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태복음 19~23장
마태복음 19~23장 소개 및 연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성역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 유대로 떠나 예루살렘에서 며칠을 보낸 후, 마침내 성역은 완성될 것이었다. 지상의 삶이 겨우 몇 주 남은 상황에서 구주께서는 결혼의 신성함과 성약을 지키는 사람들이 받게 될 보상인 영생,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 등 왕국의 교리를 가르치셨다. 구주께서는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셨지만,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면하시고,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의 은밀한 음모를 공공연하게 밝히셨으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다.
마가복음 19~23장 주해
마태복음 19:1~12.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또한 마가복음 10:2~21 참조)
구주께서 지상 성역을 베푸시던 시기에 이혼은 유대인 율법사들 사이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 성가신 쟁점이었다. 사소한 이유로도 이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당화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런 논쟁에 끌어들이고자 그분께 이혼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구주께서는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결혼에 담긴 화합과 영속성의 이상을 보여 준 아담과 이브를 이야기하셨다.(마태복음 19:4~6; 또한 창세기 2:24 참조)
마태복음 19장 7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신명기 24장 1절을 언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성구를 아내가 탐탁지 않을 때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모세가 왜 이혼을 허락했느냐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9:8; 기울임체 추가) 후기 성도 경전에서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행복의 계획에서 결혼이 영원하도록 계획되었음을 확언한다.(교리와 성약 132:15~20 참조; 전도서 3:14; 모세서 4:18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혼의 심각성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쳤다.
“현대의 선지자들은 결혼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 한 번의 어려움으로 파기할 수 있는 단순한 계약으로 [보는 것은] 혹독한 정죄를 받는 악’이라고 경고해 왔습니다. 그러한 경우 특히 자녀들이 고통을 당합니다.[David O. McKay, in Conference Report, Apr. 1969, 8–9]
고대에는,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 우리 회원들이 살고 있는 몇몇 국가의 부족 법률에 따르면, 남자들은 사소한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여성에 대한 그러한 부당한 학대를 금하셨습니다.[마태복음 19:8~9]”(“이혼”,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70쪽)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혼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혼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연되어 있고 도처에서 늘어나는 이 악습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며, 의와 화평과 진리의 대적이 하는 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하나님이 짝지어 주심”, 성도의 벗, 1991년 7월호, 73쪽)
마태복음 19:9.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은 간음인가? (또한 마가복음 10:11; 누가복음 16:18 참조)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 시대에는 이혼한 사람이 새로 결혼하는 것에 대해 간음이라고 여기지 않고 재혼할 수 있으나, 해의 왕국에서는 이혼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승영에 필요한 결혼, 즉 영원히 지속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속성을 갖는 결혼은 이혼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전에서 부부들은 영원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일부 결혼은 그러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완악함’[마태복음 19:8]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현재 해의 왕국의 표준에 맞는 결과들을 강요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혼한 사람들이 더 높은 해의 왕국의 법에서 규정하는 부도덕의 오점이 없다면, 다시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이혼”, 70쪽)
마태복음 19:12.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구주께서는 독신 생활이나 자해를 승인하신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남녀 간의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것이며 가족은 창조주께서 그의 자녀들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의 중심[이다.] …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신 계명이 여전히 유효[하다.]”(“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129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고대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독신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된 고자란 이교도의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로, 고의로 자신을 거세하는 것이 자신의 구원을 앞당긴다는 배도적인 관념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참된 복음의 요건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의로 거세하는 것은 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러한 관념은 출산과 해의 왕국의 결혼에 관한 모든 참된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549)
마태복음 19:13~15. 어린아이들
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19장 13~14절에는 이렇게 나온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그에게 데리고 오더라.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어 이르길, 그럴 필요가 없나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어린아이들은 구원 받으리라 하셨다 하더라.
그러나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9:16~22. 그리스도와 부유한 젊은 관원(또한 마가복음 10:17~22; 누가복음 18:18~23 참조)
한 부유한 청년이 예수께로 와서 영생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쭈었다.(마태복음 19:16~22 참조) 구주께서는 세상적인 소유물을 포기하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으나 청년에게 재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생을 상속받는 데 필요한 희생을 하는 대신 근심하며 떠나갔다. 이는 물질적인 소유가, 필멸의 삶에서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불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청년이 이 결정을 끝까지 고수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완전히 거절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부유한 청년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언급하며 구주의 용감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용감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귀중한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악을 피해야 함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의로운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참된 기쁨, 즉 사람이 존재함은 결국 ‘기쁨을 갖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니파이후서 2:25)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해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대개 태만 죄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던 그 의로운 부자 청년을 떠올려 보십시오. …
그러자 그 청년에게 딱 맞는 계명이 주어졌습니다.[마태복음 19:21~22 참조] 그가 온전해지는 데 방해가 된 것은 뭔가 중단해야 했던 일이 아니라 행해야 할 무엇이었습니다.”(“The Pathway of Discipleship” [Brigham Young University fireside, Jan. 4, 1998], 4; speeches.byu.edu)
마태복음 19: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낙타가 들어가려면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려 놓아야 하는,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이 바로 바늘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문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성구의 그리스어 원문에서 글자 하나만 변경하면 바늘귀에 들어가야 할 것이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늘귀에 들어가는 낙타를 언급하셨을 때, 그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마태복음 19:23)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과장법이었을 것이다. 조셉 스미스 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나니, 그러한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10:26)
브리검 영(1801~1877) 회장은 재물을 축적하는 사람들이 처하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이 백성과 관련하여 느끼는 최악의 두려움은 그들이 이 지역에서 부를 얻어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잊어버리고, 기름지게 되어 스스로 이 교회에서 박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 이 백성은 폭도와 약탈과 빈곤, 온갖 박해에 맞서며 충실하게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이 부에는 맞서지 못한다는 점입니다.”(James S. Brown, Life of a Pioneer [1971], 122–23)
마태복음 19:27~29.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저버리는 것
기꺼이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지 않았던 부자 청년과는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자신과 동료 사도들이 구주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었다고 말했다.(마태복음 19:27) 우리 시대에 우리 또한 구주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기꺼이 희생해야만 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집을 등지고 대평원을 횡단하라는 요구를 받은 후기 성도들의 큰 희생을 언급하며 그들의 영적인 힘은 복음 성약을 지키는 데서 나왔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종종 초기 성도들이 견뎌 낸 고통과 희생을 전해 들으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 초기의 후기 성도들은 하나님과 성약을 맺었고, 그러한 성약은 그들의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타올랐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성약에 따라 살기보다는 편의에 따라 살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복음의 표준에 따라 생활하고 진리를 옹호하며 회복을 증거하는 것이 항상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늘 편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교회의 부름에 응하는 것도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약을 맺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뜻깊은 방법으로 봉사하는 기회는 편한 때에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난 편안한 생활만 하는 것에는 아무런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은 우리가 성약을 지키는 데서 나옵니다.”(“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성도의 벗, 1999년 7월호, 102쪽)
마태복음 20:1~16. 품꾼들의 비유
예수님 시대에는 땅 주인이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중심지로 가서 임시 품꾼을 고용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이 비유에서 집 주인은 새벽 6시경에 장터에 가서 (당시에 하루치 품삯이었던) 한 데나리온에 일할 품꾼들을 고용했다. 주인은 아침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제십일시)에도 장터에 갔다. 그는 거기에서 일을 하고 싶지만 아직 고용되지 못한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상당하게 주리라”라고(마태복음 20:4, 7) 약속하며 그들을 고용했다.
일을 가장 적게 한 사람들에게 품삯을 먼저 지불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마태복음 20:8 참조) 그러나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9장 30절에서 가르치신 다음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십일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인생 후반에 개종하여 왕국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 비유가 보여 주는 한 가지 진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시점이 어렸을 때이든, 젊었을 때이든, 인생 후반기이든, 또는 영의 세계이든(교리와 성약 137:7~8 참조) 영생은 주님과 성스러운 성약을 맺고 지키는 모든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리라는 점이다.(교리와 성약 76:95; 84:38; 88:107 참조)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 품꾼들 비유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 품꾼이나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모든 비유가 양과 염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선하심, 오래 참으심과 용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관대함과 동정,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제가 수년 전에 들은 어떤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심을 가장 좋아하시는 순간은 자비를 베풀 때, 그것도 자비를 기대하지 않거나 종종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하실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 하지만,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더라도, 너무 많은 기회를 이미 놓쳐 버렸다고 생각되더라도,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거나 가진 재능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혹은 가정과 가족과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생각할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음을 간증드립니다. 여러분이 무한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빛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 현세와 영원을 두고 여러분이 성취하지 못할 소망과 꿈이란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제십일 시가 다 되도록 마지막까지 남겨진 품꾼과 같이 느껴질지라도, 포도원의 주인인 주님께서는 손짓하며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 그분의 관심사는 여러분이 마지막에 지니게 될 신앙이지, 그 신앙을 하루 중 언제, 몇 시경에 얻었느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약을 맺었다면, 지키십시오. 아직 성약을 맺지 않았다면, 성약을 맺으십시오. 성약을 맺었으나 이를 어겼다면, 회개하고 다시 회복하십시오. 포도원의 주인이 끝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늦은 것이 아닙니다.”(“포도원의 품꾼”, 리아호나, 2012년, 32~33쪽)
마태복음 20:22~23. 구주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구주의 잔을 마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0:38~39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0: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속물”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0:45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0:29~34.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시다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신 내용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10:46~52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1:1~11.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또한 마가복음 11:1~10; 누가복음 19:29~44; 요한복음 12:12~19 참조)
구주께서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스가랴 9장 9~10절에 기록된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면서, 동시에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표한 행위였다. 고대에 나귀는 유대인의 왕위를 상징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군주제 시대에 유대인들은 사울 왕의 즉위 이후로 해마다 즉위식을 새로 거행했는데, 이때 왕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나귀에 탄 사람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서 출발하여 감람 산과 기드론 계곡을 지나 성전으로 왔다. 이런 의식은 메시야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오실 때를 고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유대인으로 넘쳐나던 그 시점에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 즉 이스라엘의 왕임을 나타내 보이는 방식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나귀를 타신 것은 또한 군마를 탄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평화적이고 “겸손”한 구주로 오신 것임을 보여 주었다.(스가랴 9:9~10 참조)
재림 때에 예수님은 큰 권능과 영광 중에 지상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그분의 영광에 대한 상징으로서 요한계시록에는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탔던 나귀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지상으로 오신다고 기술되어 있다.(요한계시록 19:11~16 참조)
마태복음 21:8. 군중이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또한 마가복음 11:8; 누가복음 19:36 참조)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군중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그분 앞에 펼쳐 놓았는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그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와 같은 특별한 존경의 표시는 오직 왕과 정복자들만이 받는 것이었다. (열왕기하 9:13 참조) … 찬양 소리와 함께 구원과 해방을 간청하는 외침 속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가시는 길에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펼쳤다. 이 극적인 전체 장면은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요한계시록 7:9~10)라고 외치는 미래의 집회를 예시하는 것이었다.”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578)
마태복음 21:9~11. “호산나”(또한 마가복음 11:9~10; 누가복음 19:38; 요한복음 12:13 참조)
호산나는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의미하며 찬양과 기원에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이다.] … 예루살렘으로의 주의 승리의 입성 때에도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고 예수가 타고 가도록 종려나무 가지를 펴 놓아서 예수가 고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던 동일한 주임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시 118:25~26; 마 21:9, 15; 막 11:9~10; 요 12:13).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오래 기다리던 메시야로 인식하였다.”(경전 안내서, “호산나”; scriptures.lds.org) “온 성이 소동하”였다는 말은(마태복음 21:10) 예수님께서 승리의 입성을 하는 소리가 온 성 안에 떠들썩하게 들렸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마태복음 21:17~2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열매가 열렸다는 표시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겉모습으로 잘못 판단하게 하는 그 무화과나무는 위선을 상징했으며, 그것의 최후는 스스로 의롭다고 공언하면서도 구주의 죽음을 모의했던 이들의 최후를 상징했는지 모른다.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이 “말씀으로 쳐서 죽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진리를 알려 준다고 말했다. 이 진리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며칠 후 기꺼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스스로” 자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 527쪽)
마태복음 21:12~16, 23~27.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마태복음 21:15~16 참조) 성전의 제사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환전 일을 감독했으며, 그것에서 이윤을 얻었다. 예수님이 상을 둘러 엎으시며 성전을 “나의 집”이라고(마태복음 21:13) 부르신 것은 그들이 어떤 권위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신 것이었다. 이후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분에게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마태복음 21:23)라며 극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제사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서기관들은 그들이 받은 교육에, 장로들은 그들의 사회적 입지와 부에 의거하여 권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구주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으셨으며, 그 사실은 그분이 공적인 성역 기간 내내 보이신 가르침과 성역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마태복음 7:29; 마가복음 1:27; 요한복음 3:2 참조) 구주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도전에 응하여 그들을 침묵시킬 다른 질문을 던지셨다.(마태복음 21:25 참조) 그렇게 생생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구주께서는 당신에게 도전하는 자들과 또한 당신의 말을 경청하는 무리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유대인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당신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가르치셨다.(마태복음 21:28~44; 22:1~14 참조)
마태복음 21:28~32. 두 아들의 비유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비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두 아들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자녀에게 지상의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거절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한 맏아들은, 전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대업에서 충실한 종이 된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한다. …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을 기꺼이 수락했으나 맡은 일을 하지 않은 둘째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포도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상징한다.[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과 반대로 번역되어 있음–옮긴이] …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예수님은] … 회개가 실제로 작용하는 생생하고 지속적인 원리임을 분명하고 힘 있게 가르치신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디모데전서 1:15)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단 말인가? 그렇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589–90)
마태복음 21:33~46. 악한 농부의 비유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하나님을,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종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도록 보내진 선지자들을 나타낸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이전의 여러 세기 동안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거절했음을 가르치셨다.(열왕기상 19:10; 역대기하 36:15~16 참조) “후에” 와서 “포도원 밖에” 내쫓겨 죽임을 당한 “상속자”는(마태복음 21:37~39)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비유의 이 부분은 사흘 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성취되었다.(히브리서 13:12 참조)
그런 후 주님은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마태복음 21:42) 된다는 예언을 언급하심으로써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당신이 메시야이며, 당신을 거절함으로써 끔찍한 결과가 뒤따르리라는 것을 알리셨다.
마태복음 22:2~10.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왕의 초대는 명령과도 같아서 그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왕과 그의 권세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 구주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가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있음을 가르치셨다. 손님들이 보이는 태도는 그들이 왕을 거절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대놓고 초대를 거절하고(마태복음 22:3 참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이 왕의 초대에 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으며(5절 참조), 왕의 종들을 거절했다.(6절 참조)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못함을 나타낸다. (이와 유사한 큰 잔치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14:12~24 주해를 참조한다.)
마태복음 22:11~14.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고대에 왕과 같이 부유한 사람은 초대한 손님이 혼인 잔치와 같은 행사에 입고 오도록 적절한 의복을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 사람은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제공한 예복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차림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그 잔치에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도록 초대를 받더라도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마태복음 22:9 참조) 갖추어야 할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 예복은 종종 주님의 면전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자질인 의로움과 순결함을 상징한다.(이사야 61:10; 요한계시록 19:8; 니파이후서 9:14; 교리와 성약 109:76 참조) 오늘날 성전에서 입는 의복은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서 성약과 의로움과 순결함으로 옷 입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 아들의 속죄의 의복을 받아들이고 착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큰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요한계시록 19:8~9 참조)
마태복음 22:15~2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예수님에게 올무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고 기록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마태복음 10:17)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이 질문에 담긴 딜레마를 설명하고 구주의 대답에서 배울 수 있는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또한 창세기 1:26~27; 요한계시록 3:12; 앨마서 5:14 참조)
“만일 예수님이 ‘그러하니라, 세금을 바치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역적으로 불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주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시켜 모반이 일어났게 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는 것은 타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을 반역죄로 로마 당국에 넘겼을 것입니다.
주님의 적들은 그분이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곤경에 처하게 하려 했습니다. …
[구주의] 대답에 담긴 지혜는 이중 주권의 한계를 나타내며, 하늘과 땅이라는 두 제국의 관할권을 정의합니다. 동전에 찍힌 군주의 모습은 현세적인 것은 현세의 주권자에게 속함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모습은 그 사람의 모든 능력과 힘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이를 그분의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8, 64–65)
마태복음 22:23~30 부활 때의 결혼
구주께서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하신 말씀을 영원한 결혼이 없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구주께서 부활 후에 결혼 관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 후에는 결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지적했다. “결혼 관계에 관한 모든 문제는 부활 이전에 … 이미 결정되기 때문에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게 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 549쪽)
구주의 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그분이 그 말씀을 “부활이 없다 하는”(마태복음 22:23) 사두개인들에게 하셨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주께 던진 질문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부활 때의 결혼에 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라는(마태복음 22:30; 강조체 추가[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에는 they라는 단어가 있음—옮긴이]) 말은 바로 그 당사자들, 즉 사두개인을 말한 것이었다.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라고(마태복음 22:25; 기울임체 추가) 말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결혼 관계는 현세 너머로는 지속되지 못한다.(교리와 성약 132:15~17 참조) 이 후기에 주님은 결혼 관계가 그분의 율법에 따라 맺어지고, 권세가 있는 사람을 통해 행해지며, 약속의 성령으로 인봉될 경우에만 영원할 수 있다고 계시해 주셨다.(교리와 성약 132:19 참조)
구주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열쇠는, 사두개인들이 언급한 모세의 말은(마태복음 22:24 참조) “수혼”을 가리킨 것이었다는 점이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남자가 자녀를 두지 않은 상태에서 죽을 경우, 그의 형제가 죽은 남자의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를 부양하고, 죽은 형제를 위해 자녀를 키우도록 되어 있었다.(신명기 25:5; Bible Dictionary, “Levirate marriage” 참조)
성경에는 영원한 결혼의 교리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남편과 아내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이고(베드로전서 3:7),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전도서 3:14),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다는(고린도전서 11:11) 점은 언급되어 있다.
마태복음 22:35~40. 두 가지 큰 계명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회장은 첫 번째 큰 계명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 계명과 두 번째 큰 계명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모든 정신과 기력을 쏟아야 합니다. 미온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존재 자체를, 즉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으로 온전히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니신 사랑의 폭과 깊이, 높이는 우리 인생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적인 것이든 현세적인 것이든 우리의 소망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랑의 중심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왜 이 첫 번째 계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을까요?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의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고자 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삶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애굽의 요셉은 하나님과 자신의 일, 또는 보디발의 아내 중 어느 것을 가장 우선에 두었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려 했을 때 요셉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세기 39:9) … 요셉은 선택 앞에서 주인의 아내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더 열망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상사나 교사, 이웃, 데이트 상대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고자 열망합니까? …
만약 성전 밖에서 여러분과 결혼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필멸의 인간입니까? … 여러분은 성전에 들어가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전 밖에서 여러분과 결혼하고자 하는 그 누구도 여러분에게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면, 성전에서 결혼할 수 있도록 자격 조건을 갖출 것입니다.
우리는 첫째 계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 이웃을 가장 많이 축복하게 됩니다.”(“큰 계명—주님을 사랑함”, 성도의 벗, 1988년 7월호, 4~6쪽; 또한 마가복음 12:28~34 참조)
마태복음 22:41~46.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태복음 22장 41~46절에서 예수님은 영감 어린 다윗의 시편을 언급하셨는데(시편 110:1 참조), 이 시편에서 다윗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 예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칭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이스라엘 국가를 해방시켜 줄 지상의 왕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영의 감화를 받은 다윗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일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후손을 주님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구주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단순한 다윗의 자손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의 경전을 근거로 가르치셨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의 중요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여러분이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고, 여러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를 크게 좌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신성한 속성을 연구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외 없이 자신의 내부에서 우리를 향상하고 정화하는 영향력을 느낄 것입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51, 93)
마태복음 23:1~5.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기에 앞서, 그들이 인간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진리를 가르치며 그 진리는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들이라고 인정하셨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다. 그들은 교만과 사리사욕에 따라 움직였다.(마태복음 23:1~5 참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경문”을 착용하는 방식은 그들의 교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13장 9절과 신명기 6장 8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구함, 즉 경문을 착용하는 관습을 따랐다. 그들은 작은 가죽 상자를 이마와 팔에 끈으로 묶었다. 경문 안에는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구약전서에 나오는 몇몇 성구 전체 또는 일부가 기록되어 있었다. 출애굽기 13:2~10, 11~16; 신명기 6:4~9; 11:13~21. 대부분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에만 경문을 착용했으나 종종 온종일 달고 다니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경문 띠를 넓게” 하거나 더 큰 상자를 착용하여 남들이 그들의 신앙심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마태복음 23:5) 구주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주의를 끌려고 “긴 옷”을 입는 서기관들의 모범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누가복음 20:46)
마태복음 23:5~6, 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구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칭송을 들으려 노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지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께 봉사하라는, 이와 비슷한 권고를 전했다. “지위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높은 자리’나 ‘윗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에 관해 구주께서 주신 권고를 기억하십니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6, 11)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의로움에, 지위가 아니라 봉사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매달 자신의 임무를 조용히 수행하는 성실한 가정 방문 교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에서 더 중요한 직책이라 생각되는 직책의 사람들만큼 주님의 사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가치는 다를 수 있습니다.”(“교회의 여성들에게”, 성도의 벗, 1993년 1월호, 96쪽)
마태복음 23:13~33. 위선자들에게 포고된 화
외식하는 자[hypocrite]라는 단어는 “배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으로, 가장하거나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속이기 위해 모순된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님께서는 겉으로는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과장하고 있으나 마음은 오만하고 진지하지 않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다. 구주께서는 위선적인 행위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닥칠 여덟 가지 “화”를 연달아 포고하셨다. 화라는 단어는 큰 역경이나 불운에서 기인한 비참하고, 번민하며, 슬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음 도표에는 주님께서 위선이라고 밝히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몇 가지 행동이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위선으로 밝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 | |
---|---|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그분이 제의하신 구원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으려 했다. | |
그들은 탐욕스럽고 물질주의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불운을 이용했다. | |
그들은 사람들을 거짓 믿음으로 끌어들였다. | |
그들은 맹세를 통해 성전이 영광을 돌리는 주님보다 성전의 금과 비품을 더 숭배했다. | |
그들은 규칙은 지켰으나 그런 규칙의 바탕이 되는 더 중요한 교리와 원리는 무시했다. | |
그들은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의로움의 기저에 내적인 탐욕과 방종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청결하고 훌륭했으나 내면은 부패로 가득하고 영적으로 퇴락했다. | |
그들은 죽은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충성을 주장하면서 살아 있는 선지자들은 거부했다. |
마태복음 23:23~28. 율법의 더 중한 바는 내적 요건에 초점을 둔다
구주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더 중한 바”를 생략한 것에 대해 나무라시면서 그들을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맹인 된 인도자”라고(마태복음 23:23~24)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부정한 동물을 잘못 삼키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시는 물을 조심스럽게 걸러 내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의 관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한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를 상징적인 의미에서 삼키었다.(레위기 11:4 참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구주의 가르침이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의 “더 중한 바”인 내적 요건에 초점을 두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심판과 자비와 신앙이 ‘율법의 더 중한 바’[마태복음 23:23]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구주의 약속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그리스도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주님이 오심으로써 더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빛과 생명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더 높고 더 어려운 표준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요건보다 내적인 요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간단하며 더 어렵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 속옷을 원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용서하되 한 번이 아니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하라. 이것이 새로운 복음의 정수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보다 하라는 것을 좀 더 강조했습니다. 더 많은 도덕적 의지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마태복음 7:12; 22:37~39; 누가복음 6:29; 마태복음 5:40; 18:21~22 참조]”(“율법의 더 중한 바: 심판과 자비와 신앙”, 성도의 벗, 1997년 11월호, 53쪽)
칠십인의 린 지 로빈스 장로는 사람이 하는 행위와 더 중한 바인 그 사람의 됨됨이 사이의 불일치도 위선에 포함된다고 가르쳤다.
“구주께서는 종종 의롭지 않으면서 행동으로만 의로운 척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 부르며 비난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가복음 7:6) 본성은 좋지 않은데 겉으로만 좋게 행동하는 것은 위선이며, 그러한 사람인 척하는 것뿐입니다. …
구주께서는 위선을 행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그들이 행한 것)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이 되었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구주께서는 행동의 중요성을 인정하셨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한 바’로 여기셨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다음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 침례의 물에 들어가는 것은 행동입니다. 그 전에 도달해야 할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마음에 일어나는 큰 변화입니다.
• 성찬을 취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성찬을 취하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중한 것입니다.
• 신권 성임은 행위, 즉 행동입니다. 그러나 더 중한 바는 신권 권능이며, 이것은 ‘의의 원칙’(교리와 성약 121:36), 즉 [개인의] 상태에 기초합니다.”(“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리아호나, 2011년 5월호, 103~104쪽)
마태복음 23:25~28. “회칠한 무덤 같으니”
신약 시대에 무덤의 내부에는 시체가 썩어 가고 있었지만 바깥쪽은 흰색으로 마감 처리하여 깨끗하게 보이도록 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아무리 바깥쪽에 윤을 내더라도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구주께서는 그런 모습과 더불어 바깥쪽은 깨끗하나 안쪽은 그렇지 않은 잔을 비유로 드시며, 위선자들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분명한 불일치를 설명하셨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이 가르침을 음란물을 보는 이들에게 적용했다.
“몰래 외설물을 보는 사람들에게 구주의 가장 중대한 가르침 중의 하나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태복음 23:25~26; 또한 앨마서 60:23 참조) …
그러한 위선의 즉각적이고 영적인 결과는 파괴적입니다.”(“외설물”,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88쪽)
마태복음 23:34.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 보내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을] … 보내매”라고(마태복음 23:34)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였으며, 모든 시대에 영감에 찬 신권 지도자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분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보내졌으나 그 노력의 결과로 박해와 죽임을 당하게 될 선지자들을 말씀하셨고, 거기에는 주님 자신과 사도들도 포함되었다.
마태복음 23:37~39.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슬퍼하시다
구주께서는 성역을 마감할 날을 앞두고서 예루살렘에 대해 슬퍼하셨다.(마태복음 23:37~39; 누가복음 13:34~35 참조) 조셉 스미스 역에는 구주의 슬픔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도입부가 나온다. “바로 이 시각에 그는 예루살렘을 두고 우시기 시작했다.”(Joseph Smith Translation, Luke 13:34)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두고 우셨을까?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부패의 성이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했다.]’ (요한계시록 11:8)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저주받았고 곧 일시적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었다. (누가복음 19:41~44 참조)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선지자들의 고향이며, 주님께서 성역을 베푸신 성이었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보다 간악한 편인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성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민족이 땅 위에 달리 없[었기]’ (니파이후서 10:3)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미래에 세상의 수도이자 중심지가 될 것이며, 그곳으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온 백성에게로 나아갈 것이다. (이사야 2:3)
참으로 예루살렘의 역사는 그 어떤 장소에도 비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거주민의 반역 때문에 우셨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