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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장
요한복음 20~21장 소개 및 연대
요한복음 20장과 21장에는 구주께서 부활 후에 행하신 성역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 일과 구주께서 그날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그 후에 열 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했다. 구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라고 말했다.(요한복음 20:25) 여드레가 지난 후, 도마는 실제로 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가르치셨다.(요한복음 20:29) 또한, 요한은 구주께서 디베랴(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명하신 일을 기록했다.(요한복음 21:15~17) 요한은 이처럼 구주께서 나타나신 일들을 기록하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
요한복음 20~21장 주해
요한복음 20:1~10. 텅 빈 무덤에서
무덤 속을 들여다본 베드로와 요한은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요한복음 20:6~7) 즉, 수의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던 위치에 그분의 시신을 둘러쌌던 모양 그대로 속이 빈 채 놓여 있었으며, 시신을 둘러쌌던 세마포 수의 위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이 원래 놓였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두 사람은 함께 세마포 수의가 시신을 둘러쌌던 모양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는데, 부활체는 그 수의를 거쳐서 빠져 나갔다. 그러자, 요한에게 … 처음으로 깨달음이 왔다. 사실이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그들은 안다.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고린도전서 15:54)”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842)
수의가 놓인 위치에 대한 이런 세부적인 묘사는 도굴범 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주장을 막기 위해 음모를 꾸민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신을 가져갔을 가능성을 불식시킨다.(마태복음 28:9~15; 요한복음 20:2, 13 참조)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는 데 관여한 사람이라면 수의를 벗겨 한 곳에 쌓아두었거나, 수의가 입혀진 채로 시신을 가져갔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 속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까지도, 메시야가 죽음에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날 것을 알리는 경전상의 증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계시의 힘을 통해,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 20:11~18.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또한 마가복음 16:9 참조)
막달라 마리아, 즉 막달라의 마리아는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에 있는 막달라로 불리는 동네 출신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9절과 누가복음 8장 2절에 따르면, 구주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으며 “여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제임스 이 탈매지, 예수 그리스도, 268쪽) 그녀는 사복음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매장, 빈 무덤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으로 언급된다.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구주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일은 그분이 여성을 존중하신다는 점을 나타낸다며 이렇게 가르쳤다. “어떤 여성도 구주께서 여성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가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슬퍼하며 무덤을 맨 처음 찾은 사람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으며, 바로 그녀가 무덤이 돌이 치워져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알려 주었습니다. 그 두 사도는 와서 보고 돌아갔으나, 마리아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십자가 근처에 있었으며,[마태복음 27:56; 마가복음 15:40; 요한복음 19:25 참조] 무덤 앞에 그대로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61; 마가복음 15:47 참조] 비어 있는 무덤 옆에서 울며 서 있었습니다.[요한복음 20:11 참조]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본 사람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58쪽)
요한복음 20:16. “랍오니”
마리아가 부활하신 구주를 부르기 위해 사용한 아람어 랍오니[Rabboni]는 신약전서에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 20장 16절에서 흠정역 번역자들은 아람어와, 요한이 독자들을 위해 넣은 번역어 “선생님[Master]”을 그대로 유지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서, 그 단어는 “선생님[Lord]”으로 번역되어 있다. 랍비라는 칭호는 1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교사들을 부르는 데 사용되었다. 랍비라는 칭호의 좀 더 고상한 형태인 랍오니는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주로 거룩한 지식과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매우 존경받는 교사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칭호였다.
요한복음 20:17~18. “나를 붙들지 말라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마리아가 살아나신 구주를 알아보자, 그분이 그녀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나를 붙들지 말라(Touch me not)”였다.(요한복음 20:17)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와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흠정역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나를 만지지 말라[Touch me not]’로 인용한다.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Hold me not]’라고 나온다. 그리스어를 번역한 여러 번역본에서는, 그 구절이 ‘나를 붙잡지 말라[Do not cling to me]’ 또는 ‘나를 붙들지 말라[Do not hold me]’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더는 나를 붙잡지 말라’, 즉 ‘더는 나를 붙들지 말라’라는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었다고 추정하며, 그런 점에서 이 말은 그분을 더이상 붙들지 말라, 혹은 그만 붙잡으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전하신 말씀의 취지가 ‘여기서 너는 나를 붙들 수 없느니라. 내가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생각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대한 메시지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관계이다.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인 엘로힘은 온 인류의 영의 아버지이시며, 특별히 덧붙이자면, 주 예수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예수님의 영의 아버지이시자 육신의 아버지이시다.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인 엘로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물론 예수님의 경우, 그분 자신이 하나의 하나님이요 모든 권능을 지니고 계시고 신회의 한 구성원이긴 하시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영원히 종속되어 있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4:264–65)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일은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는 필멸의 제자들과 불멸의 그리스도 간에 정중한 방식의 분리가 있을 것을 분명히 해 준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일은 또한 그분이 죽으신 후 곧장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신 것은 아니었음을 밝혀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은 영의 세계로 가서 육신과 다시 결합될 때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몰몬경의 선지자 앨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 모든 사람의 영은 이 죽어야 하는 육신을 떠남과 동시에, 참으로 모든 사람의 영은 그들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로 데려감을 입느니라.”(앨마서 40:11) “하나님께로 데려감”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곧바로 하나님의 면전으로 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분의 지시와 지배를 받는 영의 세계로 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20:19~23. 부활하신 구주께서 제자들과 만나셨다
구주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어느 시간에, 십이사도 중 열 명이 모여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아 두었다.(요한복음 20:19) 예수께서 홀연히 그 방에 나타나심으로써, 부활한 존재는 물질적 장애물에 제한을 받지 않음을 보여 주셨다.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부활한 몸은 원소들을 지배합니다. 부활 때 몸이 어떻게 무덤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로나이 천사가 선지자 조셉에게 나타났을 때, 선지자는 천사가 분명히 단단한 벽이나 건물의 천장을 통해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 구주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문을 닫고 모여 있는 방에 쉽게 나타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모로나이 천사가 건물을 통해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어떻게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원소를 지배하는 권능을 갖고 계셨습니다.”(구원의 교리, 브루스 알 맥콩키 편, 제2권, 254~255쪽)
요한복음 20:22. “[성신]을 받으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영이라는 단어에는 “숨”과 “바람”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요한복음 3:8 비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쉰]’ 것은 아마도 그분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성신]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맥콩키 장로는 사도들의 그 경험을 인용하며 성신의 은사를 받는 것과 실제로 그 은사를 누리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성신의 은사를 받았으나 그 순간에 그 은사를 실제로 누린 것은 아니었다. … 성신의 은사는 충실함에 입각하여, 신회의 구성원인 성신을 지속적으로 동반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은사는 침례를 받은 후에 안수례로 부여된다. 이 은사는 관련된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경우 일정한 축복들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 제공된 은사를 누리거나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 사도들의 경우에는 오순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은사를 실제로 누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1:857)
요한복음 20:23. 죄를 사하고 유지하는 권세
전에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천국 열쇠”는 그들이 땅과 하늘에서 매거나 풀 수 있는 권능을 갖게 해 주었다.(마태복음 16:19; 18:18) 구주께서는 그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사도들에게 죄를 사하거나 유지하는 권세에 관하여 가르치셨다.(요한복음 20:23 참조) 사도가 지닌 이런 권능은 언제나 참된 교회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신권의 열쇠와 권능을 부여하였음이니, … 그리고 누구의 죄든지 네가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 영원히 용서될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네가 땅에서 그대로 두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있으리라.”(교리와 성약 132:45~46)
요한복음 20:24~29.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를 포함하여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도마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증거를 먼저 얻기 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못마땅해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이야기하고, 그분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도마가 사실상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으며 미래를 향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주일이 지나, 사도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에 있는 그 동일한 집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 가운세 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6~27)
그 기록에는 도마가 이 권유, 즉 주님의 애정 어린 꾸지람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도마는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상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했던 대답은 오직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뿐이었습니다.[요한복음 20:28] 이제 도마는 믿었으나, 가장 높은 형태의 신앙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29]
이 일은 전무후무한, 위대한 교훈 중의 하나입니다. 도마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Conference Report, Oct. 1962, 22–23)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요한복음 20장 25절을 인용한 후, 도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현대에 비유했다. “도마와 같이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바로 우리 눈과 귀와 손 앞에서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마치 사랑이나 신앙, 또는 심지어 전기와 같은 물리적 현상을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외적으로 증명되고 설명되는 것 이외의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는 모든 세대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그런 후 힝클리 회장은 요한복음 20장 26~29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는 주님의 상처난 손을 만지는 도마에게 주어졌던 말씀, 즉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현세와 영원을 통하여 가장 위대하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 성도의 벗, 1978년 10월호, 91~92쪽)
전통적으로 도마가 “의심하는 도마”로 언급되지만, 다른 경전 구절에는 구주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이 잘 드러난다.(요한복음 11:16 참조) 초기에 기록된 수많은 기독교 저술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마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인도에서 널리 복음을 전파했다고 나온다. 구전에 따르면 도마는 주후 72년경에 인도에서 순교했다.
요한복음 20:27.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생긴 상처를 그대로 유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십자가 위에서 생긴 상처를 그대로 유지하셨는가에 대한 몇 가지 이유가 경전에 제시되어 있다. 그분은 자신이 글자 그대로 육체적으로 부활했음을 입증하며(요한복음 20:19~20, 24~28 참조), 자신이 바로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메시야임을 증명하고(제3니파이 11:11~17 참조),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고(스가랴 12:9~10; 교리와 성약 45:51~52 참조), 자신에게는 구원하고 축복할 권능이 있음을 충실한 이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셨다.(교리와 성약 6:34~37 참조) 더 나아가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생긴 상처를 그대로 유지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부활의 권능은 십자가 위에서 생긴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고 새롭게 할 수 있었으며, 또 언젠가는 확실히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상처들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셨다. 거기에는 그분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셔서 그 자국들을 보이시고 자신이 ‘친구의 집에서’ 상처를 입었음을 드러내시는 것도 포함된다.[스가랴 13:6; 교리와 성약 45:52]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생긴 상처들은 필멸의 삶에서는 순결하고 완전한 사람에게까지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남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아님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우리를 구조하러 오시는 분이 바로 그 상처입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고 희망적이다. 희생의 상처 자국, 사랑의 외상, 겸손과 용서의 상징을 지니신 그분은 우리 영혼의 대장이시다. 필멸의 육신으로 겪으신 그 고통의 흔적은 살면서 상처 입고 다친 이들에게, 어쩌면 자기 친구들의 집에서 그리된 이들에게도 용기를 주시려 함이 확실하다.”(Christ and the New Covenant [1997], 258–59)
요한복음 20:28.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예수님께 했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말은(요한복음 20:28) 요한복음의 한 가지 주제를 반영한다. 즉, 예수께서는 단지 선한 사람, 거룩한 사람, 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다른 모든 왕들 위에 계십니다. 전능하신 분인 주님은 모든 통치자 위에 계십니다. …
영광의 왕이요, 흠 없는 메시야이시며, 임마누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온 인류 위에 계십니다. …
그분은 우리의 왕이요, 주님이시며, 스승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이 영광스러운 부활절 아침”, 성도의 벗, 1996년 7월호, 67쪽)
요한복음 20:29~31. 타인의 증언을 믿음
요한복음과 그 밖의 경전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차례 나타나신 기록들이 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그런 기록 중 몇 가지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어느 누가 그 이야기의 참됨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상 어떤 사건도 이보다 분명하게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만지고, 그분과 대화한 모든 사람들의 간증이 있습니다. 주님은 두 반구의 두 대륙에 나타나셔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두 권의 거룩한 책, 두 권의 전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라고 신앙심 없는 비평가는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답합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넘어서 이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이 참되고 정당하다는 간증이요 증거이며, 이 간증은 성신의 권능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이 실재하신다는 확신 때문에 수 세기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안락과 재산과 목숨까지도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륜의 시대의 선지자도 놀라운 시현으로 자신이 본 것과 전능하신 아버지와 부활하신 아들의 말을 들었다는 강력한 간증을 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그 시현은 … 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이 영광스러운 부활절 아침”, 성도의 벗, 1996년 7월호, 67쪽)
다음 도표에는 신약전서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받은 사람들이 실려 있다. 요한이 설명했듯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다.]”(요한복음 20:31)
신약전서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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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성구 |
방문을 받은 사람 |
날짜 또는 시간 |
장소 |
일어난 일 |
막달라 마리아 |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 |
무덤에서 |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했다. | |
그 밖의 여성들 |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 |
무덤과 예루살렘 사이의 어느 지점 |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그분을 경배했다. | |
시몬 베드로 |
부활하신 날 |
알려져 있지 않음 |
알려져 있지 않음 | |
두 제자 |
부활하신 날 오후 |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
예수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음식을 먹었다. | |
사도들 및 그들과 함께 있었던 그 외 사람들 |
부활하신 날 저녁 |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장소의 문 닫힌 방 |
예수님과 함께 식사했으며, 사도들은 그분의 손과 발을 만져 보았다. | |
열한 명의 사도 |
부활하시고 여드레가 지난 날 |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장소의 문 닫힌 방 |
예수께서 도마에게 상처를 보여 주셨다. | |
일곱 명의 사도 |
부활하신 이후 어느 때 |
디베랴 바닷가(갈릴리 바다) |
예수께서 그들을 먹이셨으며,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다. | |
열한 명의 사도 |
부활하신 이후 어느 때 |
갈릴리에 있는 어느 산에서 |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셨다. | |
열한 명의 사도 |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
베다니 근처 |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치신 후, 승천하셨다. | |
500명 이상의 남성 |
알려져 있지 않음 |
알려져 있지 않음 |
예수님을 보았다. | |
야고보 |
알려져 있지 않음 |
알려져 있지 않음 |
예수님을 보았다. | |
열한 명의 사도 |
부활하신 이후 어느 때 |
예루살렘에서 |
예수께서 사도들을 가르치셨다. | |
스데반 |
스데반이 순교할 때 |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또는 근처 |
그가 돌에 맞아 죽기 직전이었다. | |
바울(당시에는 사울로 불림) |
아마도 예수님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2년 후 |
다메섹으로 가는 길 |
바울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 |
바울 |
그가 개종하고 난 후 어느 때 |
예루살렘 성전에서 |
예수님을 시현으로 보았으며, 이방인들에게 선교 사업을 행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 |
계시자 요한 |
주후 1세기이며, 정확한 때는 알려지지 않음 |
밧모 섬 |
시현으로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며,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얹으셨다. |
요한복음 20:31.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 믿게 하려 함이요”
요한은 자신이 기록을 하는 한 가지 목적은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기록했다.(요한복음 20:31)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한 이 내용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결국 모든 경전의 기본 목적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심을 믿는 신앙, 우리의 불멸과 영생을 위한 아버지의 계획을 믿는 신앙, 행복의 계획에 생명을 불어넣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을 믿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게 하는 신앙,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신앙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경전의 축복”,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34쪽)
요한복음 21:1~22. 구주께서 갈릴리에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향후에 갈릴리에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태복음 28:10; 마가복음 16:7 참조) 요한은 구주께서 예루살렘에서 열한 명의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이후 어느 시점에, 베드로와 그 외 여섯 명의 사도가 갈릴리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 가서(요한은 디베랴 호수라고 칭했음) 물고기를 잡기로 했는데, 그 일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사도로 부르시기 전에 늘 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들이 해안에 가까이 이르자, 한 남자가 그들에게 그물을 어디로 던져야 하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사람이 구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한복음 21:5. 구주께서 제자들을 “얘들”이라고 부르셨다
구주께서는 사도들을 “얘들”이라고 부르셨다.(요한복음 21:5) “얘들[children]”에 대한 그리스어는 paidia이며, “유아” 또는 “매우 어린 아이들”을 의미한다.(또한 요한복음 4:49; 16:21 참조) 구주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사도들이 몇 년간 구주와 함께 지냈음에도 여전히 신앙 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1832년에 주님께서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그 외 회복된 교회의 초기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린아이들이라. 아버지께서 자기 손에 가지고 계시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아직은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고, 지금은 너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도다. 그러할지라도, 담대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음이라.”(교리와 성약 78:17~18)
요한복음 21:7. 시몬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동안 정말로 “벗고 있[었는가?]”
흠정역에서 “벗고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항상 “나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가볍게 입은 상태” 또는 “겉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 주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급히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요한복음 21:7) 이 상세한 묘사는 베드로가 구주와 함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드러낸다.
요한복음 21:15.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마태복음 22:36~38)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언급하며 충실하게 구주를 사랑하도록 격려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반갑게 재회한 베드로는 주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이 대화가 전반적인 사도의 성역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분명히 베드로 개인에게도, 위대한 반석이라 불린 그가 헌신적인 봉사와 지도력을 발휘하여 장엄한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작고 낡은 배, 너덜너덜해진 그물, 그리고 깜짝 놀랄 만한 153마리의 물고기 더미를 보시며 선임 사도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모두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5]
그 대답을 들으신 구주께서는 베드로의 눈을 계속 응시하시며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분명히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에 조금 당황스러웠을 이 위대한 어부는 두 번째로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6]
구주께서는 이에 대한 짧은 응답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응시하시며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베드로는 분명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에는 불과 며칠 전에 받았던 세 차례의 다른 질문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단호하게, 하지만 부정적인 답변을 했었습니다. 또는 아마도 자신이 선생님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쉽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그 대답에 대해 정말로 솔직하게 확신하고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탐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베드로는 세 번째로 대답합니다. ‘주님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7]
그 말에 주님은(여기서 다시, 경전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제가 고심한 것을 덧붙이자면) 아마도 이렇게 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왜 우리가 이 똑같은 해변에서, 같은 그물을 곁에 두고, 똑같은 대화를 하고 있느냐?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물고기를 원한다면 내가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으냐? 베드로야, 내가 필요한 것은 제자들이며, 나는 그들이 영원토록 필요하니라. 나는 내 양을 먹이고 구원할 사람이 필요하니라.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신앙을 수호할 사람이 필요하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 진실로,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 자,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도록 맡기신 그 일을 사랑하는 자가 필요하니라.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심판의 날에 우리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날 어느 시점에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는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 필멸의 삶을 살면서 아주 미숙하고 때로는 사물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이해력 속에서도 최소한 모든 계명 중의 한 가지 계명, 곧 첫째 되는 가장 큰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누가복음 10:27; 마태복음 22:37~38] 이해했는지를 알고 싶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순간에 우리가 더듬거리며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분께서는 사랑의 궁극적인 특성이란 바로 변함없는 충실함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우리 주위에는 축복해야 할 이웃과 보호해야 할 자녀, 구제해야 할 궁핍한 사람들과 수호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잡아야 할 잘못, 나눠야 할 진리, 행해야 할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일에서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념할 수 없으며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마주한 후에는 그 어떤 것도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크고 첫째 되는 계명”, 리아호나, 2012년 11월호, 84~85쪽)
요한복음 21:15~17. “내 어린 양을 먹이라”와 “내 양을 먹이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그리스어 원문을 이해하면 구주께서 베드로와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어떻게 더 깊이 알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먹이다’, 즉 feed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bosko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기르다 또는 가축에게 풀을 뜯기다’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어린 양’, 즉 lamb이라는 단어는 arnion의 작은 말로서, ‘작은 어린 양’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
[요한복음 21장 16절]에서 치다[feed]라는 말은 poimaino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양을 치다, 보살피다, 혹은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경우 양[sheep]이란 어휘는 arnion, 즉 ‘성숙한 양’을 의미합니다. …
[요한복음 21장 17절]에서 먹이다[feed]는 다시 그리스어 bosko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양분 공급을 뜻합니다. ‘양’이란 단어 sheep은 역시 그리스어 probaton에서 유래되었고, ‘어른 양’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성구는 영어로는 매우 유사하게 보이지만 그리스어로 볼 때, 사실상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작은 어린 양은 자라기 위해 영양분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 양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 양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목자, 양, 그리고 가정 복음 교사”, 리아호나, 1999년 4월호, 44~4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마빈 제이 애쉬튼(1915~1994) 장로는 주님께서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하신 계명을 우리가 어떻게 이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6) 그들이 있는 곳을 모르면 그들을 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거부하도록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들을 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양식이 없으면 그들을 먹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들을 기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기꺼이 일하고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들을 기를 수 없습니다. …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어떤 연령 계층에든지 다 있습니다. 주님의 양 가운데는 어리고, 외롭고, 길 잃은 양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치고, 고난받고, 나이 들어 쇠약해져 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우리 가족 안에 또는 우리 이웃에도 있으며, 또 금식 헌금으로 도와줄 수 있는 먼 나라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관심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 우리를 거부하도록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들을 돌보기가 설령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어렵게 됩니다. 빈정거림이나 조롱으로는 아무도 가르치거나 도울 수 없습니다. 독재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독선적인 태도는 방황하는 양들을 먹이려는 온갖 노력을 수포로 돌릴 것입니다. 저항의 벽이 세워지면, 아무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랑의 표현은 공허한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양들은 목자의 관심 어린 손길이 필요합니다.”(“품위있게 받아들이도록 지혜롭게 줍시다”, 성도의 벗, 1982년 4월호, 136~137쪽)
요한복음 21:18~19. 베드로는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일반적으로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를 박해하던 시기인 주후 64년 또는 65년경에 로마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Bible Dictionary, “Peter” 참조) 베드로는 주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기에는 자신이 합당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고 전해진다. 베드로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는가에 관계없이, 베드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구주의 예언은 확실히 성취되었다.(요한복음 21:19) 삶과 죽음 모두에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다음 권유에 대한, 제자 됨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또한 마가복음 8:34~38 주해 참조)
요한복음 21:20~22. “네게 무슨 상관이냐”
구주로부터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들은 베드로가(요한복음 21:18~19 참조) 요한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여쭈었다.(요한복음 21:2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이 질문을 인용하면서, 우리 삶의 환경을 주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주신 환경과 비교하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주시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이 장차 맡을 일에 대해 물어보자,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22) 형제 자매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너무 많이 비교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선택하신 것을 원망하며, 자기가 무시당한 것이라 여겨 영성을 잃게 됩니다.”(“내게 대답하라”, 성도의 벗, 1989년 1월호, 35쪽)
요한복음 21:22~23. “내가 올 때까지 … 머물게”
구주께서는 지상 성역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2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그 예언을 성취하여 자신이 다시 올 때까지 지상에 “머물게” 될 사람이라고 예언하셨다.(요한복음 21:22~23 참조) 구주와 베드로, 요한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의 전체 내용은 교리와 성약 7편에 실려 있다. 이 7편은 “요한이 양피지에 기록하고 직접 감춘 기록의 번역문”이다.(교리와 성약 7편, 머리말) 이 계시는 요한이 구주께 “죽음을 이길 힘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살아서 영혼들을 당신에게 데려올 수 있게 하시옵소서”라고 간청했으며, 그에 응하여 구주께서 자신이 재림할 때까지 요한이 살아 있도록 힘을 부여해 주셨음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교리와 성약 7:1~3 참조) 그렇게 해서 요한은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존재는 “불멸의 부활 때까지 고통이나 사망을 경험하지 않도록 변화된 사람”이다.(경전 안내서, “변화된 존재”; scriptures.lds.org) 변화된 존재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제3니파이 28장 4~40절을 참조한다. 여기에서는 세 명의 니파이인 제자들이 요한과 같은 동일한 변화를 겪었음을 알려 준다.(제3니파이 28:6 참조)
요한복음 21:24~25.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장 24절에 나오는 대명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원본 작성에 도움을 주었거나 이후에 이 복음서에 자신들의 간증을 덧붙였음을 암시한다. 전문 필기사들이 온갖 고대 문서의 저작 및 보존에 도움을 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저자와 필기사에 따라 다양했다. 원저자가 구술하면 필기사가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경우도 있었다. 저자가 작품을 다듬고 펴내도록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필기사가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요점을 적은 후, 자신의 말로 글을 쓴 뒤에 화자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기도 했다. 요한복음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필기사들이 어느 단계에서 도움을 주었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애초에 기록한 분명한 간증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