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소개 및 연대
바울은 이방인 성도도 모세 율법의 의례를 준수해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성도들을 꾸짖었다.(갈라디아서 1:6~7; 3:1~3; 5:2~4; 6:12 참조; 또한 사도행전 15:1~31 참조)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가르쳤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승인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성역을 베풀었다고 해명함으로써 사도로서 자신의 부름을 변론했다.(갈라디아서 1:1, 11~24; 2:1~9 참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세 율법의 행위와 의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갈라디아서 2:16) 바울은 이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으며(갈라디아서 3:6~18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가능해진 구속에 대해 가르치고(갈라디아서 3:13 참조), 모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서(갈라디아서 3:24) 주어졌다는 것을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며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갈라디아서 3:26~4:7 참조)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령에 따라 생활하고 복음의 자유를 고수하라고 요청했다.(갈라디아서 4:21~6:18 참조)
갈라디아서 주해
갈라디아서 1:1~7.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
바울은 자신의 서한을 받을 성도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주로 서두에서는 그들에 대한 감사와 칭찬을 먼저 언급했다.(고린도전서 1:4~13 참조) 그러나 갈라디아서에는 감사나 칭찬에 대한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바울은 곧바로 거짓 교사를 따른 갈라디아 성도들을 꾸짖었다.(갈라디아서 1:6~7; 4:9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갈라디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바울의 서한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특정 성도들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갈라디아인의 경우, 그들의 문제는 배도였다. 갈라디아인들은 이방인 개종자였다. 당시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고 말하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에게 물들고 있었다. 바울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으로 되돌아오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즉, 갈라디아서는 참된 신앙을 잃어 가고, 그릇된 교리와 의식을 받아들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굴복하고, 죽은 모세 율법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 있는 말씀과 뒤섞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455)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갈라디아서 1장 6~12절에 나오는 바울의 경고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두 가지 경고의 말씀은 비단 그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중에도 흉악한 이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회원임을 주장하나, 그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 회원들 간에서도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그러진이란 말은 신앙심이 약한 회원을 떼어 내려고 옳고 바른 것을 왜곡시키고, 고의로 잘못된 것을 고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당시에 말했듯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준 자로부터 그토록 빨리 떠나고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에서 떠나[는] …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상한 일입니다.”(“하나님의 신권에 대한 권고”, 성도의 벗, 1973년 9월호, 30쪽)
갈라디아서 1:8~10. “하늘로부터 온 천사”
갈라디아서 1장 8~10절에 기록된 바울의 가르침은 시현과 천사와 회복된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반박하는 데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참된 복음은 바울처럼 권한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전파된다. 그리고 그 기초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갈라디아서 1:6; 니파이후서 2:8; 10:24 비교) 또한 개인의 간증이다. 그것은 바울의 모든 가르침을 망라한다. 만일 천사가 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이 복음에서 다른 데로 돌리려 한다면(앨마서 30:53 참조), 우리는 그 천사를 무시해야 한다. 하지만 경전에는 몇몇 천사가 와서 복음의 충만함을 회복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그런 경우이다.(요한계시록 14:6 참조)
갈라디아서 1:11~2:10. 바울의 개종
바울이 기록한 자신의 개종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부름과 가르침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갈라디아서 1:1, 11~12) 자신은 교회의 감리 지도자들의 승인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갈라디아서 2:2, 9 참조)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0절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는 갈라디아서에만 나온다.(바울이 아라비아에 체류했음, 다메섹으로 돌아옴,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여행함, 그곳에서 사도들을 만남) 바울의 삶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사도행전 9:23~26 주해에 나오는 “바울의 삶과 성역에서 있었던 사건들의 연대표”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 2:1~5.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계속 시행하기를 원하다
갈라디아서 2장 1절에는 바울이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디도가 거기에 동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 사람인 디도는 할례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일부 유대주의자들은 모든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 모세 율법의 의례를 계속 순종하기를 바랐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거짓 형제들이 부지중에 데려온 자들이 있었나니,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다.”(Joseph Smith Translation, Galatians 2:4) 거짓 형제들이 데려온 이 첩자들은 디도와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단념하고 모세 율법의 속박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고자 했다.
갈라디아서 2:11~16. 바울과 베드로의 대립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최고 선임 사도인 베드로와 대립했던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한 후(갈라디아서 2:1 참조),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의 성도들을 방문했는데, 마침 바울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베드로는 그곳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한 무리의 유대인 기독교도들이 그곳에 오자 식사를 멈추었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 성도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 유대인 방문자들이 불쾌하게 여길까 봐 두려워했다.(갈라디아서 2:12 참조) 유대인 문화를 포함하여 고대 세계의 여러 문화에서 식사는 우정과 충성의 관계를 확약하는 것이었다.(마가복음 2:15~16; 사도행전 10:28 참조) 하지만 일부 유대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이방인들과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는 문화적 전통이 이방인 성도들과 기독교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3:28)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을 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이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갈라디아서 2:14) 베드로와 같은 교회 회원들과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암시했다고 여겼다.
이 대립에 대해서는 현재 바울의 기록만 있다는 점과 베드로가 주로 유대인들에게 성역을 베풀었음을 바울도 인정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갈라디아서 2:7~8 참조)
“그러나 최고 선임 사도를 변호하는 측면에서 볼 때, 베드로는 감정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두 분파로 구성된 비교적 작은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이쪽에서는, 즉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일부 이방인들이 모세 율법의 규정, 특히 할례를 꺼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반면, 바울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모세 율법의 전통을 아직도 굳게 고수하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의 감정 문제를 개의치 않아 했다. 선지자인 베드로는 당연히 교회의 유대인 회원들과 이방인 회원들을 모두 사랑하고 염려했다.
베드로에게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계속 식사를 한다면 방문을 온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감정이 상할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자리를 떠난다면 바울과 안디옥의 이방인 기독교도들이 불쾌해할 것이다. 타협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감정이 상할 사람들이 발생한다. 베드로는 아마 바울은 감정이 상하더라도 계속 충실하게 남겠지만,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감정이 상하면 아직 유아기 단계에 있던 교회를 반대하거나 떠나도록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Frank F. Judd Jr., “The Jerusalem Conference: The First Council of the Christian Church,” Religious Educator, vol. 12, no. 1 [2011], 67; rsc.byu.edu)
갈라디아서 2장에는 주후 49년에 개최된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사도행전 15장 참조) 바울은 그 대회에 참석했으며, 이후에 자신이 성역을 베풀었던 사람들에게 그 대회의 결정을 전했다.(사도행전 15:30; 16:4 참조) 바울이 그 대회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결정이 언급된 서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갈라디아서 2장 11~21절에 서술된 일이 예루살렘 회의 전에 일어났다고 여긴다.
갈라디아서 2:1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언급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사람은 모세 율법의 행위를 수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즉, 죄에 대한 형벌을 사면받는다.) 베드로도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와 비슷한 관점을 보였다.(사도행전 15:7~11 참조) 의롭게 됨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1:16~17 주해를 참조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에 대해 통찰을 얻으려면, 로마서 3:22 주해를 참조한다.
의롭게 됨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종종 성결하게 됨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언급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이 두 교리가 어떻게 관련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의롭게 된 사람을 우리는 용서받아 죄 없는 사람이라고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내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자는 충만하게 될 것이요, 만일 그가 끝까지 견디면, 보라,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설 그 날에 내가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죄 없다 할 것이라’(제3니파이 27:16; 강조체 추가) 속죄는 죄 사함과 같이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냅니다. 모로나이는 ‘더 많은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또,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 그의 권능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그러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하게 되나니, 이 피 흘리심은 아버지의 성약 안에서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서 너희를 거룩하며 흠 없게 되게 하는 것이니라.’(모로나이서 10:33; 강조체 추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성결하게 되는 것은 깨끗하고 순결하며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어 과거의 죄에 대한 형벌이 없어진다면, 성결하게 됨으로써 죄의 얼룩이나 결과가 사라집니다.”(“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Ensign, June 2001, 20, 22; 또한 모세서 6:59~60 참조)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며 의로운 행위는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오해되기도 한다. 이 성구를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바울의 기록 대부분에서, 행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선행이나 복음대로 생활하려는 노력, 즉 순종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2~3장에서 바울이 했던 말에 나오는 행위라는 단어는 모두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 안에서 쓰였다. 이는 할례 의식, 음식물 규제, 성일 등 모세 율법의 준수를 의미했다.(로마서 3:27~31 주해 참조)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바는 모세 율법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복음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라는 의미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에베소서 2:8~9; 니파이후서 25:2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의 행위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이 했던 말 중 또 다른 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12) 이 표현은 우리의 의로움이 구원과 승영을 얻게 해 준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신성한 운명을 타고났다 해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 세상을 거쳐 영생을 얻도록 해 준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때로 그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말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니파이가 말한 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부지런히 권고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니파이후서 25:23)
… 그러나 순종과 선한 일을 한 후에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죄의 영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73~74쪽)
갈라디아서 2:18~20; 3:10~11, 2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라는 바울의 말은(갈라디아서 2:18) 자신이 구주를 믿는 새로운 삶을 떠나 모세 율법을 준수했던 예전 생활로 돌아갈 때 일어날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3:10) 그는 어느 누구도 율법만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알았다.(갈라디아서 3:10~11, 22 참조) 바울은 분명 모세 율법의 일부 관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지만(사도행전 16:1~3; 18:18; 21:26 참조), 이제 그것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승영을 위한 필수 요건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예전 삶을 죽은 것으로 묘사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갈라디아서 2:18~20 참조)
칠십인 정원회의 로버트 엘 백맨 장로는 구주께 자신을 온전히 바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신뢰와 신앙과 사랑의 선물로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치는 자세를 시 에스 루이스는 이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 너의 많은 시간과 많은 돈과 많은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원하는 것은 너 자신이니라. 나는 육으로 난 너에게 고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육으로 난 너를 죽이러 왔노라. 일부만 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 나는 가지만 여기저기 쳐내는 것을 원치 않고,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육으로 난 너를 모두 넘기라. 네가 가진 모든 악한 욕망은 물론 네가 순수하다 생각하는 욕망도 모두 나에게 넘기라. 너에게 새로운 너를 주겠노니, 곧 나 자신이라. 그러면 나의 것이 너의 것이 될지니라.”’ (Mere Christianity, New York: Collier Books, 1960, p. 167)”(“예수 그리스도”, 성도의 벗, 1992년 1월호, 11쪽)
바울이 신앙으로 의롭게 된 본보기로서 아브라함을 언급한 것을 이해하려면, 로마서 4장 주해 및 로마서 4:18~22 주해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 3:7~9, 16~19, 29.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의 이방인 기독교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상속받기 위해 모세 율법의 관습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더 잘 이해하도록,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3:7; 또한 8~9, 16~19, 29절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 나오는 Bible Dictionary[성경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 즉 일반적으로 이방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복음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계로 입양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의 성약의 상속자가 된다.(갈라디아서 3:26~29)”(Bible Dictionary, “Abraham, covenant of”)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은 충실할 경우 승영을 약속받는다.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경전상으로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의 후손이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축복을 받으리라는 성약을 위대한 족장 아브라함과 맺으셨습니다.[창세기 18:18 참조]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그러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침례를 받고, 성전 결혼을 하고, 그들의 성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지상의 온 나라들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그의 자손이 되고 약속된 축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 바울이 말한 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사람들입니다.[갈라디아서 3:29]”(“하나님의 지식의 열쇠”,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54~55쪽)
갈라디아서 3:8.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성도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는가?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복음의 충만함이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졌으며, 구주의 시대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의로운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후로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 위대한 구속의 계획의 권능을 통해 구원받았다. …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갈라디아서 3:8 참조]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다음 말씀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은 오직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복음 8:56] …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당신을 고대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생 제물을 당신께 바치도록 명하실 때마다 그들이 당신께서 오시는 때를 신앙으로 고대하고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속죄의 권능에 의지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History of the Church, 2:16–17)
주님께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 또 다른 고대 성도의 예로는 아담과 이브가 있다. 희생 제물을 바치던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침받았다.(모세서 5:5~8; 6:50~66 참조)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나무에 매달리셨기에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갈라디아서 3:13; 사도행전 5:30; 10:39; 베드로전서 2:24 참조) 그들은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범죄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의 성구를 언급했다.(신명기 21:22~23)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으로 여겨져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저주를” 받았다는 개념을 구주께 적용함으로써 이를 다른 식으로 고찰했다. 그는 예수께서 구속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우리 입장에서 “저주를” 받게 되셨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기울임체 추가)
갈라디아서 3:14~16. 아브라함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글자 그대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집에 먼저 주어졌다. 신약 시대와 오늘날에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제3니파이 20:25~27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받게 된다.(로마서 9:6~8; 갈라디아서 3:27~29; 니파이후서 30:2; 교리와 성약 84:33~34 참조) 이런 축복은 상속의 땅을 받고(창세기 13:14~15; 아브라함서 2:6 참조), 땅의 먼지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후손을 받고(창세기 13:16; 15:5 참조), 신권과 복음을 받고(아브라함서 2:11 참조), 종국에는 영생을 받는 것으로(아브라함서 2:11 참조) 요약될 수 있다. 이런 축복의 충만함은 우리가 해의 왕국에서 영원한 상속을 받을 때, 앞으로 올 영원한 세상에서만 받을 수 있다.
갈라디아서 3:19~25.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바울은 모세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가르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 율법을 주신 이유를 설명했다.(갈라디아서 3:19~25 참조)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범법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일시적인 조치였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지속될 수 있었다.(갈라디아서 3:24) 모세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될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이 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 구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로마서 3:20, 23~24; 갈라디아서 3:22 참조) 몰몬경의 선지자 아빈아다이는 모사이야서 13장 29~30절에서 모세 율법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했다.
조셉 스미스 역에 나와 있는 이 구절은 모세 율법이 주어진 이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중보자”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즉 율법은 범법으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인데,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 안에서 약속되어진 그 후손이 올 때까지 그러하신 것이라. 모세는 천사의 손으로 이 첫 성약(율법)의 중보자로 성임되었더라.
이제 이 중보자는 새 성약의 중보자가 아니었으나 새 성약의 중보자가 한 분 계시니, 그는 그리스도시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에 관한 율법에 기록된 대로니라. 이제 그리스도는 생명의 중보자시니, 무릇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임이니라.”(조셉 스미스 역, 갈라디아서 3:19~20[경전 안내서])
갈라디아서 3:24~25.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칠십인 정원회의 폴 브이 존슨 장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다. 그는 주님이 당신의 왕국에 변화를 가하실 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함을 설명했다.
“왕국에 일어나는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주님이 당신의 일을 서두르시는 데 도움이 됩니다.(교리와 성약 88:73 참조) 영감에 따라 이뤄지는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왕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전서 후반부에서 교회가 직면했던 주요한 도전은 기독교인으로 동화되고 있던 이방인 개종자들과 관련된 쟁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부각되기 시작하는 그 쟁점은 바울이 쓴 여러 서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모세 율법에 규정된 의식들을 따라야 한다고 여겼고, 거기에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고넬료와 관련하여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는 극적인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사도행전 10~11장 참조), 과거를 청산하고 새 출발을 이뤄 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특별 회의를 개최하여 이방인 개종자들이 그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런 결정을 설명하는 서한을 써서 보낸 후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분쟁과 분열의 근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5장 참조) 교회에 일어난 이 중대한 변화를 많은 회원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 많은 유대인, 심지어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모세 율법의 목적과 원래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율법에 부수적인 조건과 전통을 무단으로 첨가해서 율법의 참된 의도를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수적인 첨가와 전통 때문에 율법은 이제 더는 ‘영혼을 주께로 향하게’(야곱서 4:5) 하거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갈라디아서 3:24) 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푯대를 지나쳐’(야곱서 4:14) 바라보며 율법을 세우시는 분인 구주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왜곡된 율법을 세웠습니다. 율법은 너무도 부담스럽고 소모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
저는 우리가 왕국에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와 싸우고 그 일이 진척되는 것을 방해했던 사람들처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랬듯이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sponding Appropriately to Change” [address to CES religious educators, Feb. 8, 2013], 1; si.lds.org)
갈라디아서 3:26~27. 신앙과 침례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침례와 연결됨을 보여 준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자녀]”은 침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성약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8:14~16 주해를 참조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는 구절에서 “입다”로 번역된 동사는 그리스어 enduō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여한다”라는 의미를 띤다. 이 그리스어는 옷을 입는다는 것을 뜻하며,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및 가능하게 하는 힘을 상징적으로 “입는다”는 의미로 쓰였다.(또한 에베소서 4:22, 24; 6:11; 골로새서 3:9~12 참조) 그와 유사하게, 교회의 충실한 회원들은 성전 “엔다우먼트”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의 속성을 받아들이기로 성약한다.
갈라디아서 3:28~2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주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인 분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분열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각 회원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성약 관계는 모든 회원을 하나로 묶는다.(갈라디아서 3:28 및 에베소서 2:12~14, 18~19 주해 참조) 우리는 침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고대 축복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라디아서 3:29) 주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현대의 계시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공표하셨다.(교리와 성약 86:9; 아브라함서 2:6~11 참조)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신약 시대의 교회처럼 오늘날의 교회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는지를 설명했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은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로마서 2:11; 갈라디아서 2:11~16; 3:1~29; 5:1~6; 6:15 참조) 그들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가르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주님의 종들은 필리핀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 또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변화시켜 미국인이 되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구주는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나아오도록 권유하시며(니파이후서 26:33; 교리와 성약 43:20 참조), 그분의 종들은 …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 후기 성도가 되게 하려 합니다.”(“회개와 변화”,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39쪽)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은 교회에 다양성과 단합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교회의 복음이 더욱더 많은 나라에 전파되어 감에 따라 교회 내에서 풍부한 문화의 다양성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우리는 ‘믿는 것[에] … 하나가’[에베소서 4:13] 될 수 있습니다. 각 그룹은 주님의 왕국으로 그들의 은사와 재능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서 가치 있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교리와 의식과 성약을 합한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
우리가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더 위대한 영적인 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영적으로 각 개인의 차이를 초월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회원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문화와 개인적인 정체성 안에 있는 숭고하고 훌륭하며 고무적인 모든 것을 지켜 나가시기를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권 열쇠의 권세와 권능 아래에서 우리가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가 되도록 노력하며, 신권의 열쇠를 소유하신 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가 되고, 우리 안에 내재한 신성을 구할 때 모든 차이점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하나님 왕국의 상속자”, 성도의 벗, 1995년 7월호, 61쪽)
갈라디아서 4:1~9.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성약 관계가 종과 주인의 관계처럼 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누가복음 17:7~10; 모사이야서 2:17, 21; 5:13 참조)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로 볼 때 더욱 잘 이해된다고 설명했다.(갈라디아서 4:6~9 참조)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 성약 안에서 “아들”이 되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숭배했던 거짓 신의 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했다. 구주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복음 성약 안에서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가르치셨다. 그 비유에 따르면,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을 영원히 잃었다고 여긴 방종한 아들은 아버지의 종이 되게 해 달라며 간청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였다.(누가복음 15:17~24 참조)
갈라디아서 4:6~7. “아빠 아버지”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
“아빠 아버지”에 관해 더 이해하려면 로마서 8:15 주해를, “유업을 받을 자”에 관해 더 이해하고자 한다면 로마서 8:17 주해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 4:9~15. 기쁨의 상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전에 자신을 얼마나 잘 영접했는지를 상기시켰다.(갈라디아서 4:13~15 참조) 15절 첫 부분에 나오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한때 이야기했던 기쁨이 어디로 갔느냐?” 그들은 한때 바울이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와 그의 가르침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이제 그런 행복은 자취를 감추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던 유대인 기독교 교사들은 바울에게 반기를 들어,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의 짐을 지게 함으로써 결국 그들의 행복을 앗아갔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요한복음 15:11; 갈라디아서 5:22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을 참조하면 갈라디아서 4장 12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형제들아 내가 온전하듯이 너희도 온전하기를 구하노라. 이는 너희가 나를 알며 너희가 말로써 나를 해치지 아니하였음을 믿기 때문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Galatians 4:12)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복음에 따라 생활하며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의 모범을 따르도록 요청했다.
갈라디아서 4:21~31.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아들들의 비유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두 아들을 비교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비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복음이 모세 율법보다 우월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삶을 비유로 사용한다. 이는 청자들이 아브라함과 그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그 교리가 각인될 수 있도록 고안한 교수 방법이었다.
여종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자유인인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으며, 반면에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서 영을 따라 났다. 그러므로 하갈은 옛 성약인 모세 율법을 상징한다. 이 성약으로 사람은 죄의 속박을 받아야만 했다. 반면 사라는 새 성약인 복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성약으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속박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모세 율법이 주어진 시내 산과 그 율법이 시행된 예루살렘은 모세 율법을 상징하며, 그들의 자손은 속박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성도들이 거주할 하늘의 성인 영적 예루살렘은 사라로 상징되며, 사라는 자유인의 어머니이다. 우리의 영적 어머니로서 오랫동안 잉태를 하지 못했던 사라는 우리가 모두 이삭처럼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영을 따라 난 이들을 상대로 싸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거부하고 이삭을 받아들이셨듯이, 지금도 모세 율법을 고수하는 이들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신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477–78)
바울은 이 두 성약에 관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갈라디아서 5장에서 새 성약의 일부가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영을 통해 선행으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두 성약에 관한 비유에서 속박과 자유를 대조하고, 이를 토대로 갈라디아서 5장 1, 13절에 나오는 자유에 관한 가르침을 전했다.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두 아들: 옛 성약과 새 성약의 상징 | |
---|---|
하갈과 이스마엘 |
사라와 이삭 |
여종 하갈은 자연적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바울은 이를 “육체를 따라” 난 것이라고 묘사했다.(갈라디아서 4:22~23) |
자유인인 사라는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즉, “약속”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갈라디아서 4:22~23) |
바울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모세 율법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 율법은 시내 산에서 받은 것으로, 지상의 성인 예루살렘을 위해 주어졌다. 모세 율법은 사람들을 속박으로 이끌었으며,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다.(갈라디아서 4:24~25 참조) |
바울은 사라와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자유와 하늘의 성인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 성은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다.(갈라디아서 4:24~26 참조) |
옛 성약인 모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속박의 자손이다. 그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와 이삭을 박해했듯이 끊임없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다.(갈라디아서 4:24, 29 참조) |
새 성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모세 율법의 의식이라는 속박에 얽매이지 않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이다.(갈라디아서 4:24, 30~31 참조) |
갈라디아서 5:1,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옛 성약인 모세 율법을 “종의 멍에”로 묘사했다.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종[bondage]을 주로 죄에 사로잡힌 것으로 묘사했지만, 바울은 모세 율법의 부담과 한계를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주께서는 자신의 멍에는 “쉽고” 짐이 “가벼[워]” 그 멍에를 지는 사람들은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태복음 11:28~30)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유는 제자들이 자유롭게 영의 인도를 받고 율법에 제약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5:22~23 참조)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종교의식을 “생각 없이”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와 신앙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행할 때, “우리와 그분의 거리는 좁혀지며 우리는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의 속박에서 풀려나며, 영에 감동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4, 36)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우리를 영적으로 자유롭게 해 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권고에 순종할 때 옵니다. 복음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억압의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욕구를 다스리고 행위를 인도하는 자유의 계획입니다. 그 열매는 달콤하고 그 상은 풍성합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5, 78)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훈계했다.(갈라디아서 5:1) 오늘날 우리는 모세 율법에 얽매일까를 염려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따금 의식적으로 또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것들에 얽매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반대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게 됩니다. … 기독교인의 자유는 율법의 부재에서 오지 않고, 기꺼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때 옵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다른 멍에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때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들이 고수했던 멍에는 모세 율법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메는 모세 율법의 멍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Gaye Strathearn, “Law and Liberty in Galatians 5–6,” Go Ye into All the World: Messages of the New Testament Apostles [2002], 70–71; rsc.byu.edu)
갈라디아서 5:2~4. 갈라디아 성도들은 모세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구원을 위해 모세 율법에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묵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며 어떤 효력도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갈라디아서 5:2~5 참조) 바울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라고 말한 것은(갈라디아서 5:4) 아마도 역설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미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바가 있다.(갈라디아서 3:11 참조) 바울의 말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너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라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5:4)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바울의 말은(갈라디아서 5:4) 만일 모세 율법을 준수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신성한 은혜에서 떨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5:16~25. “성령을 따라 행하라”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게 되리라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5:16) 바울의 말은 “육체의 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갈라디아서 5:19~21 참조) 이런 죄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범주로 나뉜다. (1) 성적인 죄. “음행”은 부도덕한 성관계를 말하며, “호색”은 억제되지 않거나 과도한 욕정을 말한다. (2) 우상 숭배와 주술과 같은 종교적 영역에 따른 죄. (3) 다른 사람을 거스르는 죄. “분쟁”은 불화로 해석할 수 있으며 “원수 맺는 것”의 결과물이다. “시기”는 타인과 동등하거나 타인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서, 때로는 질투심에서 단행하는 행동이다. (4) 술과 관련된 죄: “술 취함”과 “방탕함”. 바울은 이런 죄에 습관적으로 가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갈라디아서 5:21)
우리가 어떻게 영을 통해 육욕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바울의 가르침에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로마서 7:14~8:13 주해 및 로마서 8:1~13 주해를 참조한다.
갈라디아서 5:22~25. “성령의 열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성령의 열매”의 몇 가지 예를 들었다.(갈라디아서 5:22~25 참조) 칠십인 정원회의 데니스 이 시먼즈 장로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더 많은 예를 들면서, 이런 축복들이 묘사되어 있는 여러 성구를 소개했다.
“바울은 영의 열매, 즉 영이 가져다주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니] …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다시 말해서, 영은 무엇이든지 꿰뚫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법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성령이 주님의 사업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경전에서 가르치는 바, 성령은
• 마음을 밝혀 깨닫게 해 주며(교리와 성약 6:15 참조)
•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고] … 공의롭게 행하도록, 겸손히 걷도록, 의롭게 판단하도록 인도하’며(교리와 성약 11:12)
•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며(교리와 성약 11:13; 모사이야서 4:20 참조)
• ‘모든 것의 참됨을’ 알게 해 주며(모로나이서 10:5)
•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증거하며(교리와 성약 20:27 참조)
• 모든 것을 알며(교리와 성약 42:17 참조)
• 증언해 주며(교리와 성약 100:8 참조)
• 지식을 주며(교리와 성약 121:26 참조)
•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말하며(니파이전서 17:45)
• 사람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치며(니파이후서 32:8 참조)
• 큰 변화를 일으키며(모사이야서 5:2 참조)
• 확신을 갖게 하며(앨마서 58:11 참조)
• ‘소망과 완전한 사랑’으로 채워 주며(모로나이서 8:26)
• 자유를 주며(고린도후서 3:17 참조)
• 위안을 주며(요한복음 14:16 참조)
• 평안을 주며(앨마서 58:11)
•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6:14 참조)”(“주님의 평안”,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32쪽)
갈라디아서 6:7~9.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수확의 법칙이 육체적인 것은 물론 영적인 것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수가 없다고 가르쳤다.(갈라디아서 6:7~9 참조) 그는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면 축복을 거두게 될 것이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훈계했다.(갈라디아서 6:9) 마찬가지로 죄악을 선택하면 그 결과로 우리는 영적인 파멸을 맞게 된다.(모사이야서 7:30~31; 교리와 성약 6:3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엘 톰 페리 장로는 수확의 법칙에 따라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축복들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님은 우리가 의로울 때 축복을 해야만 하도록 자신의 율법을 만드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7~9 인용됨]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가 되어 영생을 거두는 자가 되기를 … 기원합니다.”(“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성도의 벗, 1976년 8월호, 63쪽)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가 사탄의 속임을 피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중점을 두면서, 바울이 언급한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공의를 반영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우리가 마약이나 외설물이나 사도 [바울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라 부른 다른 악들을 탐닉한다면, 영원한 율법에 따라 우리는 영생보다는 썩는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자비가 공의를 도둑질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율법이 깨진다면, 그 율법에 부속된 형벌도 무너지게 됩니다. 이 중 일부는 구주의 속죄로 충족될 수 있지만, 더럽혀진 죄인을 자비롭게 씻어 낼 수 있는 정화는 회개를 통해서만 옵니다.(앨마서 42:22~25 참조) 일부 죄의 경우, 회개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속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