망하자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상, 가말리엘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이 사상운동을 순리에 맡기자. 예수의 추종자들이 일으키는 이 사상운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면 드다와 유다가 일으킨 반란처럼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너희는 그 일을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사도행전 5:35~39 참조)
사도행전 6:1~6. 일곱 명이 사도들을 돕도록 부름받다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사도들은 이제 모든 회원의 필요 사항을 일일이 다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 “헬라파”, 즉 헬라어로 말하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과부들이 등한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히브리파”, 즉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에 대해 원망을 쏟아 냈다.(사도행전 6:1 참조) 과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곱 명이 부름을 받아 십이사도를 돕도록 권한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십이사도의 지시에 따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 일곱 명이 어떤 신권 직분을 소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감독과 지부 회장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진다.
“감독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서 보살피라는 신성한 명령을 받았다.(교리와 성약 84:112 참조) 감독은 와드에서 복지 사업을 지휘한다. 감독의 목표는 회원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자립하도록 돕는 것이다. (지부에서는 지부 회장이 이와 같은 복지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진다.)
감독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분별의 은사를 축복받는다. 개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영감이 필요한 일이다. 감독은 영의 인도와 기본적인 복지 원리에 따라 … 누구를 돕고,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며, 언제까지 도와야 하는지를 결정한다.”(Providing in the Lord’s Way: Summary of a Leader’s Guide to Welfare [booklet, 2009], 4–5)
사도행전 6:8~14. 스데반을 반대한 사람들
스데반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택함받은 일곱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충만하였으며, 큰 기적들을 행하였고, 영의 권능으로 가르쳤다. 스데반을 반대한 사람들은 타국 출신의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회당에서 온 사람들이었다.(사도행전 6:9 참조) 자유민은 과거에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을 말한다. 구레네인은 아프리카 북부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알렉산드리아인은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으며,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령이었다. 스데반에 대한 비난과(사도행전 6:11~14 참조) 그의 항변을(사도행전 7장 참조) 볼 때,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땅, 모세 율법,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유대인의 기본 개념이 재정립되었다는 그의 가르침에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스데반을 반대하는 이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였는데(사도행전 6:11), 이는 반대자들이 사람들을 설득하여 위증죄를 범하게 했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6:15. 스데반이 변형되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데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증거였다. 모세가 산에서 40일 동안 주님과 교통한 후에 그의 얼굴이 뚜렷하게 빛을 발산했던 것처럼 스데반의 경우도 정도는 덜했지만 그와 같았다.(출애굽기 34:29~35)”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67)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과 그의 간증을 반대함으로써 하나님을 반대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분명한 징표를 주셨다. 스데반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 특히 그의 변형(출애굽기 34:29~30),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종의 한 사람으로서 배척받은 일은(사도행전 7:35~39 참조) 모세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과 유사하다. 스데반의 경험은 또한 구주의 변형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누가복음 9:28~31 참조) 이로써 모세에 대한 적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적대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적대해 왔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양상이라는 스데반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사도행전 7:35~39, 51~52, 57~60 참조)
사도행전 7:2~60.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스데반의 비난
스데반이 유대인 공회에서 한 말은(사도행전 7장 참조) 유대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다음 세 가지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1) 이스라엘의 땅(2~36절), (2) 모세 율법(37~43절), (3) 성막 또는 성전(44~50절) 스데반은 주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세 가지 축복을 각각 주셨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고,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축복들을 거부했는지를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비난하는 자들을 꾸짖고 나무라면서,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같다고 지적했다.(51~53절 참조) 스데반은 옛 이스라엘의 일부 유대인이 모세를 배척했듯이,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구주를 배척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선지자들]을 [너희 조상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느니라.]”(사도행전 7:52)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책임이 있음을 단언했다. 스데반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을 잘 알고 있었다.(신명기 18:15; 사도행전 3:22~23; 제3니파이 20:23; 사도행전 7:37 주해 참조)
스데반은 비난자들이 그들의 조상들과 같고, 구주를 배척했다고 단언한 죄로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스데반이 시현으로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더는 참고 들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로마 당국의 재판이나 심리도 없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였다.(54~60절 참조)
사도행전 7:37. 모세와 같은 선지자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으며, 사람들은 그분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했다. 스데반은 청중이 예수님과 모세가 어떤 점에서 유사한지를 알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음 표를 공부하면서 스데반이 가르친, 모세와 구주의 생애에 나타나는 몇 가지 유사점을 알아본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간의 유사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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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
예수 그리스도 |
사도행전 7:18~21. 모세는 유아 시절 애굽에서 대학살로부터 목숨을 구했다. |
마태복음 2:13~16. 예수님의 가족들은 유아인 그분이 살해당하지 않도록 애굽으로 피난하였다. |
사도행전 7:22.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였다.]” |
마가복음 6:2. 많은 이들이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워했다. |
사도행전 7:25. 모세는 “그의 형제들이 …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
요한복음 1:10~11; 요한복음 6:66.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
사도행전 7:29. 모세는 백성들을 구해내기 전에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였다. |
마태복음 4:1~11.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성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하려고 광야로 가셨다. |
사도행전 7:30~34.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죽은 후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다. |
마태복음 2:20.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은 헤롯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다. |
사도행전 7:34.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속박에 놓여 있었다. 모세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보내졌다. |
요한복음 8:33~36. 유대인들은 죄에 속박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
사도행전 7:35. “[그들이]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 관리[로 보내셨다.]” |
마태복음 21:33~39.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또한 마가복음 15:1~2 참조) |
사도행전 7:36. 모세는 “애굽[에서] …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 두루 다니사 … 모든 병[을] 고치[셨다.]” |
사도행전 7:39. 백성들은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 |
요한복음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 |
사도행전 7:48.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사도행전 7장 48절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대한 흠을 잡기 위해 이따금 사용한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 또는 성전을 세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암시하지는 않았다. 어떻든 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스데반은 고대에 일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열왕기상 8:27 참조), 하나님께서 성전이라는 물질적 구조물에만 제한적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만물을 지으신 위대한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지은 성전에는 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며, 이따금 그 거룩한 집을 방문하신다. 그리고 충실한 사람들은 그 성스러운 성전에서 항상 그분의 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76)
사도행전 7:52~53.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
사도행전 7장 53절은 천사가 실존하며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스러운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성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에게 복음의 경륜의 시대가 주어질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내심을 받은 거룩한 천사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성신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포되었[다.]’ (모세서 5:58) 이 성구에서 스데반은 천사들이 또한 ‘율법’, 즉 ‘예비적 복음’을(교리와 성약 84:26~27)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말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76–77) 고대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들이 천사에게서 성스런 메시지를 받았던 것처럼, 천사의 방문은 후기에 복음의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천사의 성역에 대해 말하고, 믿고, 간증을 나누지만, 저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더 자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사들은 휘장 너머로 증언하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위대한 방편 중 하나입니다.”(“A Standard unto My People” [Church Educational System symposium on the Book of Mormon, Aug. 9, 1994], 11; si.lds.org).
사도행전 7:55~56. 신회는 세 분의 신성한 인격체로 이루어진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다.(사도행전 7:55) 이 시현에서, 신회의 각 구성원은 개별적인 존재로 나타났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스데반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든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이라면 하늘에는 권능의 열쇠를 지닌 세 분의 인격체가 계시며, 한 분이 모두를 감리하신다는 것을 압니다.”(History of the Church, 5:426)
신회의 각 구성원이 지닌 본질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0:30, 37~38 주해에 나오는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의 말씀을 참조한다. 또한 사도행전 7장 55~56절과 조셉 스미스—역사 1장 16~17절을 비교하여 읽으면, 스데반의 시현과 조셉 스미스의 첫번째 시현 간의 유사점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7:56. “인자”
사복음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80회 이상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언급하시며 이 칭호를 사용하셨다. 아마 스데반이 구주를 인자로 언급한 이유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누구셨는지를 알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인자”라는 칭호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모세서 6장 57절 및 마태복음 8:20; 9:6; 10:23; 11:19; 12:8, 32, 40 주해와 마가복음 14:53~65 주해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7:57~60. 스데반의 죽음
일반적으로 스데반은 기독교인 중 첫 번째 순교자로 간주된다. 죽음에 직면한 그는 구주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었다.(사도행전 7:59~60과 누가복음 23:34, 46 비교) 누가는 독자들이 사울의 개종 이야기를 읽을 준비가 되도록 스데반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사울을 언급하였을 것이다.(사도행전 8~9장 참조) 누가는 스데반을 돌로 친 사람들이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흥미로운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사도행전 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