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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7장
누가복음 15~17장 소개 및 연대
누가복음 15~17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구주의 성역 막바지에 그분께서 갈릴리에서 베레아 지방 등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누가는 잘 알려진 비유들인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탕자를 포함하여 구주의 몇몇 비유를 기록했다.(누가복음 15장 참조)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 그들이 그분께로 돌아올 때 맛보는 기쁨, 그리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 준다. 구주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누가복음 16:1~12 참조) 우리가 심판의 날을 끊임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독선과 탐심을 비난하셨으며(누가복음 16:19~31 참조),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태도는 다음 생에서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무익한 종의 비유와(누가복음 17:7~10 참조) 구주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에서(누가복음 17:11~19 참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과 우리가 그분에게 은혜를 입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다.
누가복음 15~17장 주해
누가복음 15~17장. 베레아 성역
누가복음 15~17장에 기록된 구주의 가르침 중 적어도 일부는 요단 강 동쪽에 있는 베레아 지방에서 전해졌으며, 그 기간은 몇 주일에 불과하지만 이 가르침은 이른바 베레아 성역의 한 부분을 이룬다.
이 성역에 대해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유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가졌던 적개심이 너무도 컸으므로,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다. 그가 희생될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예수께서 스스로 허용하시지 않으면 적들이 그를 죽일 수 없으나, 그들의 방해가 심하면 주님의 사업이 지체되게 된다. 주님은 침례 요한이 공적 성역을 시작하였던 곳으로 돌아가셨는데, 이곳은 아마 주님이 침례를 받으셨던 곳인 듯하다. 정확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곳은 분명히 요단강 건너편이었으므로 베레아 지방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곳까지도 그를 찾아와 믿는 사람이 많았다.”(예수 그리스도, 491쪽)
누가복음 15장. 세 가지 비유의 소개
누가는 구주의 매우 유명한 비유 중 세 가지,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탕자(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기록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된 주제는 잃어버린 것에 관한 것이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의 경우,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샅샅이 뒤졌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이 일에 관계된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했다.
잃어버린 것.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에서, 양과 동전과 탕자는 각각 서로 다른 이유로 잃어버려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에 관하여,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어떻게 그 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그 양은 반항적이지 않았습니다. 비교해 보면, 그 양은 지극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살아갈 방도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했거나, 아니면 더 좋은 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들판으로 무심결에 이끌려간 탓에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교회에는 지극히 타당한 이유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방황하는 …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업적인 성공이나 그들의 전문 분야에서 성공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교회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고 마침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에 관하여,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동전을 잃어버린 것은 그 동전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 동전을 맡은 사람이 부주의나 태만으로 그 동전을 잘못 두었거나 떨어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것은 그저 동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들, 즉 어린이와 청소년과 성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탕자에 대해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가 작용했으며, 의도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권위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상속받은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낭비했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45, 120–21, 123)
잃어버린 것을 샅샅이 찾음. 양을 잃어버린 목자와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둘 다 소중한 소유물을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녔다.(누가복음 15:4, 8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도 역시 복음의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알렉산더 비 모리슨 장로는 이 책임에 관하여 이렇게 적었다. “목자로서의 지도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큰길과 덤불 속으로 들어가 신앙과 간증의 불꽃이 희미하게 식은 채로 길을 헤매는 회원들을 찾아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잃어버린 회원을 찾을 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강력한 비유에서, 구주께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하신 그 기쁨을 그들도 누리게 된다.”[3~7절 참조]”(Feed My Sheep: Leadership Ideas for Latter-day Shepherds [1992], 28)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수고의 열매를 맺는 데 수년이 걸렸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한 충실한 가정 복음 교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딕 해머는 경제 공황 당시에 시민 보호단의 일원으로 유타에 왔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어느 젊은 후기 성도 여성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가 카페를 개업하자, 그곳은 인기 있는 회합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해머 가족의 가정 복음 교사는 윌러드 밀른 형제였습니다. 전 딕 해머와 친분도 있었고 그의 카페 메뉴를 인쇄해 준 적도 있었던 연고로, 세인트조지 시에 방문할 때마다 제 친구인 밀른 형제에게 ‘우리 친구 딕 해머는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가?’ 하고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그 응답은 대개가 ‘그럭저럭’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고, 재작년쯤에 윌러드 형제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몬슨 형제님, 딕 해머가 개종하여 곧 침례를 받는답니다. 90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오랜 시절을 우린 친구로 지냈지요. 그가 내린 결정에 내 마음이 흐뭇합니다. 여러 해 동안 가정 복음 교사로 있었지요. 아마 15년은 되었을 겁니다.’
해머 형제님은 실제로 침례를 받았고, 그로부터 1년 후에 아름다운 세인트조지 성전에서 엔다우먼트와 인봉 의식을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저는 윌러드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정 복음 교육을 하시면서 낙담한 적은 없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정말 기쁩니다.’”(“가정 복음 교육—하나의 성역”,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47쪽)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함. 기쁨은 이 비유들의 주된 메시지이다.(누가복음 15:6, 9, 23~24, 32 참조)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적었다. “[세 가지 비유에서] 잃어 버린 영혼이 스스로 멀리 떠난 양에 비유되었든, 주인의 부주의로 잃어버린 은전에 비유되었든, 혹은 집과 천국같은 삶에서 스스로 떠난 아들에 비유되었든, 그 영혼을 되찾은 기쁨은 마찬가지이다. 죄에 항거한 의로운 영혼보다 회개한 죄인이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죄는 무조건 나쁜 것이지만, 죄인은 회개하여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는 그래도 귀중하다.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손실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는데, 한 사람이라도 멸망시키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 464~46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 세 가지 비유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길을 잃더라도 그분의 속죄와 가르침을 통해 누구나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리아호나, 2012 년 5월호, 100쪽)
누가복음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셨다며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누가복음 15:1~2 참조; 유대인들은 특히 세리를 혐오했다.) 이 비유들은 자신을 영적인 지도자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그들 중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 복음서에는 구주께서 잃어버렸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시어 타인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를 보이신 예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마가복음 5:1~8; 누가복음 5:29~32; 19:1~10; 요한복음 9:35~38 참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 비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백 마리의 양은 백 명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경멸하는 몇몇 사람들, 혹은 가난한 세리 한 명”을 찾기 위해 양 우리 밖으로 나가셨을 것이다. 그분이 회개하고 구주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그들은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History of the Church, 5:262) 이 해석에 따라,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도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도록 꾸짖으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교리와 성약 133:16; 또한로마서 3:23; 요한1서 1:8; 교리와 성약 18:9, 42 참조)
누가복음 15:3~7. 잃어버린 양의 비유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사람들이 주님과 교회 활동에서 벗어나는 이유에 대해 가르치면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를 이렇게 적용했다.
“일부는 다르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그들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르기 때문에, 무리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보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이 이 교회에 맞지 않는다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에서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연민을 보이기만 해도,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문제와 슬픔들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일부는 지쳤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너무 벅차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매일 직면하는 모든 스트레스와 시간에 대한 압박과 요구가 있기에, 지치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낙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너무 약해서 기여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무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점차적으로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뒤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관심”,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18~19쪽)
브루스 시 하펜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을 때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비슷하게 적용한 바가 있다. 그는 우리가 모두 삶의 어느 시기에 잃어버린 양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단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이 잃어버린 양은 아닙니다. … 자녀 출산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 생활하면서 고독과 유혹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 역시 잃어버린 양입니다. 꼭 필요한 직장을 막 잃은 사람, 재정적 위기에 봉착한 사업가, 외국 문화를 접한 신출내기 선교사, 갓 감독으로 부름받은 사람, 서로 오해하고 있는 기혼자 부부, 또는 자식이 찾아오지 않는 노인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저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여러분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6; 강조체 추가)
길을 잃은 느낌은 우리가 곧고 좁은 길에서 벗어났을 때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바라시는 곳에 있음에도 그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The Broken Heart: Applying the Atonement to Life’s Experiences [1989], 60)
누가복음 15:8~10.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동전을 잃어버린 것은 소유자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여인은 누군가를 영적으로 돌보고 보살피는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을 상징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교회 회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적절히 돌보지 못해서 한 교회 회원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구주의 비유를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특히 교회의 새로운 회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주님의 사업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으로 끊임없이 양육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작은 것들이며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상당히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가장 큰 비극은 교회에 가입했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 이 교회에 가입하면서 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전의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를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하게 아끼던 신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관의 변화와 취향을 억제하는 것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고독과 심지어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개종자의 생애에 이런 어려운 시간이 닥치면 그들을 키워 주고 강화해 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선교 사업”, 성도의 벗, 1988년 3월호, 5쪽)
다른 모임에서,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개종자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실질적으로 잘 도와서 자신의 길을 찾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개종자 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곧 친구와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모로나이서 6:4)으로 양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기회입니다.”(“개종자와 청남”,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47쪽)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우리 모두를 구속하시고자 크나큰 값을 치러야 하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에서 활동적인 회원이 되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양육하고 가르치지 못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코 헛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까?”, 리아호나, 1999년 1월호, 8쪽)
누가복음 15:11~32.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비유는 특정한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탕자라는 단어는 낭비벽이 심하고 돈을 무모하게 함부로 쓰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는 두 명의 아들이 나온다. 하나는 낭비벽이 심하고(누가복음 15:11~24 참조), 다른 하나는 성마른 아들이어서(누가복음 15:25~32 참조) 둘 다 그들의 아버지와 화해할 필요가 있었다.
누가복음 15:12~13.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구주 시대의 관습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야만 유산을 받았다. 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을 것이다.(누가복음 15:12~13 참조) 이 아들의 요구는 자신의 아버지, 가정, 양육, 심지어 지역 사회 전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누가복음 15:13. “먼 나라”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준 후 얼마 안 되어, 낭비벽이 심한 아들은 자신의 재물을 모두 다 들고 떠났다. 그는 부모의 보호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뿐 아니라 자신의 미성숙함도 드러내었다. “먼 나라”라는 말은 아마도 이방인의 나라를 의미하며, 둘째 아들의 반항이 극단적이었음을 보여 준다.(누가복음 15:13)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이런 상세한 사항을 우리 각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탕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악한 분위기의 록 공연이라는 ‘먼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먼 나라’에 대한 거리는 킬로미터로 측정되는 것이기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뜻이 예수님에게서 얼만큼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측정되는 것입니다! (모사이야서 5:13 참조) 지역적 위치가 아니라 충실함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4쪽)
누가복음 15:14~17. 탕자가 돼지를 치는 일을 시작하다
모세 율법에서 돼지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레위기 11:7) 그러므로, 탕자가 모욕적인 돼지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며, 그것은 또 다른 치욕의 표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마침내 “스스로 돌이[켰다.]”(누가복음 15:17) 이 말은 그가 자신의 범법 때문에 비참한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음을 시사한다.(모사이야서 2:40 참조) 닐 에이 맥스웰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어쩔 수 없어 겸손하게 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 겸손하게 되는 것이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앨마서 32:13~14 참조) 기근이 영적인 배고픔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세상의 유혹”,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4쪽)
누가복음 15:20~24.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이 비유가 전해졌던 당시에 탕자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돌아오자마자 대중의 경멸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구주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이례적인 반응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그 아버지가 자주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아들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와서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누가복음 15:20) 아버지는 용서와 화해의 행위로, 즉 아들을 공개적으로 끌어안고 입을 맞춘 후, 집으로 데려왔다.
“제일 좋은 옷”과 반지, 신발(종들은 맨발이었다)을 주고, 잔치를 위한 살진 송아지를 잡은(누가복음 15:22~23 참조) 이 모든 행위는 아들의 수치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종이나 죄인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탕자의 아버지가 보인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아들을 염려하던 충실한 아버지가 아들을 맞으러 달려나가 수없이 입을 맞추는 애틋한 장면은 거룩한 경전에 있는 모든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애정어린 장면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보호의 팔 속으로 돌아오시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또 다른 탕자”,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69쪽)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제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가 길에서 벗어나거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막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사랑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무척 바라시며, 우리가 아직도 “거리가 먼” 곳에 있어도 우리에게로 달려오실 것이다.(누가복음 15:20). 그분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에,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더 나은 본모습을 알아보실 수 있으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이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는 또한 우리가 죄로부터 돌이키고 구주께로 돌아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 속죄를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달려오시며, 우리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시고, 우리 혼자서 회개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현대에 삶을 “방탕한 생활”로 낭비하고 나서 다시 교회의 활동 회원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길을 찾은 한 청년에 대한 예를 보려면, 누가복음 7:36~50 주해에 나오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엘 앤더슨 장로의 이야기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5:25~32.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은 충실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멀어져 있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측은히 여기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잔치에 참석하길 거절함으로써 그도 역시 둘째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아버지에게 수치와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아버지는 그 시대의 문화적 사고방식에 따라 첫째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보다는 잔치에서 빠져나와 그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충실한 아들과 덜 충실한 아들 모두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질투의 자기 파괴적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아들은 다른 사람이 집에 왔을 때에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으나 부모님께서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한 것에는 화를 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서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자기 연민을 느끼며, 이 충실한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충실한 이 아들은 잠시 동안 불결함이나 절망, 두려움이나 자기 혐오를 자신이 결코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잊었습니다. 그는 목장에 있는 모든 송아지가 이미 자신의 것이며, 옷장에 있는 모든 옷과 서랍에 있는 모든 가락지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잠시 동안 잊었습니다. 자신의 충실함으로 늘 보상을 받아 왔으며 앞으로도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그는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열심히 일을 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그것을 얻었던 그는 자신이 근접해 있던, 주님의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그는 아직 동정심과 자비, 그리고 동생의 귀향이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는 넓은 시야와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그의 동생이었습니다. …
분명 이 동생은 죄수, 곧 죄와 어리석음, 그리고 불결한 생활 속에 사로잡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도 어느 정도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보이지 않는 감옥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질투의 괴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한다는 느낌과 동생에 의해 권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지도 않은 모욕의 희생물로 빠져 들었습니다. … 이제까지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좋은 운명에 만족을 느꼈던 사람이 단지 또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좋은 운명을 지녔다는 것 때문에 갑자기 매우 큰 불행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또 다른 탕자”, 70쪽)
누가복음 16:1~12.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처음 읽으면, 이 비유에서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묵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공부해 보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신중하게 자신의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착수해야 함을 가르친다. 조만간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청지기는 현명하게 몇몇 친구들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려고 했다.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청지기의 부정직함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신중함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칭찬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쳤지만 빚진 자들을 구제해 주었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그의 법적인 권한을 초과하여 행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도덕적으로는 잘못과 부정이 있을지 모르나 여전히 청지기였기 때문이다. 그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부지런하라. 세상적인 재물을 사용할 시간은 곧 지나가 버릴 것이다. 부정직하고 악한 자들에게서도 배울 교훈이 있다. 그들이 가까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토록 신중하다면 영원한 미래를 믿는 여러분은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얼마나 더 신중하여야 하겠는가! 여러분이 ‘불의한 재물’을 사용하는 지혜와 신중함을 배우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속하는 재물을 맡겠는가?” (예수 그리스도, 467~468쪽)
누가복음 16:13~18.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한 배경
누가복음 16장 13~18절은 구주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가르치시게 된 배경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세속적인 부나 이익을 의미하는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교리를 가르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 가르침에 화를 내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였기에, 그분을 “비웃”었다. 그러자 구주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 의도를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6:13~15 참조) 조셉 스미스 역에는 누가복음 16장 16~18절에 대해 부연 설명이 있으며,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셨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그분은 부자를 바리새인들에 비유하셨고,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옳은 길을 왜곡할 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를 가졌거늘 이 사람에 대하여는 우리가 그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스스로 우리를 다스리는 재판관이 됨이니라.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율법과 선지자들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 그러하도다, 또한 심지어 요한 때까지 기록한 모든 선지자들이 이 날에 대해 예언하였느니라.
그때 이래로 하나님의 왕국이 전파되어 진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느니라.
또 무릇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쉬우리라.
또 어찌하여 너희는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기록된 것을 부인하며, 아버지께서 너희 모두가 구속받게 하고자 율법을 이루기 위해 보내신 자를 정죄하느냐?
오 어리석은 자들아! 이는 너희가 너희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또 너희는 바른 길을 굽게 하며 천국이 너희 폭력으로 고난받게 하는도다. 또 너희는 온유한 자를 핍박하며 너희의 폭력으로 왕국을 멸하려 하며, 왕국의 자녀들을 힘으로 빼앗으려 하는도다. 화 있도다 너희 간음하는 자들이여! 하시더라.
또다시 그들이 그를 모욕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간음한 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 화 났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이르시기를, 무릇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자기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부자에 비유하리라 하시더라.”(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16:16~23[경전 안내서])
이 비유에서, 구주께서는 부자가 악인이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가 받았던 모든 축복으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나눠 주지 않았다고만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나사로가 낙원에 갔는데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말을 듣고서 놀랐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구주께서는 우리가 받은 현세적 및 영적 축복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영의 세계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사후 영의 세계에 있는 두 가지 상태, 즉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를 언급한다.(누가복음 16:22~23 참조) 전자는 충실한 사람들(조상 아브라함이 대표적임)이 있는 안락한 장소로 묘사되어 있고, 후자는 고통스러운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품은 잔치나 연회 중에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편안하게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요한복음 13:23 참조) 또한 품이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요한복음 1:18 참조) 낙원에서 나사로는 모든 이스라엘인의 존경을 받는 조상인 아브라함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었다.”(Jay A. Parry and Donald W. Parry, Understanding the Parables of Jesus Christ [2006], 156; 또한 요한복음 13:23 주해 참조) 충실한 사람들이 거하는 처소와 “음부”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누가복음 16:26), 둘 사이의 왕래를 막았다.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나타내며, “음부”는 영옥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부활 사이에 영의 세계를 방문하시기 전에는 이 두 장소 사이에 경계선이 존재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하시기 전에는 낙원의 영들이 영옥에 있는 영들을 방문할 수 없었다. 그분이 영의 세계에서 베푸신 성역으로 낙원과 영옥 사이의 구렁텅이에 다리가 놓이게 되어, 영옥에 있는 영들이 낙원에서 파송한, 권한을 받은 성역자들로부터 복음 메시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교리와 성약 138:18~37; 요한복음 5:25~29; 베드로전서 3:18~21; 4:6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구주께서 영옥에 있는 영들을 방문하심으로써 죽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설명했다. “우리 주님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기 때문에(이사야 61:1) 복음이 영의 세계 곳곳에 전파되었으며, 회개하고자 하는 자는 회개할 수 있게 되었고, 대리 의식이 지상의 성전에서 집행되며, 이생에서 복음을 알 기회가 있었더라면 온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을 영들에게도 구원의 희망이 있게 된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522)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영들이 영옥에서 풀려나려면 먼저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을 위한 구원 의식이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영의 구원이란 영옥에서 복음이 가르쳐지고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산 자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행한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에프 스미스, [1998], 414쪽)
구주께서 영의 세계에서 하신 성역에 관하여 더 많은 통찰을 얻으려면, 요한복음 5:25, 28 주해 및 베드로전서 3:18~20; 4:6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6:24~25. 공의의 율법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신성한 공의의 원리를 가르쳐 준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지상에서 생활했을 때 했던 결정들 때문에 죽음 이후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고 있었다. 나사로는 죽은 후에 축복과 위로를 받았다. 이것은 이생에서 겪는 모든 불공평함이 다음 생에서 의인들에게는 보상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준다.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친구이다. 이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상 생활의 불공평함은 다음 생에서 바로잡아진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누가복음 16:25)
누가복음 16:31.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나사로에 관한 비유는 유일하게 구주께서 등장인물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신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음부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어, 회개하라고 그들을 설득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했다.(누가복음 16:31) 그러한 설득을 하려면 사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이 요구된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면, 죽음에서 실제로 살아나신 구주의 말씀도 듣지 아니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무릇 나의 종을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라고 선언하셨다.(교리와 성약 84:36) “내 자신의 음성으로 한 것이나 나의 종들의 음성으로 한 것이나 같으니라.”(교리와 성약 1:38)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후 얼마 안 되어 구주의 가까운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는데, 구주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다.(요한복음 11장 참조)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라도 사악한 사람에게 회개하도록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자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요한복음 12:10~11 참조) 불과 몇 달 후에는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뒤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고, 그럼에도 유대인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누가복음 17:1~4. 범법과 용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시면서, 사람은 틀림없이 죄를 짓게 하는 것들을 접하게 된다고 상기시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죄를 짓도록 다른 사람을 꾀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실족하게 하는 “작은 자”에는 신앙이 아직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포함된다. 구주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누가복음 17:1~2 참조) 또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더라도 매번 회개한다면, 그들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다.(누가복음 17:3~4 참조) 모든 사람은 용서를 해야 한다.(교리와 성약 64:8~10 참조) 이 중요한 가르침은 무익한 종의 비유가 전해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누가복음 17:5~10. 무익한 종의 비유
예수님이 타인을 용서할 필요성에 대해 가르치시자, 사도들은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청하였다.(누가복음 17:5) 이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비유를 가르치셨다.(누가복음 17:7~10 참조) 이 비유의 요점은 바로, 종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이기에 어떤 특별한 보상을 기대하거나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음식과 잠자리, 의복을 주었으니 결국 종들은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종이 자신의 의무를 아무리 잘 수행했을지라도 여전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해 주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 빚을 졌으며, 결코 그분께 완전히 갚거나 우리의 빚을 그분께 지울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강화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구주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는 우리가 그분께 빚을 졌으며, 그분께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포함된다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진 것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모사이야서 2장 22~24, 34절에 기록된 베냐민 왕의 가르침을 참조한다.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존 케이 카먹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직면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라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저 계명을 지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할지 모르나 신앙을 키우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계속해서 희생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그렇게 합니다.”(“Lord, Increase Our Faith,” Mar. 2002, 56)
누가복음 17:6.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갖는 것에 대한 설명을 보려면, 마태복음 17:20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7:11~19. 나병환자 열 명과 감사
이 이야기에서 나병환자 열 명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으나]” “구원”은 오직 되돌아온 사마리아인만이 받을 수 있었다.(누가복음 17:14, 19) 감리 감독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메릴 제이 베이트먼 감독은 이렇게 가르쳤다. “온전한 사람이 된 그 겸손한 나병환자는 외모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치유를 받았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도 외모는 치유되었으나, 오직 한 사람만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내부로부터 치유할 수 있는 권능”, 리아호나, 1995년 7월호, 14쪽)
교회 연차 대회에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깨끗하게 된 열 명의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감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전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받은 축복에 잊지 않고 감사를 드립니까? 진심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받은 축복을 인식할 뿐아니라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감사라는 성스러운 선물”,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87쪽)
누가복음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신약전서의 여러 번역본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문구가(누가복음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것은 너희[you]라는 대명사가 그리스어에서는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이 문구가 “하나님의 왕국이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음이니라.”로 변경되어 있다.(조셉 스미스 역, 누가복음 17:21[경전 안내서]) 이 문구에 대한 번역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 즉 그분의 교회를 당시에 지상에 세우셨고, 우리 시대에도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진리를 나타낸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하나님의 왕국”을 이렇게 정의했다. “어떤 사람은 오순절 전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지지 않았으며, [침례] 요한은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아담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이 지상에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지상에 의인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계시하시고 그분의 이름으로 집행할 수 있는 권능과 권세를 주셨[으며,] … [그런] 곳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년], 82쪽)
누가복음 17:20~37. 예수께서 재림에 대해 가르치시다
재림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조셉 스미스—마태 1:23; 마태복음 24:6 주해를 참조한다.
누가복음 17:29~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에 관하여 가르치시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라고 권고하셨다.(누가복음 17:32)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7장 31절 끝에 나오는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 가르침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론 우리는 [롯의 처에 대한] 그 경전상의 이야기가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점을 압니다. 남성과 여성이 벌이는 최악의 상황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주님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그 도시들이 멸망할 것이니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은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라고 이르셨습니다. ‘돌아보[지] …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세기; 강조체 추가)
… 롯의 가족이 그곳을 떠난 다음날 아침에 동이 틀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경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을] …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세기 19:24~25) …
분명 주님이 주신 ‘돌아보지 말[라]’라는 권고가 롯의 아내의 귓가에 울렸겠지만 경전에 나온 대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소금기둥으로 변했습니다. …
… 롯의 아내가 한 일 중 무엇이 그렇게 나빴던 것일까요? … 롯의 아내가 그저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는 점이 명백한 잘못입니다. 이미 그 도시를 벗어나기 전부터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누리던 것을 그리워한 것 같습니다.
롯의 아내는 주님께서 떠나라고 명하셔서 남기고 가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고는 원망하며 뒤를 돌아보았을지도 모릅니다. … 롯의 아내는 단순히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간절히 바라며 돌아보았습니다. 즉, 과거에 안주하려던 간절함이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 더 컸습니다. … 적어도 그녀는 그러한 부분에서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 과거에서 배우되, 그곳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 배워야 할 바를 배우고 경험을 토대로 최고의 것을 얻었다면 이제는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항상 미래를 향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 삶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축복과 진리, 사건과 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롯의 아내에 대해 표현한다면 그녀는 신앙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분명히 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이 남겨 두고 온 것만큼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Remember Lot’s Wife”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Jan. 13, 2009], 2–3; speeches.by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