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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마가복음 1~4장 소개 및 연대
마가복음 1~4장의 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특별한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문구는 거의 마가복음의 제목처럼 간주된다. 마가복음 4장 41절에는 구주께서 바다에 몰아치는 폭풍을 잠재우시자 제자들이 경이로워하며 “그가 누구이기에”라고 감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마가복음 1~4장을 공부하며 이런 성구들을 기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에 관한 마가의 간증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암시하듯이, 1~4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제시하며 그분이 하나님의 전능한 아들이심을 되풀이하여 증거한다.(마가복음 1:11, 22, 24, 27, 34; 2:10, 28; 3:11, 22~27; 4:35~41 참조)
또한, 사람들이 구주께서 하시는 사업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했음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와 침례 요한 모두 회개와 용서를 전파했다.(마가복음 1:4, 14~15; 2:17 참조) 많은 사람이 구주의 가르침과 기적에 “놀라” 그분 주위로 모여들었다.(마가복음 1:22, 27, 33, 45 참조)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분에 대한 반대도 커져 갔다.(마가복음 2:1~3:7 참조) 구주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을 알기 위해 신앙과 이해력 면에서 성장이 필요했다.(마태복음 10:~41 참조)
마가복음 1~4장 주해
마가복음 1:2~11. 왜 마가는 마가복음 첫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언급했는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요한복음은 전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부터 시작하는 반면, 마가복음은 독특하게도 예수님의 침례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마가가 이렇게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마가가 기록한 내용은 주로 베드로에게서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누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는가?”를 참조한다.)
사도행전 10장 37~4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집안 식구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마가복음의 전체 개요와 같다. 즉,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고, 성신이 그분에게 임하였으며, 하나님의 권능이 그분과 함께했고, 두루 다니며 선을 행하고 사람들을 고치셨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다. 베드로와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구주의 공식적인 성역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발점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사도행전 1:21~22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식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밝히셨다.(마가복음 1:11)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간증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주의] 성역은 요단강에서 그분의 사촌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이 물에서 일어서실 때 성신이 비둘기의 형태로 그분에게 임하였으며, 그분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마가복음 1:11 참조] … 그 선언은 그분의 신성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83쪽) 마가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기에(마가복음 1:1; 기울임체 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아들로 확언하는 내용을 첫 부분에 기록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마가복음 1:4~5, 15; 2:5~12, 17. 회개하라는 권유와 용서에 대한 약속
침례 요한이 전한 가르침의 핵심과 마가복음의 첫 부분에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두 회개와 용서에 대한 교리에 중점을 두었다.(마가복음 1:4~5, 15; 2:5~12, 17 참조) 이런 초점은 구주께서 지상에서 베푸신 성역과 우리 개인의 삶에서 갖는 이 교리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회개는 복음의 첫째되는 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신앙개조 제4조 참조) 그것은 현세의 삶과 영원을 통해 여러분의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회개는 잘못된 것을 그저 인식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갖게 하는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말한다. 회개에는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하는 일이 포함된다.”(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18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신약전서에서 나오는 회개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은 그 계명을 그리스어의 동사인 metanoeo로 기록했습니다. 이 강력한 단어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 접두사 meta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 접미사는 다음 네 가지의 중요한 그리스 용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Nous는 ‘마음’을 의미하고, gnosis는 ‘지식’을 의미하며, pneuma는 ‘영’을 의미하고, pnoe는 ‘호흡’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변화하라, 즉 마음과 지식과 영[을] … 변화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회개와 개심”,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103쪽)
마가복음 1~4장. 이 교재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주해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구주의 성역에서 있었던 가르침과 사건 중 다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이런 가르침과 사건에 대한 주해를 이 학생 교재의 어느 부분에서 찾을 수 있는지 다음 도표에서 확인한다.
마가복음에서의 주제의 위치 |
이 교재에 나오는 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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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13.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 |
마태복음 4:1, 5, 8; 마태복음 4:2; 마태복음 4:1~3; 마태복음 4:2~10 |
마가복음 1:16~20.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부르심 | |
마가복음 1:30~31.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 |
마가복음 2:14~17. 레위(마태)를 부르심 | |
마가복음 2:21~22. 낡은 옷과 새 옷, 낡은 가죽 부대와 새 가죽 부대 | |
마가복음 3:13~19. 사도들을 부르고 성임하심 | |
마가복음 3:31~35. 누가 구주의 형제인가? | |
마가복음 4:1~34. 비유 |
마가복음 1:22.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은 모세 율법에 대한 법률적 측면에서 전문가로 여겨졌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할 때 과거의 권위자와 전문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에 더욱 큰 비중과 권위를 더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입법자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세 율법을 주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마가복음 1:23~27, 34; 3:11, 14~15, 22~30.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귀신”과 “악마”를 내쫓으시다
세 개의 공관복음서 모두 “더러운 귀신”과 구주의 대립을 언급하는데, 특히 마가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가는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악마와 더러운 귀신들이 알았다고 언급했는데, 마태와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마가복음 1:34; 3:11 참조; 또한 마가복음 1:24; 5:7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쫓아내신 더러운 귀신과 악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악마가 들린 사람들과 그 악마를 내쫓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독자가 아무리 그런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필멸의 삶에서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천군, 즉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의 자녀 중 삼분의 일이 모반하여 하늘에서 쫓겨났다. 악마의 사자이자 멸망의 아들인 그들은 지상을 활보하며 파멸시킬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그들은 정죄를 받아 육신을 입는 것이 거부되었다. 더는 진보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또한 온 인류가 비참해지기를 추구한다. 그들은 영원히 저주받는 희망 없는 영혼들이다.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한 규정과 율법에 따라, 그들이 육체의 장막 안에서 일시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육체에 거하게 된다.
어떻게, 또는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육체를 차지하도록 허락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모든 것은 율법으로 다스려지고 통제된다는 것뿐이다. … ‘또 그는 사람의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거하는 악마, 곧 악한 영들을 쫓아내시리라’라는 메시야적 언급으로 알 수 있듯이(모사이야서 3:6), 예수님은 실제로 하셨던 것과 같이 악마를 쫓아내도록 정해져 있으셨고, 이 권능은 사도들과 칠십인들에게 주어졌으며 물론 오늘날 참된 교회에도 있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 [1979–81], 2:36–37)
구주께서 악한 영을 내쫓으신 이야기를 공부할 때, 사탄은 사람들의 허락 없이는 그들을 지배할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사탄의 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력하게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용납하지 않는 한 우리를 지배할 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참으로 비겁하여 우리가 굳게 선다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인 야고보는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7) 사탄은 우리가 말하지 않는 한 우리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니파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의로운]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릴 아무 권능도 갖지 못함이니’(니파이전서 22:26 참조)”(“능숙한 모방자”, 성도의 벗, 1988년 1월호, 39쪽)
마가복음 1:33~39, 45; 2:2; 3:7~9, 20; 4:1. 예수님을 찾아 나선 군중
마가복음 1~4장의 여러 성구에는 구주께서 갈릴리에서 성역을 베푸시던 초기에 엄청난 인기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셨다고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런 열광적인 반응이 어떻게 그분 성역의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마가복음 8:30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1:40~45.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성경에서 “나병”은 종종 우리 시대에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을 포함하는 다양한 피부병을 가리킨다. 나병은 피부, 신경, 눈, 뼈, 사지를 침범하는 만성질환이다. 이를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점진적으로 불구가 되어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병 환자들은 격리되었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경계하기 위해 “부정하다!”라고 외치라는 계명을 받았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사람에게는 그들의 부정함이 전파된다고 여겼다.(레위기 13:45~46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어 고치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마가복음 1:41 참조) 그에게 손을 대신 행위는 안수례와 관련 있을 것이나, 그것은 또한 구주께서 지니신 연민을 나타내며, 더불어 그분의 우선순위가 의식의 요건보다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중 하나인 자비에 있음을 나타낸다.(마태복음 23:23) 구주께서는 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그에게 모세의 율법에 따라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희생 제물을 드리며, 정결 의식을 받으라고 명하셨다.(마가복음 1:44; 레위기 14:1~32 참조)
나병은 육체를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격리하여 홀로 지내게 함으로써 사회적 신분도 손상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죽음으로 간주하였다. 구주께서는 이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그의 육체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사회로 다시 복귀시켜 주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은 구주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일을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용서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나병 환자 손 닿으면
자기도 나병 환자 된다고
옛날에는 치료할 방법이 없어
그저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
· · · · · · · · · · · · · · · · · · ·
하지만 한 가지 방법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지
이분이 만지면 모두 다 낫는다고
그 끔찍한 고통 없앨 수 있다고
썩은 살이 새롭게 된다고
· · · · · · · · · · · · · · · · · · ·
그분이 열 명의 나병 환자 고치신 날은
그들을 깨끗게 하신 날은
그분의 성역, 그분의 삶의 의미를
잘 보여 주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아무리 큰 기적이라 해도
이 때문에 그분 오신 건 아니었지
죽음과 죄와 수치에서
모든 영혼을 치유하러 오신 거지
· · · · · · · · · · · · · · · · · · ·
깨끗하게 되려고 해야 할 일
우리 혼자 할 수는 없지
율법에 따르면
순결한 분이 속죄해야 한다 하지
자비의 변호가 있기까지는
공의가 지배한다 가르쳐 주셨지
회개하고 침례받으며
말씀대로 살면
· · · · · · · · · · · · · · · · · · ·
우리 보고 들은 모든 것
이해할 수만 있대도
“깨끗하게 씻겼노라!” 이 두 낱말보다
더 고귀한 선물 없음을 알게 되리라
(“깨끗하게 씻겼노라”,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10~11쪽)
마가복음 2:1~3:7. 반대가 커짐
구주께서 겪으신 반대는 마가복음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이다. 마가복음 2~3장에서는 구주의 성역에 대한 반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마가의 기록에는 구주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그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마태를 성직에 부르시고,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고,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고 나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사건들 각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그들의 반대는 단순한 의심에서(마가복음 2:6~7 참조) 시작하여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음모로까지 이어지며(마가복음 3:6 참조) 심화되었다.
마가복음 2:2~5. 중풍병자와, 그를 구주께로 데려간 네 사람의 단합된 신앙
“중풍병자”와(마가복음 2:3) 그의 친구들이 구주께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어떤 것들이 필요했을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신앙과 결의에 감탄하게 된다. (이 성구에 나오는 중풍은 “마비”를 의미한다. 그 사람은 걸어서 구주께로 갈 수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운반해 주어야 했다.) 1세기에 가버나움의 주택들은 돌벽으로 지어졌으며, 지붕은 들보를 고정한 후에 나무와 짚으로 평평하게 짜서 얹고, 틈새는 다진 흙으로 메웠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메고 가던 네 사람은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던 집이 사람들로 붐벼서 문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를 위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진흙과 짚으로 만들어진 천장(또는 아마도 야자수 잎으로 덮은 차양)을 큼직하게 뚫어 들것을 구주께서 계신 곳으로 내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마가복음 2:5; 기울임체 추가) 그 다섯 사람의 단합된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구주께로 다가가기 위해 힘을 합쳐 매우 끈질기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다음 경험을 나누며, 다른 사람들과 단합하여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몇 해 전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집회소에서 형제님들이 음악 행사를 위해 예배실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옆에 붙어 있는 활동실로 옮기도록 부탁받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삿짐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무거운 악기를 예배실을 지나 활동실까지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체력뿐만 아니라 신중하게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의견들이 나왔지만 그중 어느 것도 피아노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힘, 키, 연령에 따라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뭘 해야 할지 몰라 피아노 주위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저의 좋은 친구인 한노 루신 형제님이 대담하게 말했습니다. ‘형제님들, 함께 가까이 모여 선 다음에, 각자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어 올리십시오.’
그 방법은 너무 간단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었을 때, 마치 피아노가 자기 힘으로 땅 위에서 들리워져서 활동실로 옮겨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가까이 모여 서서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됐습니다.
저는 종종 루신 형제님의 간단한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그 심오한 진리에 감명을 받습니다. …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어 올리는 것이 간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힘의 원리입니다.”(“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들어 올리십시오”,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53~54쪽)
개개인이 단합된 신앙을 보일 때 받을 수 있는 힘에 관하여 제일회장단의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많은 사람의 기도와 신앙이 더해지면, 영의 영향력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To Know and to Love God” [evening with President Henry B. Eyring, Feb. 26, 2010], 4; si.lds.org)
마가복음 2:7.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화에는 구주가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내는 중요한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주님의 생애에서 이 사건은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 준 증거이다. 이는 그분이 성역을 베푸신 이들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인정한 사실이다.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자주 증언하셨으며 유례 없는 가르침과 병 고침의 성역으로 그 개인적인 증언을 뒷받침하셨다. 그분의 목적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음을 알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으로 그 일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과 그 자리에 있던 ‘율법사’ 모두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이 자신 안에 있다는 확실하고도 극적인 증거로서, 이 적절한 기회를 취하여 (아마도 이 기회를 구하여) 죄를 사하셨다. 율법사들은 죄를 사하는 능력을 사칭하는 것이 신성 모독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어떤 협잡꾼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즉, 죄를 사함받은 그 사람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신성한 권능을 입증하셨다. ‘죄를 사하는 것이 병자를 일어서게 하고 걷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권능을 요하겠느냐?’라는 그분의 질문은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가능하다! 그 두 가지는 하나의 권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중 한 가지를 할 수 있는 이는 나머지 한 가지도 할 수 있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177–78)
마가복음 2:12. 중풍병자를 고치심
조셉 스미스 역에는 중풍병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유되었음을 군중이 인정했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권능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2:9; 마가복음 2:12 비교)
마가복음 2:15~17.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
고대 근동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친교의 표시로, 우정 어린 유대와 화친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런 관계를 제의받는 자리였다.(창세기 31:43~54; 출애굽기 18:12; 사무엘하 3:12~21 참조) 구주께서는 종종 함께 식사 자리를 기회로 삼아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용서를 받으라고 권하셨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이 벌어질 때면, 독실한 체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며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다.(마가복음 2:15~17; 누가복음 15:2; 19:1~10 참조)
그들이 “죄인”으로 여긴 사람들에는 계명을 어겨 죄를 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의 전통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 즉 (세리처럼) 일상적으로 성스럽지 못한 일을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처럼, 사도행전 10:28 참조)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세리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태복음 9:9~13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2:23~3:7. 안식일에 대한 논쟁
구주께서는 지상에서 성역을 베푸시는 동안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대에 숱하게 부딪히셨는데, 그중 다수는 안식일에 어떤 활동이 적절한가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기준이 되었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성스러운 장소, 희생 제물을 바치는 율법, 여러 가지 종교적 관습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이스라엘에만 있었다.(출애굽기 31:12~17; 에스겔 20:12, 20 참조) 유대인 율법사들은 자신들의 성스러운 날을 보호하기 위해 안식일에 허용되는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에 대해 수많은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한 “구전 율법”의 전통이 만들어진 이유는 성문 율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예방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에 일정한 활동을 금하는 이런 전통은 많은 유대인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구주의 안식일 활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한 가지 예는 구주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조금 땄던 일이다.(마가복음 2:23~24 참조) 모세 율법에서는 낫을 들고 남의 밭에 들어가 곡식을 추수하는 것이 아닌 한 밀밭을 지나가면서 손으로 이삭을 조금 따는 것은 허용되었다.(신명기 23:25 참조)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구전 율법은 모세 율법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안식일에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도 금했다. 구주의 제자들을 본 바리새인들은 그분께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지적했다.
마가복음 2:27~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또한 마태복음 12:8; 누가복음 6:5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성경의 마가복음 2장 27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더하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휴식의 날로 사람에게 주어졌느니라. 또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어졌지 사람이 먹지 않도록 주어진 것은 아니니라. 이는 인자가 안식일을 만들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rk 2:26–27) “인자”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태복음 8:20; 9:6; 10:23; 11:19; 12:8, 32, 40 주해를 참조한다.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은 우리가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안식일에 대한 모세의 율법에는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들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로서 오랫동안 개인의 선택의지를 박탈당해 왔던 사람들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모세의 율법은 구주께서 선포하신 대로 엄격하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 당시엔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규정들이 신앙이나 사랑 및 영의 은사와 같은 ‘율법의 더 중한 바’보다 더 중시되었습니다.(마태복음 23:23)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끝도 없는 수많은 제약을 요구하지는 않으시며, 그분은 우리의 예지를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아마 이것은 안식일 예배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그 영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식일을 오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약속된 위대한 축복을 놓칠 기로에 서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일에 … [우리를] 시험하여’(교리와 성약 98:14) 우리가 온전히 헌신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입니다.
안식일에 하는 일이 합당한 일인지 아닌지 어디에 선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지침 안에서 우리 각자는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지침들은 경전과 현대 선지자들의 말씀 안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우리 마음속에 확고히 받아들여 양심에 따라 적용해야 합니다. …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 참조)
어떤 일이 안식일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우리 각자가 주님께 솔직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안식일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며 경건한 자세로 행해야 하고 그 밖의 활동은 제한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잘 지킴으로써 받는 축복에 관하여 제가 드린 말씀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주님의 날”, 성도의 벗, 1992년 1월호, 40쪽)
마가복음 3:2. “사람들이 예수를 … 주시하고 있거늘”
마가복음 3장 2절에서 “주시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바리새인들이 악의적인 의도로 예수님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회당에 온 것이 아니라 결점을 찾으러 왔다.
마가복음 3:4~6.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구주의 질문은 (마가복음 3:4~5) 생생한 가르침을 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일부 율법사들은 위급한 상황에서만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정해 두었다. 물론, 안식일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불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구주께서 남자의 손을 치유하며 선행을 베푸시자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사람들, 즉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 안식일에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를 구상하기 시작했다.(마가복음 3:6 참조)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는 날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기도의 집에 가서 네 성찬을 바[치고] …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네 헌신을 바치”는 것이다.(교리와 성약 59:9~10)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기도, 명상, 경전 및 후일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 쓰기, 유익한 자료 읽기, 병자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방문하고 다른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신앙에 충실함, 118쪽)
마가복음 3:6. 헤롯당
헤롯당은 종교적인 목적을 둔 정치 단체였다. 그들은 헤롯 가문과 그 지도력을 지지했는데, 예수님이 성역을 베푸시던 시기에는 특히 헤롯 안디바를 지지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연계하여 구주를 반대하고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마태복음 22:15~16; 마가복음 3:6; 12:13 참조)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복음 3:22~27. “강한 자”를 제압하는 사람에 대한 비유(또한 마태복음 12:29; 누가복음 11:21~22 참조)
구주를 반대할 시도를 더 많이 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이 사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다. 마가복음 3장 22~27절에 기록되었듯이, 구주께서는 강한 자를 제압하고 결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사람어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이 문맥에서 “강한 자”는 사탄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그를 결박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마가복음 3:27) 구주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실로 그분이 사탄을 이길 권능이 있으심을 비난자들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누가복음 11:22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중심부를 공격하셨으며 그의 악령들이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는 인간의 육체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셨다. 만약 그리스도가 먼저 ‘강한 자’, 악마의 주인, 즉 사탄을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 271쪽)
마가복음 4:1~20, 30~34. 비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가르치신 이유를 더 자세히 알아보고, 씨 뿌리는 자(또는 땅)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더 잘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3장 주해를 참조한다.
마가복음 4:26~29.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 관계를 가르친다. 사람은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 씨를 심지만, 그런 후에는 그 씨앗이 자라나기를 기다려야만 한다.(마가복음 4:26~27 참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마가복음 4:28) 바울이 기록했듯이, 인간은 씨를 심고 물을 줄 수는 있으나, 기적적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린도전서 3:6~7)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실 수 있다. 이 원리는 개개인의 영적 성장과 세계 곳곳에 있는 교회의 성장에 적용된다.
칠십인 지역 관리 역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윌프레도 알 로페스 장로는 이 비유와 그것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유의 중요한 교훈은 가정과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하거나 또는 선교 사업과 관련하여 봉사하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복음의 씨앗이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싹이 트고 온전히 꽃피는 것은, 우리의 영향력 너머의 요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개인의 간증이 성숙한 열매 또는 개종으로 성장하려면, 우리의 결실 이면에 하나님의 능력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영향력으로 우리는 사람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도록 돕는 교육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한을 받은 씨 뿌리는 자로서 다음의 사실을 이해하고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은 살아 있는 씨앗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가르친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한 상태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고 선한 행위를 낳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추수의 날에 우리의 기쁨은 충만할 것입니다.”(“은연중에 자라나는 씨의 비유”, 리아호나, 2003년 2월호, 32쪽)
마가복음 4:35~41. 예수 그리스도께서 폭풍을 잠재우셨다
갈릴리 바다는 이스라엘 북동부 지방에 있는 담수호로, 해수면보다 거의 213미터 아래에 있는 요르단 지구대에 있으며, 서쪽과 북쪽 및 동쪽으로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바람이 서쪽 경사면을 내리치면 광풍이 갑작스럽게 형성되어,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이 호수에 엄청난 파도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호수 한가운데 있는 어부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두려움에 떨 수도 있다. 마가가 묘사한 그날에도 큰 광풍이 일었고, 친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깨울 때까지 예수님은 평온하게 주무시고 계셨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구주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마가의 기록을 인용하며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생애에서 어떤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는 비록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같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사납고 무서우며 파괴적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가족으로서, 사회로서, 국가로서, 심지어 교회로서도 우리는 갑작스러운 돌풍을 만나게 되어 어떤 식으로든 ‘주님이시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간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폭풍우가 지난 후 잠잠한 가운데 어떻게든 다음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자신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이 조용한 꾸짖음은 크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며 받들어 온 이 위대한 여호와께서는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라고 말씀하셨던 (창세기 1:6)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고 말씀하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9)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른 땅 위로 지나갈 수 있도록 홍해를 가르신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출애굽기 14:21~22 참조) 그분이 갈릴리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자연의 힘에 명령하실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 생애의 거친 파도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과 고통과 번민과 운명의 시달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배는 거의 온 생애 동안 요동쳤으며 적어도 인간의 눈에는 그 배가 바위투성이의 갈보리 해안에 치명적으로 부서져 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전혀 다른 일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폭풍우가 사납게 휘몰아쳐도 구주의 입술과 마음에는 평강이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 가정에, 전 세계에서 각자의 나라들에, 나아가 때때로 교회가 당면하는 시달림 속에서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떠한 방해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주여 큰 폭풍우 일고”,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34, 36쪽)