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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6장
히브리서 1~6장 소개 및 연대
히브리서 1장 2~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의 상속자”시라는 말이 나온다. 그분은 “모든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런 서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계속되는 주제,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라는 주요 주제로 이어진다. 바울은 구주께서는 탁월한 분이시기 때문에, 천사나 모세를 포함한 선지자들의 말씀보다도 구주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히브리인 성도들에게 가르쳤다.(히브리서 1:4; 2:1~3; 3:3 참조) 구주의 탁월함에는 “시험 받는 자들을 … 도우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도 포함된다.(히브리서 2:18)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셨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완전한 공감력을 얻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에서 탁월한 위치에 계심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첫 세대가 출애굽 때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 백성들은 불신과 죄로 말미암아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히브리서 3~4장 참조)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기는 주후 68년 이전일 것이다.
히브리서 1~6장 주해
히브리서 1:1~4.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이 서한의 독자층인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예전의 유대 방식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상속자”이시며, 여러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시다는 간증을 듣는 것이 중요했다.(히브리서 1:1~4 참조)
히브리서 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여러 세계를 지으셨다
많은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3, 10 주해를 참조한다.(또한 골로새서 1:16; 히브리서 1:2; 모세서 1:27~33 참조)
히브리서 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형상”이란(히브리서 1:3) 말은 그리스어 charaktēr에서 나왔는데, 이는 반지에 새겨진 도장을 부드러운 밀랍에 눌렀을 때 찍히는 날인처럼 무언가를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나오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낸다는 것과, 하나님의 신성한 품성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교리와 성약에는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나온다.(교리와 성약 107:43)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고대와 현대의 인류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증인이 되신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세월이 서서히 지나감에 따라, 그토록 완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잘못된 세대의 인간이 만든 신조에 따라, 점점 더 잘 알려지지 않고 잘 알 수도 없는 분으로, 즉 형태도 없고 냉정하며, 파악하기 어려우며 만질 수도 없는, 어디서나 계시는 동시에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분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몰몬경의 선지자들의 눈을 통해 우리가 본 분을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아버지]의 형상’이셨고[히브리서 1:3; 또한 고린도후서 4:4; 골로새서 1:15 참조] 지금도 그러하신 채, 살아 계셔서 숨을 쉬시며, 몸을 가지고 계신 나사렛 예수와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개선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개선하[려] … 오셨던 것입니다.”(“하나님의 위대하심”,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72쪽)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도우셨는지에 관한 선지자의 말씀을 더 보려면, 요한복음 14:7~11; 16:25 주해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1:5~13; 2:6~8. 구약전서의 인용
히브리서의 몇몇 성구에는 다음과 같은 구약전서의 성구들이 인용되어, 하나님의 계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려 준다. 시편 2:7(히브리서 1:5 참조); 시편 8:4~6(히브리서 2:6~8 참조); 시편 45:6~7(히브리서 1:8~9 참조); 시편 102:25~27(히브리서 1:10~12 참조); 시편 104:4(히브리서 1:7 참조); 시편 110:1(히브리서 1:13 참조) 저자는 유대인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이 서한에 구약전서의 성구를 인용함으로써 그 추론과 교리적 가르침에 권위를 더했을 것이다.
히브리서 1:6, 14.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영의 자녀들이다. 조셉 스미스 역, 히브리서 1장 7절에는 “천사들은 성역을 베푸는 영”이라고 나온다.(경전 안내서) 히브리서 1장 14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서 이 천사들, 즉 성역을 베푸는 영들이 목적하는 바 중 하나는 지상에 있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성역을 베푸는 것이라고 나온다.(또한 모로나이서 7:29~31 참조)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천사의 성역에 대해 말하고 믿고 간증을 나누지만, 저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더 자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사들은 휘장을 통해 증거하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위대한 방편 중 하나입니다.”(“A Standard unto My People” [address delivered at the Church Educational System Symposium on the Book of Mormon, Aug. 9, 1994], 11; si.lds.org)
이후에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이 된 브루스 시 하펜은 천사의 성역이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런 개인적인 방문 중 일부는 극적이고 강력했습니다. 제3니파이 17장 기사에서 니파이인 어린이들에게 성역을 베푼 천사들, 또는 한 아버지의 기도에 응하여 앨마와 모사이야의 아들들을 질책했던 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사이야서 27장 참조)
다른 개별적인 방문들은 그것을 받는 사람이 천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천사의 성역은 하늘과 땅이 상호 작용하는 가장 숭고한 형태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염려하고 계심을 강력하게 나타내며, 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확신과 영적인 힘을 부여해 줍니다.”(“When Do the Angels Come?”, Apr. 1992, 12)
히브리서 2:6~9.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
바울은 히브리서 2장 9절에서 예수께서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고 말하면서, 시편 8편 4~6절에 나오는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을 언급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 제한이 있는 필멸 상태를 경험하시려 전세의 보좌에서 내려와 지상으로 낮추어 오셨다.(또한 빌립보서 2:7~9; 니파이전서 11:16, 26~32 참조)
히브리서 2:10, 14~18. “그가 …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또한 히브리서 4:15~16 참조)
히브리서 2장에 나오는 이 성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필멸의 인간으로 생활하며 지상 생활의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시련과 유혹에 직면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예수께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명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기에 [우리에게] 당신이 하신 일을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길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여정을 위해 그 길을 훨씬 더 쉽게 만드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디에 뾰족한 돌과 장애물이 있으며, 어디에 가시와 엉겅퀴가 가장 무성한지도 아십니다. 어디에 있는 길이 위험한지를 아시며, 길이 갈라지고 땅거미가 지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분께서는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경험하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 했기에, 이런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앨마서 7:11~12) 돕다[succor]라는 말은 ‘달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펼치신 자비의 팔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이며, 지금도 달려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비틀거리고 흔들리는 사람들 곁에 계시며 그들을 잡아 주고 강화하십니다. 결국,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곳에 계시며, 이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어두워 보일지라도, 세상의 구주께서는 훨씬 더 캄캄한 날들을 겪으셨습니다.”(“Therefore, What?” [Church Educational System Conference on the New Testament, Aug. 8, 2000], 9; si.lds.org)
다른 시기에,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연민과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그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를 어떻게 돕고 강화하실지를 알고자 모든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친히 걸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지는 가장 깊고도 가장 개인적인 짐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우리가 겪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슴 아픈 고통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를 고난에서 들어 올리시려고 그 모든 고난 아래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인생살이에서 겪는 고뇌나 슬픔, 비애를 모두 겪으셨고, 용감하고 동정 어린 당신의 어깨로 그 모든 것을 지고 나르셨다.”(Christ and the New Covenant [1997], 223–24)
히브리서 2:16.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자손뿐만 아니라 복음 성약을 맺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히브리서 2:16) 전적으로 이방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개종하고 침례받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입양된다.(갈라디아서 3:7, 29; 니파이후서 30:2; 아브라함서 2:10 참조) 교리와 성약 132편 31~32절에는 아브라함과 맺었던 약속이 오늘날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이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서 2:17; 3:1.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신약전서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묘사한다.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히브리서 9장과 히브리서 9:11~15, 23~28; 10:1 주해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위대하시다
유대인들에게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모세가 가장 높이 존경받는 선지자였다. 히브리서의 독자층인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모세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도 더 뛰어난 분임을 이해하지(또는 충분히 깊이 있게 믿지) 못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심을 증명한 후, 그분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으로서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이심을 설명했다.(히브리서 3:1)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분이신(히브리서 3:3) 한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통해 구원 자체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분은 지상의 인간을 구원하는 최고의 성직자이시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6–73], 3:147) 히브리서 3장 3~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모세는 하나님 집의 종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집을 지으셨고 또한 다스리신다고 설명했다.
히브리서 3:7~15. 오늘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의 중요성
바울은 히브리서 3장 7~15절에서 시편 95편 7~11절을 인용하며, 성도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서로를 권면하며, 불신과 죄를 피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당장(“오늘”) 신앙으로 행하라고 권고했다. 마음이 완악해져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 불순종한 것에서 오는 결과이다.
칠십인 정원회 회장단의 도널드 엘 홀스트롬 장로는 영적인 일을 미루는 것에 대한 위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중 다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전히 개종되는 것을 미루다가 단순히 우리를 창피하게 하는 것 훨씬 이상의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게으름, 두려움, 합리화, 혹은 신앙의 결핍 때문에 온전한 영적 참여를 미룹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할 거야’라고 자신을 설득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으며, 마침내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조차도 진보의 손실과 필연적인 퇴보는 피할 수 없습니다.”(“지금 행하십시오”,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49~50쪽)
히브리서 3:8~17; 4:1~11.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진노케 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나안 땅은 주님의 안식을 상징한다.(출애굽기 19:3~25; 20:18~21; 민수기 14; 야곱서 1:7~8; 앨마서 12:33~37; 13:6, 12~13, 28~29 참조)
후기의 계시에서, 주님은 당신의 안식을 “[당신]의 영광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하셨다.(교리와 성약 84:24; 또한 23절 참조)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지상 생활 동안에도 주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고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그분의 계획을 믿는 신앙을 갖고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바른길을 걷고 있음을 알고,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속이려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것까지도 뜻합니다. … 하나님을 깊이 믿어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물리쳐 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 저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기를, 즉 의심이나 두려움, 위험에 대한 염려, 세상의 종교적 소란 등으로부터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Gospel Doctrine, 5th ed. [1939], 58)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 히브리서 4장 5절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또 다시 이곳에, 그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는다면 내 안식에 들어올 것이라.”
히브리서 4:2~3.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결부함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첫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했기 때문이다.(교리와 성약 84:24) 히브리서 4장 3절에 대한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우리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만일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로다. 또한 내가 맹세하기로, 만일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리라. 하지만 세상의 기초가 놓이던 때로부터 하나님의 일은 준비되었느니라.”(경전 안내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듣는 것과 신앙을 결부시키지 못해서, 즉 가르침대로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부 주일학교 회장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에이 로저 메릴 형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연결하는 것의 의미를 보여 주는 하나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 모임에서, 개인 및 가족 경전 공부에서, 심지어 주님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진정으로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 적어도 세 가지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들은 구합니다. 우리는 유흥과 오락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방관자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 제가 있사오니, 이제 저에게 영감을 주십시오.’라는 자세로 연차 대회나 교회에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대신 영을 구하고 받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 교사나 연사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영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받는다라는 단어는 동사입니다. 그것은 행동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기초적인 표현입니다.
두 번째, 받는 사람들은 느낍니다. 계시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올 때, 그것은 대부분 느낌으로 옵니다. 영적인 느낌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보통은 영을 깨달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
세 번째, 영으로 받는 사람들은 행하려고 합니다. 선지자 모로나이는 몰몬경에 대한 간증을 얻으려면 우리가 ‘진정한 의도’(모로나이서 10:4)를 지니고 간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진심으로 행하려고 할 때, 영은 우리를 가르쳐 줍니다.”(“영으로 받음”,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93~94쪽)
히브리서 4: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또한 모사이야서 15:5; 교리와 성약 20:22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는 구주께서 겪으신 필멸의 경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가 이 필멸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온갖 육체적 아픔이나 영혼의 곤고, 영적 번민이나 나약함을 구주께서 먼저 경험하셨습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약해졌을 때 이렇게 절규할 수 있습니다. ‘그 누가 이해하랴, 어느 누가 알아줄까?’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완벽하게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 앞서 우리 짐을 지시고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최후의 값을 치르고 짐을 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완벽하게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여러 번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손길을 뻗어 어루만지거나 도우며 말 그대로 우리에게 달려와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도록 해 주십니다. 아울러 그분은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할 때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일도 능히 헤쳐 나가도록 도움을 주십니다.”(“In the Strength of the Lord”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Oct. 23, 2001], 7–8; speeches.byu.edu)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죄를 범할 수도 있으셨고, 유혹에 굴할 수도 있으셨으며, 생명과 구원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도 있으셨으나 그분은 끝까지 참되게 남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사탄의 유혹에 굴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면, 참된 의미의 시험이 될 수도 없고,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승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죄를 지을 능력을 박탈당하셨더라면, 그것은 선택의지 역시 박탈당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의지를 수호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만일 하고자 하셨다면 그분은 죄를 지을 능력과 역량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완전하시고 죄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되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그와 같이 되고자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가 받은 시험”, 성도의 벗, 1977년 2월호, 17~18쪽) 죄 없는 삶을 사신 구주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히브리서 7:26 주해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4:15~16. 구주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아시며 필요할 때 도우실 수 있다
칠십인 정원회 회장단에서 봉사하던 메릴 제이 베이트먼 장로는 속죄가 친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이었고,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어떻게 도울지를 완전히 알게 되셨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엄청난 죄로 그분을 짓누르고 있었던 장소인 겟세마네동산과 십자가에서의 구주의 경험에 대해 저는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앨마, 아빈아다이, 이사야,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저의 견해는 바뀌었습니다. 죄의 비정한 무게 대신,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시고(히브리서 4:15),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당하실 때(이사야 53:4~5),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있었던 것입니다. …
값진 진주에서는 모세가 땅의 주민들 모두를 보았으며, 그 수가 ‘바닷가 모래와 같이 무수했다고 가르칩니다.(모세서 1:28) 모세가 모든 영혼을 보았다면, 우주의 창조주께서 우리 각자를 개별적으로 알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은 더욱 이치에 닿는 듯합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연약함에 대해 배우셨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셨으며 저의 고통과 고난 또한 경험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알고 계심을 간증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유혹에 대처하는 방법을 이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분께서는 단지 우리를 아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신앙으로 그분께 나아갈 때, 우리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아십니다.”(“모두를 위한 모형”, 리아호나, 2005년 11월호, 75~76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육의 갈등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갈등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도 알고 계십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에 굴복하여 영혼의 화평을 깨뜨렸을 때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 영혼의 내적인 화합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71쪽)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 고대 문화에서 초청받지 않고 왕의 보좌에 나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자신 있게 나아가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보좌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이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분의 축복을 구할 때, 우리가 그처럼 바라는 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간구할 때,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도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 (“기도의 본보기”, 성도의 벗, 1984년 7월호, 49쪽)
히브리서 5:1~6, 10.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히브리서 5장 4~6, 10절에서, 바울은 아론과 다른 고대 대제사장들이 그 부름의 존귀를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올바른 권세를 통해 신권을 받은 것처럼, 예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권세를 받으셨다고 기록했다. 신앙개조 제5조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예언에 의하여 또 권세 있는 자에 의한 안수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야 함을 믿는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계시를 통해 혹은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에게서 성임되어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않는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통한 구원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 히브리서 5장 4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다시 묻겠습니다. 아론은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면 어떻게 부름을 받았겠습니까?”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109~110쪽; 또한 교리와 성약 42:11 참조)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봉사하도록 계시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부름을 받았는데, 이 직분은 성스러운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고 다른 신권 소유자들(레위인들)을 감리하는 책임을 진다. 그의 부름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모세에게 주신 것이었다. “너는 … 네 형 아론[을] …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애굽기 28:1) 아론의 시대 이후로 대제사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후손인 제사장 가문에서 선택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 직분은 아론 신권의 한 직분으로서, 우리 시대의 교회 감리 감독의 직분에 비견할 만하다. 아론의 아들들과 다른 레위인들은 여러 가지 직무를 수행했는데, 예를 들면 성막에서 시중을 들고, 성막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침저녁으로 희생 제물을 처리하며, 성스러운 제단의 불을 계속 지켜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가르치는 일 등을 담당했다.
구약전서와 신약전서에서는 모두 신권 소유자들이 권세를 지닌 신권 소유자에게서 성임을 통해 신권을 받았음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런 관행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신권이 학위처럼 수여될 수는 없습니다. 면허증처럼 수여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지나 편지로 여러분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합당한 성임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권세를 지닌 신권 소유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여러분을 성임해야 합니다.”(“아론 신권” , 성도의 벗, 1982년 4월호, 48쪽)
히브리서 5:5~6. “너는 내 아들이니”
히브리서 5장 5~6절에서 바울은 시편 2편 7절과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했다.
히브리서 5:7~8.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을 배우셨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히브리서 5장 7~8절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 둘 다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히브리서 5장] 7절과 8절은 멜기세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는데,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며 그 선지자가 베푼 성역은 모세가 베푼 성역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 베푸실 성역의 예표이자 전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18:15~19; 사도행전 3:22~23; 제3니파이 30:23; [조셉 스미스—역사] 2:40) 따라서 비록 이 성구들과, 특히 7절에 나오는 말들이 원래는 멜기세덱에게 해당하였다 하더라도, 멜기세덱에게 주어졌던 모든 약속이 주님을 통해 성취되었으니 이 내용은 두 사람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아마도 주님의 삶과 성역에 한층 더 적절하게 들어맞을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157)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라고 가르치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주는 모든 것에서 그렇듯이, 순종에서도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히브리서 5:8] 비록 유한하지만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순종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 순종이 우리의 목표가 될 때, 더 이상 순종을 성가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걸림돌이 아니라 건축에 쓰이는 돌이 됩니다.”(“순종: 자유에 이르는 길”,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55쪽)
히브리서 5:8~9. 고통을 통해 배움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구주께서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도록 준비되셨으며(히브리서 5:8~9),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으로 정제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정련 과정은 고통을 통해서 옵니다. 그 과정은 고통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신 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에는 결코 느껴 보지 못한 혈족 관계를 느끼게 됩니다. …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것만큼 신성한 것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주시고, 우리의 영혼이 청결하게 되도록 도우시며,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 내도록 도움을 주십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해롤드 비 리[2000], 207쪽)
리 회장은 더 나아가 고통에는 필연적인 목적이 있다며 이렇게 가르쳤다. “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사고로 잃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으며, 제게 와서 위로를 얻도록 축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이생에서는 항상 고통이 있어야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신 구주께서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5:8) 제가 생각하기에 그 답은 그렇다입니다. 이생에서는 항상 괴로움과 슬픔의 고통이 있어야만 하며, 그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4, 25)
히브리서 6:1~3.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서 6장 1절에 대한 조셉 스미스 역은 오해의 여지를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리의 원리를 버리지 말고”(경전 안내서) 이 수정은 그리스어 원전에 나오는 문구를 뒷받침하는데, 그 문구는 “교리의 기초를 남겨 두고”로 번역된다. 히브리서의 독자층인 성도들은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와 의식과 교리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었다.(신앙, 회개, 침례, 성신의 은사를 받기 위한 안수례. 히브리서 6:1~2 참조) 그들은 그런 원리들을 버리지 말고 그 시작 지점에서 영적 성숙함을 향해 계속 성장해야만 했다.(니파이후서 31:15~21 비교)
히브리서 6장 3절에 대한 조셉 스미스 역에는 또한 다음과 같이 중요한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완전으로 나아가리라.”(경전 안내서)
히브리서 6:4~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또한 히브리서 10:26~31 참조)
히브리서 6장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개인적으로 배도에 빠질 수도 있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실려 있다. 히브리서 10장 26~31절에서는 또한 그런 행위에 따르는 결과가 암시되어 있다.(또한 베드로후서 2:20~21; 앨마서 24:30 참조) 히브리서의 저자는 진리의 지식에서 돌아서서 용서받지 못하게 되며 회개하지 않을 이들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히브리서 6:6)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 삼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못 박고 부끄러움을 당하시게 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 6:4~8; 교리와 성약 76:34~35)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려면, 사람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계시를 통해 성신으로부터서 얻고, 그런 후에 ‘자신을 성결하게 한 새롭고 영원한 성약을 [부인하며,] 그것을 성스럽지 않게 여기고, 영의 은혜를 모독해야 한다.’ [History of the Church, 3:232] 그렇게 그 사람은 주님의 사망에 동의함으로써 살인을 저지른다. 이는, 진리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지닌 채 공공연히 주님을 모반하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의 입장에 서기를 자처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못 박히시고 드러내어 부끄러움을 당하시는 것이다. (교리와 성약 132:27)” (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161) “용서받지 못할 죄”의 의미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2:31~32, 43~45 주해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6:7~8. “가시와 엉겅퀴”
성지의 대지에는 수많은 엉겅퀴와 가시가 자라났다. 따라서 그것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비유의 소재로 쓰였다. 엉겅퀴와 가시는 해를 입히고 작물을 귀찮게 하는 존재였다. 네 종류의 땅에 대한 비유에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가시는 자라나서 결국 그 씨앗의 기운을 막아 버리는 역할을 한다.(마태복음 13:7; 마가복음 4:7; 누가복음 8:7 참조) 이런 가시는 이 세상의 염려와 즐거움, 그리고 “재물의 유혹”을 상징했다.(마태복음 13:22; 마가복음 4:18~19; 누가복음 8:14 참조) 가시는 경전에서 좋은 것이나 긍정적인 것의 상징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뿐이었다.(히브리서 6:8)
히브리서 6:11, 18~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이 소망을 품기를 바랐다.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우리는 ‘의의 일’을 할 경우,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교리와 성약 59:23) …
소망의 원리는 영원까지 이어지지만,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도 소망을 통해 감당할 힘을 얻을] 수 있다.”(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91쪽)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수많은 경전 구절을 사용하여 소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소망은 영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소망이며, 이는 구주를 믿는 우리의 신앙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약속의 원리이자 계명이며, 우리는 모든 계명과 함께 그것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하고 소망을 잃게 하는 유혹을 극복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행복의 계획에 대한 소망은 평강, 자비, 기쁨 즐거움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은 보호해 주는 투구이며 신앙의 기초가 되고 우리의 영혼에 닻이 됩니다.”(“무한한 소망의 힘”,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21~22쪽)
히브리서 6:13~20. 아브라함이 끈기 있게 견딘 후에 약속을 받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약속을 하실 때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말했다.(히브리서 6:13) 고대에 맹세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종교적 삶에서 공식적인 한 부분이었다.(창세기 24장; 민수기 30장; 니파이전서 4:32~33 참조)
히브리서 6장 19절에 나오는 “휘장”은 성전의 휘장을 말한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휘장을 통해 지성소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천국으로 돌아갈 길을 준비하기 위해 휘장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셨다.(히브리서 9:1~7 주해 및 히브리서 9:11~15, 23~28; 10:1 주해 참조)
아브라함의 신앙에 관해 더 알아보려면, 로마서 4:18~22 주해를 참조한다. 주님에게서 약속된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고대 선지자들에 관해 공부하려면, 히브리서 11:8~16 주해를 참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